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27)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27화(127/325)
127. 할게요!
“이탈리안 와인이요? 요리는 뭐죠?”
“아직 메뉴가 정해진 건 아니고.”
“으··· 그래요? 요리가 중요한데.”
데니는 생일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눈을 빛내더니,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 뜯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대 위에 선 듯한 과장된 몸짓에, 한길의 입에서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요?”
“아니,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
“누구요?”
“그냥 친구.”
“잘 생겼어요?”
“잘 생기긴 했는데.”
“그럼 됐어요.”
외모가 닮은 건 아닌데···.
묘하게 퀘스트 속 프란체스코와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이번에는 데니가 무언극을 하듯, 손을 크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게, 프랑스에서는 와인 페어링을 마리아주(marriage)라고 하잖아요? 뭔가 부부 같은 궁합이라면, 이탈리아는 엄마와 아들 같거든요.”
“엄마와 아들?”
“아, 이탈리아 어머니들 보신 적 없으시려나? 자식이 성인이 되어도 허리에 탯줄을 꽁꽁 감고 다니는 분들인데. 하여튼, 그런 느낌이 있어요. 처음부터 둘이 한 몸이었다가 강제로 떼어낸 것 같은? 이탈리안 와인은 그냥 먹으면 너무 강렬하거나 산미가 지나친 것 같은데, 이게 또 요리랑 먹으면 풍미가 확 달라지거든요. 혹시 예산이 정해져 있나요? 지금 레스토랑 와인 리스트를 봐도 될까요?”
최셰프가 1호점의 와인 리스트를 건네주자, 데니의 눈빛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굉장히···. 정석적이네요.”
그다지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이런 느낌이라면 바롤로(Barolo) 하나 넣어줘도 되죠. 와인의 왕이라고 불리는데, 향이 정말 미쳤거든요. 장미 향 같은 것도 나고, 체리 소스 같기도 하고. 산도가 높긴 한데, 그래서 기름진 음식이랑 잘 어울려요. 한입 먹을 때마다 와인향이 나는 녹차 티백을 입에 넣고 혓바닥을 긁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개운하고요. 이게 네비올로 포도를 사용하는데 네비아가 이탈리아어로 안개라는 뜻이거든요. 그 안개···.”
“이탈리아어?”
“네, 네비올로가 안개 낀 고지대에서만 수확되는데 ···.”
“데니, 이탈리아어 할 줄 알아?”
“네, 워홀로 잠시 갔다 왔었거든요. 원어민 수준은 아니지만, 연애할 정도는 되죠.”
기준이 뭔가 이상한데···.
아니, 그것보다.
고개를 돌리자, 최셰프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피탈리타 이탈리아나의 필수 조건.
와인 리스트의 30%를 이탈리안 와인으로 구성할 것. 그리고 이탈리아어에 능숙한 직원이 상주하고 있을 것.
데니를 고용하면 한 번에 두 조건을 모두 만족할 수 있다.
“그래서, 요리는 언제 정해져요?”
“다음 주나 다다음 주?”
“뭐야, 아직 멀었네요? 그럼 왜 부른 거예요?”
“앞으로 2호점에서 상주할 소믈리에를 찾고 있거든.”
굳이 이탈리아어가 아니었어도, 상주하는 소믈리에를 찾는 참이었다. 이탈리아 와인은 어려웠으니까.
1호점의 와인 메뉴는 대부분 프랑스 와인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와인의 경우, 완벽하지는 않아도 적당히 공부해서 리스트를 만들 수 있었다.
프랑스 와인은 대부분 와인에 가장 적합한 여섯 개의 ‘노블 버라이어니’ 포도 품종을 사용했으니까. 피노 느와(Pinot Noir), 메를로(Merlot),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샤르도네(Chardonnay) 등의 품종을 썼다. 지역마다 토양이나 제조법에 따라 맛이 다르긴 했지만, 어느 정도 품종마다 나오는 맛이 있으니 공부할 시작점이 있었다.
반면, 이탈리아 와인은 다양성이 특징이었다. 이탈리아반도에 재배되는 포도 품종은 2천 개가 넘는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다.
“전 상주는 안 하는데···.”
좋아할 줄 알았던 데니는, 예상외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제가 단발성 프로젝트로는 좋아도 직원으로는 별로거든요. 괜히 형이랑 관계만 틀어질 것 같고.”
“왜?”
“예전에도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일해본 적이 있는데···. 이게··· 막상 상주하다 보면 페어링이 아니라 영업을 해야 하더라고요. 맛의 조화보다는 재고를 신경 써야 하고. 제가 워낙 특이한 조합을 좋아하다 보니 MD가 잡지에서 뽑아온 와인 리스트 같은 거에 괜히 반발심 생기고 그래서요.”
“만약에 머천다이징도 같이 맡긴다면?”
한길의 말에 데니의 모든 동작이 멈췄다.
“제가 와인을 골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되겠지?”
“그러니까, 손님에게 권하는 와인이 아니라 와인 창고 안에 넣을 와인을 골라도 된다고요?”
“그러려고 상주 소믈리에를 찾는 거니까. 이탈리아 지역 요리가 컨셉이니까 그 지역에서 난 와인을 골라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그 외에는 전적으로 맡기려고 하거든.”
“할게요! 아··· 그런데···.”
데니는 뒤늦게 무언가 생각났는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쉬는 날이 언제였죠?”
“월요일.”
“흠···. 일주일에 한 번만 일찍 퇴근할 수는 없을까요?”
“고정으로?”
“제가 화요일 저녁마다 탱고 모임이 있거든요.”
“탱고?”
“왜요?”
“아니···.”
너무 잘 어울려서··· 라는 말을 하면 왠지 실례일 것 같았다.
한길이 잠시 단어를 찾기 위해 망설이는 모습이 못 미더워하는 표정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데니가 갑자기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래도 일은 열심히 해요! 나름 웨이팅 경력도 있었고요.”
“그래.”
“못 믿겠으면 직접 보세요! 오늘 저녁, 장사하시죠? 한번 보여드리죠!”
#
‘역시···.’
한길은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데니의 서비스는 데니스러웠다.
“두 숙녀분, 뭐로 하시겠어요?”
“토마토 타르타르 하나랑 해물 스튜, 그리고 오리 스테이크 하나요.”
“와인은 안 하세요? 홍합에 상쾌한 로제가 생각보다 잘 어울리거든요. 아름다운 두 떨기 장미를 위한 장미 한 병, 어떤가요?”
“크크, 뭐에요, 그게.”
혈관에 버터가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느끼함. 그런 독특함을 즐기는 손님도 있었지만, 불편해하는 손님도 있었다.
“사장님, 함박에 쉬라즈는 어떠신가요? 짐승남 같은 와인이라, 이 스파이시함으로 기름을 정복시키거든요. 역시, 남자는 짐승이죠!”
“와인을 마시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러서.”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와인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실 수 있는데. 어떤 와인인지에 따라 다르지만요.”
영업이 특기가 아니라더니···. 오늘이 오디션이라고 생각했는지, 데니는 과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손님이 곤란해하는 얼굴이 그대로 보였고.
원래라면 한길이 직접 다가가겠지만···.
한길은 지금 평상복을 입고 간이 테이블에 앉아 손님인 척, 관찰하고 있었다. 셰프복을 입고 홀에 나와 있으면 너무 주목을 받을 테니까.
다행히, 데니의 뒤에서 슬아가 다가왔다.
“데니 씨, 주방에서 찾는데요?”
바톤 터치를 한 후, 슬아가 상큼하게 웃었다.
“느끼함을 씻어낼 탄산음료는 어떠세요? 너무 단 음료가 거북하시면 탄산수도 있어요.”
“그러면 탄산수로 주세요.”
몇 번 비슷한 상황이 오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슬아가 수습해 주었다. 손님들이 데니의 특이함을 즐기면 즐기는 대로 놔두고, 불편해하면 신속하게 나타나 상황을 정리했다.
‘어떻게 아는 걸까?’
슬아의 움직임은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대화에 열중하는 테이블에는 말없이 다가가 조용히 물을 채워줬고, 어색함이 흐르는 테이블에는 친절하게 요리에 대한 설명을 하며 침묵을 깨트렸다. 다른 웨이터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누군가 실수를 저지르면 어느새 달려가 커버를 하고 있고. 그 와중, 주방과의 커뮤니케이션도 담당했다.
“어, 또 오셨네요? 이번에도 아드님 보러 오셨어요?”
“그려. 추천 메뉴가 뭔가?”
“흠, 이제 웬만한 건 다 드셔보셔서. 오리구이만 남았는데, 그걸로 드릴까요?”
심지어 혼자 온 단골을 알아보고, 그들이 지금껏 먹었던 메뉴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2호점에는 데려가야겠지?’
데니의 서비스는 조금 부담스러운 면이 없잖았지만, 슬아가 붙어 있다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어때요? 합격이죠?”
데니는 마지막 손님이 떠나자마자, 으스대며 다가왔다. 저렇게 자신만만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슬아야, 괜찮겠어?”
“···.”
잠시의 침묵 후, 슬아는 땅이 꺼지라 한숨부터 쉬었다.
“하아···. 공짜는 아니죠?”
“뭐가 필요한데?”
“짬뽕.”
“짬뽕?”
“요즘 셰프 스태프 밀 안 하잖아요? 속을 확 불태워버릴 정도의 짬뽕이 먹고 싶어요.”
#
“슬아 누나!”
식당을 나서자마자 부르는 목소리에, 슬아가 뒤를 돌아봤다.
“누나?”
“전에도 누나라고 불렀잖아요.”
“같이 일하게 되면 다르지. 손님들 앞에서 누나라고 부르면 이상하잖아?”
“에이, 손님 앞에서는 제대로 매니저님이라고 불러드리죠. 설마 그것도 모를까 봐. 그나저나, 오늘 한잔하고 가는 건 어때요? 환영식 겸!”
“난 약속이 있어서.”
“나도 오늘은 피곤해서···.”
데니가 해맑게 제안하자, 함께 퇴근길에 오른 홀 직원들이 모두 먼 산을 바라보며 핑계를 댔다. 그러자, 데니의 시선이 슬아를 특정해서 지목했다.
“누나는요?”
“딱 한 시간만.”
“좋죠! 어디로 갈까요?”
데니의 넘치는 에너지에 시달려 피곤했지만, 슬아는 잠시만 더 시간을 내기로 했다. 할 말이 있으니까. 마침 술이 땡기기도 했고.
“열정적인 건 좋은데, 조금 더 진중한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게.”
“내가 가벼워 보여요?”
“어.”
“왜 그럴까? 나름 매 순간 진지한데···.”
“그리고 손님 중에는 조금··· 알뜰한 분도 계시거든. 메뉴 선택만 봐도 어느 정도 감이 오니까, 그런 분들한테는 와인을 너무 강요하면 실례야.”
“네, 조심할게요!”
들은 건지, 만 건지.
너무 금방 대답해서 오히려 신뢰가 안 간다. 답답함에 슬아는 눈앞의 맥주잔을 쭉 들이켜 마셨다. 탄산이 필요했다, 탄산이.
“그나저나, 누나도 2호점 갈 거죠?”
“2호점? 글쎄?”
“어, 당연히 가는 거 아니에요? 한길 형도 한동안 2호점에 집중한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내가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에이, 새로 오픈하는 건데 가줘야죠. 누나도 형 좋아하잖아요?”
“푸!”
갑자기 슬아가 입안에 있던 맥주를 크게 뿜어냈다. 분수처럼 터져 나온 맥주가 테이블을 적시자, 무안해져서 서둘러 냅킨을 들고 닦기 시작했다.
“아, 미안. 너무 뜬금없는 소리를 하니까 그러지.”
“왜요?”
“좋아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같은 곳에서 일하는, 그것도 직장 상사 같은 건데.”
“왜요? 나도 형 좋아하는데?”
“데니, 혹시 외국인이야?”
“흠···. 조금 오래 살긴 했죠?”
“에휴.”
다시 혈압이 올라 맥주를 한 잔 더 시켜서 시원하게 들이켜 마셨다. 너무 빨리 마셨는지, 갑자기 취기가 머리끝으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 뒤로도 한동안 데니가 무언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누나, 화났어요?”
“아니. 왜?”
“뭔가 묘하게 조용한데? 항상 치어리더 같던 누나가 그러니까 이상하잖아요?”
“화 안 났어.”
“이상한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그냥 한길 형 주변에는 항상 슬아 누나도 있고 영국이 형도 있고 하니까 한 세트로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식당에서는 셰프랑 최셰프라고 불러.”
“아, 오케이.”
데니의 표정이 어느새 시들어 있었다.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하아··· 네가 한 말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금 생각이 많아서 그래.”
“생각? 무슨 생각이요?”
“미쳤다고 너한테 말하겠니?”
“왜요? 나, 은근 입 무거운데.”
“스스로 ‘은근’이라는 말 붙인 거 자체가 어느 정도 자각한다는 것 아닌가?”
데니는 속마음을 털어놓기에 믿음직한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슴 속이 꽉 막혀와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어졌다.
“사실은···. 그만둬야 할까, 고민 중이었거든.”
“네? 누나가요?”
“왜 그리 놀라는데?”
“그게 아니라··· 누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거 좋아하잖아?”
좋아한다. 정말 많이. 하지만,
“언제까지고 웨이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원래 이렇게 오래 일할 생각도 없었고.”
“그래요?”
“그냥 아르바이트였는데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
한스키친의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본 건, 취업 전쟁의 패잔병으로 방황했을 시기였다.
여러 번의 인턴 생활을 하는 동안, 빠릿빠릿하다며 귀여움을 받아왔지만, 한 번도 취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냉정히 말하면, 슬아는 학벌도 학점도 좋지 않았으니까.
다섯 번째 회사에서는 모처럼 바이럴 마케팅 프로젝트를 맡았었다. 직접 만든 영상이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퍼져나가고, 실적도 제법 좋아 이번에야 하는 기대를 품었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슬아는 선택받지 못했다. 결국 자신은 쓰다가 버려지는 소모품이었으니까.
취직은 그만두고 카페 창업이나 할까 하며 바리스타 학원에 다니던 중, 알바 공고를 보며 한스키친에 지원했다. 돈도 벌고, 자영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부에서 한번 살펴볼 생각으로.
‘대단하네.’
밤을 새우며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는 한길을 보며, 처음에는 단순히 감탄했었다.
메뉴 테이스팅을 해달라며 자신의 의견을 물어봐 주고, 믿고 홀을 맡겨주는 그 신뢰는··· 따뜻했었고. 그래서 작게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작은 골목식당이 유명세를 타고, 방송에도 나오고, 한남동 대로변에 새 레스토랑을 오픈하는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짜릿하기도 했고.
레스토랑 초기에, 주방 직원들이 한길의 능력을 의심할 때는 서운하기도 했었다. 가끔 ‘저 사람은 정식 셰프도 아니잖아?’라는 말을 하는 걸 주워들으며, 요리계에도 학벌주의가 있나 싶었고. 그래서 일부러 과장되게, 웃으며 직원들 사이의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려 노력도 많이 했었다. 어딘가 무뚝뚝하고 조용한 한길이 모두와 편하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그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다.
이제는 모두 한 식구다. 특히 주방은, 슬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고.
반면, 웨이팅 스태프는 그만두는 사람이 많았다. 초반에 같이 시작한 사람들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대우가 나빠서가 아니다. 떠나는 사람들의 이유는 다 같았다.
– 평생 웨이터로 지낼 수는 없잖아? 언니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
레스토랑에서도 4대 보험이 적용된다. 급여는 일반 중소기업 이상으로 준다. 현 상황만 보면 나쁜 직장은 아니었지만··· 계속 있을 곳은 아니다. 미래가 없으니까.
슬아는 스스로 핑계를 대왔다.
한길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지만 자리를 잡은 지는 이미 오래다.
“누나는 요리에 관심 없어? 요리를 배워보는 건 어때?”
“넌 주방 식구들 일하는 거 안 봤어?”
“직접 볼 일은 없었지.”
“’한번 해볼까?’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주방은, 티비에서 나오는 멋진 셰프의 일터가 아니었다. 전쟁터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저 이곳에 일하고 싶다는 이유로, 취미에도 없는 요리를 배우겠다고 말하는 건 실례다.
“아쉽네, 모처럼 같이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쁘게 나가는 것도 아닌데, 뭘.”
혼자만 생각하다가 막상 다른 이에게 털어놓으니 더욱 현실로 다가왔다.
다음날, 슬아는 출근하자마자 한길의 사무실을 찾았다. 더 늦기 전에 말하는 게 좋으니까.
“셰프, 저, 퇴사하겠습니다. 당장 나가는 건 아니고, 사람이 구해지고 인수인계까지는 제대로 할 예정이고요.”
구질구질한 설명을 걷어내고 깔끔하게 요점만 말하니, 한길이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입에서 이별의 말이 나오니 뭔가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왔다.
슬아는 일부러 환하게 웃어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혹여나 눈물이 글썽인다면 보이지 않게.
한길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이미 결정 내린 거야?”
“네.”
“그래.”
역시.
딱히 막지는 않는다.
막을 이유도 없고.
서운할 이유도 없는데, 이게 왜 서운한지 모르겠다.
“네 인생이니까 내가 관여할 생각도, 그럴 권리도 없지만, 전부터 준비해둔 말이 있어서. 일단 들어만 볼래?”
“···.”
“우리, 내년에 페이튼 호텔에 입점할 거야.”
“결정 났나요?”
“아니.”
“···?”
“그래도 들어갈 거야.”
이미 기정사실인 양 확신에 가득 차 있다. 그러고 보니, 짧은 시간 동안, 한길은 어느덧 확실히 셰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파인 다이닝에는 서비스가 중요하지. 메트르 도텔(maitre d’hotel)이라는 게 있더라.”
“메트르 도텔이요?”
“주방에서 셰프가 요리사들을 지휘하는 것처럼, 홀에서 웨이터들을 지휘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잠깐만요!”
슬아는 한길의 말을 끊고 바로 검색을 시작했다.
메트르 도텔.
한국에서는 찾기 힘들었지만, 해외에서는 나쁘지 않은 직종이었다. 이름만 알려지면 제법 높은 연봉은 받고 이직도 가능했고.
일반 매니저와는 조금 달랐다.
셰프의 요리를 이해하고 손님과 소통하는 사람.
주방이 백스테이지라면, 무대라고 할 수 있는 홀의 모든 걸 보이지 않게 지휘하는 사람.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아니, 슬아 스스로가 봐도 자신의 천성이었다.
무엇보다··· 하고 싶었다.
“저, 할게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듯이 말하자, 한길이 미안한 기색으로 웃었다.
“이런 말 꺼내놓고 말하긴 뭐하지만···. 너여서 이 자리를 준다는 건 아니고,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 거거든.”
“···?”
“내가 이쪽 분야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혼자 공부 해야 할 거야. 특히 호텔로 입점한 후에, 혹여 홀에 대한 컴플레인이 들어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행동해야 할 수도 있고. 그래도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잘못하면 자를 수 있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도움도 주지 못하니 혼자서 알아서 배우라는 소리이기도 했고.
그런데 이상하게···
슬아의 시야가 갑자기 흐려졌다.
“미안. 너무 심한 말을 했나? 우리 레스토랑은 다른 그 무엇보다 실력으로 사람을 뽑고 싶거든. 친분이 아니라···.”
가장 듣고 싶은 소리였으니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길은 당황하자, 슬아는 눈물을 닦아내며 환하게 웃었다.
“에이, 이 정도 눈물에 속아 넘어가다니. 셰프, 그래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겠어요? 그냥 장난이에요. 아, 퇴사 통보도요. 제가 가긴 어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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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 슬아··· 랑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눈이 빨갛던데···.”
입구에서 슬아와 마주친 최셰프가 고개를 기울이자, 한길은 서둘러 주제를 바꿨다.
“내일모레 내부 컨테스트는 준비 잘 되어 가나요?”
“물론이죠. 이번에는 저도 몇 개 야심 차게 준비해 봤습니다. 그것보다 걱정인 건 2호점인데··· 이력서는 더 들어온 게 없죠?”
준비는 순조롭게 되고 있었다.
공사는 진행 중이고, 주방에 설 요리사들도 세팅이 되었고. 와인은 데니에게, 홀은 슬아에게 맡기면 된다.
이제 남은 건 메뉴.
그리고 헤드 셰프.
구인 공고도 내고, 최셰프의 인맥과 노셰프의 인맥을 통해 사람을 구하는 중이었지만. 이탈리아 요리학교를 나오거나 이탈리아 현지 레스토랑에서 근무한 이력을 가진 이를 찾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제 슬슬 시간이 없는데···.
띠리리!
갑자기 울린 전화의 화면을 보자, 최셰프가 방긋 웃었다.
“이번에는 좋은 소식 아닐까요?”
그 말대로.
노셰프의 연락이었다.
– 사람 아직 못 구했지?
“네, 아직 찾는 중이에요.”
– 이게, 조건에 맞는 사람은 찾았는데 이걸 넘겨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어서.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으니까. 장점 먼저 들을래, 단점부터 들을래?
“장점이요.”
– 그래? 일단 ICIF라고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가 있거든. 나름 알아주는 덴데, 거기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라 페르도가 어딘지 아나? 로마 유일의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이거든. 거기서 3년간 일하던 친구라고 하거든.
오스피탈리타 이탈리아나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사람이다.
“좋네요. 그런데 지금 한국에 있나요?”
– 어, 강남에 있는 마루이트 호텔에서 일하고 있다나 봐.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이 오려고 할까요?”
– 아, 그건 걱정 없어. 오늘, 잘린다고 했거든.
“네?”
– 아, 단점을 말 안 했네. 그, 성깔이 조금 있다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