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50)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50화(150/325)
150. 심사는 못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시선이 간 건, 하얀 살루미였다.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져 곱게 포개진 상태다.
‘이게 그 라르도구나.’
콜로나타에서 직접 수입한 대리석으로 만든 라르도(lardo).
“아직 빵이 따뜻할 때 라르도 먼저 올려서 드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레산드로는 손을 뻗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
아직 따끈따끈한 빵을 한 손에 들고, 서둘러 포크로 라르도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반투명한 라르도는, 실크 커튼처럼 빵 위에 걸쳐졌다.
‘와, 그사이에 녹네!’
토스트의 미열에도 금방 녹아 반질반질 윤기를 내고 있다. 이 상태로 입안으로 직진이다.
바삭!
토스트의 고소함이 먼저 퍼지고.
그 고소함을 크리미한 이불이 덮어버린다.
라르도는 보기에는 끈적이는 반투명 젤처럼 보인다. 하지만 혀에 닿는 순간 녹아서 혀를 기름칠한다.
질감은 올리브유처럼 매끄럽게.
향은 베이컨처럼 푸짐하게.
“맛이 어떤가요?”
“조흐으네요…”
“이번에는 올리브유와 아몬드, 훈제 소금을 조금씩 올려서 드셔보세요. 또 다른 맛이 날 거예요!”
그러고 보니. 살루미와 함께 나온 작은 사이드가 있었다.
시키는 대로 이번에는 토스트 위에 라르도를 올리고. 그 위에 잘 구워진 고소한 아몬드를 뿌렸다.
작은 개별 병에 담긴 올리브유를 뿌리니, 연둣빛 옷이 입혀진다.
여기에 소금도 한 꼬집!
바닷소금인지, 조금 거친 질감의 굵은 소금을 눈처럼 솔솔 뿌려주고… 다시 한 입!
“음!”
훈향이 더해진 소금은, 라르도 속에 있는 베이컨 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 준다.
아몬드의 견과 향도 좋지만…
그것보다도…
이 올리브유!
토스카나 특유의 매캐한 올리브유는, 목구멍을 살살 긁는 듯한 칼칼함이 있다. 그 칼칼함이 라르도의 기름기를 중화시켰다.
“아이쿠! 이거, 조금만 늦게 왔으면 와인을 맛보기도 전에 안주를 다 드셨겠네요. 베르나차 디 산 지미냐노입니다.”
서둘러 입안의 내용물을 삼키고, 소믈리에가 따라준 건 화이트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 마셨다.
청량한 액체가 목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온다. 잘 익은 과실의 향이 터진다. 희미하게 파인애플 같은 향이 나는 독특한 산미다.
다시 토스트 한입.
그리고 와인 한 모금.
이번에는 와인을 입안에 머금고 물 양치를 하듯이 오물거린다.
향긋함과 기분 좋은 기름기.
마음을 녹이는 만족감.
입이 배시시 풀려버렸다.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입꼬리는 주책맞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음, 좋군요”
행복이 별 게 있나.
맛있는 음식!
맛있는 와인!
이게 바로 행복이지!
“이번에는!”
짙은 붉은 색의 프로슈토를 토스트 위에 올리고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었다. 방금 썰어낸 신선한 프로슈토는 혀 위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한다.
발효된 햄에서 나는 복잡하게 얽힌 육향과 기분 좋은 염분.
게다가 이건 무언가… 익숙한… 뭐지…?
“아, 빵!”
“손님, 미각이 좋으시네요! 저희는 토스카나 빵을 사용하거든요. 물론, 토스카나에서 직접 가져오지는 않고. 인근 빵집에서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 빵을 받아오지요.”
토스카나 빵은 소금이 안 들어간다.
약간 쫀득하면서도 두툼한 빵은, 그 자체로 먹으면 심심하지만. 프로슈토와 함께 먹으면 염분의 농도를 적절하게 조절해준다.
“이번에는 레드로 가시죠! 루피노 어떻습니까!”
소믈리에가 건네준 루비색 와인.
화려한 열매의 향이 입안에 휘몰아치며 프로슈토의 잔향과 어우러졌다. 프로슈토 향을 지워버리거나 무식하게 덮어버리지 않는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춤추고 있다.
이것이 궁합!
허겁지겁 삼키고.
술로 부드럽게 목을 축이고.
또 삼키고.
축이고.
이러다 보니 순식간에 접시도, 잔도 비었다. 허전하다.
쩝.
허탈하게 하얀 접시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후각 레이더에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파파르델레 알 아나트라입니다.”
아까 눈과 코로 맛을 봤지만, 끝내 입안에는 넣지 못했던 그 요리! 검붉은 오리 라구가 소복이 올라간 파스타다.
이대로 승천해버릴 것 같…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암, 그러면 맛을 못 보니까.
파스타에서 따끈따끈 피어오르는 김에는, 라구의 풍미가 꽉꽉 차 있다. 냄새 만으로도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텅 비어버린다.
계란이 들어가서 노란빛을 머금은 넓적한 면발. 그 위에 올려진 짙은 갈색 소스.
바닥에 소스가 흐르지 않는, 건조한 파스타. 진짜 이탈리아식 파스타다.
양도 그리 많지 않다.
이탈리아에서는 파스타가 메인이 요리가 아니니까.
파스타 하나만 먹는 게 아니라, 파스타를 먹고 또 다른 메인을 먹기 때문에 적당한 양만 나온다.
‘외형은 합격이고, 어디!’
방금 전 살루미 한 접시를 해치웠는데도, 식욕이 또 고개를 쳐든다.
포크를 들고 소스를 마구 섞는다.
푹!
삼지창이 고기 조각과 몇 장의 면을 관통한다. 돌돌 감아서 말고 입안으로…
슈르르릅!
기분 좋게 튕기면서 빨려 들어오는 면발. 얼굴에 살짝 튀기는 소스를 닦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 이 맛이지!’
오리고기의 진한 향.
오리고기, 오리 기름, 오리 육수. 세 겹으로 맛을 두른 오리고기는 진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육향이 이렇게 진하면 무거울 법도 하지만. 토마토소스의 산미가 그 무게를 덜어준다. 소프리토의 감칠맛과 달곰함이 충족감을 주고. 소스에 들어간 와인의 타닌이, 이 모든 향을 혀에 밀착시켜준다.
츄르르르릅!
달곰한 향이 몸 안을 파고들면서 온기를 전한다. 온몸에서 힘이 불끈 솟는다.
시골스러운 맛이 주는 따뜻한 포만감.
고기는 씹는 맛이 있지만, 동시에 씹히면 바로 녹아내려 혀에 착 달라붙는다.
게다가!
이 면발!
파파르델레는 스파게티와 수제비 중간쯤 되는 두께다. 입안에 포동포동한 것이 날뛰는 게 느껴지는데, 이 정도 두께니까 이 묵직한 소스에도 지지 않고 탱탱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거다.
절묘하다.
“이번에는 이것도 같이 드시죠! 라구에 들어간 것과 동일한 와인입니다. 카스텔로 반피죠.”
얼굴을 들지도 않고 손을 내밀어 와인잔을 들고 와 입가에 대고 기울인다.
이번에도 레드 와인이다.
체리와 자두 계열의 과일 향이 입안에서 폭발하고, 약간의 스파이시한 끝맛을 남긴다.
키안티 와인은 산도가 높아 진한 고기를 가로지르고 달린다. 와인의 타닌 성분이 기름기를 걷어간다. 파우더를 뿌린 것처럼, 혓바닥이 건조된다.
그 말인즉슨,
다시 먹을 수 있다!
츄르르릅!
“여기, 껍질도 같이 드세요!”
‘왜 이걸 못 봤지?’
파스타 옆에 작은 종자에는, 아까 본 오리 껍질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져 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맛있어 보인다.
바삭!
크리스피한 껍질에서 오리의 감칠맛이 폭발한다. 감자칩 같은 바삭함이지만, 건조하지 않고 촉촉하다. 그러면서 미묘하게 쫀득함도 있고!
꿀꺽. 꿀꺽.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고기와 푹 고아낸 고기 소스. 쫀득한 탄력의 파스타. 바삭한 오리 껍질 튀김과 향긋한 와인!
“하아아아….”
너무나 황홀하면서도 따뜻하다.
이건…
할머니의 손맛이다.
요즘 시대처럼 서둘러서 급하게 한 끼를 뚝딱 만든 게 아니다.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해주려고, 하루종일 주방에 서서 정성으로 빚어낸 맛이다.
정성과 성의와 마음이 가득 담긴 맛.
소울푸드라는 말은 이것을 위해 있는 거다.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존재가 있었다.
“비스떼카 피오렌티나입니다.”
웅장함이 느껴지는 스테이크!
손가락 네 개 높이의 압도적인 크기!
화염이 스친 자국이 그대로 묻어있어 더욱 늠름해 보인다.
“썰어드릴까요, 아니면 직접 하시겠어요?”
“직접!”
포크와 나이프를 각자 한 손에 쥐어 들고 공격한다. T자형으로 가운데에 자리 잡은 뼈를 피해서 살코기만 찍어 썰어…
주르르륵!
칼날이 닿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붉은 빛!
이거야말로 알 상그(al sangue)!
핏빛!
진짜 비스떼까 피오렌티나는 양념이 없다.
소금이나 후추조차 뿌리지 않는다. 이 빨간 핏물과도 같은 육즙이 소스 역할을 하니까.
우선 한 조각만 썰어서 들어 올리자, 날것에 가까운 새빨간 속살이 눈을 찌른다.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고기가 아니라, 새빨간 립스틱을 칠한 듯한… 당당하고도 화려한 적색.
비스떼까 피오렌티나는 레어가 정답이다.
피렌체에서 조금만 유명한 식당에 가서 레어가 아니게 구워달라고 하면, 가차 없이 쫓겨난다.
이 맛이 있으니까.
이게 바로 전통!
늠름한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씹자, 육즙이 입안에서 용솟음친다. 육즙조차 힘이 넘친다.
쫄깃쫄깃.
거침없는 탄력.
참숯의 훈향이 살짝 스쳐 간다.
씹을 때마다 육즙이 멈추지 않고 뿜어져 나온다.
비스떼까 피오렌티나는 스테이크가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 전혀 다른 요리.
진짜 비스떼까 피오렌티나는, 아무 조미료 없이 고기를 참숯에서만 굽는다. 심플하고 빠르게, 태고에서 먹듯이 굽는 그런 맛이다.
오로지 고기 맛과 불맛으로만 먹는다.
이 맛은 고기가 좋아야…
‘어? 키아니나는 한국에 수입이 안 될 텐데?’
소고기 자체의 맛을 즐기는 이 스테이크를… 어떻게 만든 거지?
“이건 무슨 고기죠? 키아니나는 아닌데, 이런 맛이 나는 고기가 국내에 있어요?”
“역시 손님! 대단한 미각이네요! 네, 아쉽게도 키아니나는 못 구하고, 대신에 영국의 고대 종인 화이트 파크 비프를 드라이에이징한 겁니다. 뭐, 동시대를 살아갔으니 키아니나의 친척쯤 되려나요. 이것도 앞으로 20인분밖에 안 남았는데, 손님은 정말 운이 좋은 겁니다!”
행운이다. 아니, 축복이다.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을 정도로.
소믈리에가 건네주는 와인으로 입안을 정리하며, 또 씹고 씹기에 바빴다.
적당히 식탐을 채우고 살짝 물린다는 생각이 들 때, 사이드로 나온 콩을 한 스푼 떠먹는다.
하얀 강낭콩처럼 생겼지만 이건, 카넬리니 콩이다. 올리브유만 살짝 뿌려 버무린 게 분명한데도, 맛에 부족함이 없다.
‘이건 아까랑 다른 올리브유네.’
요리마다 나오는 올리브유도 다르다.
향이 강한 이탈리아 올리브유이기에 가능한 거다.
이처럼 재료 맛을 완벽하게 살리는 요리라니!
이것이야말로 이탈리아!
“와… 손님, 이걸 다 드시네요! 보통 두어 명이 나눠 먹는데!”
소믈리에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말 고기는 한 조각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귀한 재료니까 버리면 안 되니까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왠지 야만인이 된 느낌이다.
비스떼까 피오렌티나를 혼자 다 먹는 건, 괴물이다.
어떻게 이걸 다 먹었지?
이래서는 디저트를 먹을 배가…
“칸투치(cantucci)와 빈 산토(vin santo)입니다.”
아니지.
원래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지 않나?
암, 그렇고말고.
마지막 요리.
이탈리안 디저트인 돌체다.
길쭉한 타원형 칸투치는 두 번 구운 비스킷으로, 바삭함이 생명인 과자다.
이건, 고대 로마 시대부터 군인들이 먹었다고 하는 요리. 아몬드를 넣고 딱딱하게 구워낸 비스킷은, 오랜 원정에도 상하지 않는 최고의 보존식이다.
물론, 이대로 먹으면 이빨이 아프니 먹는 방법이 따로 있다.
“빈 산토와 함께라니! 정말 이건 귀하네요.”
“먹는 방법은… 안 알려드려도 되죠?”
“하하, 그럼요. 이탈리아 사람에게!”
빈 산토는 호박색에 가까운 신비로운 빛을 내는, 짙은 주황빛의 와인이다.
빈 산토 (vin santo)는 성자의 와인이라는 뜻이다. 중세시대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이 와인을 약처럼 먹었다는 설이 있다.
그야말로 축복의 와인!
늦가을에 수확한 포도를 부활절 직전, 성주간(Holy Week)까지 건조하면. 포도의 수분이 다 날아가고 건포도처럼 쪼그라들어 당분만 남는다. 그 포도를 최소 3년간 발효시킨, 달콤하면서도 신성한 디저트 와인.
이 와인은 꿀처럼 따뜻하면서, 끝 맛은 집요할 정도로 달다. 어딘가 말린 살구를 닮은 달달함.
그래서 설탕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칸투치와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이걸 한국에서 먹을 줄이야!’
알렉산드로는 길쭉한 비스킷을 손으로 들어 올린 후, 투명한 와인잔에 비스킷을 그대로 담갔다.
그리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너무 오래 두면 비스킷이 녹아내려 와인이 탁해진다. 달달한 액체가 스펀지처럼 비스킷 안으로 스며들 정도로만.
바삭!
칸투치는 아직 조직감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냥 먹을 때만큼 이가 아플 정도로 딱딱하진 않다.
씹을 때마다 그 기공 속에 가둬둔 와인이 뿜어져 나온다.
고소한 아몬드 향!
오븐의 열기를 두 번이나 입은 바삭함!
은은한 버터 향과 와인의 단맛!
그리고 약간의 휘발성이 더해진 씁쓰름한 알코올 향까지!
‘그래, 이거야, 이거!’
눈을 감으면 토스카나 어딘가에 있는 트라토리아에 와 있는 것 같다.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집에 안 간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몰랐는데, 이렇게 친숙한 맛에 몸을 내어주니, 갑자기 미친 듯이 집이 그리워졌다.
“다른 음료라도 더 가져다드릴까요?”
눈을 떠 보니…
식사는 이미 끝나 있었다.
허탈했다.
속이 텅 빈 것처럼.
좋은 영화를 몰입해서 보다가 영화관에 불이 켜졌을 때의 그 기분이다.
스토리도 완벽했고 결말도 완벽했지만….
차가운 형광등 아래 홀로 덩그러니 놓이니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어졌다.
이건… 아쉬움과 갈증이다.
이렇게 배가 부른데 갈증이 느껴지다니…
“식사는 잘하셨나요?”
셰프가 나오자, 절로 기립 박수를 하고 싶어졌지만, 간신히 체면을 생각해 참았다.
알레산드로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토스카나의, 아니, 이탈리아의 정수를 담은 한 끼였습니다.”
이런 요리가 한국에 있다는 게 축복이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매 코스, 매 요리가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네 개의 요리밖에 먹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잠시 소소한 대화가 오간 후, 남자 셰프가 물었다.
“그래서, 심사 결과는 언제 나오나요? 절차를 잘 몰라서요.”
알레산드로는 잠시 망설였다.
완벽한 한 끼였다.
하지만…
동시에 계속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걸 말하는 순간, 주워 담지 못한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다.
그래도…
욕심이 난다.
알레산드로는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하지만… 심사를 못 하겠습니다.”
“네?”
남자 셰프도, 여자 셰프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토끼 눈을 뜨며 자신을 바라봤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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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신성한 경험이었다.
마치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하고 나온 기분이다. 절로 무릎을 꿇고 찬양하게 되는, 그런 한 끼였다.
하지만.
알레산드로는 그렇게 신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성당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평범한 사람이다. 그것도 사업인.
막이 올라가고 차가운 형광등 아래 있으니,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이건, 기회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제안이라니요?”
“제가 재료 수입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었죠. 사실, 저만 하는 게 아니라 저희 집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꽤 규모 있는 물류 업체를 하고 있죠. 저만 한국에 나와 있는 셈이고요.”
남자 셰프는 참을성을 갖고 들어주고 있었지만. 여자 셰프는 ‘그걸 왜 말하는데?’하며 따지는 얼굴이었다.
“이 레스토랑에 재료를 납품하고 싶습니다.”
“네?”
이번에는 둘 다 벙찐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욕심이 나는걸?’
이곳의 식사는 한 접시, 한 접시.
재료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했다.
직접 만든 살루미는 그렇다 치고.
와인 한잔.
올리브유 한 모금까지.
이 맛에 익숙한 알레산드로도 그렇게 느꼈는데… 이 맛을 모르는 한국인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올 거다.
“여기 올리브유는 어디 제품을 썼는지, 혹시 손님들이 물어보지 않나요?”
“네, 가끔.”
“그때 뭐라고 알려드리나요?”
“제품명을 알려드리기는 하는데…”
“일반인이 구하기 어렵겠죠.”
“그렇습니다.”
“그 손님들이 물어볼 때, 제 업체에서 구입할 수 있다는 정보를 주시면 됩니다.”
이곳은 전 국민의 주목을 받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리고 분명, 이 인기는 지속될 거다.
이곳을 쇼윈도처럼 활용한다면?
알레산드로는 이탈리아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재료를 구해왔지만,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이탈리아의 재료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아예 모르니까 관심을 둘 수 조차 없었다.
그걸 여기서…
“죄송하지만, 저희는 이미 납품을 받는 업체가 있습니다.”
“그러시겠죠. 그래서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알레산드로는 서류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고 그 위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종이를 지익 찢어서 뒤집은 채로 테이블에 올리고 두 셰프를 향해 내밀었다.
오퍼.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본 두 사람은, 사뭇 놀란 얼굴이었다.
‘그렇지, 남기는 게 거의 없으니까.’
파격적인 제안이다.
알레산드로 입장에서는 남는 게 없는 장사.
하지만…
광고비에도 몇억이 들어가는데.
그렇게 돈을 들여도 효과가 없었다.
하지면 여기는 분명 효과가 바로 나타날 거다.
이곳을 찾아오는 고객들은, 처음부터 이탈리아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설령 우연히 찾아왔다 하더라도, 여기 요리를 맛보면 없던 관심도 생길 거다.
“보시다시피, 원가에 가까운 비율입니다. 저는 모든 재료를 현지에서 도매가로 구해오죠. 운송비와 세관 수수료를 제외하고 그냥 드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 대신, 저희는 무얼 하면 되는 거죠?”
“이 재료에 대한 질문을 하는 고객들에게 저희 브로슈어를 나눠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외부 홍보도 하고 싶습니다. 이 레스토랑의 재료는 저희가 납품한다고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 말입니다. 물론, 홍보비는 저희 쪽에서 부담하고요.”
이 정도도 좋은 제안일 테지만, 저쪽에는 아직 망설임이 보인다.
그렇다면…
“게다가, 저는 수시로 이탈리아 출장을 갑니다. 필요하신 재료가 있다면, 현지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소량이라도 들여올 수 있게 힘을 쓸 테고요.”
이번에는 반응이 보였다.
대부분의 수입 업체는, 일정 수요가 있는 제품만 취급한다. 하지만, 이 레스토랑의 특성상 분명 대중이 원하는 재료가 아닌, 희귀한 재료를 앞으로도 많이 찾을 거다.
다른 재료상들은 한 고객만을 위한 재료 수급을 선호하지 않는다. 분명 두 배, 세 배에 달하는 수수료를 요구할 테지만…
그걸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음.. 상의해 보고 연락을 드리죠.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심사는…”
“죄송하지만, 이 말을 꺼낸 순간부터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심사할 수는 없죠.”
셰프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이미 제안을 한 시점에서 심사의 공정성은 날아간 거다.
그걸 깨달았는지, 여자 셰프는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일방적으로 이러면 우리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생각은 안 했어요?”
하루를 통으로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지금의 국내 여론 상, 저들은 빠른 심사를 원할 거다.
알레산드로는 다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래서 사과드리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사과한 후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남자 셰프가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업 건은 일단 나중에 따로 얘기를 나누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심사 일정이 어떻게 바뀌는지는 지금 알고 싶군요.”
“제가 빠지게 되면, 심사하실 분이 한 분밖에 안 계시죠. 저희 식음료위원회의 회장님이십니다.”
“회장님이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 마르코 로씨 셰프님이십니다. 서울 호텔의 일루미나티 레스토랑의 총주방장을 맡고 계시죠.”
“로씨…?”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졌다.
저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번거롭고.
난이도가 올라간 셈이니까.
“그.. 몇 년 전, 교황 성하가 방한했을 때 찾았던 레스토랑 있죠. 그때 꽤 크게 기사도 났는데… 그곳을 책임지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