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12)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12화(112/325)
112. 파이널 퀘스트
“셰프!”
고르메 키친으로 돌아오자마자 수셰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셰프는 오픈 키친 너머로 상체를 길게 내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카운터를 뛰어넘어 달려올 기세다.
한대훈과의 대화가 어떻게 갔는지 궁금한 거겠지. 이미 깨톡으로 결과를 알려줬음에도.
한길은 조용히 엄지 척 사인을 날린 후, 자신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아직 시간은 밤 아홉 시 반.
주방이 마감하려면 30분이 남았다.
그동안 집중하라는 무언의 지시다.
수셰프는 원망이 조금 담긴 눈초리를 했지만, 마지못해 패스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안 들어가는 게 좋겠지?’
마음 같아서는 한길도 주방에 합류하고 싶지만, 간신히 의지를 발휘하여 자신의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온종일 주방을 수셰프에게 맡겨둔 상태다. 마지막 30분을 남겨놓고 주방에 들어가는 건 의미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행동은 다른 주방 요리사들의 눈에 불신으로 비칠 지도 모른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앞으로 분점을 내면 수셰프가 1호점 주방을 지휘해야 하니까.
“후우…..”
사무실에 들어와 의자에 파묻히듯 쓰러지니, 지금껏 잊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갤러리의 ‘이상한 나라’ 행사는 오늘 풀 예약이었다. 덕분에 쉴 틈 없이 일해야 했다.
CCTV로 손님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완벽한 타이밍에 소품과 요리를 세팅해야 하니, 한순간도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역시 효율이 떨어지네.’
단 하루뿐이지만 피부로 와 닿았다. 이머시브 다이닝은 레스토랑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의미도 있고 손님들의 반응도 좋지만. 여섯 명 단위로 들어오는 손님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세 팀이 왔으니, 꼬박 네 시간 반을 일하면서 열여덟 명의 손님만 받은 셈이다.
TG 카드에서 일당으로 계산을 해주기에 망정이지, 레스토랑에서 이런 식으로 운영하면 손해 보는 장사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똑똑!
노크와 동시에 문이 열리면서 수셰프가 달려 들어왔다.
“얘기는 잘 된 거죠?”
“그럼요.”
“기한은요?”
“1년입니다.”
“1년이라….. 하아…. 할 게 많네요.”
수셰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덕분에 제법 기묘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해는 갔다. 한길 역시 똑같은 심정이었으니까. 절대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기분 좋은 긴장감이 혈관을 따라 온몸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인테리어 업체는 뭐라고 하던가요?”
“2주 정도면 준비 가능하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종일 공사를 하면 시간은 단축되겠지만, 저희 영업시간을 피해서 해야 하니까요.”
2호점은 1호점 바로 위에 오픈하기로 했다.
지금은 피자집으로 운영되는 곳으로, 다음 달 말에는 문을 닫는다고 한다.
때마침 2층에 자리가 생겨서 무엇 보다 다행이었다. 1호점과 2호점을 오가며 동시에 운영하기에는 최적의 지리적 조건이니까.
카키와도 얘기를 마친 상태다. 동업자가 건물주라 여러모로 편리했다.
“요리사는 몇 명을 더 채용할까요?”
“10명은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대한 빨리 구해서 적응 기간을 두고 싶습니다. 1호점에 있는 요리사 반은 2호점으로 데려가고 싶거든요.”
장소도 있고, 새로운 인력을 뽑아서 훈련할 시간도 충분하다.
모든 준비가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어떤 컨셉으로 갈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건 아직 생각 중입니다.”
고르메 키친 1호점은 퓨전 컨템포리 다이닝 레스토랑이다. 거창한 표현이지만, 결국은 국적 없이 모든 메뉴를 판매한다는 뜻이다. 로마 요리를 현대화한 메뉴도 있는가 하면, 영국식 비프 웰링턴, 지중해식 해물 요리에 함박까지. 통일성이 없다.
하지만 2호점은 그래서는 안 된다. 단순히 매출이 잘 나오는 식당으로는 부족하니까.
“호텔 입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한식, 중식, 일식, 양식 중에 고르는 게 좋죠. 양식은 이탈리안이나 프렌치가 아무래도 유리하고요.”
“….. 그건 그렇죠.”
“셰프는 어떤 요리가 가장 편하신가요?”
“……”
그게 문제였다.
한길이 요리의 길에 들어선 지 이제 10년.
그동안 다양한 주방에 섰지만, 한길의 경험은 호텔 요리와 견주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한식은 기사식당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고, 중식과 이탈리안은 동네의 중국집과 파스타 집에서 일한 게 전부다. 일식은 횟집과 가정식 식당에서 짧게 근무해 봤고, 프랑스식은 아예 경험이 없다. 물론, 퇴근 후에 집에서 혼자 레시피 연구를 해오긴 했지만,
‘그거로는 부족하지.’
퀘스트를 반복할 때마다 무엇보다 크게 깨달은 건, 요리는 레시피가 아니라는 점. 일반 식당은 레시피를 보고 그럭저럭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파인 다이닝은 다르다.
맛의 정수를 보여주는, 각 퀴진의 본질을 담은 요리. 그런 요리가 아니면 호텔 입점은 불가능하다.
현실에서 그런 경험을 얻기는 어려우니, 퀘스트를 활용하는 게 좋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의 스테이지가 영국이다.
‘영국 요리 전문점은….’
거기까지만 생각하다 사고를 멈추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순간 깃털을 입은 백조나 생선 머리가 튀어나온 파이가 떠올라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려온 탓이다. 영국 요리라니, 있던 손님도 달아나게 만들 컨셉이다.
“인테리어 방향은 언제까지 알려줘야 하죠?”
“빠를수록 좋지만, 1-2주 내로는 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일단 다음 주까지 생각해 보죠.”
“예스, 셰프.”
한길은 시야의 한 쪽에 있는 카운트다운 시계를 바라봤다. 남은 시간은 4시간.
‘빨리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하면···.’
마지막으로 영국에 체류했을 때 드디어 국왕을 만났었다. 궁전이 배경인 스테이지에서 파이널 퀘스트는 국왕과 연관이 있을 확률이 높고.
그것만 클리어하면 다음 스테이지다.
시스템은 한길에게 필요한 경험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이것만 마치면 다음 스테이지는 중국이나 이탈리아, 프랑스가 나올 수도 있다.
제발.
#
[파이널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파이널 퀘스트 – 왕비의 연회>.
조건: 왕비의 연회를 성공리에 치르세요.
제한 시간: ???
체류 기간: 4주.
보상: 300,000 고르메 포인트
실패 시: 상점의 아이템 10개를 무작위로 회수합니다.
+
눈앞에 뜬 퀘스트 창을 보자마자 한길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피어올랐다.
가장 보고 싶던 단어.
파이널 퀘스트.
영국에서의 마지막 퀘스트다.
‘연회’라고 하면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다. 일전에 변기 담당관이 말했던 연회가 보름 후에 열리니까. 그런데,
‘체류 기간?’
퀘스트의 양식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는 퀘스트에 대한 제한 시간만 주어졌었는데, 이번에는 제한 시간과 별개로 체류 기간이 명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처음 보는 물음표···.
“마크!”
“어?”
“몇 번이나 불렀는데 못 들었냐? 설마, 몸이 안 좋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그러면 다행이고. 오늘 저녁은 국왕 전하를 초청한다고 하지 않았나? 서둘러야지.”
한길은 일단 퀘스트 창을 끄고 서둘러 준비를 했다. 어차피 지금 고민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니까.
길버트의 말대로, 오늘은 왕비가 다시 국왕을 초청한 날이다. 일전의 아서왕 만찬에 대한 후속 식사를 마련해야 하니 할 일이 많다.
아직 국왕 측에서 공식적으로 한길에게 연회를 맡으라는 지시를 내린 것도 아니니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실수만 안 하면 된다.
이미 모든 길은 닦아 놓았으니까.
#
···. 라고 생각한 지도 열흘이 지났다.
헨리 국왕은 격일로 왕비를 찾았고, 그때마다 한길은 아서왕의 식탁을 재현해 주었다.
국왕은 항상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고, 식사를 마칠 때마다 한길에게 각종 보석을 상으로 내렸다.
원탁의 기사는 어느새 스무 명이 넘었고, 새로이 임명된 기사에게는 왕비와 시녀들이 직접 수놓은 녹색 벨트가 주어졌다.
헨리 국왕의 ‘녹색 기사단’은 궁 안의 화제였다. 언제부터인가 국왕의 주위에 있는 최측근은 모두 녹색 벨트를 허리에 둘러매고 있었으니.
동시에, 언제부터인지 불린 왕비 역시 녹색 드레스만을 입기 시작했다. 다른 시녀들에게는 녹색 의상 착용 금지령이 내려졌고.
한동안 국왕이 찾던 시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한 눈으로 봐도 궁중의 권력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보였으니까.
모든 게 순조롭다.
한 가지만 제외하면.
“뭐가 그리 불만이지?”
불린은 엘리자베스의 곱슬머리를 손가락에 돌돌 말며 한길에게 질문했다.
그 사이, 해골처럼 삐쩍 말라 있던 불린 왕비는 제법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푹 꺼진 볼은 다시 부풀어 올랐고, 장밋빛 홍조까지 띠고 있었다.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불만은 없습니다.”
“흐음?”
불린의 눈동자와 작은 코웃음이 ‘웃기고 있네’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내 관심 없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불린은 손가락으로 엘리자베스의 볼을 장난스레 콕콕 누르기 시작했고, 엘리자베스는 그 손가락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어릴 적 많이 했던 ‘쌀 보리’ 놀이와도 비슷해 보였다. 불린은 기분이 좋은지, 흥얼거리듯이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초청하는 위팅턴 백작 요리에는 꼭 아스파라거스를 넣어줬으면 좋겠는데.”
“네.”
“최대한 입에 넣지도 못할 수준으로. 물론, 전하의 그릇에 똑같은 음식이 올라가면 안 되고.”
불린은 뒤끝이 있는 여인이었다.
국왕이 시녀에게 흔들렸을 당시, 시녀를 찾아간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었다.
개중에 쓸모없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궁에서 내쫓았고, 쓸모가 있는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소심한 복수를 하고 나서야 기사단에 받아들였다.
“표정이 왜 그렇지? 불만이 있으면 뒤에서 떠드는 것보다는 앞에서 말하는 게 좋은데?”
“불만은 아니고,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불안?”
“아직 전하께서 연회에 대한 말씀이 없으시니까요.”
왕비 역시 한길이 연회를 맡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연회는 각국의 대사들이 모이는 자리. 그런 자리에서 왕비의 요리사가 총지휘를 맡으면, 누가 이 나라의 안주인인지 전 유럽에 다시 한번 못 박는 셈이니.
그런데 국왕이 계속 뜸을 들이는데도 왕비는 너무나도 차분했다. 오히려, 눈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은가. 남녀 관계에서는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하다고.”
“……”
“우리 리지 앞에서 그런 우중충한 기운 뿌리지 말고 바람이나 한번 쐬고 오면 어떤가?”
“그러면 내일 오전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뒤끝이 있는 여인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편에게는 박하지 않았다. 불린은 한길과 길버트에게 개인 기숙사 방을 배정해주었고, 한길에게는 원하는 때에 언제든 수도원을 방문하도록 자유 외출도 허가해줬다.
“그러고 보니, 그 수도원은 폐쇄일이 언제였지?”
“다음 주입니다. 수도원장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지만요.”
“순례자들은 아직도 많고?”
왕비는 유난히 한길의 수도원에 관심이 많았다. 항상 외출 후에는 수도원에 대한 상세한 질문을 했고, 그 끝에는 항상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썩어빠진 수도승 몇 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이 피해를 보는지. 먼 길 왔는데 숙식 제공해주는 곳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
“자네는 그 수도원을 어쩔 생각이지? 그대로 놔두면 금방 폐허가 될 텐데, 여관으로 운영하면 어떤가? 어차피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있으니 손님이 부족하지는 않을 테고.”
“제가 여관을 운영할 여력이 안 됩니다.”
식당 하나를 굴리는데에도 얼마나 큰 노력과 힘이 들어가는데, 숙식 제공을 같이하려면 모든 에너지를 다 그곳에 쏟아야 한다.
“수익이 안 날 것 같아 걱정이라면 순례자들의 숙식비용은 내가 지원하도록 하지.”
“네?”
“그 정도는 보태줄 능력이 있네만, 왜, 못 믿겠나?”
일국의 왕비인데, 그 재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적에게 그토록 가차 없는 태도를 취해 온 왕비가, 순례자들을 챙기는 모습에서 모순을 느꼈던 거지. 하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도록. 관리인 하나만 두면 되고. 자네도 손해 볼 것 없으니까.”
#
“마크! 아직 식사는 안 하셨죠? 때마침 홀에서 다들 식사 중인데, 식사부터 준비해 드릴까요?”
“네, 부탁합니다.”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요리사인 키치너가 오랜만에 주인을 본 대형견처럼 단걸음에 달려와서 호들갑을 떨었다.
한길은 그동안 격일로 이곳을 방문해서 순례자들 틈에 섞여 식사했다.
단순히 이곳의 식사가 맛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정보를 구하기 위함이다.
궁전에서 한길이 대화를 나눌 상대는 같은 하인들밖에 없었고, 그들은 궁 안에 갇혀서 생활하기에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수도원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을 왕비의 마스터 쿡이라고 소개하면, 귀족들조차 한길을 반갑게 맞이했다.
“예전에 여름 행궁 행차 당시 국왕 전하의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예술이었지! 자네가 그 자리를 마련한 건가?”
“아니요, 저는 최근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대단한걸? 그 젊은 나이에 왕비 전하의 요리사라니!”
“저보다 좋은 요리사들도 많은걸요. 얼마 전에 제법 유명한 분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 같은데 이름이 기억 안 나네요.”
“누구? 타일레방? 아니, 그 사람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고. 최근에 요리사에 대한 소문은 페라라 공작령의 메시부고 밖에 없던데.”
“아니, 영국 내에서요.”
“무슨 소린가, 이 사람아. 영국의 유명 요리사들은 다 궁에 있겠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로마 스테이지에서는, 일반 퀘스트와 별개로 자물쇠가 걸린 인물을 만났었다. 전설의 제빵사인 에우리사케스를 만났고, 그를 통해서 희대의 미식가인 아피키우스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스테이지에서는 자물쇠를 본 적이 없다. 적어도 궁전 안에서는.
어차피 국왕의 명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혹시나 자신이 모르고 지나간 장인이나 미식가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오늘도 수확이 없네.’
아직 쓸만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이 시대에는 요리사들이 큰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일반 하인보다는 대우가 좋았지만, 결국은 일개 하인이었다.
가끔 예외적으로 유명한 요리사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프랑스나 이탈리아반도에 살고 있었다.
영국에서 미식으로 이름난 귀족이 있는지도 알아봤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인물을 들어보지 못했고.
실망감을 감추며 다이닝룸을 나서자, 키치너가 들뜬 걸음으로 다가왔다.
“마크, 바로 가시나요? 시간이 되시면 정원에 한 번 오시겠어요?”
“물론이죠. 이번에는 뭐죠?”
“봄을 맞이해서 정원에 새로 핀 작물이 있어서요.”
키치너는 수도승보다는 요리사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재료와 요리에 대한 얘기에 굶주려 있었고,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한길이 올 때마다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대했다.
서둘러 한길을 끌고 정원으로 향한 키치너는, 이상하게 생긴 새싹을 뜯어 건네주었다. 돋나물과 아스파라거스를 반반 섞어놓은 생김새다.
그 새싹을 입에 넣자, 떫은 잔디 맛이 퍼지면서 입안이 순식간에 바짝 말라버렸다.
[홉 순 (1등급)이 고르메 상점에 등록되었습니다.]“이게 뭔지 아십니까?”
“맥주 만들 때 쓰는 홉의 새싹이네요.”
“오! 어찌 아시네요? 이게 생으로 먹을 때는 모르는데, 구워 먹으면 맛이 기가 막힙니다!”
알고 있다.
현대에서도 드물게 먹는 채소니까.
홉 순의 이파리는 케일과 비슷한 맛이 나고, 그 순은 약간의 산미가 섞인 견과류 향이 난다고 한다. 맛은 독특한 아스파라거스와도 같고, 식감은 미나리에 가깝다고 들었다.
이 채소를 드물게 먹는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채소이기 때문이다. 판매하는 곳도 잘 없거니와, 영국에서는 판매가가 1킬로에 1,000파운드, 즉, 150만 원을 호가한다.
“또 다른 건 없나요?”
“이미 며칠 전에 오셨잖습니까. 아! 이번에 조금 다른 종류의 장미로 로즈 워터를 만들어봤는데 한번 시식해 보시렵니까?”
키치너는 신이 난 발걸음으로 달려가 선반에서 병을 꺼내왔다.
로즈 워터는 장미수다. 장미를 찌거나 삶아서 만든 물로, 아랍 요리나 인도 요리에서는 지금도 자주 사용된다.
이 시대에는 영국은 물론, 전 유럽에서 사용되는 재료였다.
너무 과한 양을 사용하면 향수를 먹는 것 같지만, 적절하게 한 티스푼 정도만 넣으면 고급스러우면서 향긋한 향을 더해줬다.
“저번에 맛본 것보다 맛있네요.”
“그렇죠? 이번에는 장미를 한 종류만 쪄낸 게 아니라 영국 장미와 다마스쿠스 장미를 섞어봤죠! 의외로 이파리의 색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 같아서…..”
키치너는 한번 설명을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몰랐다. 들어주는 게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한길은 이런 열정이 싫지는 않았다.
“당신은 이곳이 폐쇄되면 어디로 갈 생각이시죠?”
“모르죠, 가라는 곳으로 가야죠. 사실은 마크에게만 털어놓는데, 저는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키워진 입장이라 막상 나가려니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이상하죠?”
“아니, 전혀요.”
“다른 곳에서는 이런 연구를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 같고…”
“혹시 이곳의 관리인이 되는 건 어떤가요?”
키치너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그, 얼마든, 제 목숨을 바쳐서! 아니, 진짜 바친다는 건 아니고, 아니, 그래도 화재가 난다면 이 안의 물건은 모두 옮겨둘 정도로는 목숨을 바쳐서! 열심히 관리하겠습니다!”
“자세한 건 모레쯤에 다시 말하죠. 일단 지금은 빨리 궁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네! 마크 님!”
원하는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도원은 들릴 때마다 조금씩 수확이 있었다. 신기한 재료도 많았고, 키치너가 연구하는 각국의 조리법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관리인도 한 명 얻은 셈이니 나쁘진 않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궁으로 돌아오니,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믿을 수 없네!”
“진짜 그런 말을 했다고?”
“세상에!”
요리사들도, 지나가는 하인들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다가 한길의 인기척을 느끼면 바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딱히 한길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엄청난 소문이 번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었어?”
“엄청난 일이 있었지! 여기서는 말하기 좀 그렇고, 이쪽으로 와봐!”
주방에 도착하자마자 길버트를 먼저 찾은 한길이었지만, 자세한 내용을 듣기도 전에 시녀가 주방으로 내려왔다.
“마크! 이제야 왔군. 전하께서 찾으시네.”
위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통해 왕비의 내실로 들어가자,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한 웃음을 짓는 불린이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 같은, 위풍당당함이 느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아, 마크. 자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국왕의 명이 있었네. 연회의 총지휘를 자네에게 맡기고 싶다고 하시더군.”
한길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심 속으로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아, 그리고 오늘 저녁은 손님이 오실 것 같은데 준비 좀 해 주게.”
“전하이신가요?”
“아니, 그런 귀한 분은 아니고. 최대한 우유를 듬뿍 넣어줘. 이왕이면 우유가 들어갔는지 티가 안 나게 들어갔으면 좋겠고. 완두콩도 한가득, 요리마다 갈아서 넣어줬으면 좋겠군.”
불린 왕비와 함께 일한 지도 보름이다. 왕비가 이렇게 손수 재료를 지정하는 건, 대개 손님을 골탕 먹이기 위함이다. 그럴 때마다 한길은 항상 질문했다.
“이 재료를 드시고 몸에 두드러기가 나거나 배탈이 나는 건 아니겠죠?”
편식하는 재료를 억지로 먹이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혹시나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을 먹일 수는 없으니. 하지만 왕비가 답하기도 전에,
“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황소처럼 내실로 돌진해오는 이가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 제법 나이가 든 남자였다.
남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던 불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뜬 후에는 장난스레 웃으며 한길에게 입만 벙긋거리며 ‘완두콩 많이!’를 전달한 후, 몸을 돌렸다.
다시 화사한 웃음을 가면처럼 쓴 왕비가 불청객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