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09)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09화(109/325)
109. 동심의 맛
호텔로 마중 나온 차량은 빌 페이튼을 서울 시내에 있는 한 건물 앞에 내려주었다.
제법 모던한 느낌의 유리 건물 입구에는 ‘TG 모던 아트 갤러리’라고 적혀 있었다.
“빌, 오랜만입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원한 웃음을 짓는 동양인이 다가왔다. 유창한 영어, 자신감이 넘치는 걸음걸이. 한대훈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시장하시지는 않으시죠?”
“아직 그럴 시간도 아닌데요. 그나저나, 식사하자고 하더니 웬 갤러리인가요?”
“한국이 첫 방문이 아니라고 들어서요. 전통 문화체험은 질릴 정도로 많이 했을 것 같아 조금 색다른 모험을 준비해봤습니다.”
그 말대로. 페이튼이 한국을 방문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그리고 이전의 두 번은 궁중 요리 체험과 비빔밥만 먹다 갔다.
“그나저나, 갤러리 분위기가 좋군요.”
“하하, 그 말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운영하는 곳이거든요.”
한대훈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건물의 내부로 페이튼을 안내했다.
중간중간 농담을 던지며 편안하게 말을 거는 한대훈을 보며, 페이튼은 속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사람만 본다면, 페이튼은 한대훈이 마음에 들었다. 동양인은 모두 공대생처럼 딱딱하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한대훈은 호탕하고 유머도 넘쳤으며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페이튼은 그런, 고정관념을 깨는 인물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건 비즈니스 관계다.
비즈니스에서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수치다. 아시아 진출을 생각하고 일을 진행하고 있지만, 페이튼 그룹의 입장에서 한국은 그다지 매력 있는 시장이 아니었다. 중국과 일본에 비교하면 내수 시장이 너무 작은 데다가 국제적으로 가진 이미지도 흐릿했으니까.
“그래서, 어떤 모험인가요?”
“사실은 저도 잘 모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도중 질문하자, 한대훈은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특별한 손님을 위한 특별한 프라이빗 이벤트를 기획해달라고 했는데, 너무 특별해서 저에게도 알려줄 수 없답니다. 이걸 알려주는 건 식스 센스의 결말을 알려주는 것 같은 스포일러라고 하더군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물어볼 수가 없군요.”
“하하, 이해해 주시는군요. 그러니 뭐가 나와도 저를 원망하면 안 됩니다. 저도 똑같이 당한 거니까요.”
역시 무언가 능숙했다. 만에 하나 함께 비즈니스를 할 상대라면, 이 정도 능청스러움이 좋다.
“그래도 이 이벤트의 이름은 캐낼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무능력하진 않으니까요.”
“뭐죠?”
“‘토끼굴’이라더군요.”
“대범하군요.”
“그렇죠? 그래서 사실은 불안해 죽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되는걸요.”
토끼굴.
앨리스의 모험이 시작되는 곳.
지금껏 경험치 못한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는 단어다. 그 단어가 가진 의미를 알고 사용한 건지.
“여기가 입구네요. 가보죠.”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치 영화관에 들어가는 것처럼, 환한 복도와 대비되는 어두운 통로가 나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딘가 축축하다. 온몸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습기. 공기 자체가 눅눅하고 희미하게 흙냄새가 났다.
‘가습기를 틀어놨나?’
게다가 어디선가 뚝뚝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났다. 동굴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메아리칠 때 나는 소리다.
“정말 동굴 속을 들어가는 것 같긴 하군요.”
“그렇네요.”
조금 걷다 보니, 통로의 가장자리에 낡은 진열장이 나타났다. 각종 골동품과 그림이 진열되어 있었고, 가느다란 조명 하나가 선반 위의 작은 유리병을 강조하고 있었다.
유리병에 붙어있는 라벨은 「오렌지 마멀레이드」.
“그건 뭔가요?”
“텅 빈 마멀레이드 병이죠.”
한대훈이 갸웃거리는 걸 봐서는, 원작을 잘 모르는 듯했다.
“토끼굴 입구에서 앨리스가 발견하는 물건입니다. 원작에서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원작의 무대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 같군요.”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갑자기 ‘팟‘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조명이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부스럭! 부스럭!
다시 조명이 켜졌을 때는, 통로의 끝에 하얀 토끼가 보였다.
원작처럼 이족보행을 하는 토끼는 아니었다. 애완용 강아지에게 입히듯, 아담한 양복 의상을 입힌 토끼였다.
‘분장하는 것보다는 좋네.’
절로 머릿속에서 평가하게 되었다.
토끼 분장을 한 사람이 등장한다면 너무 학예회 같았을 거다. 홀로그램 CG로 토끼가 등장했어도 나쁘지 않았을 테지만, 할리우드 CG에 익숙한 일반인에게 큰 인상을 주지는 못할 거고.
실제 토끼가 등장하는, 어딘가 아날로그적이면서도 현실과 판타지가 기묘하게 겹쳐진 연출이 나쁘지 않았다.
토끼는 바닥에 회중시계를 질질 끌면서 어딘가로 깡충깡충 뛰어가고 있었다.
“저건 따라가야겠죠?”
“뭐, 토끼굴이니까요.”
토끼를 따라가니 작은 방이 나왔다.
형광 핑크 조명으로 밝혀진, 어딘가 사이키델릭한 분위기의 방. 한쪽 벽에는 여러 개의 문이 그려져 있었고, 방의 한가운데에는 유리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세팅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장난감과 각종 잡동사니가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었고.
어린이집에 들어간 느낌. 방금 전까지 장난감을 갖고 놀던 아이들이 마법처럼 사라진 것 같은 그런 기이함이 있었다.
“일단 자리에 앉죠?”
한대훈의 말대로 자리에 앉으니, 뒤늦게 반대편 벽면에 진열된 태블릿이 보였다. 태블릿에 적힌 문장은 단 하나:
「7 to escape (탈출까지 7)」
“……”
“……”
자리에 앉은 후에도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자, 한대훈이 다시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웨이터가 없나 보군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서 먹어도 되는 거겠죠?”
페이튼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있는 특이한 병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리 빨대가 꽂힌 병 안에는 버블 검과도 같은, 부자연스러운 핑크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병에는 라벨이 붙어 있었고.
「Drink Me (나를 마시세요)」
상상했던 것보다 인공적인 색이다.
그 음료를 손에 들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 수십번도 넘게 머릿속에 그려왔던 음료였으니까.
빌 페이튼은 유년 시절, 단 한 번도 색깔이 있는 음료를 마시지 못했다. 마트에서 파는 소다는커녕, 크랜베리 주스 하나 허락되지 않았다.
집안의 룰 때문이었다.
페이튼의 집은 백색이었다. 하얀 러그와 하얀 소파, 하얀 쿠션, 하얀 램프. 지금은 나이가 들어 그 물건 하나하나가 얼마나 고가인지 알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다.
왜 자신은 옷에 흙을 묻히면 안 되는지.
왜 집 안에서는 색깔이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지.
안 그래도 엄격한 집안이었지만,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보다 빌에게 유난히 엄격했다. 후처였던 어머니는, 명문가 페이튼 집안의 관습을 따르기 위해 필사적이었으니까.
이복형제들은 양쪽 핏줄이 모두 명문가였기에 어느 정도 장난을 해도 ‘아이니까’라는 말로 모든 게 용서되었다. 반대로, 빌의 실수는 모두 ‘혈통’의 증거가 되었다.
언제나 예의 바르게.
옷은 단정하게.
식탁에 팔꿈치를 올려서도 안 되고.
끼니마다 올라오는 고급 프랑스 요리를, 포크와 나이프 순서를 외워가며 먹어야 했다.
‘비디오 게임’이나 ‘만화책‘이라는 단어는 꺼내지도 못했다. 몰래 스파이더맨 만화책을 빌려왔다가 압수당한 기억도 있다. ‘친구에게 돌려줘야 한다’면서 울며 사정하는 페이튼의 눈앞에서, 어머니는 만화책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 뒤로, 페이튼에게 만화책을 빌려주는 친구는 없었다.
페이튼에게 허락된 유일한 엔터테인먼트는 책이었다. 물론 만화책은 아니고 명작 특선이었다.
그중에서 페이튼이 가장 선호한 책은 앨리스의 모험담이었다.
아마 어머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순진하게도, 유명한 명작이라 위해성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책의 내용을 알면, 허락했을 리가 없다. 앨리스의 모험담은, 이상한 룰이 가득한 이상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그 모험담의 시작에는 항상 이 음료가 있었다.
음료의 맛은 원작에도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순서대로 체리 타르트와 커스터드, 파인애플, 칠면조구이, 토피, 그리고 버터를 바른 토스트 맛이 나는 맛있는 음료라고.
항상 레몬을 띄운 밍밍한 스파클링 워터만 먹어본 페이튼에게는, 상상도 못 할 맛이었다. 어떻게 액체에서 그런 풍요로운 맛이 날 수 있을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밀크셰이크 같은 묵직한 음료도 마시게 되었고, 지금도 원하는 건 무엇이든 먹을 수 있지만, 앨리스의 음료는 아직도 마셔본 적이 없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상상의 음료였으니까.
페이튼은 천천히 빨대를 입에 물고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기대와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반반 섞인 마음으로.
액체인 줄 알았던 음료는, 액체보다는 젤리와도 같은 맛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젤리는 아니고 물컹거리는 느낌이 약간 섞인, 묽은 젤리 주스였다.
‘….!’
그리고 정말, 젤리 주스에서는 체리 타르트 맛이 났다. 버터 맛이 은은하게 나는 페이스트리와 마라스키노 체리 잼이 섞여 있는 그 맛이.
계속 빨아들이니, 계란 노른자와 바닐라 향이 섞인 묵직한 크림 커스터드의 맛이 뒤를 따랐다. 그 뒤에는 파인애플의 강렬한 열대 향이 입을 채웠고.
“윽… 이건 좀….”
“저만 그런 건 아니군요.”
다음은 역시 칠면조구이였다. 앞서 등장한 파인애플, 커스터드나 체리 타르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맛이라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맛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칠면조구이는 금방 스쳐 갔다. 그 뒤에 등장한 버터 캐러멜과 같은 달달한 토피, 그리고 갈색으로 바싹하게 구운 토스트 위에 버터를 바른 맛이 칠면조구이가 준 트라우마를 바로 치유해 주었다.
땡!
그와 동시에 벨이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벽에 걸린 태블릿의 숫자가 ‘6’으로 줄어 있었다. 이 정도 되면 어떤 컨셉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여섯 개의 단서를 더 찾아야 이 방에서 벗어날 수 있나 보군요.”
“그런가 보네요. 어디보자, 음료 다음에는 분명 케이크였는데, 케이크가 보이나요?”
한대훈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페이튼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아래를 살폈다.
역시 테이블 아래에는 거대한 상자가 있었다. 그 상자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열어보니, 사람 얼굴 크기만 한 커다란 하얀 공 두 개가 나왔다.
화이트 초콜릿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하얀 공의 표면에는 어두운 갈색으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Eat Me (나를 먹으세요)」
“용케 단번에 찾으시네요?”
“원작에서는 음료를 마시고 몸이 줄어든 앨리스가 테이블 다리에서 케이크를 발견하고 먹거든요.”
“그런데 이건 케이크라고 부르기에는 좀….”
“그러게 말입니다. 원작에서는 보온병이 나오지도 않죠.”
페이튼은 상자에 함께 들어 있는 길쭉한 보온병을 들어 올려 자세히 살폈다. 병의 밑바닥에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Pour Me (나를 부으세요)」
뚜껑을 열어보니, 따끈따끈한 김이 나오면서 진한 초콜릿 향이 풍겨왔다. 뜨거운 초콜릿이다.
“이거 혹시…..”
화이트 초콜릿 위에 병의 내용물을 붓자, 하얀 공이 녹아내리며 내부에 있는 케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주먹 크기의 케이크는, 책에 서술된 것처럼 검은 커런트 열매가 위에 올라가 있었다. 폭신폭신한 스펀지케이크를 모두 먹었을 때,
땡!
태블릿의 숫자가 ‘5’로 줄어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빌이 리드해야 합니다. 사실 저는 띄엄띄엄 기억하고 있어서.”
“어떻게 갔더라….. 앨리스가 케이크를 먹으면 몸이 거대화되고 울기 시작하죠. 지나가던 하얀 토끼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장갑과 부채를 떨어트리는데, 부채를 부치면 몸이 다시 작아집니다. 한번 찾아보죠.”
이번에는 둘 다 일어나서 방에 어지럽혀진 물건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페이튼은 최대한 자신의 목소리 톤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움직이는 몸짓도 최대한 어른스럽게.
하지만 묘한 설렘이 가슴을 사로잡았다.
이건, 주변에서 듣기만 했던, 어린아이들이 하는 탐정 놀이 같았다.
땡! 땡!
이제 남은 단서는 3개.
그 순간, 갑자기 조명이 푸른색으로 바뀌면서 방 안에 물이 찰랑찰랑 넘치는 소리가 났다. 새가 날개를 파닥이는 소리, 쥐가 찍찍거리며 우는 소리, 오리의 꽥꽥거리는 소리.
“이건 또 뭐죠?”
“앨리스의 눈물바다에 동물들이 모두 휩쓸려 갑니다. 그리고 겨우 육지에 다다르고서는 몸을 말리죠.”
원작에서는 몸을 ‘건조’하기 위해, 쥐가 ‘건조한’ 정치 얘기를 한다. 그 지루한 얘기를 견디는데도 몸이 마르지 않자, 결국 도도가 달리기 시합을 제시한다.
달리기 시합……
페이튼의 시선이 바닥에 어지럽혀진 장난감 중, 경주 트랙에 멈춰다. 그 근처에는 여러 개의 태엽 인형도 있었다.
“조금 이상한 제안이긴 하지만…..”
결국 페이튼과 한대훈은 각자 여러 개의 태엽 인형을 감아 놓고 달리기 경주를 벌렸다.
땡!
이제 남은 단서는 2개.
“경주는 누가 이기나요?”
“승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상을 줘야죠.”
“누가 누구에게 상을 주나요?”
“앨리스가 동물들에게요.”
“왜요?”
“도도가 시켰으니까요. 앨리스의 주머니 안에 사탕이 들어있습니다. 그걸 찾아야 할 겁니다.”
다시 바닥의 물건들을 뒤적거리자, 작은 인형 옷 같은 원피스가 나타났다. 주머니 안에는 깡통 케이스가 있었고, 그 안에는 설탕에 절인 과일 사탕, 콩피(confit)가 들어있었다.
체리 콩피는 건포도처럼 쭈글쭈글한 모양이었지만, 꾸덕꾸덕하면서도 쫀득하게 씹혔다.
땡!
‘1’
마지막 하나는….
원피스 반대편 주머니를 뒤지자, 안에서 작은 골무가 나왔다.
“이걸 하사해야 합니다.”
“하사요? 어떻게,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그러면 좋죠.”
한대훈이 기사 수여식이라도 하듯 무릎을 꿇자, 페이튼이 골무를 건네주었다.
“이 세련된 골무를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이상한 상황극을 하자니, 서로의 꼴이 우스꽝스러워서 둘 다 동시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풍자로군요. 인간이란, 별것 아닌 일에도 거창한 의식을 하니까요.”
이어진 한대훈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역시, 어딘가 예리하면서도 유머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 순간, 다시 ‘팟’하고 조명이 꺼지면서 ‘드르륵’하고 무언가 레일 위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 조명이 켜졌을 때는, 문이 그려있던 벽이 미닫이문처럼 옆으로 열려있는 상태였다.
“어서 가시죠.”
페이튼은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려 했지만, 근육이 힘껏 땅겨지는 게 느껴졌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다음 스테이지 진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