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18)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18화(118/325)
118. 연장전
“이제 오셨···. 대사 각하?”
샤푸이는 입구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하인을 본 채 만 채 하고 서재로 달려갔다. 서재 한 쪽에 있는 책상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샤푸이의 미간이 구겨졌다.
“내 펜은 어딨지?”
“네?”
“내 깃펜. 종이도 없군.”
“그게···. 지금 필요하신가요?”
“필요도 없는데 묻겠나?”
샤푸이는 깔끔한 성격이었다. 서재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있으면 신경질을 부렸기 때문에 하인은 항상 책상 위를 깨끗하게 치워두었고.
하인은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불만을 억누르고 서둘러 깃펜과 종이를 들고 왔다.
“여기 있습니다.”
“가서 윈프레드를 불러와!”
“이 시간에 말입니까?”
샤푸이가 다시 한번 사납게 노려보자, 하인은 필기도구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달리다시피 방을 나갔다.
“쯧, 한심한 놈 같으니.”
깃펜과 종이를 달라고 했더니, 정말 깃펜과 종이만 들고 왔다. 편지를 봉할 왁스와 인장도 없이. 저리 눈치가 없어가지고는···.
하지만 지금은 덜떨어진 하인을 혼낼 여유가 없다. 한시가 급하다.
‘뭐라고 쓰지?’
깃펜을 들었지만, 문장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을 최대한 잘 포장해야 하니까.
우선, 영국과의 동맹은 낙관적이다. 헨리 국왕이 굳이 사절단까지 보내겠다는 건, 자세한 얘기를 하자는 뜻일 테니.
문제는 그 동맹에 조건이 붙는다는 것.
사절단과 함께 가는 요리사. 그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먹으면 불린을 왕비로 인정하는 꼴이다.
신성로마제국 입장에서는 망신스러운 일이다.
찰스 5세는 헨리가 이혼한 전 왕비, 캐서린의 조카다. 고모에 대한 박한 대우, 메리 공주의 계승권 문제도 해결하지도 않고 불린을 왕비로 인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맹은 필요하다.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이번에는 최대한 동맹 얘기만 하고, 왕비의 일은 뒤로 미뤄야 한다.
동맹을 위해 가는 사절단.
그들과 동행하는 왕비의 요리사.
샤푸이는 다시 깃펜을 들고 망설임 없이 글을 써 내렸다. 마지막 문장을 적을 때, 기다리던 이가 도착했다.
“윈프레드를 들여보낼까요?”
“그걸 꼭 물어봐야 하나? 그리고 인장은 어디 있지?”
“그,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덤벙대는 하인을 보니 다시 짜증이 올라왔다. 그 짜증은 편지지를 접으면서 더 치솟았다. 뭔가 감촉이 이상해서 살펴보니, 종이 두 장이 겹쳐져 있던 것.
“죄, 죄송합니다!”
샤푸이의 사나운 눈길에 하인이 고개를 깊게 조아리며 여분의 종이를 주섬주섬 챙겼다. 마치 자신의 실수를 없던 일로 하려는 듯이, 종이를 소매 안에 넣었다.
한심한 놈.
샤푸이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쉰 후, 왁스를 녹이고 인장을 그 위에 꾸욱 눌려 편지를 봉했다. 조용히 대기 중이던 윈프레드는 편지를 받자마자 단 하나의 질문을 했다.
“얼마나 빨리 가야 하나요?”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
연회가 끝나고 국왕은 요리사들을 위해 와인 창고와 맥주 창고를 하나씩 개방해 주었지만, 한길은 홀로 방으로 돌아왔다.
지난 이틀간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일단 눈부터 붙일 생각이었지만···.
‘잠이 안 와.’
몸속에 흐르는 아드레날린이 수면욕을 밀어내고 있었다. 들숨 날숨을 반복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한번 내달리기 시작한 심장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럴 수밖에.
이탈리아니까.
지금은 유럽에서 프랑스 요리를 으뜸으로 치지만, 프랑스 요리의 시작은 메디치 가문이라는 설이 있다. 카트린 드 메디치가 프랑스로 시집오면서 데려온 수많은 요리사가 프랑스 요리의 근간을 마련해주었다는 것.
그뿐 아니라, 이탈리아 요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요리다. 특히나 한국인들에게는 프랑스 요리보다 이탈리아 요리가 더 친숙하다. 프랑스 요리는 느끼하거나 비싸다는 편견이 있어 접근성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나 피자나 파스타는 먹어봤을 테니까.
‘그런데 사절단을 따라가면 요리를 배울 기회가 있을까?’
로마에서도, 영국 궁전에서도. 한길은 주방에 있었기 때문에 재료를 마음껏 접하고 요리를 배울 수 있었다. 사절단을 동행하는 건,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환경과 다를 거다.
‘그래도 가는 길에 밥은 먹겠지.’
끼니마다 최대한 많은 요리를 주문해서 먹어보고. 여관에 머무른다면,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고 단기간 속성으로 요리를 가르쳐 달라고 하면 된다.
돈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지.
그리고 다행히, 영국 스테이지에서 한길은 제법 부유한 편이었다. 유동자산이 없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지금까지 일한 임금을 받아두고, 이번 연회에 사용한 가축의 대금도 빨리 지불해 달라고 재촉해야 한다.
‘다음에 올 때는 그것부터 시작하자.’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이고 싶지만. 카운트다운 시계는 이미 0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길은 아쉬움을 달래며 눈을 감았다.
‘어?’
그런데 눈을 떴을 때는 현대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퀘스트가 끝나면 바로 현대로 이동하는데···. 처음 로그인했을 때 왔던 예의 하얀 공간이었다.
왜?
[퀘스트 체류 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퀘스트 진행 상황입니다.]+
<파이널 퀘스트 – 왕비의 연회>.
– 진행률: 5%
– 놀라운 업적을 세웠습니다.
┗ 1,243명의 귀족이 당신의 요리에 감탄했습니다.
┗ 32명의 대사가 당신의 요리에 감탄했습니다.
┗ 유럽 중으로 당신의 이름과 연회에 대한 소문이 퍼집니다.
+
평소에 뜨는 창과는 달랐다.
어떻게 보면 예상 했어야 했다.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퀘스트 구조도 지금까지와는 다르니까.
파이널 퀘스트가 이제 막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서 그런가, 진행률이 많이 낮았다.
‘이번에는 포인트를 못 벌었네.’
별도의 정산 내역이 없어 아쉬움을 드러내는 순간, 창이 떴다.
[놀라운 업적으로 인해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내역은 상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들뜬 마음으로 상점의 [보상] 탭을 열어보니,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세 개나.
+
▶ 정보 열람권 (1장):
미공개 정보를 추가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 1달 타임 점프 이용권 (1장):
스테이지 내의 시간을 건너뛸 수 있습니다. 점프 기간은 최대 1달이며, 건너뛴 시간은 기존의 알고리즘 기반 상황으로 대체합니다.
▶ 1달 체류 연장권 (1장):
퀘스트의 체류 기간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체류 연장 기간은 최대 1달입니다.
+
처음 보는 보상이 있었다.
타임 점프는 말 그대로 시간을 건너뛴다는 뜻이었다. 이번 퀘스트와 같이, 이동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에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체류 연장권.
이걸 언제 사용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현대보다 가야 하는 곳이 있었으니까.
[1달 체류 연장권을 사용합니다.] [스테이지 체류 기간이 1달 연장됩니다.]#
“표정이 왜 그러지?”
“무엇이 말입니까.”
“다 죽어가는 것 같은데?”
“시간이 시간이니까요.”
“흐음.”
못마땅한 눈으로 한길을 흘기는 이는, 불린 왕비였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것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시녀장의 호출이 있었다. 왕비가 야식을 차리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길은 납덩이 같은 몸을 일으키고 주방에 가서 남은 토마토를 이용해 간단한 요리를 만들었다.
토마토를 다지고 올리브유, 바질, 식초와 구운 마늘과 함께 버무려주었다. 빵을 얇게 썰어서 올리브유를 뿌리고 팬에 살짝 토스트 한 후, 그 위에 토마토를 올렸다.
브루스게타(bruschetta)다.
불린 왕비는 완성된 요리를 제법 열심히, 오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연회가 마친지 고작 두어 시간 뿐인데. 어떻게 저게 들어갈 공간이 있는지···.
“리지도 아~ 해봐.”
“시러. 내가 머글꼬야.”
“안돼, 다 묻잖아.”
“내가! 내가!”
심지어 엘리자베스도 아직 깨어 있었다. 이 시간에.
처음 봤을 때의 제법 의젓했던 모습과 달리, 최근 들어 엘리자베스는 투정이 늘었다. 투정보다는 어리광이라고 해야 하나.
불린이 빵을 건네주자, 엘리자베스는 두 손으로 빵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어?”
역시나. 한 입을 베어먹자마자, 토스트 위의 토마토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이는 당황하며 그 작은 손으로 토마토 조각을 들어 올리다가 멈췄다. 손가락 사이에서 으스러지는 토마토에 놀란 듯했다. 꾸욱 누르면 껍질 안의 있는 과육이 튀어나오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혼자 까르르 웃으며 찰흙 놀이하듯 토마토를 조몰락조몰락 거리다가 입에 넣었다. 아마 염분이 상당히 추가되었을 텐데···
“하나 더!”
맛있나 보다.
토마토 찰흙 놀이가 계속될수록 엘리자베스의 손가락도 입 주변도 새빨갛게 물들었지만, 왕비는 그걸 닦아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저하, 음식으로는 장난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다 묻습니다.”
“내가 닦을꼬야!”
보다 못한 한길이 나서자, 엘리자베스는 냅킨을 들고 입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빨간 범위가 두 배로 늘었다.
한길이 직접 나서면 궁중 예법에 어긋나는 걸까 망설이는 사이, 왕비가 입을 열었다.
“출발은 이틀 후네.”
“네?”
“자네는 식량과 그곳에서 구하지 못하는 재료만 챙겨. 나머지는 다른 시종들이 알아서 할 거야.”
사절단은 배를 타고 이탈리아까지 이동할 예정이라고 했다. 예상하는 시간은 편도로 2-4주. 연회를 준비하고 여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최소 2달은 자리를 비우게 될 터.
“정말 가도 괜찮습니까?”
“왜, 싫은가?”
“제가 가면 기사단은….”
애당초 불린이 국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데에는 한길의 공이 컸다. 녹색 기사단의 만찬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불린은 그 질문 자체가 불쾌하다는 듯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설마, 자네가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할 거라 생각하나?”
“걱정해 드리는 겁니다.”
“일개 요리사가 걱정을 할 정도로 내가 우스···.”
왕비는 말을 중간에 끊고 갑자기 고개를 숙여 부르스게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 손에 스푼을 쥐고, 토스트 위에 멀쩡히 잘 올려진 토마토를 재정렬하기 시작했다.
잠시의 침묵 후에, 왕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말이 별로 없어.”
“네?”
“자네는 내가 가진 비숍이야. 비숍을 아낀다고 체크메이트가 될 수는 없잖아?”
“···.”
“하지만 비숍이 죽어버리면 힘들어지니까 죽지는 말고.”
한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혹시 모르니 파커에게 쓸만한 요리 몇 개를 알려주고 가겠습니다.”
아직 이틀이 남아있다. 그동안 헨리 국왕의 취향에 맞는 요리를 생각해 내고 파커를 훈련하면···.
“마크, 어디 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토마토가 아닌 한길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 앞이었지.
“잠시 어딜 좀 다녀와야 합니다.”
“왜? 내가 장난쳐서?”
엘리자베스는 볼을 크게 부풀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지만, 울지는 않았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바람에 코를 훌쩍대고 있었지만.
“장난 안 칠꺼야. 가지 마.”
엘리자베스는 마치 방금 한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다시 한번 브루스게타를 들었다. 이번에는 차분한 손길로 움직였지만, 또다시 토마토가 떨어지자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하나 망설이는데, 옆에서 왕비가 거들어주었다.
“마크도 부모님을 보러 가야지.”
“마크도 엄마 아빠가 있어?”
“아버지는 계십니다.”
“엄마는?”
“… 어머니도 좋은 곳에 계십니다.”
“마크는 좋은 곳에 가는 거야? 아, 잠깐만!”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한길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한길의 손에 억지로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빨간 토마토 물이 그대로 묻어 있는 손수건이었다.
“마크의 무사 귀양을···”
“귀환을.”
“아, 마크의 무사 귀환을!”
어디선가 레이디가 기사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는 모습을 보고 따라 하는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자, 갑자기 한길의 앞에 시녀장이 다가왔다.
시녀장의 손에는 묵직한 상자가 있었다. 뚜껑이 열린 상자 안에는 튜더 장미 문양이 그려진 목걸이가 있었고.
“혹시 누가 길을 막는다면 이걸 보여주도록. 그쪽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감사합니다.”
불린이 고개를 까닥이자, 이번에는 또 다른 시녀가 주머니를 들고 왔다.
“그쪽에서는 이쪽 통화를 사용할 수 없을 테니 이것도 들고 가서 나쁠 것 없지.”
주머니 안에는 각종 금은과 보석이 들어있었다. 그 값어치는 알 수 없지만, 일개 요리사에게 아무렇지 않게 건네줄 정도의 물건은 아니다.
“그러면 이만 들어가도록. 자네도 오늘 고생했으니.”
“네.”
한길이 다시 주방을 향하자,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부탁하네.”
짧은 문장에는 보이지 않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
“뭐야, 마크! 자는 거 아니었어?”
“이제 가서 자려···”
“그러지 말고 잠시만 들려, 다들 애타게 찾는데!”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길버트와 마주쳐 버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길버트는 한길의 의견을 들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깨동무로 포박당한 한길은 그대로 메인 주방으로 끌려갔다.
“마스터 쿡을 위하여! 한잔 더!”
주방에는 역시나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요리사들은 번갈아 가며 한길의 입에 잔을 가져다 대고 억지로 기울였다.
입안으로 맥주가 왈칵왈칵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이상한 춤을 추는 사람들. 고함 소리. 건배를 외치는 소리.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요리사들은 하나둘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수면 부족 상태로 무리한 탓이겠지.
“우리도 이만 가자.”
“어?”
“방에 가서 자야지. 여기서 자고 싶으면 말리진 않겠지만.”
한길은 전멸한 요리사들 사이에서 길버트를 찾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길버트는, 뭉그적대고 있었다.
“왜, 여기서 할 일이 남아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은…..”
길버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잠시 ‘쉿’ 표시를 하고 입을 다물었다.
주방은 몇몇 요리사들이 코를 드르렁 거리는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길버트는 조용히 품 안에서 하얀 종이 한 장을 꺼내 한길에게 건네주었다.
“그, 조금 신기한 걸 주웠는데….”
종이는 평범한 종이였지만, 횃불 아래에 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책받침 없이 노트에 힘을 주고 필기를 했을 때 남는 자국과 같았다.
“이건 뭔데?”
“그,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안 말해.”
“샤푸이 대사 방에서 나온 거야.”
“이건 어떻게 구한 건데?”
한길이 놀라서 묻자, 길버트는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맥주 창고 관리인의 친구의 형이 샤푸이 대사의 하인이라는 설명이었다. 길버트는 맥주 창고 관리인과 제법 친했는데, 건너 건너 부탁을 한 거다.
“이런 짓 하다가 들키면 어쩌려고?”
“나도 그건 아는데···. 이번 토마토 사건도 있었고, 혹시 몰라서···.”
위험한 짓을 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니 어쩔 수 없고.
편지의 내용이 궁금하긴 했다.
연필로 살살 위를 그으면 읽을 수 있을 텐데, 이곳에는 연필이 없었다. 그 대신 화로에 있는 재를 조금 뿌려서 문지르자,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도착은 약 3-4주로 예상합니다. 그동안 어떻게든 왕비의 요리사는 떼어낼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사절단만 따로 만나셔야 합니다. 나머지는 이쪽에서 정리하겠습니다…. 」
한길이 편지를 다시 돌려주자, 길버트가 창백한 얼굴로 한숨을 연달아 쉬고 있었다.
“이걸 그대로 태우기는 뭐하고, 귀족들한테 보여주다가는 쥐새끼 취급할 테고···. 읽어줄 만한 사람이 없나? 내 주변에는 다 나랑 비슷하게 까막눈인데, 시녀 중에는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고···.”
“무슨 소린데? 너도 글을 읽을 줄 알잖아?”
인쇄 기술이 있는 시대라 이곳은 생각보다 다양한 책들이 유통되고 있었고, 한길은 길버트가 그런 책을 읽는 모습도 본 적이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하지만 길버트는 한심한 눈으로 한길을 보고 있었다.
“마크, 취했어? 이건 외국어잖아.”
다시 종이를 내려다본 한길은, 그제야 편지지 위의 글자가 평범한 알파벳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동 번역 기능 때문에 너무 자연스럽게 읽혀 알아채지 못한 거다.
이 문자는 길버트가 모를 만도 하다. 이 시대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죽은 언어니까.
이 문장을 읽을 수 있는 건 고등 교육을 받은 귀족, 혹은 성직자라고 들은 것 같다.
알파벳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고.
한길에게는 익숙한 언어···.
라틴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