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34)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34화(134/325)
134. 잡일이니까
여관에서의 업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발렌티나는 지나치게 들떠 있었다. 몇 걸음 걷다 혼자 키득키득하고 있었으니까.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왜?”
“계속 웃고 있으니까요.”
발렌티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오늘 내가 오늘 누굴 만난 줄 알아?”
“누구를 만났는데요?”
“미켈란젤로의 친구!”
“누구요?”
“미켈란젤로 몰라? 피에타랑 다비드상을 만든, 이 시대 최고의 예술가잖아!”
얼굴에 광채가 날 정도로 빛나고 있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어린 소녀의 얼굴이다.
“아, 마크는 모르려나? 피렌체는 미켈란젤로의 고향이거든.”
“그렇군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티칸에 가 있는데 가끔 피렌체에도 온대! 무려 교황님의 부탁을 받고 작업을 시작한다나 봐. 대단하지 않아?”
“그런 얘기는 누구한테 들었어요?”
“누구긴 누구야, 손님이지. 오늘 왔던 손님 중 한 명이 미켈란젤로의 작업실에서 일했다던데? 신기하지 않아? 여기 있는 동안 미켈란젤로가 오면 소개해준대. 이번 주에 오는 일은··· 없겠지? 아니, 불가능은 아니니까.”
한길이 말없이 쳐다보자, 발렌티나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
“모르는 사람은 절대 따라가면 안 됩니다.”
“내가 무슨 어린 애도 아니고.”
“절대 안 간다고 약속하세요.”
“당연하지! 그런데··· 루이지는 이상한 사람은 아냐. 원래 고향이 밀라노 쪽인데 타지에 와서 외로운 모양이더라고. 그냥 말 친구가 필요한 것 같던데.”
한길이 한숨을 크게 내쉬자, 발렌티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마크도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는 거지?”
“네.”
“다행이잖아? 일자리 구해서.”
“요리사가 아닌 잡일꾼이지만요.”
바로 채용이 결정된 발렌티나와 달리, 한길은 하루만 일해보고 결정을 내리기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코시모는 피렌체에 체류하는 5일 동안, 주방에서 일해도 된다고 허락을 했다.
단, 요리사가 아닌 잡일꾼으로.
그게 영 마음에 걸렸는데···.
“그쪽도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걸 거야.”
“사정이요?”
“요리사는 임금이 더 비싸잖아? 여기가 몇 번 문 닫을 위기에 놓였었다고 하더라고.”
“이렇게 손님이 많은데 문을 닫을 뻔했다고요?”
“뭐, 남는 게 없나 보지. 안젤라가 툭하면 손님 머릿수를 세고 있더라고.”
그러고 보니.
주문의 절반 이상이 리볼리타나 폴렌타 등, 간단하게 배를 채우는 수프 요리였다.
그 외의 메뉴도 간편 요리다.
계란을 부쳐서 만든 계란 전. 애호박꽃을 튀긴 꽃 튀김. 그리고 빵가루 파스타. 고기 메뉴도 있었지만, 소 위장과 막창을 삶은 요리였다.
‘한국으로 치면 국밥, 내장탕, 잔치 국수 정도 되려나?’
손님이 많아도 한 그릇당 남는 게 별로 없다.
묘하게 동질감이 들었다. 최저금액의 요리를 만들며 손님의 머릿수를 세는 경험이라면 한길도 있었으니까.
“마크는 돈이 궁한 것도 아니잖아? 계속 일할 거지?”
“네, 일할 겁니다. 배울 게 많기도 하고요.”
어차피 ‘잡일꾼’으로 일해도 퀘스트 수행에는 문제가 없었다. 코시모의 요리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고.
한길이 확답을 주자, 발렌티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사실 난 여기가 마음에 들거든. 안젤라, 정말 대단하더라! 오늘도 완전 험상궂은 남자들이 술 마시고 난동을 부리는데 말 한마디로 제압하더라니까!”
“누가 난동을 부려요?”
“아, 멸치같이 비쩍 마른 노인들이. 오.. 오빠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이런 얘기 하면 쳐들어와서 끌고 갈지도 모르니까. 나도 벌써 열여섯인데 무슨 어린애 보듯 한다니까?”
“몇 살이라고요?”
“열여섯. 왜?”
역시 외국인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미성년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졸지에 미성년자가 술집이나 다름없는 여관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데 동조한 셈이다.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졌다.
“발렌티나, 앞으로 남자 손님과는 주문 외 대화는 금지입니다.”
“뭐야? 왜 마크도 갑자기 날 어린애 취급하는데? 솔직히 이 나이면 벌써 결혼도 하고 애도 있을 나이거든?”
“그러면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 자유롭게 대화하세요. 지금은 안 됩니다. 사적인 대화는 무조건 금지.”
“왜?”
“마리오한테 이를 겁니다.”
“치···.”
발렌티나는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지만, 알아들은 건지 잘 모르겠다.
새삼 마리오의 고충이 이해 갔다. 지금껏 남매치고는 유난히 티격태격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춘기 여자아이를 보호하려는 큰오빠였던 거다.
“왜 이리 늦었어?”
숙소에 도착하니, 마리오가 입구에서 팔짱을 끼며 기다리고 있었다.
“일자리는 구했어? 뭐 하는 곳이야?”
“’무화과나무’라는 곳인데 이상한 곳은 아니고! 부부가 운영하는 여관인데 둘 다 진짜 친절하셔!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넌 들어가 있어!”
“왜?”
“들어가라니까!”
마리오는 매서운 눈길로 발렌티나를 들여보내고 바로 한길에게로 다가왔다.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어떤 곳이지?”
“부부가 운영하는 여관입니다.”
“사람들은 친절해 보이고?”
아직 층계에 서 있는 발렌티나가 애걸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마리오에게는 솔직히 말하는 편이 좋았다.
“친절과는 거리가 멀지만, 열심히 사는 분들 같아요. 적어도 악독해 보이지는 않았어요.”
“후우···. 그럼 됐어.”
“네?”
“외부인들에게 친절한 놈들은 대개 사기꾼이거든. 저놈의 자식은 안 된다고 하면 도망가서 이상한 데서 딴짓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잘 지켜봐.”
갑자기 고개를 떨군 마리오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미간의 주름이 안쓰러웠다.
“네, 잘 지켜볼게요.”
“당연히 잘 지켜봐야지. 이상한 놈들이 꼬이거나 무슨 문제 생기면 네가 책임져야 하니까.”
“책임이요?”
“그래, 평생 책임져.”
평생 책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리오의 얼굴을 보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손님들이랑 말 한마디도 못 섞게 단단히 못 박아 두겠습니다.”
그제야 마리오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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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했으면 재깍재깍 주방으로 들어오지, 뭐해?”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코시모가 윽박질렀다. 서둘러 달려가니, 주방 작업대에는 곡물가루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잡일이다. 반죽 다루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옆에서 보고 따라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이건 다섯 살 어린애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네, 할 수 있습니다.”
“서둘러. 점심 전에 빵이랑 피치까지는 만들어놔야 하니까. 잡일이 정말 많아.”
이상할 정도로 ‘잡일’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빵 반죽은 호밀가루를 쓸 거야. 물은 이 정도가 적당하고···.”
잡일꾼에게 알려주는 것치고는 유난히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다. 거의 일대일 과외 선생님처럼.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고.”
“네.”
“잡일꾼이 말귀도 못 알아들으면 답답하니까.”
그 말과 함께 코시모는 반죽을 동그란 모양으로 성형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재료를 빼놓은 상태로.
“소금이 안 들어갔는데요?”
“피렌체 빵은 원래 소금을 안 써.”
“네?”
“피렌체뿐 아니라 토스카나주에서 만드는 빵은 다 그래.”
소금이 안 들어간 빵이라니···.
어느 순간부터 빵이 형편없을 정도로 맛이 없어진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토스카나주로 넘어오자마자 맛이 없어진 거다. 소금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이었으니까.
소금은 간을 맞추는데에도 중요하지만, 빵 안에 수분기를 가둬두는 역할도 한다. 소금이 없는 빵은 금방 과자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지금껏 먹어온 빵처럼.
“왜죠?”
“뭐가?”
“소금이 비싼 재료이긴 하지만, 다른 요리에는 사용하잖아요?”
“그게 전통이니까. 들리는 말로는 옛날에 피사랑 전쟁이 나면서부터 그렇게 먹었다더라.”
“전쟁이요?”
“항구 도시 놈들이 전쟁 중에 치사하게 소금을 안 준다고 한 거지. 거기에 대고 내륙인들도 ‘우리도 소금 따위 필요 없다’면서 소금 없이 빵을 만들었다고 하고. 뭐, 사실일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자유롭게 쓸 수 있잖아요?”
“지금껏 먹어온 방식이 있으니까. 이미 소금 없는 빵에 적응했는데 지금 와서 바꿀 필요는 없잖아?”
소금 없는 빵에 적응했다니···.
‘아!’
한길은 뒤늦게 코시모의 말뜻을 이해했다.
코시모는 수프를 다시 재활용할 때, 빵을 뜯어서 넣었다.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딱딱한 빵은 수프에 넣기에는 최적이었으니까.
촉촉한 빵을 사용했다면, 수프에 넣고 오래 끓일수록 젖은 휴지처럼 기분 나쁜 물컹한 식감이 될 거다. 하지만 비스킷처럼 딱딱한 빵은, 수프에 넣으면 적당히 탄력 있는 식감으로 변했고 전분까지 더해주었다.
즉, 이곳에서 빵은 단독으로 먹는 요리가 아니라 요리에 사용되는 재료였다.
“쓸데없는 질문 말고, 이것 좀 열어봐.”
코시모가 가리키는 것은 커다란 나무 궤였다. 궤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발효를 마친 빵 반죽이 들어 있었다. 새로 만든 빵 반죽을 그 안에 넣고, 이미 발효된 빵을 꺼내자,
“이게 우리 여관 문양이야.”
코시모가 이상한 도장을 들고 왔다. 빵의 표면에 꾹 하고 도장을 찍으니, 나무 문양이 새겨졌다. 여관의 간판에 있는 문양이다.
“밖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걷다 보면 빵집이 나오거든. 거기에 맡겨두고 와.”
“빵집 오븐을 빌려서 사용하나요?”
“빌리는 게 아니라 이 구역 공용 오븐이야. 맡겨두고 나중에 오후에 가서 찾아오고.”
서둘러 공용 오븐에 빵을 맡기고 주방으로 달려오니, 이번에는 코시모가 작업대에 밀가루를 잔뜩 쌓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리 굼떠? 주방에 잡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모처럼 잡일꾼을 고용했는데 내가 다 해야겠어, 어?”
말은 그렇게 해도 한길은 속지 않았다. 굳이 한길에게 설명하면서 만드는 것보다 혼자 만드는 편이 편리하고 빠른 걸 알고 있으니까.
“보고 따라 해, 이게 피치라는 거다.”
피치(pici)는 여관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파스타로, 손으로 만든 생면 파스타였다.
밀가루 반죽을 치댄 후, 칼국수 면을 썰듯 기다란 가닥으로 썰어준다. 칼국수와 다른 점은, 썰어낸 면을 손으로 비벼서 둥근 모양을 만들어 준다는 것.
지우개 가루를 모아서 기다란 지렁이 모양을 만드는 것처럼. 작업대에 대고 면을 살살 굴려 가며 동그란 모양의 면을 만든다.
완성된 면은 스파게티보다 훨씬 굵다.
일반 커피점에서 사용하는 빨대 정도의 굵기다.
“똑같은 굵기로. 너무 길어서도 안 되고 너무 얇아도 안 돼.”
그렇게 뽑아낸 면발은, 서로 붙지 않게 밀가루를 묻혀두고 약 두 시간, 표면이 건조될 때까지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면 면을 1인분씩 모아서 털실 감듯이 감아둔다.
“코시모, 뭐 물어봐도 되나요?”
“뭐?”
“왜 건면은 안 쓰죠?”
주방에는 현대의 스파게티와 유사한 파스타 면도 있었다. 이미 건조된 상태로, 물에 넣고 끓이기만 해도 되는데···.
“손님이 안 시키니까 그러지. 비싸거든.”
“건면이 더 비싸요?”
“바다 건너오면 다 비싸지. 건면은 시칠리아에서 넘어온 거니까.”
수제로 만든 생 파스타가 더 저렴한 음식이었다.
적어도 북쪽 지역에서는.
“어제 빵가루 피치를 만드는 건 봤나?”
“네.”
“그럼 한번 만들어봐.”
면이 완성되자, 코시모는 팔짱을 끼며 시험감독 같은 자세로 지시를 내렸다.
“이건 너무 간단해서 요리라고 부르기도 뭐하고, 잡일 같은 거니까!”
굳이 어설픈 변명까지 하면서.
한길은 그릴 앞으로 가서 어제 어깨너머로 본 피치 파스타를 만들어 보았다.
코시모가 만드는 피치 파스타는, 굉장히 간단한 요리였다.
주재료는 단 네 개.
올리브유, 마늘, 빵가루, 그리고 치즈.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을 넣은 후, 마늘 특유의 구수한 향이 퍼지면 빵가루를 넣어준다. 마늘과 빵가루 황금빛을 유지하는 최대 순간까지 볶아준 후, 삶은 파스타 면을 넣어 준다.
불에서 내리고 마무리로 페카리노 치즈를 갈아서 올려준 후, 집게로 면을 휘휘 저어준다. 그러면 파스타의 열기에 자연스레 치즈가 녹으면서 잘박한 소스가 완성된다.
코시모는 아무 말 없이 한길이 만든 파스타를 맛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진 않네. 먹어봐.”
“네.”
‘이게 끝이야?’ 싶을 정도로 간단한 요리지만, 그 맛은 놀라웠다.
올리브유의 향과 마늘 향이 깔끔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만든 치즈를 바로 써서 그런가, 치즈의 풍미가 제대로 살아있었다. 농밀한 치즈 향은 면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었다.
소스는 소스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양이 적었지만, 그게 딱 적당했다.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양이라 왠지 모를 당당함이 느껴졌다.
채소도 단백질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면에 묻어있는 빵가루 튀김이 입안에서 터져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심플함의 결정체.
아무런 기교 없이, 순수하게 재료의 맛으로 승부를 건 파스타였다.
탄력 있는 면발. 올리브와 마늘. 치즈의 향이 각자 도드라지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항상 진한 화장을 하는 여배우의 민낯이 오히려 더 빛이 나는 것처럼. 군더더기 없는, 간단한 재료에서 나오는 청순미가 감탄을 자아내는 그런 맛이었다.
“오늘은 네치, 리볼리타, 피치. 이렇게 세 개 정도는 맡을 수 있겠지? 이 정도는 잡일에 가까우니까.”
“물론이죠.”
“아, 그리고 어제 한 잡일도 계속하고.”
작업대에 그릴을 세팅해 주면서도 굳이 ‘잡일’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게 웃음이 나왔지만, 간신히 웃음을 삼켰다.
많은 돈을 못 주는 대신, 미안함에 요리를 가르쳐 주는 거다. 자존심이 강해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그, 잡일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지?”
“잡일은 제 담당이니까, 제 방식대로 한번 해봐도 되나요?”
“뭘 하려고?”
“보시면 압니다. 혹시 글 쓰는 도구가 있을까요?”
#
“1번, 5번 주문!”
그 말과 함께 발렌티나가 손바닥만 한 태블릿을 들고 왔다.
밀랍으로 만든 태블릿은, 이곳 서민들이 사용하는 수첩이다. 밀랍으로 만든 칠판에 철로 된 연필로 글자를 새겨넣는 필기도구인데, 한번 쓰고 버리는 종이와 달리 여러 번 재사용이 가능하다.
“나야 주문을 까먹지 않아서 좋긴 한데, 이게 의미가 있어?”
“훨씬 편하죠.”
발렌티나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떠났고, 한길은 주문을 살폈다.
테이블 1의 주문은 네치 둘, 피치 하나.
테이블 5는 리볼리타 둘, 피치 둘.
주문에 따라 파스타 3인분을 준비하고, 면이 삶는 동안 네치와 리볼리타를 만들어 서빙했다. 면이 완성되면 같은 팬에 넣고 한꺼번에 조리한 후, 1인분씩 나눠서 서빙했다.
“완성이요.”
“엄청 빠르네? 여기, 7번, 8번, 3번도 주문!”
한길은 발렌티나에게 여러 테이블의 주문을 한꺼번에 받아오게 했다.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이것만으로도 효율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코시모는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순차적으로 주문을 처리하고 있었다. 집에서 요리를 만드는 것처럼. 하지만 식당에서는 적당히 모았다가 몰아서 처리하는 편이 빠르다.
요컨대, 볶음밥 1인분을 만들고 서빙하고, 다음으로 들어온 볶음밥 주문을 추가로 만드느니, 조금 기다렸다가 볶음밥 2인분을 한꺼번에 만드는 게 시간을 절약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물론, 주문이 모일 때까지 마냥 기다려서도 안 된다. 어느 정도 주방의 흐름을 읽고, 손님들이 주문할 요리를 예측해야 할 수 있는 일인데···.
어제 처음으로 들어온 주방이지만, 생각보다도 흐름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골목식당에서 혼자 주문을 처리해온 경험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이건 또 어떻게 생각해 냈대? 이 귀신 같은 놈!”
처음에는 굳이 복잡하게 필기를 해야 하나 구시렁대던 코시모도, 시간이 지나자 감탄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한 첫날은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지만, 이틀째가 되자 주방은 놀라울 정도로 한가해졌다.
“이 무식한 놈, 이런 걸 알려주면 너만 손해잖아?”
“뭐가요?”
“이렇게 한가해지면 잡일꾼이 필요 없어지잖아?”
“필요 없으시면 말해주세요. 언제든 가도 되니까.”
“건방진 놈.”
“어차피 쫓아낼 생각도 없잖아요?”
“그래서 네가 건방지다는 거야.”
“말조심하겠습니다.”
“갈 곳 없으면 말해. 한 놈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전 로마로 가야 해서요.”
“굳이 상인 집에서 일할 것 뭐 있어? 피렌체도 좋은 도시라고.”
“다음에 다시 올게요.”
여유가 생기니, 주방에서 코시모와 대화를 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솔직히···.
퀘스트만 없으면 이곳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코시모를 보면 어딘가 안타까웠으니까.
“코시모는 조금 더 비싼 메뉴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비싼 거라니, 뭐, 고기 같은 거?”
“네.”
“내가 안 해봤겠냐? 내가 토끼찜을 또 기가 막히게 하거든. 그래서 한번 팔아보려고 했었는데··· 우리 마누라만 살찌더라.”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안 팔리니까 우리 마누라만 끼니마다 고기를 먹였다고. 그런데 저놈의 여편네가, 남편이 모처럼 고기를 먹여주는데 잔소리만 하더라? 이 비싼 거, 갖다 팔면 얼만데··· 하면서. 그래서 그만뒀지, 뭐.”
“얼마 동안 판매했었는데요?”
“글쎄··· 한 달?”
지나가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코시모는 이내 길게 한숨을 뿜어냈다.
“처음에 식당을 차릴 때만 해도 세를 내기도 빠듯해서 수프만 팔았거든. 그런데 이게 수프만 알려지니까 다른 요리를 안 먹어.”
“세를 내요?”
“그럼, 시골에서 올라온 농부가 여관을 살 돈이 어딨어? 고기라도 팔리면 조금 도움이 될 텐데, 뭐, 어쩔 수 없지. 이런 운명인 것을.”
뭔지 알 것 같았다.
국밥집에서 고급 갈비찜을 먹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코시모의 토끼 요리는 먹어본 적이 없지만, 재료를 다루는 그의 실력만 보면 아마 상당히 맛있을 거다. 하지만 아무도 먹어볼 생각을 안 한다. 그래서 메뉴에 올리지도 못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코시모의 고민은 놀라울 정도로 익숙한 고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길도 같은 입장이었으니까.
‘도움을 주고 싶은데···.’
별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불린 왕비에게서 받은 보물 하나를 건네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내키지 않았다.
어쭙잖은 동정심이 되어버리니까. 분명, 그런 행동을 하면 코시모도 모욕으로 받아들일 거다.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 시대에는 방송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홍보수단도 없고···.’
숙소에 돌아와서도 계속 고민을 하는 한길을 보며, 마리오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뭔 생각을 그리하나?”
“별일 아니에요.”
“발렌티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네.”
“···.”
대화를 마치고도 마리오는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뭔가 말을 꺼내고 싶은데 쉽지 않은 모양이다.
“무슨 할 말 있으세요?”
“그, 혹시 로마로 가는 게 급한가?”
“느긋한 편은 아니죠. 왜요?”
“조금 더 있다 가면 어떨까 해서.”
“정 그러면 따로 가도 되기는 한데···.”
한길이 혼자 로마로 갈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노치니 일행과 함께 가고 싶었다. 여행에 익숙한 그들은, 어느 마을에 들러야 하는지, 언제 숙소를 잡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괜히 혼자 떠났다가 마을을 못 찾고 밤에 노숙하게 된다면, 산적이나 용병 단의 표적이 된다고 들었다. 이곳의 치안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일정이 달라지면 따로따로 움직여야 한다.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길은 로마로 가서 황제를 만나야 하니까. 언제 어떻게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로마에는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다.
“아, 너무 오래는 아니고 2-3일만 더 피렌체에 머무르다 가면 어떨까 해서.”
“무슨 일이 있나요?’
“아, 그, 별 건 아니고, 조금 신기한 볼거리가 있다고 해서.”
“볼거리라니, 뭐요?”
마리오는 괜히 무안한지 코를 긁적이며 말을 꺼냈다.
“메디치 가문에서 무슨 요리 대회를 한다더라고.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까 한번 구경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