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29)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29화(129/325)
129. 마음대로 해!
“마른 재료, 조미료랑 기름은 이쪽 수납장에 있습니다, 신선한 재료는 냉장고에 있는 건 아무거나 쓰셔도 됩니다.”
설명을 들은 유소희가 수납장을 열자,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마른 허브만 세 줄.
각양각색의 기름이 다섯 줄.
소금만 해도 스무 종이 넘고, 내용물을 알 수 없는 특이한 단지도 여럿.
판타지 소설에서 옷장을 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처럼, 냉장고 크기의 수납장 안에 마트 하나가 통으로 우겨 넣어진 상태였다.
“와… 이게 다 뭐야. 셰프, 돈 들어왔다고 제대로 질렀네요?”
“형, 이런 건 또 언제 다 모았어요?”
수납장 속을 빼꼼 들여다본 여직원과 남직원이 순서대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자신을 슬아와 데니라고 소개한 직원들이었다.
“무슨 소금만 몇 종류야, 형, 이 정도 되면 병이에요, 병.”
“그러면 와인도 지역별로 한 종류만 구비할까?”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음껏 사십시오!”
“와인이요?”
“아, 제가 소믈리에거든요.”
소희는 데니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는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일반 회사원이나 웨이터로는 보이지 않았다.
딱 맞아떨어지는 양복은 반질반질한 회색 재질이었고, 그 안에 조끼를 단정하게 갖춰 입었다. 가슴팍 주머니에 손수건을 곱게 포개어 넣어놓은 모습에서, 요즘 시대에 보기 힘든 클래식함이 느껴졌다. 특이한 차림새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소믈리에라고 하니 뭔가 로망이 느껴지는 차림새였다.
‘그나저나 헤드 셰프보다 소믈리에를 먼저 구하다니······’
순간 이상한 그리움이 소희를 덮쳤다.
이탈리아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와인이라고 했던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와인 창고가 자신의 비밀병기라고 했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존경하던 선배님이.
그러고 보니, 그 레스토랑의 소믈리에는 셰프와 20년 넘게 함께한 형제 같은 사람이었지.
“그런데, 너무 많으면 오히려 고르기 힘들던데. 이래서 브레이크 타임 내에 끝나겠어요? 도와드릴까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돌아보니, 슬아가 생긋 웃고 있었다. 굉장히 따스한 미소였지만, 소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이것도 시험일 테니까요.”
“시험이요?”
“재료 고르는 것도 면접 항목에 들어가는 거겠죠. 안 그래요?”
한길을 바라보며 질문하자,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요리의 시작은 재료니까요.”
소희는 잠시 멈춰서서 머릿속으로 목록을 정리했다.
한길이 주문한 요리 중 마른 재료가 필요한 요리는 두 개. 판소티와 파리나타.
하나는 이탈리아식 만두,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식 팬케이크다. 각각 밀가루와 병아리콩 가루가 필요하다.
소스용으로는 호두와 케이퍼, 올리브유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신선 재료를 쓰는 게 좋고.
‘우선은 케이퍼부터…’
소희는 짙은 녹색의 피클 병을 살피며 케이퍼를 찾았다.
일반 피클이 오이를 절인 것이라면, 케이퍼는 케이퍼 식물의 꽃봉오리를 절여놓은 재료다. 오이 특유의 시원한 향 대신, 짭조름한 맛이 특징이다.
한국에서는 케이퍼를 연어 요리와 함께 자주 먹지만, 이탈리아 요리에서는 보다 다양하게 활용된다. 수프에도, 파스타에도, 샐러드드레싱에도 넣으면 적당한 염분과 맛의 깊이를 더해준다.
“판텔레리아 케이퍼네요?”
“네. 혹시 다른 게 필요한가요?”
“… 아뇨.”
케이퍼는 한국에서 흔히 보는 작은 동그라미가 아닌, 올리브처럼 길쭉한 형태였다.
‘아는 걸까?’
판텔레리아는 시칠리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화산 지대인 데다가 밤낮 기온 차가 높아 이곳의 케이퍼는 유난히 달고 향이 응축되어 있다.
‘뭐, 국내에서 못 구하는 재료도 아니니까.’
소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케이퍼 병을 꺼낸 후, 서둘러 병아리콩 가루를 찾았다. 인도산의 콩가루 하나밖에 없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밀가루는 달랐다.
“정말 많이도 갖다 놓았네요.”
“선택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국산용으로 박력분, 중력분, 강력분. 미국산 다목적용, 제빵용, 페이스트리용 밀가루. 이탈리아산으로는 0, 00, 1, 듀럼 밀과 세몰리나까지. 종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소희가 00 밀가루를 꺼내자, 옆에서 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00은 뭐예요?”
“이탈리아에서는 제분 정도에 따라 표시하거든요. 가장 입자가 두꺼운 건 1, 가장 고운 건 00이에요. 00이 탄성이 가장 좋으면서….”
“탄성이 뭐요?”
“아, 아니에요.”
소희는 급히 말끝을 얼버무렸다. 하마터면 또 습관처럼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다 말할 뻔했으니까.
조심해야 한다.
“흐음··· 역시 난 요리는 취향이 아니구나. 우리 셰프님도 그렇지만, 무슨 요리를 하는데 과학 용어들이 막 나와서 듣기만 해도 복잡하던데. 이래서 전 요리도 포기했어요.”
슬아는 가볍게 농담을 했지만, 뒤에서 지켜보던 한길은 지나치게 진중한 눈빛으로 질문을 했다.
“세몰리나는 안 쓰시나요?”
“네.”
“왜죠?”
“하아, 파스타라고 항상 세몰리나 밀가루를 쓰는 건 아니니까요.”
말을 해놓고 소희는 아차 싶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섞어 버렸으니까.
‘너무 건방진 말투였으려나?’
몰래 눈치를 살폈지만, 한길의 표정에 큰 변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입꼬리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쳐진 것 같았다.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다른 파스타를 만든다면 쓰겠지만, 판소티는 야들야들한 게 어울려요.”
“그게 다인가요?”
“세몰리나는 유연성이 낮고 가소성이 높아요. 펜네같이 독특한 모양을 유지해야하는 파스타에는 어울리지만, 판소티에는 굳이 질긴 식감을 줄 필요가 없잖아요? 어울리지도 않고.”
가소성은 plasticity라고도 부른다. 플라스틱처럼 딱딱하게 형태를 유지하는 성질이다.
즉, 가소성이 높은 밀가루를 사용하면, 밀가루 플라스틱처럼 모양을 굳히기 좋다.
그래서 파스타는 세몰리나 밀가루를 주로 사용한다. 꼬불꼬불한 나선형,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는 빨대형, 그리고 표면에 울퉁불퉁한 문양을 새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판소티는 굳이 문양이나 모양을 만들 필요가 없다.
또 너무 아는 척을 했나 걱정했지만, 한길은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시험하고 있는 건가?’
조금 짜증이 올라왔다. 모처럼 조심하고 있는데 일부러 자극할 건 뭐람,
‘조심하자, 말조심.’
소희는 다시 한번 속으로 여러 번 다짐을 했다.
소희의 가장 큰 단점.
필터 없이 말을 내뱉는다는 점이었으니까.
딱히 욕설을 하거나 남의 흉을 보는 일은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소희는 아는 게 너무 많았다. 즉, 잘난 척을 많이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왜 똑같은 내용을 배웠는데 남들은 이해를 못 하는 건지, 답답한 경우가 많았다. 학교에 다닐 때도 그래서 주변에서 혀를 찼었고, 이탈리아의 레스토랑에 일할 때도 이놈의 입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단순히 성격의 단점이었다면, 한국에서는 나불거리는 입이 죄였다. 특히 첫 직장에서는.
–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귀국하고 처음 입사한 호텔에서 소희를 지도하던 직속 선배는,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치근덕거리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허세에 비해 능력은 형편없었다.
– 여기, 오타 있는데요?
– 오타?
– 면이 납작하니까 타글리오리니가 아니라 타글리아텔레에요.
– 어? 진짜 실수네?
메뉴판에 올라가는 메뉴명에 오타는 기본. 하지만 그것보다 더 어이가 없는 건, 그 사람이 만드는 메뉴였다.
– 이탈리아 대사관 행사인데 크림소스 요리를 내겠다고요?
– 괜찮아, 우리는 가끔 크림소스도 사용하거든. 고급스러운 알프레도 같은 거지.
– 알프레도는 이탈리안 요리가 아니라 미국 이민자들의 요리에요. 중국 사람들이 전통 중국요리를 내달라는데 짜장면을 내는 것과 같잖아요?
– 괜찮다니까?
하지만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소희가 말한 그대로 총주방장이 지적했으니까.
알고 보니, 그 선배는 무능하기로 유명한 선배였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하지만, 선배의 무능함보다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무능함을 지적한 신입의 괘씸죄가 더 컸다.
그때부터 ‘교육’이 시작되었다.
소희가 소속되었던 부서는 호텔의 연회부로, 결혼식이나 각종 행사, 귀빈을 위한 요리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주기적으로 행사를 위한 메뉴 개발을 해야 했고.
소희는 주방에서는 실수가 없었다. 그래서 메뉴 개발을 하는 시간에 집중 포격이 가해졌다.
– 뭐, 브로데토? 그게 대체 뭔데? 이탈리아 요리 찾는 한국인들이 이걸 보면 뭔지 알겠냐?
– 누구는 몰라서 못 만드나? 안 팔리니까 안 만드는 거지. 평범한 피자, 파스타 만들라는 게 그리 어렵냐?
– 냅둬. 배우신 분이 만들기에는 천박한 메뉴인가 보지.
– 로컬라이징 몰라? 이탈리아 요리가 그렇게 만들고 싶으면 이탈리아로 가든가. 여긴 한국이잖아?
소희의 요리를 깎아내리는 그들의 눈빛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그래도 소희는 꿋꿋했다.
이 유치한 괴롭힘에 가담한 선배는 단 세 명뿐이었고, 소희는 로마 유일의 미슐랭 3스타 셰프의 인정을 받았었으니까. 사정상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1년만 더 이탈리아에 남아있었다면, 레스토랑 역사상 최연소 수셰프가 될 터였다.
실력으로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반년 가까이 일하면서 소희의 요리는 단 한 번도 채택되지 못했다. 답답함에 과장을 찾아가 이유를 물으니,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 분란을 일으키는 요리를 채택할 수는 없으니까. 요리도 중요하지만, 주방에서 중요한 건 팀워크잖아? 처음부터 잘 맞는 사람이 어딨어? 같이 잘 맞춰가는 것도 사회생활이야.
그날 저녁, 우연히 같은 과장이 다른 요리사들에게 하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 에휴, 상엽이 놈,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정신 차리고 제대로 공부하라고 해. 그리고 신입 교육 좀 제대로 해. 왜 저리 드세냐.
다음날, 바로 사표를 냈다.
그때만 해도 실망은 했지만, 좌절은 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 가서 새로운 시작을 하면 되니까.
하지만 새로 옮긴 직장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능한 선배는, 놀랍게도 국내 저명한 호텔조리학과 출신이었다. 실력은 없지만, 인맥은 상당했다.
장소와 캐스팅만 바뀐 상태에서 똑같은 일을 겪었다. 소희의 성격도 오해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 쟤, 뭔가 재수 없지 않냐?
– 건방져.
‘건방지다’는 말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니, 이탈리아에서도 자주 들었었다.
– 건방진 놈, 네가 뭔데 셰프 레시피를 멋대로 바꿔! 그딴 식으로 할 거면 당장 나가!
레스토랑에 처음 출근한 날에도 들었었고.
레시피에 버터가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 넣었다는 이유로, 난생처음 들어보는 욕설이 쏟아졌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수셰프는 와인을 건네주면서 설명을 했었다.
– 개발하고 싶은 메뉴가 있다면 손님 요리로 하지 말고 업무 전후에 따로 들고 와. 손님들은 네 요리를 먹고 싶어서 오는 게 아냐. 레스토랑에서는 안정적으로 같은 요리를 내는 게 중요해. 식당은 실험실이 아니라고.
이탈리아에서도 욕은 많이 먹었다.
하지만 그 욕은 채찍질이었다.
앞을 보며 달리라며 끝없이 채찍질이 가해졌다.
국내에서 경험한 건 망치질이었다.
튀어나온 못을 무자비하게 때려서 틀 안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같은 타격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그냥 얌전히 있자.’
세 번째 직장에서는 입을 아예 닫아버렸다. 일만 열심히 하고, 최대한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지만,
– 뭔가 마음에 안 드냐?
얼굴에 생각이 드러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세 번째 호텔의 총주방장은, 유난히 새로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요리가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20년 전의 교과서처럼 경직된 요리였다.
–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든가.
그녀의 표정을 보며 모두가 등 뒤에서 한 말이었다.
이쯤 되니, 미움을 받는 건 익숙해서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길을 잃었다는 좌절감.
모든 호텔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소희가 경험한 곳들은 레스토랑과 회사를 반반 섞은 곳이었다. 연차에 따라 레일을 차근차근 올라가는 대리, 과장, 차장, 부장들이 있었고.
눈앞의 총주방장은 10년, 20년 후에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보면, 힘이 빠졌다.
갑자기 연료를 잃은 것처럼 모든 동력을 잃은 소희에게, 친구인 연희가 외부에 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 요즘은 오히려 새로 차린 레스토랑들이 더 자유롭다고 하더라? 안 그래도 내가 아는 선배님이 아끼는 후배가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시작한다고 하는데···
친구는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한다. 병원비로 쌓인 빚도 많아 쉴 여유가 없으니까.
그래, 꿈은 나중에.
일단은 취직이 먼저다.
그러려면 가장 중요한 건, 말조심이고.
“다 고르셨습니까?”
“아니요.”
잠시 생각에 빠져있자, 옆에서 한길이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수납장 속, 마지막으로 골라야 하는 재료는 올리브유. 이탈리아 요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재료다. 그런데,
“사이카 카스텔베트라노···.”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이카 카스텔베트라노는 시칠리아의 올리브유로, 옛 방식대로 올리브 열매를 압착하여 만든 올리브유다. 원심분리하는 기계가 아니라 전통 방식대로.
설마 이걸 여기서 볼 줄이야.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만니….”
흐르는 금이라고 불리는, 세계 최고 셰프들의 선택을 받은 토스카나 최고의 올리브유가 떡하니 진열되어 있었다.
“이…이거, 시식해도 될까요?”
“재료는 원하는 대로 다 쓰셔도 됩니다.”
한길은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지만, 왜 웃는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소희는 서둘러 작은 숟가락을 꺼내 그 위에 올리브유를 조금 따라낸 후, 입안에 넣었다.
폭죽이 터졌다.
잔디와 과일과 향이 느껴지는, 감미로운 점도. 기침이 나올 것 같은 매캐한 향이 지나간 후 찾아오는 달콤함. 그 달콤함이 지나가자마자 신기하게도 기름기가 모두 사라지고 입안이 깔끔하게 메말라버리는 감각이 신기했다.
“이건… 진짜네요.”
“당연히 진짜죠.”
“이거, 세상에서 유일하게 3년 이상 신선도를 유지하는 올리브유라는 거 아세요? 어? 라오데미오도 있네요!”
밝은 에메랄드 빛의 액체를 보자마자, 심장이 멎어버렸다. 소희는 들고 있던 병을 내려놓고 또 서둘러 숟가락에 작은 양을 따라냈다.
치커리 같기도 한, 쌉싸래하면서도 강렬한 향이 깔끔하게 입안을 휘감았다.
“이거, 올리브유의 페라리라고 불리는 거 아세요?”
“페라리요? 그런 별명은 몰랐지만, 어울리네요. 어딘가 스포츠카 같은 힘이 있더라고요. 육류에도, 생선에도, 향으로 밀리지 않는 올리브유는 처음이었습니다. 이 향을 좋아하시면 아마 엘로라 팜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에게해에서 몇백 년간 보존한 올리브 나무에서 수확한 올리브를 사용해서 옛 맛을 그대로 살려낸 향이거든요.”
“이 정도 되면 람다도 있을 만한데 그건 없네요?”
“구하려 했는데 1리터에 185불이나 하는 거라… 다음번 구매 목록에 넣어봤습니다. 그것도 드셔 보신 적이 있나요?”
“요리에는 못 써보고 선배가 맛만 보라고 해서…”
“저기요!”
갑자기 옆에서 슬아가 외치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두 분 다, 면접이라면서요? 저희는 브레이크 타임 끝나면 돌아가야 한다고요. 덕질은 나중에 하고 집중하시죠!”
덕질이라니….
그러고 보니, 잠시 모든 상황을 잊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렇게 즐겁게 얘기를 한 건 정말 오랜만이다.
다시 눈앞의 미션에 집중하려 했지만, 허브를 보는 순간 모든 생각이 다시 날아가 버렸다.
로즈메리, 타임 같은 흔한 허브 외에도 마조람, 세이지, 오레가노까지.
“소렐(sorrel)이랑 보라지(borage)도 있네요? 이걸 국내에서도 파나요?”
“구하기 쉽진 않지만, 구할 수 있긴 합니다. 이건 최셰프가 아는 농장에서 소량으로 재배를 부탁한 거고요.”
“국내에서도 수확이 가능해요?”
“가능하긴 한데, 온도 조절이 까다로워서 온실에서만… 아, 잠시만요.”
그 순간 전화가 울리고, 한길은 잠시 실례한다며 주방을 나갔다.
소희는 이 틈을 타 눈을 감고 허브의 향을 힘껏 빨아들였다. 오랜만에 맡는 향긋함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향이었다.
“신기한 게 많죠?”
눈을 뜨니, 슬아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네요.”
“셰프가 이런 재료 모으는 게 취미라, 여기가 식당보다도 더 많을 거예요. 주방 요리사들한테도 언제든 뭐 만들어보고 싶으면 여기 주방 사용해도 된다고 했거든요. 저희 다 열쇠 하나씩 갖고 있고. 그러니까… 여기는 레스토랑의 비공식 연구실 같은 곳이라… 진짜 이상한 의도로 오라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해서요.”
이상한 의도라….
솔직히, 소희에게 한길은 첫 만남부터 꺼림칙한 사람이다. 생긴 건 멀쩡하면서 하는 행동이 상식을 벗어나는,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닐까 싶은, 내키지 않는 부분은 있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다들 사이가 좋네요.”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셰프는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이상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니라고. 요리사들도, 직원들도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야, 같이 일하는 레스토랑 식구니까요.”
슬아는 상쾌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지만, ‘식구’라는 단어는 소희의 심장을 잔인하게 찔렀다.
“다 고르셨나요?”
어느새 한길이 돌아오자, 소희는 표정을 가다듬고 필요한 질문을 했다.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드릴까요?”
“방식이요?”
“카폰 마그로 같은 건 서민적으로 만들 수 있고, 아니면 조금 더 다듬을 수도 있으니까요.”
“면접관에게 답을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은데요.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네?”
“마음대로 하세요.”
제대로 듣긴 했지만,
“다시 한번 얘기해 줄래요?”
다시 듣고 싶었다.
한길은 지금껏 본 중 가장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반복해 주었다.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별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뭉클해지는 말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요리하라는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