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14)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14화(114/325)
114. 아니, 처음 보는데요?
그로부터 이틀, 연회를 사흘 앞둔 시점.
한길은 여느 때보다 분주했다.
“파커, 제과실에 가서 설탕 모형을 확인하고 오도록.”
“네.”
“길버트는 그릇 담당관에게 다시 한번 수량을 확인하고.”
“네.”
한길의 말에 요리사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지시를 따르는 데 익숙해 졌는지, 멈춰서서 따져 드는 이는 없었다.
다행이었다.
이런 바쁜 시기에 괜히 뭉그적대는 인물이 있으면 여러모로 불편하니까.
‘쓸데없는 방해물은 없는 게 좋지.’
궁중 연회는 일반 식사와는 달랐다.
일반 식사 시간에는, 국왕과 왕비는 내실에서 밥을 먹고, 귀빈들은 귀빈실에서, 일반 귀족은 그레이트 홀에서 식사했다.
하지만 연회에는 모든 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 800명에서 1,200명의 인원이.
듣자 하니, 방 한가운데에 거대한 테이블을 세워두고 그 위에 수십 개에서 수백 개에 달하는 요리를 전시한다고 한다.
국왕의, 영국의 권위를 보여주는 한 상을 차려야 한다. 그 요리가 대사들의 입을 통해 유럽 전역에 생생하게 중계될 테니까.
한길은 이 자리에서 ‘육해공’을 전부 선보일 계획이었다.
조금 야심 찬 계획이긴 했지만, 한길의 아이디어를 들은 요리사들의 반응만 봐도 그 파급력이 어느 정도일지 대략 예상되었다.
‘무조건 성공해야 해.’
이번 스테이지의 마지막 퀘스트.
실패하면 다음 스테이지로 진입할 수 없다. 게다가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도 있고.
그리고….
이 한 상에 다른 두 명의 운명까지 달려있다.
“피터, 제빵실에 가서 파이 모형을 다시 가져오도록.”
“어제도 보셨는데요?”
“수정 사안을 반영했는지 확인해야지.”
“네!”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할 수 없다.
이미 확인한 사항도 두 번, 세 번에 걸쳐 확인하니 일이 끝이 없었다.
그래도.
사흘이면 시간도 넉넉하다. 여느 때보다 완벽하게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요리사들을 모아놓고 새로 도착한 파이 모형을 확인하던 그때,
“마스터 쿡!”
숨을 헐떡이며 주방으로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그, 헉, 갑자기, 헉, 궁을 옮긴다고 합니다! 그린위치 궁전으로요!”
“뭐? 언제?”
“오늘 내일이라고 합니다. 국왕 전하께서는 이미 떠나셨다고요. 궁 내에서 발한병 환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요리사들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영문을 모르는 이는 한길뿐이었다.
한길이 은밀하게 길버트에게 시선을 던지자, 길버트가 한길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전했다.
“국왕전하는 발한병을 병적으로 두려워하시거든.”
“그게 아니라, 궁이 이사한다는 건 무슨 뜻이지?”
“아, 마크는 모르는구나. 국왕 전하는 궁이 60개가 넘는데 몇 달 단위로 옮기거든. 그래야 화장실도 비워내고 궁 내부를 환기 하니까.”
“그 말은….”
“연회는 새로운 궁에서 열린다는 거지.”
정신이 아찔해졌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장소에서 1,200명을 위한 연회를 지휘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악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행히 궁은 그리 멀지 않아 이사는 당일로 마쳤지만,
“가축은 전부 어디 갔지?”
“모르죠.”
“재료 담당관은 어디에 있고?”
“그… 아마 왼쪽 건물 2층인 것 같은데….”
이삿짐이 전부 도착하지 않았다.
연회에 사용될 요리의 재료가 없다.
한길은 거침없는 걸음으로 책임자를 찾아 나섰다. 미로 같은 복도를 여러 번 헤매면서 담당관을 찾았지만, 그는 소식을 듣고도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재료? 지금 당장 내 가구도 못 챙겼는데 이 상황에서 재료까지 어떻게 챙기나. 걱정하지 말게. 연회 당일에는 도착할 테니.”
“그래서는 늦습니다. 전날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도착한다지 않았나.”
“내일입니다.”
“알고 있네.”
어딘가 의욕 없는 공무원과 같은 태도.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 궁전의 정원에 채소가 없더군요. 이건 무슨 일이죠?”
“아, 얼마 전에 벌레 사태가 있었다더군. 걱정하지 말게, 필요한 재료는 인근 시장에서 구해올 테니. 연회 당일까지는 준비할 테니까.”
영국의 밥상은 육류가 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채소를 안 먹는 건 아니다. 적어도 샐러드와 죽에는 채소가 기본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기본 재료가 없다.
“연회 당일이 아니라 내일까지라고 했습니다.”
”자네, 일개 요리사 주제에 너무 건방진 것 아닌가?”
한길이 지나치게 추궁하니, 담당관이 성을 냈다. 저쪽은 귀족이다. 한길은 요리사고.
혈압이 올라 혈관이 터질 것 같았지만, 여기서 귀족과 말싸움을 해봤자 입만 아프다. 저 어정쩡한 태도를 믿고 기다릴 생각은 더더욱 없고.
무엇보다,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한길은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왕비에게로 달려가 모든 상황을 보고했다. 아직 이삿짐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왕비는 모든 일을 미뤄두고 바로 담당자를 불렀다.
한길이 생각하는 담당자가 아니었지만.
“크롬웰, 연회 직전에 재료가 없다니. 이렇게 허술한 이사는 처음 보는데.”
왕비의 알현실로 불려온 크롬웰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고개를 지나치게 숙이는 바람에 얼굴에 그늘이 져서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전하. 분명 짐은 도착을 한 것 같은데, 1,200명분의 이삿짐이 한데 섞여 있어서 지금 찾고 있습니다. 궁 어딘가에는 있습니다.”
“그걸 찾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 물론 아니죠. 혹시 몰라 인근의 농부들과 시장에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근처에 길드 연회가 있었는지, 남아있는 재료가 많지 않아 최대한 알아보는 중입니다. 시장가의 5배까지 제시했는데도 물건이 없어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 말을 믿으라고?”
“못 믿으신다면 증인을 데려오겠습니다.”
“꼼꼼하게 준비했구먼.”
왕비는 코웃음을 쳤고, 크롬웰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판매하는 사람만 나타난다면 언제든 구매는 가능합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한길이 입을 열자, 크롬웰은 고개를 들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주제 파악을 하게. 네 놈이 건방지게 떠들 자리는 아니니.”
“연회의 총괄 요리사가 재료 확보에 대한 얘기도 못 하면 무슨 얘기를 합니까?”
한길이 그대로 맞받아치자, 왕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크롬웰. 미처 말을 못 했지만, 그 요리사는 연회 담당자이자 내 대리인일세. 다시 한번 주제 파악을 하는 대화를 나누도록.”
크롬웰의 표정이 굳어졌다. 눈 밑이 미세하게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고. 하지만 상대의 하찮은 자존심을 챙겨줄 여유는 없다.
한길은 당당하게 크롬웰을 추궁했다.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물건을 판매한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바로 구매해 올 수 있습니까?”
“물론이네.”
“다행이네요. 때마침 판매처를 알고 있으니까요.”
크롬웰이 경멸에 가득한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어떻게’라는 뜻이 담긴 코웃음.
그에 대고 한길은 차가운 미소로 답했다.
“때마침 제 소유의 수도원이 인근에 있습니다. 가축 600마리. 마지막 방문에 보니, 물고기를 보관한 연못도 가득 찼었죠. 허브 정원도 딸려 있습니다. 연회에 필요한 물량은 전부 판매하겠습니다. 아까, 5배의 가격이라고 하셨죠?”
“….. 그것참 다행이군. 바로 재료를 들여올 수 있도록 마차와 배를 준비하겠네.”
짧은 공백 후, 크롬웰은 자동응답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영혼 없는 답변을 했다. 그러자, 왕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사는 자네 특기가 아니니 아무래도 감독하는 사람을 보내야 할 것 같군. 내 경비병과 시녀들도 함께 가도록 하지. 두 시간 내로 모든 준비를 마치게.”
크롬웰은 창백한 얼굴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왕비는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개가 꼬리를 내리고 가는 모습이네. 역시 주인을 물어뜯는 개는 바로 교육을 해야 한다니까.”
평소라면 왕비의 서슴없는 발언에 불안감을 느꼈을 테지만, 이번에는 어딘가 속이 후련했다.
한길은 기본적으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퀘스트 속 사람들이 어떤 일을 벌이든, 자신은 요리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가슴속에 차오르는 감정. 이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혈관이 싸늘하게 식어오는 감각.
시리도록 차가운 분노.
심장은 분출을 앞둔 화산처럼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동시에 극한의 긴장감이 온몸의 집중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시간이 느려지고 모든 뇌세포가 한꺼번에 각성한 듯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래서, 수도원 물자가 있으면 재료는 충분한가?”
“육류와 생선은 충분하겠지만, 채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가축은 한 마리로 몇 백 명이 먹을 수 있지만, 1,200명분의 채소가 있을지는 확답하기 어렵습니다.”
“녹색 기사단에게 각자의 재고를 내놓으라고 한번 말해보도록 하지. 하지만 다들 영지가 멀어서 어떨지는 모르겠군.”
불린은 크롬웰이 사라지자, 진지한 표정으로 함께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민을 시작했다.
그녀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이 자리는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자리라는 것을.
한참을 상의하며 대략 상황을 마무리 짓던 그때, 알현실 안으로 하인 한 명이 들어왔다.
“전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지금은 알현실이 닫혀있네.”
“그게, 샤푸이 대사 측 사람이라고 합니다.”
“샤푸이 대사?”
불린은 잠시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불린과 샤푸이는 견원지간. 개인적으로 왕래가 전혀 없는 사이다. 신성로마제국의 대표인 샤푸이는 불린을 왕비로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샤푸이가 사람을 보냈다?
수상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다.
샤푸이를 거절하면, 왕비가 신성로마제국의 대표를 망신 준 것으로 해석될 우려가 있으니.
“들어오도록.”
불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고, 잠시 후, 알현실로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말끔한 차림새의 귀족이었다. 그는 예를 갖추고 불린에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앤.”
“무슨 일이지?”
남자는 ‘왕비’나 ‘전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불린의 눈에 분노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조만간 열릴 연회가 걱정되어 왔습니다. 성 마티아스를 기리는 성스러운 날인데, 최근 궁의 상황을 보니 어려움이 있을 거로 생각해서요. 어려운 시기에 서로를 돕는 게 좋은 크리스천이죠.”
남자가 고갯짓하자, 뒤에서 하인 한 명이 바구니 들고 나타났다.
“저희 대사저에서 수확한 작물입니다. 부디 사용해주십사하고 들고 와 봤습니다. 조금 익숙지 않은 작물일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저희 대사저에서도 이것밖에 남아있는 게 없어서요. 나름 귀한 물건이니 부디 사용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네.”
불린의 말투가 딱딱하게 굳어 있다.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마크, 가서 확인하도록.”
한길은 불안감을 느끼며 바구니에 다가갔다. 이제 어느 정도 궁중 인물들의 사고방식은 파악할 것 같았다.
천적이 보내는 재료.
분명 함정이다.
아마 사용하지 못한 선물을 억지로 쥐여주는 거겠지. 다 사용하지 못할 경우, 우정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거절당했다고 해석될 수도 있고.
하지만 바구니에 다가갈수록, 한길의 입꼬리는 조금씩 올라갔다.
엄지손톱 크기의 빨간 열매.
동글동글한 짙은 보랏빛 열매.
그리고 기다란 뿌리채소.
“이걸 본 적이 있나?”
“아니요. 처음 보는 겁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지?”
“제가 아는 채소와 닮아 있어서요.”
“그럴 리가.”
눈앞의 남자는 코웃음을 쳤지만, 한길은 거리낌이 없었다.
“확인차 한번 맛을 봐도 될까요?“
“이걸 생으로 먹겠다고?”
“한 입 먹는다고 죽지 않습니다.”
한길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바구니 안의 작물을 하나씩 맛보았다.
빨간 열매를 먹자, 과즙이 입안에 터지면서 농축된 단 맛이 퍼져나갔다. 달달함 끝에 남는 여운. 감칠맛이다.
보라색 열매는 아삭하게 씹히는 상쾌한 식감이었다. 신선하다.
뿌리채소는 서걱서걱 씹혔다. 원래는 구워 먹어야지만, 생으로 먹었는데도 그 당도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시식을 마친 한길은 진심 어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선물 감사합니다. 이런 작물이 얼마나 있다고 하셨죠?”
“부족함은 없을 거네. 귀한 것을 나눠주었으니 부디 버리는 일만 없기를 바랄 뿐이지.”
남자는 한길의 반응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너무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표정을 가다듬으려고 해도 차마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이들의 속셈이 뭔지 빤히 보였다.
이건, 영국인들에게 익숙지 않은 작물이다.
이 시대 영국은, 아직 유럽 대륙을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한길은 이 작물을 본 적이 있었다.
조금 모양새가 다르긴 하지만, 익숙한 맛이다.
게다가, 눈앞에 뜨는 창 역시 한길의 예상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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