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21)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21화(121/325)
121. 남김없이
다음 날 아침.
일행은 해가 뜨자마자 움직였다.
목적지는 제노아에서 수레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농촌 마을.
“프란체스코!”
“크리스티나! 오랜만입니다!”
“왜 이리 오래 걸렸어?”
“로라!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을 여인들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프란체스코는 수레에서 뛰어내려 그들과 정겹게 인사를 나눴다.
“로라! 볼 때마다 아름다워지시네요! 이러면 제가 떠날 수 없잖습니까.”
“에이, 맨날 그러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잘만 떠나더라.”
“원래 남자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눈물을 들키기 싫은 법이죠! 그걸 그렇게 해석하시다니!”
“그런데 왜 하필 오늘 왔어? 오늘은 다들 씨 뿌리기 하느라 얘기도 제대로 못 할 텐데.”
“안젤라! 이런! 안젤라도 일하러 나가시나요?”
“당연하지.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데 여기서 놀 수는 없으니까.”
“제가 이 시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왔는데, 저와 함께하는 시간이 놀이라니! 그런 말씀 하시면 상처받습니다.”
유혹적인 눈빛.
과장된 손짓.
단어마다 앞뒤로 버터를 바른 말투.
한길의 입장에서는 프란체스코의 행동 하나하나가 낯설었지만, 여인들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많은 여인이 몰려와 제법 북적이기 시작했다.
몰려온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있는 중년 여성. 그들은 젊은 총각이 빈말이라도 해주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프란체스코는 현대를 기준으로 봐도 정말 잘생긴 얼굴이다. 어딘가 젊은 시절의 디카프리오와 닮은 구석도 있고.
능숙하게 아주머니들을 다루는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발렌티나가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어때, 잘하지 않아? 내가 훈련했는데.”
“네?”
“우리 영업 무기야. 부엌은 아주머니들 구역이니까. 겨우내 돼지 한두 마리밖에 안 잡는데 이 마을에 정육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라도 해두지 않으면 우리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거든. 기다려 봐, 조금 있으면 필살기 나오니까.”
발렌티나는 묘하게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다물자마자,
“네, 그럼 저도 일해야죠, 일!”
갑자기 프란체스코가 목청을 높이더니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미소년에 가까운 외모와 달리, 몸은 의외로 다부졌다.
“오늘은 몇 마리 있나요?”
“나는 저번에 이미 잡았잖아.”
“나도….”
“어? 그럼 더 없나요? 모처럼 힘 좀 쓰려고 했는데…”
프란체스코는 아쉬운 얼굴로 주섬주섬 다시 셔츠를 집어 들었다. 고개를 떨군 모습이, 한길이 보기에도 어딘가 안쓰러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모습을 보고 아주머니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한 마리 정도는 더 잡아도 될 것 같긴 한데. 조만간 친척들이 오거든. 그리고 그, 2-3년 후에 먹어도 되는 것도 있다며?”
“물론이죠! 3년을 묵혀둔 살루미는 잘 숙성된 와인처럼 풍미가 기가 막히죠! 와인도, 여인도, 살루미도! 오랜 세월을 머금을수록 맛도, 아름다움도, 깊이도 다르니까요!”
“그럼 나도 한 마리 잡을까?”
잠시 후, 영업을 마친 프란체스코가 다시 수레로 달려왔다.
“세 마리 성공!”
“그것밖에 없어?”
“저번 달에도 한번 왔다 갔었잖아.”
프란체스코의 입술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한겨울은 아니지만, 웃통을 벗고 다닐 날씨도 아니니까.
하지만 발렌티나는 가차 없었다. 고객들에게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으로 프란체스코를 끌고 간 후, 바로 연기 지도를 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를 조금 더, 이렇게! 강아지가 올려다볼 때처럼 하라니까? 불쌍한데 귀엽고, 쓰다듬어주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다시 한번 해봐!”
그동안, 마리오가 한길에게로 다가왔다.
어딘가 싸늘한 눈빛.
마리오는 여전히 한길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도축해본 적은 있나?”
“아뇨, 없습니다.”
“일손이 된다고 했으니까 돕는 건 문제 없겠지?”
“··· 네.”
직접 도축을 하는 현장에 가본 적은 없다. 매일같이 식당에서 육류를 다루지만, 깔끔하게 가공된 상태로 오니까.
직접 동물의 생명을 앗아가는 경험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이 있으니 물릴 수도 없다.
마리오는 그런 한길을 보며 입을 씰룩였다.
“빨리 준비하지.”
#
“짐 정리 좀 부탁해!”
“뭐야, 나보고 이걸 혼자 다 하라고?”
“제가 돕겠습니다.”
농부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오는 프란체스코를 끌고 먼저 주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한번 뒤를 힐끔거리니 마크가 발렌티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짐을 나르고 있었다.
“저놈, 너무 붙어있는 것 아냐?”
“짐 들어주는 거잖아?”
“굳이 저렇게 붙어서 들어야 하는 거냐고.”
“발렌티나가 다가가는 것 같은데?”
마리오는 저 마크라는 영국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 봐도 도시에서만 살아온 것 같은, 어딘가 곱상한 느낌이 있었으니까. 그런 놈들은 말만 반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자고로, 남자는 우직한 남자가 제일이다. 세련되지는 못해도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남자가 좋다.
발렌티나가 겉만 멀끔한 도시 남자에게 빠져드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그러려면 작전이 필요하다.
“뭘 해야 하는지는 알지?”
“그냥 평소대로 하면 되는 것 아냐?”
“뭐, 그렇긴 하지. 저런 놈들은 도축하는 것만 봐도 겁먹고 도망칠 테니까. 그걸 보면 발렌티나도 실망할 테고.”
발렌티나는 아장아장 기어 다닐 때부터 정육점에서 생활해온 아이다. 도축을 하찮게 보고 두려워하는 남자를 좋아할 리 없다.
“그런데 저놈이 겁을 먹을까? 생각보다 차분해 보이던데.”
“정 안되면 실수를 유도하던가.”
“실수?”
“정형도 맡겨봐.”
”그러다 귀한 고기 망치면 어쩌려고?”
“망치지 않게 실수를 유도해야지.”
“그게 말이야 방귀….”
매서운 눈길에 프란체스코가 말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망치지 않는 실수라는 건 있을 수 없으니까.
“걱정 마. 거기까진 안 갈 테니까. 겁먹을 게 뻔한데.”
마리오는 호언장담했다.
아니나 다를까.
프란체스코가 돼지를 기절시킬 때, 마크가 대놓고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돼지의 목을 베고 피를 모두 빼낼 때는 아예 시선을 돌렸다.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했다.
“얼굴이 좋지 않네, 왜, 무슨 일 있나?”
“아니요.”
“이런 거친 일을 시켜서 싫은가 보지?”
“···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딱 봐도 싫어 죽겠는 얼굴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라, 뭐?”
“뭔가··· 고맙네요.”
“어?”
“이렇게 좋은 돼지가 귀한 목숨까지 내주었으니, 아낌없이 잘 써줘야죠.”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외부인들이 정육사들을 보면 항상 하는 오해가 있다. 칼을 들고 목숨을 앗아가는, 사형수로 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이 짐승을 사랑하는 이들이 정육사다. 말 그대로 돼지의 속속을 다 알고 있으니까.
돼지는 신이 내린 선물이다. 절대, 한 부위도 버리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뤄야 한다. 모든 정육사는 그런 믿음과 신념을 갖고 일을 한다. 정곡을 찌른 말에 한순간 당황했지만,
“아직 아무것도 안 해놓고 무슨 아는 척을 하나?”
“그건 그렇네요.”
멋들어진 말을 하는 것과, 실제로 일을 하는 건 다르다. 도축에도 창백해질 거면 내장 손질은….
‘어?’
예상과 달리, 마크는 내장 손질을 곧잘 했다. 빠릿빠릿한 손놀림이지만 흠집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다. 거침없이 힘줄을 걷어내고, 순식간에 딱딱한 지방과 부드러운 지방을 걸러내는 모습만 봐도, 어딘가 능숙해 보였다.
‘요리사라는 건 정말인가 보군.’
도시 사람이어도 요리사라면 내장 손질 정도는 해왔을 수도 있다. 그래도 정형까지 해보진 못했을 거다. 칼을 들고 고기를 분해하는 그 모습을 보면 분명….
‘뭘 저리 좋아해?’
예상외로, 프란체스코가 반으로 가른 돼지를 들고 나타나자, 마크의 얼굴에 광채와 비슷한 빛이 감돌았다.
“바쁘니까 나 하는 걸 보고 따라 해. 실수하면 안 되니까. 정확히 여덟 부위로 나눌 거야.”
끄덕. 끄덕.
프란체스코의 손은 거침없이 움직였고, 마크는 진중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바로 칼을 집어 들었다.
‘칼질 한 번만 시키고 바로 빼앗아야지.’
마리오는 마크 옆에서 대기했다.
아무리 옆에서 시범을 보여준다고 해도, 첫 시도에 정형을 성공할 리 없다. 정육점에서 자라온 프란체스코조차, 처음에는 실수했으니까.
그 이유는 하나.
힘으로 고기를 분리하려 하니까.
인간이란, 날붙이만 들면 그거로 돼지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도축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각 살코기의 근육 부위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깨닫고 그 이음새를 공략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저렇게 할 수 있나?’
마크는 정확하게 살점의 이음새에 칼날을 넣고 있었다. 근육이 손상되지 않게 하얀 껍질 부위에만 칼집을 내고, 손으로 살점을 붙잡고 조심스레 힘을 주어 떼어내고 있었다. 살코기가 손상되지 않도록.
“자네, 이걸 해본 적이 있나?”
“아니요. 제대로 한 게 맞나요?”
“…… 그런대로 쓸만하긴 하네. 비실비실한 놈치고는.”
딱히 흠을 잡을 데는 없지만, 그렇다고 칭찬까지 해줄 수는 없다.
“톱 같은 도구가 없으니까 단면을 절단하진 않네요. 근육 원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분리하는군요.”
마크는 중얼거리듯이 혼잣말 같은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곧이어 염지 작업을 할 때는 열정적인 학생처럼 질문이 쏟아졌다.
“다리는 왜 뼈를 안 발라내나요? 뼈가 없으면 더 빨리 건조될 것 같은데.”
“여기는 노치아에서 너무 멀거든.”
“네?”
“뼈를 따로 빼내면 빈 공간이 생겨서 그 안에 검은 먼지가 묻어. 우리가 가까이 있으면 그것도 다 잡아줄 테지만, 농부들이 다룰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검은 먼지는 위험하니까.”
“그러면 목살은요? 조금 더 잘게 썰어도 될 것 같은데.”
“저 안에는 지방선이 기가 막히게 박혀 있거든. 정확하게 살코기를 사 등분하고 있어서 그대로 살리는 게 더 좋아.”
귀찮을 법도 하지만, 이상하게 이 질문이 싫지가 않았다. 돼지의 대단함, 살루미에 담긴 수많은 지혜는 마리오가 가장 좋아하는 단골 주제이니까.
“정말… 대단하네요.”
알고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크의 반응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근성도 있네.’
염지한 고기를 꺼내서 와인으로 소금기를 씻어내고. 라드(lard)와 밀가루를 섞어 살코기 표면에 바르고. 어깨 부위는 돼지의 방광을 늘려 스타킹처럼 씌우고 밧줄로 꽁꽁 묶어둔다.
이 모든 작업은 생각 이상으로 체력이 소모되는 작업이다. 슬슬 싫은 소리가 나올 만도 한데…… 마크는 얼굴에 구슬땀이 잔뜩 맺혀 있으면서도 불평 하나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마리오는 저도 모르게 와인을 건넸다.
“일할 때는 의식적으로 자주 마셔줘야 해. 아니면 어느 한순간에 힘이 쫙 빠지거든. 몸에 물이 빠지면 안 되니까.”
“감사합니다.”
“보통 때 같으면 이쯤에 마을 사람들이 뭔가 요깃거리라도 들고 와 주는데, 오늘은 바빠서 못 오나 보군.”
꼬르륵.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민망한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마크의 표정을 보니 분명 들은 거다.
“제가 뭐라도 만들어오죠. 이래 봬도 요리사니까요.”
“그래, 부탁하네.”
“아, 나도 도울게!”
갑자기 발렌티나가 벌떡 일어서며 마크를 따라나서자, 모처럼 풀어진 기분이 다시 쭈글쭈글 뭉쳐왔다.
“너는 왜?”
“왜 그래? 내가 항상 만들잖아! 저놈은 재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테고.”
그건 그렇긴 하지만.
“농땡이 피우지 말고. 똑바로 만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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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네.’
한길은 마리오 일행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도축 단계부터 돼지 한 마리를 최대한 알뜰하게 사용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이건 살라미 만들 때 써야 하거든. 부산물이랑 자투리 고기만 쓰면 살라미가 맛이 없어지니까.”
살코기는 구이로 먹는 부위, 스튜를 만들 때 육수를 내는 부위, 소시지로 만들 부위, 햄으로 만들 부위. 돼지의 지방도 라르도로 만들 지방, 요리할 때 쓸 지방, 살라미에 쓸 지방으로 나뉜다.
정말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도록 돼지를 완벽하게 분해하고 있었다.
‘알뜰한 요리구나.’
현대에서는 샤퀴테리나 살라미, 하몽이 귀한 음식 대접을 받지만. 이렇게 만드는 과정을 보니 참 서민적인 음식이었다.
냉장고가 없는 시절이니 돼지 한 마리를 잡으면 최대한 오래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태어난 요리다.
겨울철을 맞이할 때마다 준비하는 과정은, 어딘가 한국의 김장을 떠올리게 했다. 배추 대신 돼지를 사용하지만, 염지를 하고 양념을 해서 발효시키는 과정도 비슷하다.
‘어떻게 아는 걸까?’
특히나 마리오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놀라움을 넘어서 믿을 수가 없었다. 마리오는 염지 된 고기의 향만 맡고도 수분이 충분히 빠져나갔는지 가늠하고 있었고, 적절한 지방층의 두께도 손끝으로 느껴서 결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검은 먼지는 위험하니까.”
과학 지식이 없음에도, 위험한 세균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살루미는 날것 그대로의 고기를 발효하는 과정. 이때, 고기 표면에 잘못된 박테리아가 자리 잡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녹색이나 노란색이나 털 난 먼지가 붙으면 식초로 씻어내.”
세균이나 박테리아, 미생물에 대한 과학적 지식 없이도 마리오는 알고 있었다. 이 표면에 좋은 박테리아가 선점해야 올바른 발효가 된다는 것을.
그야, 당연히 이걸 업으로 삼으니 알긴 알 테지만, 막상 옆에서 지켜보니 이상하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작업하는 내내 그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자부심. 그건 한길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꼬르륵.
마리오의 배꼽시계가 울리자, 열심히 공부만 하던 한길도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요리사가 동행하고 있는데, 일행을 굶길 수는 없다.
“제가 뭐든 만들어 오겠습니다.”
“나도 도울게!”
“농땡이 피우지 말고!”
발렌티나가 한길을 따라오자, 마리오의 시선이 다시 싸늘하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 미안. 우리 오빠가 과보호가 너무 심해서. 하여간, 내 주위에 남자만 있으면 저 난리라니까?”
발렌티나는 주방에 들어가자마자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를 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걱정되시는 거겠죠.”
“걱정도 적당히 해야지. 저번에 한번은 10살짜리 꼬마가 왔는데도 걔한테 소리 지르는데, 에휴, 창피해서 정말.”
“아끼시는 거니까요.”
“난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몇 번이나 말하는데도. 저 골칫덩이들을 두고 내가 어딜 가겠냐고. 생긴 것만 도적같이 생겨서 마음은 또 여려. 내가 가게에 없으면 외상으로 건네줄 때도 한두 번이 아니고. 저런 인간들을 두고 가긴 어딜 가?”
발렌티나도 나름 불만이 쌓인 듯했지만, 이대로 들어주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걸로 뭘 만드시려고요?”
한길은 발렌티나가 들고 온 버킷을 가리키며 주제를 바꿨다.
“아, 그냥 간단하게 파스타.”
“그걸 쓰는 건가요?”
“어, 돼지 피는 오래 못 두니까. 도축하는 날에만 먹을 수 있는 파스타가 있거든. 마크도 이건 안 먹어봤을 걸?”
발렌티나는 익숙한 손길로 파스타를 만들기 시작했다.
밀가루와 호밀가루를 섞어 작은 동산을 만들고, 화산의 분화구처럼 그 가운데를 움푹 판다. 그 안에 계란을 깨서 넣고, 도축할 때 따로 빼놓은 돼지 피를 넣고 섞는다.
완성된 반죽은 비트 물을 들인 것처럼 짙은 붉은색. 그걸 한번 가볍게 숙성시키고, 밀대로 밀어낸 후, 겹쳐서 칼국수를 썰 듯이 두껍게 썬다. 손가락 두 개 굵기만큼 넓적하게.
“요리 잘하시는데요?”
“그래 봐야 한두 개지. 제대로 배운 게 없으니까. 엄마한테 배운 건 이게 다거든.”
발렌티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양파와 올리브유, 그리고 가져온 살루미를 활용한 간단한 소스다.
그 사이, 한길도 재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재료가 별로 없네.’
궁중의 주방과 달리,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많지 않았다. 그래 봐야 밀가루, 계란, 살루미 몇 종류. 그리고 오늘 일하는 대가로 농부의 밭에 있는 채소를 조금 써도 된다고 했다.
한길이 고심 끝에 필요한 준비물을 갖고 오자, 발렌티나가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다가왔다.
“뭘 만들려고?”
“피자요.”
“피자? 그게 뭔데?”
“빵 위에 토핑을 올리고 먹는 음식이에요.”
“뭐야, 그건 영국 음식이야?”
“아니, 그냥 어디서 들은 겁니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피자를 설명하는 기분도 묘했다.
한길은 우선 밀가루와 올리브유, 그리고 농부네 주방에 있는 발효종을 섞어 작은 책 크기의, 네모난 반죽을 만들었다. 그 위에 소스를 올려야 하지만,
‘토마토가 없으니까. 그것도 아쉽네.’
신세계를 통해 이 시대에도 토마토가 있었지만, 아직은 대중적으로 먹는 음식은 아닌지, 농부의 밭에는 없었다.
그래서 토마토소스가 없어도 만들 수 있는 피자를 만들기로 했다.
언젠가 요리 잡지에서 읽어본 적 있는 이탈리아의 하얀 피자. 피자 바앙카 (pizza bianca)다.
“발렌티나, 돼지 뱃살 쪽 살루미도 있나요?”
“판체타(pancetta)? 잠시만!”
판체타는 삼겹살로 만든 살루미다.
그냥 구워도 맛있는 부위인데, 발효까지 해서 깊이가 더해진 판체타의 맛은 말할 것도 없다.
탕탕탕!
판체타를 작은 조각으로 썰고 도우 위에 흩뿌린 후, 한번 구워냈다.
오븐이 없어 이곳 농부들이 하는 방식대로, 커다란 뚜껑을 덮는 임시 오븐을 사용해야 해서 조금 불안했지만, 걱정과 달리 도우는 타지 않았다.
지글지글.
베이컨이 열기를 만나며 구수한 기름을 뿜어냈고, 그 기름은 도우 반죽 위에서 끓고 있었다. 이 돼지기름이 소스를 대신한다.
그 위에 모차렐라와 유사한 부드러운 치즈를 뿌려주고 다시 굽는다.
가장자리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도우.
그 위를 하얗게 녹아내릴 치즈가 덮고 있다. 하얀 치즈 호수의 중간중간에 연한 갈색과 핑크색을 머금은 판체타가 섬처럼 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밭에서 따온 루콜라를 수북하게 올려주고, 그 위에 파르메산 같은 딱딱한 치즈를 잘게 썰어 올려주었다.
“냄새 죽이는데?”
발렌티나의 말대로.
잘 구운 도우에서 나는 밀가루의 고소한 향.
녹아내린 치즈만이 낼 수 있는 꽉찬 구수한 향. 그리고 치명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판체타의 기름진 향이 한데 섞여서 허기진 배를 더욱 괴롭혔다.
“빨리 가자! 빨리! 오빠들도 배고픈 것 같으니까.”
발렌티나는 서둘러 파스타를 커다란 그릇에 옮긴 후, 요리를 들고 주방을 나섰다.
말로는 오빠들을 챙긴다고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적시고 있다. 눈은 피자에 고정되어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