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26)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26화(126/325)
126. 천연기념물의 맛
‘어떻게 바다에서 저런 색이 나지?”
광고에서나 볼법한 푸른 바다. 노랗게 물든 유채꽃과 제주의 상징, 돌담까지···. 처음으로 보는 제주도의 풍경에 절로 마음이 들떠 올랐지만,
‘이러면 안 되지. 놀러 온 건 아니니까.’
한길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은 놀러 온 게 아니다. 재료를 찾기 위한 출장을 온 거지.
로마에서 아피키우스는 주방에 묶여 있지 않았다. 중요한 요리는 직접 지휘하고, 상에 올라가는 메뉴를 모두 점검하긴 했지만, 한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하는 일도 있었다.
율리어스 카이사르가 마셨다는 와인, 클레오파트라가 즐겨 먹었다던 사해의 대추, 유난히 통통하게 물이 오른 거로 유명한 리비아의 새우, 아라비아 왕족이 직접 키웠다는 낙타.
최고의 이야기가 담긴 최상품의 재료를 구해왔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 역할을 할 차례고.
‘지금 쓰는 고기도 나쁘지는 않지만···.’
망가리짜를 비롯해 살루미 장인들이 추천하는 헤리티지 돼지고기를 수입해 사용했고. 모두 품질도 좋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너무 비싸다.
양질의 재료를 위해 지불하는 돈은 아깝지 않지만, 거액의 운송비와 수수로는 다르다. 국내에서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있다면, 대체하는 게 좋다.
국내에서 가장 기름지기로 알려진 돼지는 제주 흑돼지. 등 지방 두께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제주 흑돼지는 특유의 탱탱한 육질과 쫀득한 오겹살로 유명하다. 그래서 납품처를 찾고 있던 와중,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제주 흑돼지는 토종 흑돼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국내에 판매되는 제주 흑돼지는 대부분 토종 돼지와 서양 품종인 두록(Duroc)의 교배종. 즉, 혼혈이었다.
그 이유는 경제성.
제주 토종 흑돼지는 몸집이 작아 도축 가능한 크기까지 자라는데 240일 이상이 걸렸고, 몸무게도 80킬로밖에 되지 않는다. 그에 비해, 혼혈종은 180일이면 도축할 수 있고, 무게도 120킬로다.
경제성이 떨어지는 토종 흑돼지는 키우는 사람이 없어져 멸종 직전까지 갔지만, 제주 축산원에서 섬마을을 돌며 마지막으로 남은 다섯 마리를 구해 간신히 멸종을 면했다고 한다.
그 후로 제주 흑돼지는 천연기념물 550호로 지정되었으며, 축산원에서 200마리 넘는 개체 수가 사육되고 있다.
하지만 멸종 위기를 벗어나려면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많은 농원이 알아서 키우면 그 수가 절로 늘어나겠지만, 축산원에서 분양해도 토종 돼지를 사육하는 농원은 많지 않았다.
경제성은 여전히 큰 걸림돌이니까.
굳이 같은 수고를 들여가며 수익이 나지 않는 돼지를 키울 필요는 없는 거다.
한길의 목적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제주의 토종 돼지를 사육하고 판매까지 하는 농원이었다. 직접 방목해서 키우는 돼지를 농원 한쪽에 있는 식당에서 맛볼 수 있는 시스템이다.
즉, 천연기념물을 직접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식당이었다.
‘설득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레스토랑에 소량으로 납품 가능할까 싶어 연락을 해봤지만, 퉁명스러운 답만 돌아왔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면 직접 와서 보던가! 보지도 않고 뭔 소리야?
농원 사장은 고함을 지르며 전화를 뚝 끊었었다. 그래서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며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거다. 그 김에 직접 돼지를 보고, 살루미에 적합한지 확인도 할 생각이었다.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킨 곳은 돌담이 성벽처럼 세워진 곳이었다. 성벽 내부로 들어가니, 제주 특유의 초원 풍경과 소박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앞에는 짐을 옮기는 노인이 있었다.
어딘가 산타클로스를 연상시키는 외모의 노인이었다. 아랫배가 볼록하게 튀어 나와 있고, 머리는 희끗희끗한 은발이다. 특이하게도 턱수염이 산적처럼 복슬복슬하게 나 있었다. 나이는 대략 70대로 보였지만, 피부는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고, 정정해 보였다.
“뭐야, 잘못 들어왔어? 지금 장사 안 해!”
“어제 연락드린 이한길입니다.”
“뭔 길?”
“돼지고기 납품이 가능한지 전화 드렸었는데요.”
“뭐야, 진짜 왔네?”
한길을 보자마자 대뜸 소리부터 지르길래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노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밥은 먹었나?”
“아니요.”
“뭣하는데 이제껏 밥도 안 먹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어여 들어와! 안 그래도 뭐 좀 주워 먹으려 했으니까.”
노인이 무심하게 고갯짓으로 가리킨 건물은 농원 내에 있는 식당이었다. 테이블마다 숯이 들어가도록 세팅된, 평범한 고깃집이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메뉴판은 없었다. 이곳에서는 고기 부위를 선택할 수 없으니까.
알아본 바에 의하면, 농원 내에서 약 백 마리의 돼지를 키우고 있었고, 일주일에 한 마리만 도축한다고 했다. 도축한 고기를 모두 먹어야 다음 돼지를 먹을 수 있으니 먹고 싶은 부위만 골라 먹을 수 없다.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앉아 있어!”
“도와드릴 건 없나요?”
“돕긴 뭘 도와! 손님인데!”
“그러면 구경해도 될까요?”
“보고 싶다는데 내가 어찌 막아?”
이쯤 되면 알 수 있었다.
노인은 화가 난 게 아니라, 말투 자체가 윽박지르는 말투다.
노인은 바로 냉장고에서 커다란 덩어리를 꺼냈다. 진공 비닐 안에 웻에이징으로 숙성시킨 돼지고기다. 비닐 팩을 벗겨내고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자,
“와!”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돼지고기는 진한 붉은 색이었다. 자줏빛에 가까운 붉은 색은, 말고기와도 흡사했다.
일반 마트에서 진열된 돼지고기는, 창백한 분홍색이다. 가끔 표면에 투명한 우윳빛 막을 씌어놓은 것같이 빛날 때도 있는데, 육질 내에 수분이 많아서 그렇다.
그에 반해, 지금 들고 있는 고기는 너무나 생생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밍밍한 수분 대신, 고기 자체의 맛을 꾹꾹 눌러 담았다는 뜻이다.
“때깔 죽이지?”
“네, 정말 진하네요.”
“이건, 생으로 먹어도 맛있다니까.”
노인은 한길의 반응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지금껏 사납기만 하던 표정이 누그러지며 흐뭇한 얼굴로 작은 살점을 하나 썰어 주었으니까.
돼지고기를 육회로 먹은 적은 없지만, 모처럼 건네준 조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손가락 사이에 있는 고기는 돼지고기로 느껴지지도 않았고.
진한 붉은 색은 마치 소고기 같았으며, 손에 저항하듯이 느껴지는 탄력에서 신선함이 묻어나왔다.
“···!”
그리고 그 맛은 상상을 초월했다.
쫀쫀하게 엮인 육질이 입안에서 기분 좋게 씹혔다. 이빨에 갈릴 때마다 은근한 단맛이 터져 나왔다.
“달달한데요?”
“그렇지? 이게 그 근지··· 뭐였더라?”
“근내지방도요?”
“맞아, 그게 일반 돼지 3배라더라. 뭔가 배우신 양반이 말하고 갔었는데. 그게 뭔가?”
“근육 안에 박혀있는 지방 비율이요. 마블링처럼 살코기 안에 기름이 많이, 고루 분포될수록 부드럽고 맛있거든요.”
“그렇지! 이놈들이 정말 살이 통통하게 올랐거든!”
“색도 정말 진하네요. 몇 개월 된 거예요?”
“이건 180일. 오래 키울수록 색이 짙어지더구먼.”
“아마 헤모글로빈 수치가 높아서 그런 거예요.”
“헤모, 뭐?”
“동물이 운동을 많이 하면 생기는 단백질인데, 붉은색이거든요.”
“요놈들이 좀 많이 뛰어다니긴 하지. 게으른 놈이 없거든!”
노인은 돼지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어깨를 활짝 폈다. 명문대에 들어간 자식 자랑을 하는 부모 같은 모습이었다.
“그거, 참. 젊은 총각이 모르는 게 없구먼!”
노인은 익숙한 손길로 고기를 슴벙슴벙 썰어서 접시에 담은 후, 한길을 끌고 가 테이블 자리에 앉혔다.
“저도 돕겠습니다!”
“뭘! 손님이! 앉아 있어!”
성을 내듯 으르렁거리는 노인은, 잠시 후 숯을 들고 와 테이블에 올렸다.
“이건 구워야 먹어야 제대로 맛이 느껴지거든!”
불판에 열기가 느껴지자마자 손바닥 크기의 살점이 올려졌다.
치이이익!
고기의 색도, 그 안에 혈관처럼 뻗어있는 마블링도. 아무리 봐도 소고기 같다.
하지만 소고기가 아닌 건 알고 있다. 돼지고기 특유의 두툼한 지방이 살코기를 에워싸고 있으니까. 지방은 연한 분홍빛이 아닌, 깨끗한 순백이었다.
“혹시 이 지방에 몇 도에 녹는지 아세요?”
“몇도?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노인은 녹는 점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제법 낮은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는데도, 이미 살코기 주위에 기름이 빠져나와 지글지글 끓기 시작했으니까.
탁한 기운 없이 투명한 기름은 굉장히 맑았다. 그리고,
“···!”
엄청난 향이 코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좋은 고기를 구울 때는 냄새로 먼저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잡내나 누린내가 나는 고기는, 구우면 기름이 그 누린내를 배로 증폭시키니까.
그런데 지금 맡아지는 이 기름 향은 굉장히 진하면서도 구수하고 깔끔했다.
“냄새부터 다르네요.”
“그렇지? 눈 감으면 그, 치즈 같다니까.”
눈을 감고 향에 집중하니, 정말 치즈 같기도 하고. 버터 같기도 했다.
기름진 향이지만 거북함은 없다.
침샘을 자극하는 농밀한 향.
“한번 맛 봐.”
노인은 노릇노릇, 튀기듯이 표면이 익혀진 고기 한 점을 한길의 그릇에 올려주었다. 원래라면 같이 먹자고 하거나 기다려야 했지만, 당장 이 고기를 씹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아···.”
맛은 예상을 배신하지 않았다.
우선은 식감. 오도독거린다고 할 정도로 쫀득하게 씹혔다. 기분 좋은 탄력은 어딘가 박력이 넘쳤지만, 전혀 질기지는 않았다.
씹을 때마다 감칠맛이 넘치는 육즙이 터져나와 눈이 절로 감겼다.
육즙이 소고기 육즙 같았다. 레어로 먹을 때의 과한 철분 향도 아니고, 미디엄으로 먹을 때의 밍밍한 육즙도 아니고. 딱 미디엄 레어로 구웠을 때 느껴지는 그 희미한 피 맛과 감칠맛, 단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육즙은 주르륵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입안에서 팡팡 터졌다. 마치 육즙 풍선을 바늘로 찔러 터트린 것처럼.
이전에 먹었던 제주 흑돼지의 지방은 약간 질기다고 느껴질 정도로 질겅거렸는데. 희한하게도, 지금 이 고기는 지방이 훨씬 두꺼운데도 탄력 있게 터지며 녹아내렸다.
육즙 폭탄은 청량감 있는 단맛을, 살코기는 감칠맛을, 지방은 견과류 같은 고소함을 주었다.
“맛있지?”
눈을 떠보니 노인은 한길의 표정을 열심히 관찰하며 씨익 웃고 있었다.
“맛있다는 말로는 부족한데요. 제가 살면서 먹어본 돼지고기 중 최고입니다.”
“그렇지? 요놈은 기름까지 맛있다니까!”
“이렇게 깔끔한 기름 맛은 처음이에요. 맛은 엄청 농밀한데, 개운하거든요.”
“맞아, 맞아. 난 이걸 돼지 주스라고 부른다니까?”
“정말 주스 같네요. 사료를 따로 먹이나요?”
“아니, 그냥 원래 사료 먹이고. 지들끼리 뛰어다니면서 풀도 뜯어 먹고 그러는데, 이건 그냥 돼지가 좋아서 그런 거야.”
“과장이 아니라, 제가 돼지고기를 품종별로 마흔 개 넘게 먹어봤는데, 이렇게 감동적인 맛은 처음입니다.”
“그래? 뭣하느라 마흔 개나 먹어봤는데?”
“레스토랑에 사용할 고기를 찾느라고요.”
“레스토랑?”
“아!”
그러고 보니.
돼지고기에 빠져 있어 여기에 온 이유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미리 설득하기 위해 준비해둔 말도 있었지만, 충격에 가까운 돼지고기의 맛이 머릿속을 깨끗이 지워버려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
갖고 싶다.
깊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입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어르신, 저한테도 한 마리만 주십시오.”
노인이 씨익 웃자, 입술 사이로 금니가 반짝였다.
“한 마리로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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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귀엽지?”
식사를 마치고 축사부터 구경시켜주겠다며 한길을 끌고 온 노인은, 자신을 장광길이라고 소개했다.
원래 제주 출신으로, 뭍에서 평생 일하다 고향으로 내려온 지 이제 3년 차라고 했다.
“내가 어릴 때는 이놈들을 정말 많이 키웠거든? 그, 뭐라 부르나? 아, 애완동물이었는데, 요즘은 그때 돼지를 보기 힘들어.”
노인은 안타까운 사고로 가족을 잃고, 지금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로 다시 돌아와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이 돼지는 가족이었다. 지나가는 돼지 한마리 한마리,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는 게, 손자를 대하는 것처럼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이렇게 아끼는데 그···.”
“뭐?”
“잡아먹으면 슬프지 않으세요?”
“뭔 헛소리야? 돼지를 키웠으면 잡아먹어야지. 우리 때는 다 그랬어. 좋은 삶 살고, 좋게 죽고, 죽고 나면 헛죽음 되지 않게 아껴주면 되는 거지. 이놈들도 다 안다니까? 얼마나 똘똘한데!”
한길에게는 낯선 태도였지만, 퀘스트 속에서 만난 농부들도 비슷한 태도를 취했었다. 하나같이 자신이 키우는 가축을 아꼈지만, 도축하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미안함보다는 감사함을 느꼈었다.
“봐봐, 잘 생기지 않았나?”
노인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들어 올리며 자랑까지 하기 시작했다.
제주 토종 흑돼지는 제법 야무지게 생겼었다. 삼각김밥 모양의 귀를 쫑긋 세운 모습이 어떻게 보면 도베르만 같기도 했고.
게다가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길이 등장하자 호기심 넘치는 돼지들이 우르르 다가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자네가 마음에 드나 보네.”
노인은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축사 다음으로 간 곳은 별도의 대형 창고. 도축한 돼지를 걸어두고 일차 숙성을 시키는 곳이었다.
노인은 반으로 절단된 통돼지 하나를 끌고 왔다. 한길이 돕겠다고 말하자 다시 한번 윽박 질렀고.
“그래서, 뭘 어떻게 잘라야 한다고?”
“여덟 개 부위인데요. 우선은 여섯 번째 갈빗대를 찾아서···.”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비디오도 찍드만. 찍어주면 안 되나? 내가 기억력이 별로 안 좋아서.”
“스마트폰도 쓰세요?”
“그럼, 나이 들었다고 못 쓸까.”
노인은 흔쾌히 한길에게 정기적으로 돼지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직접 도축까지 한 상태로. 별다른 설득을 할 필요도 없이, 아껴서 잘 쓰라는 말만 했다.
“눈빛만 보면 알거든. 제대로 아껴주면 되는 거지.”
“물론 값은 다 챙겨드리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서울에 가서도 이게 어디서 난 건지 소문 좀 내고 다니고.”
“물론이죠.”
최대한 이 맛을 알리고 싶었다.
이 맛을 알게 된다면, 더 많은 사람이 비싼 값을 내서라도 토종 돼지를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더 많은 농원에서 이 돼지를 키울 테고.
노인이 익숙한 손길로 돼지를 가르며 한 토막을 내려놓자, 한길은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왜?”
“등 지방이 두껍네요.”
망가리짜 만큼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본 그 어떤 돼지보다 지방이 두꺼웠다. 저 정도면 라르도를 만드는 데 부족함은 없다.
감격에 말을 잇지 못하는 한길을, 노인은 오해한 모양이었다.
“신경 쓰지 마, 지방은 손질하면 되거든. 이놈들이 원체 지방이 많아서 그래. 그나마 180일 키워서 이 정도거든.”
“네? 그게 무슨 뜻이죠?”
“어디 무슨 연구원 선생은 240일 키워야 맛이 제일 좋다고 하는데, 나는 180일에 잡아버리거든. 너무 자라면 지방이 해도 해도 너무 두꺼워져서. 아니, 자네, 왜 갑자기 그리 웃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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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은 잘 다녀오셨나요?”
“네.”
“성공하셨나 보네요?”
“그렇게 티 나나요?”
“그러면, 그게 숨기려는 표정입니까?”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얼굴 근육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최셰프도 직접 보시면 놀랄 겁니다. 망가리짜에 버금가는, 어쩌면 더 두꺼운 등 지방이더라고요. 그리고 육즙도, 살코기도 정말, 이건 직접 먹어봐야 합니다. 말로는 설명이 안 돼요.”
“그거 기대되는데요?”
“게다가, 등 지방만 따로 보내주신다고 하셨어요.”
노인은 3주에 한 마리, 240일 동안 키운 돼지를 한길에게 보내주기로 했다. 게다가 매주 도축하는 돼지의 등 지방까지도 정기적으로 보내주겠다고 했고.
– 버리지 않고 써주면 고맙지!
라는 말을 했었다.
“너무 많으면 레스토랑에서 다 소비가 안 될 수도 있을 텐데요? 라르도는 아직 익숙지 않은 요리라.”
“잘 팔아봐야죠. 그리고 가능하면 어르신께도 맛보라고 보내드리고요.”
나중에 가장 맛있는 살라미를 모둠으로 모아서 선물로 보내주고 싶었다.
그 노인이라면 좋아할 거다. 자신이 키운 돼지에서 이런 맛있는 요리가 나왔다며 손님들에게 자랑할 수도 있다. 기왕이면 방문하는 손님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히 주면 더 좋고.
‘오래 하셨으면 좋겠으니까.’
노인은 장사를 위해 돼지를 키우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끔은 손님이 너무 없어 고민 중이라는 말도 했었다.
돈을 보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손해 보는 건 다르다. 어떻게든 계속 농원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동정심이 아니라, 그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최셰프, 제주 흑돼지에게 도토리를 먹으면 이베리코처럼 견과류 향이 날까요?”
“글쎄요? 견과류 향은 먹는 사료의 영향도 있지만, 유전자 때문도 있어서.”
“사료용으로 쓸 도토리는 가격이 얼마나 할까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먹이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면, 사룟값을 지원하고 다양한 맛의 돼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주방에 오기 전, 돼지가 살아있는 단계부터 맛을 설계할 수 있는 거다.
앞으로도 시도해 보고 싶은 일은 많았지만···.
“오늘 실장님이 연락 왔는데, 타일을 시트지로 안 하고 일일이 붙이면 사흘 정도 더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 그렇게 하죠.”
“그리고 프라이빗 룸은 조명을 따로 선을 빼야 한다고 하는데···.”
지금은 눈앞의 일을 해결해야 한다.
일단 살루미를 만들 최상의 재료는 구했다.
2호점의 공사는 진행 중이고, 주방에 설 요리사들도 뽑았다. 오스피탈리타 이탈리아나의 조건에 부합할 헤드 셰프는 아직 알아보는 중이었고.
그 외에도 할 일은 많았다.
“오스피탈리타 이탈리아나는 역시 까다롭네요. 와인이랑 이탈리아어까지 요구할 줄이야···.”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레스토랑에서 판매되는 와인의 30%가 이탈리안 와인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리고 홀을 담당하는 직원 중, 적어도 한 명은 능숙하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하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평을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첫 번째 가게인 한스키친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가게 문을 열어서 문을 닫기 직전까지 갔었다.
두 번째로 오픈한 고르메 키친은, 대로변에 레스토랑을 세우는 데에만 열중하느라 너무 서둘렀었다. 그래서 명확한 컨셉을 잡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 번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제대로, 명확한 컨셉을 갖고 정통 이탈리안 요리를 선보일 거다. 그런 면에서, 오스피탈리타 이탈리아나의 까다로운 조건은 도움이 되었다.
“이 가이드라인은, 이탈리아 본토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이탈리아 요리의 필수 요소를 알려주는 거니까요.”
“그렇긴 하죠.”
“이탈리아어를 하는 직원이라. 무조건 이탈리아인일 필요는 없는 거겠죠?”
“네,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도 구해보고, 와인은···,”
“데니에게는 이미 연락해두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뭐, 항상 하던 대로 했죠.”
“그렇다면···.”
“네, 지나가는 길이라고 들른다네요. 아마 20분 내로 도착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