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28)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28화(128/325)
128.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노셰프는 파일과 링크를 하나씩 보내왔다. 한길이 파일을 열자, 옆에 서 있던 최셰프가 머뭇거렸다.
“저도 봐도 되는 걸까요?”
“당연히 같이 보셔야죠.”
“그래도 같은 헤드 셰프 입장인데···.”
얘기를 안 했었나?
너무 서두르다 보니, 앞으로의 계획을 주변 사람들과 제대로 공유하지 못한 감이 없잖았다. 슬아와의 일만 봐도 그렇고.
앞으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
“같은 위치는 아니죠. 제가 총주방장이라면 최셰프는 부총주방장이니까요. 지금은 상황상 1호점, 2호점을 따로 맡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최셰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봤다. 입에 희미한 미소가 걸쳐있었다.
파일은 이력서였다.
이탈리아 소재 요리학교, ICIF 졸업. 로마에 있는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서 3년간 일하며 주방보조에서 라인 쿡까지 올라갔고, 2년 전에 귀국했다. 그 후로 몇몇 호텔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예상외로···.
“여자분이시네요?”
“그렇네요.”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여성 셰프는 흔치 않았다. 노동 강도가 높은 직종인 데다가, 불과 10-20년 전까지만 해도 주방은 욕설과 과격한 언어가 난무하는 공간이었으니까. 한길의 주방에도 여자 요리사가 한 명 있지만, 엄민아는 처음부터 최셰프가 데려온 후배였다. 지금껏 받은 수많은 이력서 중에 여성은 없다시피 했고.
그것도 특이했지만···. 이력서에 딸린 증명사진을 보면 ‘왜 이런 사람이 요리를?’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었다.
갸름한 선과 도도한 눈빛. 사진 너머로 느껴지는 존재감은 요리사보다는 모델에 가까웠으니까. 이런 사람이 회사원이라고 해도 ‘왜 이런 사람이 회사원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외모였다.
이름은 유소희.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생각보다 어리네요.”
“여자는 더 빨리 시작하는 점을 감안해도··· 헤드 셰프를 하기에는 어린 나이이긴 하죠. 지금 주방에 있는 몇 명보다도 어리니까요. 하지만 셰프가 잘 정리한다면 문제 될 것 같진 않습니다.”
“근무 기간도 짧고요.”
국내에서 근무한 이력을 보면, 모두 반년 남짓이었다.
“그렇긴 한데··· 뭔가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죠.”
“사정이요?”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호텔이 생각보다 보수적인 집단이거든요. 신입부터 입사해서 차근차근 올라온 사람들 입장에서는, 외국 경력이 있다고 몇 단계를 건너뛰는 게 불공평해 보일 수도 있고···.”
그러고 보니 최셰프도 해외파 출신에, 호텔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요즘은 저 때만큼 텃세가 심하진 않다고 하는데, 또 워낙 젊은 나이다 보니···. 모르는 일이죠.”
지금껏 함께 이력서를 살필 때마다 최셰프가 가장 중요시하는 건 근무 기간이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근성이라고 생각하는 주의였으니까. 이렇게 관대한 해석을 하는 건 처음이다.
이번에는 노셰프가 보낸 링크를 열어봤다. 시민기자가 쓴 작은 인터뷰 기사였다.
「국내 최연소 미슐랭 셰프를 꿈꾸다」
당찬 제목의 기사에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유소희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동양인, 게다가 여자 요리사로 유럽의 주방에서 고군분투한 얘기. 그리고 어머니의 병환으로 귀국하게 되었지만, 앞으로도 국내에서 꿈을 키워가겠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두고 보세요. 앞으로 3년, 아니 길어야 5년 후에는 제 이름을 듣게 될 테니까요. 아직 뭐가 될지는 결정 안 했어요. 국내 최연소 미슐랭 셰프가 될지, 아니면 미슐랭 3스타를 받은 최초 여성 셰프가 될지.
기사는 2년 전 날짜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연락은 해봐야죠.”
헤드 셰프로 서기에는 어린 나이, 잦은 이직, 그리고 ‘성깔이 조금 있다’는 평판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당장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예상하는 2호점 오픈 시점은 한 달 후. 지금으로서는 필요한 이력을 갖춘 사람은 유소희가 유일했다.
“일단 면접부터 보고 결정을···”
전화기에 번호를 입력하던 한길이 도중에 움직임을 멈췄다. 노셰프가 했던 다른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오늘, 잘리거든.
불필요한 정보를 얻게 되니 오히려 신경이 쓰였다. 얼마 전 해고를 당한 사람, 게다가 아픈 가족이 있다는 사람을 불러놓고 가볍게 면접만 본 후 ‘미안하지만···’이라는 얘기를 꺼내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한길이 책상 위의 열쇠를 쥐며 일어서자, 최셰프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요?”
“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려고요.”
“셰프. 설마 하는데, 호텔로 직접 찾아가시는 건 아니겠죠?”
“··· 아닙니다.”
“정말이죠?”
“최셰프 답지 않게 왜 이리 의심을 하시는 겁니까?”
“셰프는 가끔 엉뚱한 일을 벌일 때가 있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뭔가 촉이 오는 것 같거든요.”
“···.”
“혹여라도 직접 찾아가거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네, 안 가요.”
“그러다간 스토커 취급받을 겁니다.”
“그냥 드라이브 가는 거라니까요.”
#
“키는 그대로 두셔도 됩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발렛 파킹 직원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차에서 내리니 주변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졌다.
‘역시 너무 화려해.’
슈퍼카 특유의 요란한 배기음, 밤에도 빛이 전혀 바라지 않는 노란 차체, 박쥐 날개를 펼치듯이 특이하게 열리는 문. 그 안에서 훤칠한 남자가 나타나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 아냐? 그··· 모델 있잖아.”
“아니, 배우 아니었어? 닮은 것 같은데? 왜 우리 저번 주에 본 영화···.”
꽤 가까운 곳에 있는 두 명의 젊은 여성이 소곤거리며 한길의 정체를 추리하는 소리가 들려와 괜히 무안해졌다. 그렇다고 큰 소리로 일반인이라고 해명할 수도 없고.
‘일단은 로비로 갈까?’
최셰프의 우려대로, 한길은 유소희가 근무하는 호텔에 와 있었다.
딱히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호텔 레스토랑은 이미 마감을 한 시간이었고, 설령 오픈 중이라고 해도 손님이 주방에 있는 요리사를 볼 일은 없었다.
호텔은 직원들이 드나드는 출입구가 따로 있었지만, 그런 곳에서 기다리면 정말 스토커 취급을 받을 터였다. 최셰프가 절대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하기도 했고.
즉, 이렇게 무작정 찾아온다고 해서 유소희를 직접 만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은 있으니까.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멀리서 조용히 느낌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정말 안 맞는 사람은 보기만 해도 뭔가 이상한 감이 오니까.
설령 못 본다고 해도 손해는 아니다. 어차피 앞으로는 시내 호텔을 탐방할 예정이었으니.
‘역시 호텔은 다르네.’
들어올 때부터 전해지는 분위기가 달랐다.
3층 가까운 높이의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나고 있었다. 뻥 뚫린 로비 한가운데에 서서 올려다보면, 가장자리에 있는 2층과 3층의 레스토랑이 보였다.
이런 곳에 있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건 어떤 기분일지···.
‘다음에는 런치랑 디너 타임에도 와봐야겠네.’
생각해 보니, 호텔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식사를 해본 기억이 없다. 2호점을 맡은 후에는 다른 호텔의 음식도 먹어보며 분석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이제는 주방에만 묶여 있는 게 아니라 시야를 넓혀야 할 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댕그랑!
평온한 클래식 음률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소음은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나고 있었다.
커다란 상자를 안고 있는 사람.
상자 바닥 틈새로 쏟아져 나오는 물건.
상자를 든 인물은 어색한 자세로 몸을 숙여 떨어진 물건을 주우려 했지만, 시야가 가려져서인지 손을 허우적댈 뿐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주변에서 다가가려다가 물러서는 게 보였다.
‘설마···.’
가까이 다가가니, 상자 뒤에 가려진 얼굴이 보였다.
이력서에서 본 얼굴이었다.
사진보다 머리가 조금 더 길었지만.
유소희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바닥에 떨어진 작은 타이머를 집어 들고 상자 안에 넣은 후, 다시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다.
청바지와 하얀 티, 그리고 벙벙한 점펴 차림새였지만, 이상하게 런웨이를 걷는 느낌을 주었다. 유난히 힘이 들어간 걸음걸이였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다시 멈춰 섰다.
이번에 떨어진 물건은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작은 공책이었다. 공책은 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어 찾기 더 어려운 모양이었다.
“뭘 봐요?”
무심코 공책을 주워들고 다가가자, 유소희가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문장 끝에 ‘요’가 붙어 있지만, 붙지 않은 듯한, 그런 말투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상황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됐어요. 혼자 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다시 바닥에 내려놓을까요?”
“···.”
한길이 공책을 들고 짓궂게 웃자, 유소희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서둘러 웃음을 지우고 상자 안에 공책을 넣으며 보니, 상자는 이미 조직감을 잃고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제 차에 장바구니가 하나 있는데, 빌려드릴까요?”
“왜요?”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서요.”
유소희는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도중에 입을 꾹 다물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바닥에 내려놓고 기다리세요. 금방 오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발렛 기사가 다시 차를 빼 오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기다리는 도중 뒤를 돌아 로비를 확인하니, 그녀는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휙 돌렸지만.
차 안에는 마트에 갈 때 사용하는, 제법 튼튼한 장바구니가 있었다. 상자 안의 물건을 다 담을 수 있는 크기였고.
“이대로 들고 가면 손잡이가 뜯어질 것 같은데, 안고 가야겠네요.”
“··· 고마워요.”
“별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까칠하게 굴어서 미안하고요. 사실 방금 해고당한 참이라 기분이 좋지 않거든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굳이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잠시 후, 유소희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도움받아놓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번호를 안 주는 주의라. 주소 남겨주면 이건 나중에 택배로 보내드릴게요.”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되면 그냥 정면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나.’
원래는 멀리서 보기만 하고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이미 안면을 터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도 까칠함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더한 사람과도 호흡을 맞춰본 적이 있었으니까. 퀘스트 속이긴 했지만.
“주소 불러달라니까요?”
소희가 재촉하자, 한길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이쪽으로 보내주세요.”
“고르메 키친···?”
소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명함과 한길을 번갈아 봤다. 이력서를 보냈으니, 그녀 역시 고르메 키친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었다.
“요즘은 헤드헌팅을 이렇게 하나요?”
“1차 면접이라고 해두죠.”
“요즘은 면접을 이렇게 하나요?”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한길이 스스로 생각해도 상황이 조금 이상하긴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지만.
밖으로 나오니, 어떻게 마무리 해야 할지도 애매해졌다.
“2차 면접 날짜를 잡고 싶은데요.”
“언제요?”
“내일 세시, 어떤가요.”
“··· 생각해 보고 연락 드릴게요.”
오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면접을 제시한 방법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데, 평범한 답변을 기대해서는 안 되니까.
차에 타려 했지만, 막상 혼자 떠나려니 짐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물어보기에도 안 물어보기에도 애매하지만,
“가는 길이면 태워다 드릴까요?”
“아니, 그냥 택시 탈래요.”
“이상한 의도로 말한 건 아닙니다.”
소희는 한길과 뒤에 있는 화려한 노란 차를 번갈아 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당신 같으면 타겠어요?”
#
다음날,
원래는 식당에 계속 있을 예정이었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의욕이 넘치는 데니가 ‘이건 꼭 직접 맛을 봐야 한다’며 와인 매장으로 한길을 끌고 갔기 때문이다.
“어때요, 형? 오길 잘했지? 요리에 대한 창작 욕구가 마구마구 샘솟지 않나요?”
오래 머무를 생각은 아니었지만, 시음하는데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차까지 막히는 바람에, 레스토랑에 도착한 시간은 세시 하고도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그··· 별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닐 거에요!”
“저희 셰프가 가끔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튈 때가 있어서.”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홀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는 유소희가 앉아 있었고, 그 주위를 요리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유소희는 입이 가벼운 모양이었다.
“그··· 밥 먹을 준비 해야지!”
“그래, 세팅! 세팅!”
요리사들은 한길을 보자마자 멈칫하더니, 우르르 몰려 주방으로 도망쳤다. 시야 한쪽에서 최셰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게 보였다.
“호텔 탐방을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어제부터, 마루이트 호텔부터 말이죠?”
“우연입니다.”
“네.”
“··· 그러면, 면접 좀 보겠습니다.”
시선을 유소희 쪽으로 돌리자, 그녀가 짜증이 묻어있는 말투로 투덜거렸다.
“늦었네요.”
“오늘 안 올 줄 알았습니다.”
“왜요?”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까.”
“세시라고 했잖아요?”
커뮤니케이션이 묘하게 안 맞는 게 신경이 쓰였지만, 같이 일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여러 번 확인을 해야 하니 번거로운 건 있겠지만.
최셰프는 마치 한길의 분신인 것처럼,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것까지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유소희는 영국의 요리사들에 가까웠다. 뭔가 삐딱하고 살짝 어긋나 있지만, 조금 더 강하게 지휘하면 될 뿐이다.
장소를 사무실로 옮겨 간단한 면접 질문을 하는데, 또 마음에 안 드는 점이 나왔다.
“주방 지휘는 하겠지만, 메뉴를 만드는 일은 안 할 거예요. 그래도 괜찮다면 받아들일게요.”
“그러면 헤드 셰프의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잖아요? 미리 정해진 메뉴와 레시피는 그대로 충실하게 재현할 테니까 그건 걱정 마시고요.”
“이유가 뭐죠?”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한길은 지나치게 수동적인 헤드 셰프를 원치 않았다. 당연히 모든 메뉴는 한길이 결정할 테지만, 소소한 부분까지 지휘해야 하면 따로 헤드 셰프를 두는 의미가 없다.
“일단 테스팅을 해보고 싶군요.”
“테스팅이요?”
“요리를 먹어본 적도 없는데, 결정을 내리긴 힘들잖아요?”
간단한 요리 몇 가지를 만들어보게 할 생각이었지만, 하필이면 오늘따라 주방에 남는 스테이션이 없었다.
“이거 불에서 내리면 안 되는데요!”
“뭘 만드는데?”
“비밀입니다. 내부 컨테스트용이라···.”
평소라면 한두 개의 화구가 남지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자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시간은 많죠?”
“백수인 거 알면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주방이 있으니까 거기로 가시죠.”
“어딘데요?”
“제 집이요.”
“···.”
“···.”
“···.”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약 5초의 공백 후, 갑자기 주변의 요리사들이 급하게 말을 뱉어냈다.
“오해하지 마시고요!”
“정말로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희는 셰프 집에 자주 가거든요! 그래서 그런 겁니다!”
“여기, 밑 작업 다 마친 사람 있나?”
“브레이크 타임 이제 시작했는데 있을 리가 있나.”
주방이 소란스러워지자, 어디선가 슬아가 나타나 작게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데니, 어차피 지금 할 일없지?”
“네, 왜요?”
“여기서 한가한 건 데니 밖에 없으니까. 셰프랑 같이 가드려. 면접 보시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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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이 좋네요, 생각보다.”
“원래 식당이었거든요.”
“아, 역시.”
소희는 한길의 주방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조리도구를 하나하나 살피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모습을 보니, 요리에 대한 열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뭘 만들면 되죠?”
“카폰 마그로(cappon magro), 판소티(pansotti)와 살사 디 노치(salsa di noci), 그리고 파리나타(farinata). 가능한가요?”
“레시피는요?”
“필요한가요?”
“아까 말했다시피···.”
“가게 메뉴를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라 지금 말한 요리를 만들어 보라는 겁니다. 한정식집 요리사에게 된장찌개를 만들라고 하는데 레시피를 요청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요?”
“··· 그것도 그렇네요.”
소희는 의외로 순순히 동의했다. 표정도 지금껏 본 중 가장 누그러져 있었고.
“의외네요.”
“뭐가요?”
“피자나 파스타 만들라고 할 줄 알았는데.”
“피자는 아니지만, 파스타를 만들라고 한 건 맞는데요.”
“그건 그렇네요. 그나저나, 뭐에요. 리구리아(Liguria) 음식점을 열 생각이에요?”
소희의 말에 한길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카폰 마그로, 판소티, 파리나타는 모두 제노아 들렀을 때 맛본 리구리아주의 지역 요리였다. 각각 해물 샐러드, 라비올리, 그리고 작은 팬케이크의 한 종류였다.
즉, 국내에서는 흔치 않은 이탈리아 요리였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했다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모르는 것보다는 좋은 징조였다.
조금 더 적극적인 헤드 셰프를 선호하긴 하지만, 적당히 레시피대로만 잘 만들어도 나쁘진 않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니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주방 시설을 모두 살핀 소희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시작해도 되죠? 재료는 어디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