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10)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10화(110/325)
110. 한 번 맡아봐
두 번째 스테이지, 하얀 토끼의 방은 첫 번째 방보다 쉬웠다.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에 진열된 장갑과 부채를 챙기고,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를 마시는 게 전부였으니까.
원작은 음료의 맛에 대한 별다른 서술이 없는데, 그 내용물은 와인이었다.
세미 스파클링 레드 와인은 방금 먹은 디저트와 충돌하지 않는 과일 향을 품고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달지 않았다. 적당히 당도 있는 탄산이 혓바닥 위에 톡톡 터지면서, 혀에 끈끈하게 남아있는 디저트의 단맛을 씻겨주었다.
“다음 스테이지로 가죠!”
새로운 문이 열릴 때마다, 페이튼의 목소리 톤이 한 단계씩 올라갔다.
세 번째 스테이지는 공작부인의 부엌.
냄비가 요란하게 부딪치고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울리는 혼돈의 주방이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마녀 수프를 끓일 때 사용할법한 거대한 가마솥이 있었다.
내용물은 토마토 수프.
다홍빛의 수프는 입자가 매우 고왔다. 토마토 안에 숨겨둔 감칠맛을 모조리 수프에 양보한, 그런 깊은 맛이 나는 세련된 수프였다.
하지만 수프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도 다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기 인형은 챙겼고, 남은 건 수프밖에 없는데 왜 안 열리죠?”
“흠… 이건, 후추를 찾아야죠.”
원작에서는 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후추 향이 가득해야 한다. 하지만 방금 먹은 수프는 너무 부드러웠다.
함께 주방의 선반을 뒤적거리니 투명한 병에 피클처럼 담겨있는 검은 구슬을 찾을 수 있었다.
구슬은 통후추처럼 생겼지만, 통후추와 올리브를 섞어서 만든 캐비어였다.
“콜록! 콜록!”
캐비어는 씹을 때마다 풍선 터지듯 팡 터지면서 매캐한 후추 향이 올라왔다. 원작에서 나온 대로, 모두가 재채기를 할 정도로 강렬한 향이었다.
다시 토마토 수프를 접시에 덜어 후추 구슬을 곁들여 먹으니, 맛이 또 달랐다. 우아한 수프는 어느새 까칠하게 튕기는 매력이 있는, 개성 넘치는 맛으로 변모했다.
“여기도 와인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우리 뭔가 통하네요. 아까 선반에서 본 것 같은데 가져오죠.”
한대훈의 얼굴에는 말썽꾸러기 초등학생에게서나 볼법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거울은 없지만, 아마 페이튼의 얼굴도 같은 표정일 거다.
와인을 찾을 걸 예상이라도 했는지, 와인병에도 라벨이 달려있었다.
「쉬라즈 와인: 후추, 올리브와 최고 궁합을 이루는 와인」
그 설명대로, 와인은 후추-토마토 수프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맛을 자랑했다.
어딘가 진한 향신료 맛이 나는 와인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냥 먹으면 향신료 맛이 도드라지는데 토마토 수프와 함께 먹으면 와인에서 과일 향이 올라왔다.
“다음 무대로 가죠!”
어느새 점잔 떨려는 시늉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혼자만 들떠 있으면 뻘쭘하겠지만, 함께하는 이 역시 똑같은 신이 잔뜩 나 있으니 그 즐거움을 숨길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촬영이 끝난 영화 세트장을 마음껏 누비듯이 소설 속 세상을 탐험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매번 문이 열릴 때마다 나오는 요리도 신기했다.
맛있는 건 당연한 거고, 무언가가 달랐다.
페이튼은 단순히 맛만 있는 요리는 질리도록 먹어왔다. 하지만 이렇게 피를 들끓게 만드는 요리는 처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코스의 순서도 엉망이다.
시작은 음료, 다음은 디저트, 사탕, 수프.
그 엉망진창인 순서가 오히려 이 무대와 딱 맞아떨어졌다.
이곳은 원더랜드다.
애피타이저로 시작해서 메인, 디저트로 이어지는 정석적인 코스요리는 이곳에서 의미가 없다.
다음 방은 숲.
벌레가 우는 소리와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 한가운데에는 피크닉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다.
“이건 물담배 피우는 애벌레를 만날 때군요.”
한대훈과 서로 순서를 번갈아 가며 물담배 연기 뿜어내기 시합을 벌이자니, 태블릿의 숫자가 또 하나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요리.
피크닉 테이블 위에는 특이한 쟁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인조 잔디가 깔린 쟁반이다.
쟁반 옆에는「나를 부어주세요」라는 지시가 담긴 투명한 물병이 있었다.
물병의 물을 잔디 위에 붓자, 갑자기 하얀 연기가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 같군요.”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건 마법이 아니다.
잔디 밑에 드라이아이스를 깔아뒀겠지.
과학적인 설명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안개를 보니 그저 마법 같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시원하게 피부를 스치는 안개는 맛깔난 훈향을 풍기고 있었다. 식욕을 돋우는 향을.
“그러면 먹어볼까요?”
“잘 먹겠습니다!”
버섯 무늬가 그려진 그릇 안에는 버섯 수프가 담겨 있었다.
수프 다음에 또 수프.
하지만 그런 룰은 여기서 의미가 없다.
버섯 수프는 토마토 수프와는 또 다른 매력을 자랑했다. 안개에서 풍기는 훈향이 그대로 응축되어 수프에서도 나고 있었는데, 버섯 맛이지만 고기를 먹을 때 느껴지는 포만감과 충족감이 느껴지는 수프였다.
땡!
「탈출까지 1」
“이건 아무래도…. 이거겠죠?”
“먼저 해보면 저도 뒤따르죠.”
한대훈이 버섯 수프 옆에 있는 텀블러를 들어 올리자, 페이튼은 잠시 몸을 사리는 시늉을 했다.
버섯 모양의 텀블러에는 기다란 튜브가 빨대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치사하게! 하려면 같이 해야죠. 여기까지 같이 왔는데, 의리가 있지.”
결국 페이튼과 한대훈은 각자 하나씩, 버섯 모양 텀블러를 들고 동시에 빨대를 빨았다.
아무 맛이 없다.
그냥 가스다.
풍선 안의 바람을 들이마실 때처럼 가스만 폐 안에 들이찼다.
“이건 뭐죠?”
“풋! 목소리가!”
“그러는 빌이야 말로!”
텀블러의 내용물은 헬륨 가스였다.
안에 들어 있는 가스의 종류가 달랐는지, 한대훈의 목소리는 만화 속 다람쥐처럼 높은 고음인 반면, 페이튼의 목소리는 음성변조를 한 것처럼 땅끝까지 가라앉는 저음이었다.
앨리스는 버섯을 먹으면 몸이 늘어나고 줄어들지만, 이 텀블러는 목소리를 높이고 낮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카니발이다.
어린 시절 가보지 못한 축제.
갑자기 어디서 거울의 방이 튀어나와도, 광대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신기한 요리의 행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상한 나라의 하이라이트라고 불리는 미친 모자 장수의 티파티는, 그야말로 ‘미쳤다’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고급스러운 귀족의 티테이블 같았다.
우아한 찻잔과 아름다운 무늬가 수놓아진 식탁보. 식탁의 한가운데에는 고급스러운 원목 무늬의 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금색 회중시계가 진열되어 있었다.
‘식용 금’이라고 적혀있는 회중시계에는, 기다란 종이 끈이 붙어있었다. 티백처럼.
「brew me (나를 타서 마시세요)」
“설마 진짜 차를 타 마시듯 이걸 물에 넣으라는 건 아니겠죠?”
“이곳에서 질문은 소용없습니다.”
“하긴, 그러네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니까.
금박지를 두른 회중시계를 찻주전자 안에 넣고 보온병에서 뜨거운 물을 붓자, 시계가 차츰차츰 녹기 시작했다.
녹아내린 액체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갈색이었다. 그리고 코끝을 간질이는 이 향은….
소고기 육수다.
아니, 육수보다 훨씬 진한 향이 나니, 아마도 소고기 콩소메(consomme)다.
찻주전자를 들어 올리며 향을 맡자니, 주전자 아래에 있는 냅킨에 다음 지령이 적혀 있었다.
「Pour me (나를 부으세요)」
“찻잔이 없는데요?”
“그러면 그릇에 부어야죠.”
테이블 위에는 상자와 찻주전자를 제외하고, 고깃덩어리와 야채 덩어리가 담긴 그릇만이 있었다.
고깃덩어리가 있는 그릇에 육수를 부으니, 또 다른 수프가 되었다. 단, 지금껏 먹었던 수프와 달리 확실하게 건더기가 있는 수프였다.
쫀득하게 씹히는 고기와 채소를 곁들여 맑은 육수를 먹으니, 잔뜩 매듭이 지어있는 속이 한순간에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빨에 달라붙는 듯한 고기의 탄력과 농후한 육수의 맛이 미뢰를 자극했다.
“혹시 가짜 거북이 수프가 뭔지 아나요?”
맞은편에 앉은 한대훈은 수프 그릇 아래에 있는 냅킨을 읽고 있었다.
가짜 거북이 수프.
앨리스의 모험담에 등장하는, 빅토리아 시대에서 먹던 수프다. 값비싼 거북이 고기 대신, 소머리나 발 등을 이용해서 그 맛을 흉내 내는 요리.
하지만 이 맛은, 감히 ‘저렴한 버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후로는 작은 통로를 지나가며 짧은 크로켓 경기를 했다.
플라밍고 인형과 고슴도치 인형으로 하는 미니 골프 같은 게임을 마치고 나니, 다음 문이 열렸다.
다음 방은 어항이 가득 진열된 방.
푸른 조명이 빛나는 방 안에는 파도가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이곳에 오고 처음으로 사람이 등장했다.
깔끔하게 조끼와 수트를 차려입은 가면을 쓴 웨이터. 웨이터라고 불러야 할지, 딜러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복장의 인물이었다.
웨이터 겸 딜러는 특이한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카드만 없지, 카지노에서 흔히 보는 블랙잭 테이블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카드를 올려놓는 공간을 표시하는 상자 안에는, 카드 대신 요리가 올려있었다.
“이걸 먹으라는 건가요?”
질문해도 웨이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표시만 했다.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말이 통했다면, 순식간에 이 마법이 깨졌을 테니까.
페이튼은 눈앞의 랍스타 요리부터 집어 들었지만, 딜러는 날쌘 움직임으로 다가와 요리를 가로채 갔다.
절레절레.
벽면에 걸려있는 태블릿의 숫자는 ‘4’
테이블 위의 요리 숫자도 4개.
이 퍼즐의 정답 역시 대략 짐작이 갔다.
“물개, 거북이, 연어, 해파리를 치우고 랍스타를 집어서 던져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가짜 바다거북의 노래에 등장하는 가사에요. 물개는 아마 없는 것 같고. 그러면 거북이, 연어, 해파리, 랍스타 순서로 먹는 거겠죠?”
거북이 요리 역시 없었지만,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자라 껍질이 올려진 요리는 있었다.
페이튼이 자라 껍질 요리를 집어 들자, 이번에는 딜러가 막지 않았다.
“이건 한국요리입니다. 아마도 이름이 용봉탕이었던 것 같습니다.”
“용봉탕이요?”
“용과 불사조의 수프라고 할까요. 자라고기와 닭고기가 들어간 것 같은데, 장수를 기원하는 수프입니다.”
한대훈의 어설픈 설명을 곁들여 먹은 자라 수프는, 수프라기보다는 찜에 가까웠다.
짙은 동양의 약초 맛이 배어 있어 어딘가 어른스러운 맛이었다. 가볍게 혀끝만 건드리는 맛이 아니라 깊숙이 침투하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맛이었다.
무언가 신비롭고 깊은 맛이었다.
다음으로 먹은 연어는 걸쭉한 굴 소스가 곁들어져 나왔다. 중국식 진한 갈색의 굴 소스가 아닌, 크림과 섞인 거품 같은 굴 소스였다. 의외의 조합이지만, 굴의 씁쓰름한 맛이 연어의 담백한 맛을 덮어주면서 흥미로운 페어링을 구사했다.
해파리는 한대훈의 말로는 한국에서 많이 먹는 음식이라고 했는데, 겨자 향 때문에 코끝이 찡하게 아려오면서 탱글탱글한 식감을 한껏 즐기는 요리였다.
마무리의 랍스타는 완벽하게 쪄낸, 바다의 제왕이라고 부를 만한 맛이었다.
땡!
조명이 꺼지고.
문이 열리고.
다음 방은 모의 법정.
몇 개의 단서를 찾고 법정 한가운데에 진열된 타르트를 음미하자니, 다음 문이 열렸다.
그리고.
기나긴 통로 끝에는 빛이 있었다.
은은하게 방을 밝혀주던 조명과 달리, 복도의 빛은 잔인할 정도로 눈부시게 눈을 세차게 찔렀다.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기쁨은 없었다.
“……”
“……”
잠시의 침묵으로 미루어보건데, 동행인 한대훈 역시 같은 감정을 느낄 터.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데 갑자기 찬물을 얼굴에 끼얹을 때의, 그 차가운 현실감.
아직 떠나고 싶지 않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그 필연적인 느낌까지. 원작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흠… 오늘은 이미 시간이 늦었군요.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시고, 일단 호텔로 가시는 게 좋겠군요. 차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셰프에게 인사를 못 했군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한대훈의 몸짓이 어딘가 매정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 정도로 온몸에 스며드는 여운은 강렬했다.
시공간을 넘는, 이상한 나라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페이튼은 미련을 버리고 정중한 목소리로 한대훈에게 부탁했다.
“나중에 셰프에게 전해주세요. 제 인생 최고의 원더랜드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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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셨어요!”
“우와!”
“드디어!”
손님들이 건물을 떠나자마자 여기저기서 기쁘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 무대를 세팅한 웨이터들, 그리고 소품을 정리한 스태프들의 환호성이었다.
한데 모인 사람들의 이마에는 하나같이 송골송골한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진짜 살면서 별의별 짓을 다 한다니까.”
“요리사가 이런 극한직업일 줄 알았냐.”
여기저기 장난스럽게 불평을 늘어놓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번만큼은 한길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오늘 무대의 모든 장치는 수동이었다.
제대로 훈련받은 토끼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토끼에 검은 목줄을 차고 누군가가 살살 목줄을 당겨야 했다.
조명이 꺼질 때마다 미닫이문을 여닫는 것도 수동.
웨이터와 스태프는 소품과 무대 장치를 담당했고, 요리사들은 요리를 담당했다.
방마다 설치된 CCTV를 확인하고 한길이 신호를 내리면, 요리사들은 다음 스테이지 요리를 세팅했다.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 따뜻하게 먹어야 하는 요리였으니까.
손님들이 입장하기 단 5초, 10초 전까지 요리를 세팅하고 재빨리 몸을 숨기는 모습이 어떻게 보면 우렁각시와도 같았다.
현실에는 마법이 없으니. 직접 뛰어다니며 몸을 숨겨야 했지만.
“스피커 없으면 큰일 날 뻔했죠?”
“그러네요. 역시 비싼 스피커는 다르네요.”
카키가 으스대며 한길에게 다가와 ‘나 잘했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한길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카키의 말대로, ‘뇌를 바로 때리는 스피커’가 아니었다면, 무대 뒤에서 허둥지둥하는 발소리가 모두 들렸을 거다. 그러면 몰입이 깨졌을 테고.
“앗, 그 말은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는 거죠?”
“와, 카키 그렇게 안 봤는데 치사하네!”
카키의 말에 저 멀리에 세트를 살피던 무대 감독이 뛰어나와 투덜대기 시작했다.
이들이 티격태격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남은 요리를 맛보기 위함이다.
이번에 등장하는 모든 요리가 난이도가 높다 보니, 한 번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만에 하나를 위해 여분을 여러 개 만들어놨었다.
운이 좋게 손님들이 모든 스테이지를 한 번에 클리어 했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중간에 뭔가 잘못되었다면 조명을 끄고 달려가서 요리를 교체할 것까지 생각해 두었었다.
하지만 기적처럼 무대는 실수 없이 막을 내렸고, 여분의 요리가 남아있었다.
쟁탈전의 시작이다.
정신없을 정도로 복잡한 가위바위보 토너먼트 끝에 결정된 최종 승자는 카키였다.
“나 3개 고를 수 있죠? 엘리스 음료랑, 모자 장수 세트랑, 버섯 세트요.”
“뭐야, 제일 화려한 건 다 가져가네!”
“억울하면 이겼어야죠.”
카키는 장난감 세트를 선물 받은 아이처럼, 환한 얼굴로 요리를 들고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신나게 동영상을 찍으며 맛을 보기 시작했다.
“아! 카키 사장님! 잠깐만! 올릴거면 꼭 <고르메 키친>에 지금은 판매되지 않는 메뉴라고 올려주세요!”
“이미 올렸는데?”
“아악! 안 돼요! 또 손님들 들이닥치면 그걸 누가 막아요. 제발 정정 기사!”
“기사가 아닌데?”
“제발 수정해주세요!!!!”
저 멀리서 늘어져 있던 슬아가 카키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고 뒤늦게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슬아가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왠지 동정심이 들었다.
저번에도 한번 카키의 화력을 직접 맛보았다. 그때 레스토랑으로 밀려들어 오던 예약도 안 한 손님들을 상대한 건 슬아를 비롯한 홀 직원들이었다.
“음… 셰프님, 원래 이 주스가 이 맛이 나는 게 맞나요?”
“이건… 좀 미묘한데….”
한편, 한길의 바로 옆에서 앨리스 주스를 시식하던 몇몇 요리사들은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칠면조구이 때문에 그렇지?”
“비누 먹은 것 같은데.”
“난 양말 맛 나는데?”
칠면조구이는 아무리 봐도 주스로 먹기에 적합한 재료가 아니었다. 어떻게 조리해도 디저트와 칠면조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한길은 칠면조를 그대로 넣기로 했다.
칠면조구이가 주는 충격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원작에서도 칠면조를 맛있을 거라 생각해서 넣은 건 아닐 거다.
중간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이 괴상한 맛이 주는 개성. 그게 원더랜드의 테마와 맞아떨어졌기에 그대로 살린 거였다.
“그나저나, 이 소품들 다 아깝네요. 셰프, 이거 한 번 더 안 해요? 재밌었는데~”
미술 감독은 팔꿈치로 한길을 찌르면서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한길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규모 있는 요리나 화려한 요리는 많이 만들어봤지만, 이토록 재미만을 위한 요리는 처음이었다.
단 한 번의 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한번 방법을 찾아볼게요. 아직 철수는 하지 말아주시고요. 제가 내일 연락 드리죠.”
그때,
“이한길 셰프님, 잠시 대화 가능한가요?”
돌아보니 갤러리 입구에 한대훈이 서 있었다.
아마 페이튼을 배웅하고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사람들 틈을 벗어나 한대훈과 단둘이 있게 되자, 한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대훈의 얼굴이 광채가 날 듯이 반짝이는 걸 보니, 굳이 만족했냐고 물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것 말고도 궁금한 건 많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원작이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혹시 전달이 잘못되었나요?”
“아뇨. 알고 있었습니다. 원작도 다시 읽었고요.”
“하지만….”
“퍼즐은 옆에서 정답을 알려주면 재미가 떨어질 때도 있거든요.”
한대훈은 아무렇지 않게 한길의 의문을 웃어넘기더니, 환한 얼굴로 칭찬을 시작했다.
“이머시브 다이닝이라고 해서 단순히 퍼포먼스만 생각했었는데, 함께하는 관객 두 명이 친밀감을 느낄 수 있게 설계되어 있더군요. 오랜만에 정말 재밌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사실, 이걸 한번만으로 끝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안 그래도 한 달 정도, 갤러리에서 이 컨셉을 갖고 운영해보는 것도 어떨까 싶었는데, 어떤가요?”
한길 역시 원하는 바였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요리를 준비하는 시간을 따로 빼놔야 하고, 갤러리에서 요리를 세팅할 직원도 지정해야 한다.
“그건 수셰프와 상의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뭐, 급한 건 아니니까 나중에 얘기하죠. 일단 세트는 해체하지 말고 놔두셨으면 좋겠군요.”
가볍게 미루는 걸 봐서, 한대훈 역시 이 얘기를 하고 싶어 돌아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한대훈은 가볍게 목청을 다듬더니,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말을 이어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앞으로도 이한길 셰프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지금껏 하는 게 뭐였는지 혼란스럽군요.”
“아, 제 말은…. 이런 일회성이 아니라.”
한대훈은 고의적으로 잠시 텀을 주고 대화에 여백을 남긴 후, 미소를 지으며 고백했다.
“이건 아직 대외비입니다만, 저희 TG 카드에서는 이번에 강남에 있는 한 건물을 인수하기 위해 입찰에 들어갔습니다.”
“네.”
“20층짜리 건물로, 비즈니스호텔로 운영되던 곳이죠.”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한길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호텔을 론칭할 겁니다. 가장 큰 목표는 페이튼이지만, 설령 페이튼을 파트너로 맞이하지 못한다 해도 다른 호텔 체인은 많으니까요.”
“죄송한데, 이런 얘기를 저에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군요.”
한길이 갸우뚱하자, 한대훈은 또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말의 순서가 조금 잘못되었나 보군요. 호텔의 인지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레스토랑이죠. 전체 매출의 20% 이상을 담당하기도 하고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다음에 올 문장이 무엇인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오픈할 호텔에 이한길 셰프를 총주방장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