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54)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54화(154/325)
154. 허락을 받아야지
“직접 보여주시려고요?”
스카피가 작업대 앞에 서자, 한길은 저도 모르게 질문했다. 설마 스카피가 직접 나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왜, 나는 요리하면 안 되나?”
“그건 아니지만…”
“웃기는 놈이네, 이거. 나는 대주교 예하의 주방에서 요리하고 싶다는 놈이, 이탈리아 요리를 모른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데?”
그건 그랬다.
물론, 한길이 이탈리아 요리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현대에서도 공부는 충실하게 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500년 전 이탈리아 요리를 모를 뿐이다.
로마의 요리도 책으로만 읽고 아직은 직접 만들어보지 못했고.
‘요즘 너무 바빴으니까.’
최근에는 레스토랑에서 판매하는 토스카나 요리만 주구장창 만들었었다. 한가할 때는 이미 거쳐온 리구리아나 에밀리아로마냐주 요리를 만들었고.
즉, 복습만 하고 예습할 시간은 없었다.
“그런데, 로마 3대 파스타가 뭔지는 아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는 뭐지?”
무의식적으로 애매한 답변이 나와버렸다.
로마에는 4대 파스타가 있다.
그중 하나는 토마토가 들어가는 아마트리치아나. 아직 토마토가 대중화되지 않았으니, 그걸 제외하면 딱 3대 파스타가 되긴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면 말을 아끼는 편이 좋다.
“마크라고 했던가? 이름만 보면 선인데…”
“네?”
“아니, 그냥 못 들은 거로 하지. 처음은 카치오 에 페페! 한 번만 보여줄 테니 잘 봐 둬! 이 아름다움을 욕보이면 천사고 악마고 간에 바로 주방에서 쫓아낼 테니까!”
로마의 명물 파스타, 그 첫 번째.
카치오 에 페페(cacio e pepe).
여기서 카치오는 치즈, 페페는 후추를 뜻한다.
재료는 단 세 개.
파스타, 후추, 그리고 치즈다.
“여기, 치즈 들고 왔습니다.”
“잘했어! 이봐, 마크!”
스카피는 주방 보조가 들고 온 치즈를 바로 한길의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고릿한 향이 코안을 사정없이 찔렀다.
“한번 맛보고 시작하지?”
저건 그냥 먹기에는 조금 강한데…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1등급)가 고르메 상점에 등록되었습니다.]“치즈는 페코리노 로마노(pecorino romano)를 쓰지. 무슨 일이 있어도 로마노! 사르도는 훈향이 나서 꺼슬꺼슬하고, 토스카나는 단맛이 나서 밸런스가 끔찍하지. 역시, 로마 요리는 로마 재료로!”
페코리노 로마노는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명물 치즈로 알려져 있다.
파르미지아노는 초보도 쉽게 먹을 수 있지만, 페코리노는 어느 정도 치즈를 먹어본 사람들만 그 맛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소젖으로 만들고 오랜 기간 발효한 파르미지아노는, 순하고 농밀한 맛이다. 반면, 양젖으로 만들고 발효 기간이 비교적 짧은 페코리노는, 혀를 바늘로 찌르듯이 강렬하다.
한국으로 치면 된장과 청국장의 차이 정도 되려나.
이탈리아 맛에 익숙한 소희는 페코리노를 사탕 집어 먹듯 수시로 주워 먹었는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한길은 기겁했었다. 아직 이 맛에 적응하는 한길에게는, 청국장을 생으로 떠먹는 것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크! 다음에는 이걸.”
이번에는 스카피가 하얀 가루를 내밀었다.
커다란 입자의 하얀 결정체…
굵은 소금이다. 파스타의 간을 맞출 때 사용하는.
“뭐해? 한 줌만 집어봐.”
“제가요?”
“그럼 여기 또 마크가 있나?”
시키는 대로 소금을 한 줌 집어 들자, 스카피가 한길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아무 이상 없나?”
“무슨 이상이요?”
“잠시만, 그대로!”
스카피는 소금을 한 줌 가득 집더니,
촤락!
갑자기 한길에게 소금을 뿌렸다. 아픈 건 아니지만, 근거리에서 제법 세게 던져서 따끔했다.
“멀쩡하군. 하긴, 이 정도로 사라지면 잔챙이지.”
스카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난데없이 소금 벼락을 맞은 한길의 입장에서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방금 뭘 하신 거죠?”
“자네는 이 주방에 처음 왔으니까. 소금으로 정화하고 시작하는 거지.”
“예하의 주방에서는 이렇게 하나요?”
“바로 그거지! 다른 누구도 아닌, 대주교 예하의 주방인데! 이처럼 성스러운 곳이 어딨나, 하하하…”
스카피는 크게 헛웃음을 치더니, 재료를 점검했다.
‘이게 본성인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과묵하고 근엄한 분위기였는데, 입을 열면 열수록 생각과는 다른 이미지였다.
아피키우스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훨씬 젊기도 젊었고.
이미 은퇴하고 손자 손녀까지 있던 아피키우스와 달리, 스카피는 현대의 노문배 셰프와 비슷한 나이다. 차분하고 현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아피키우스와는 달리, 젊음의 에너지가 있었다.
그야말로 파르미지아노와 페코리노의 차이.
“크흠, 그럼 시작하지!”
짧은 외침과 함께 스카피는 요리를 시작했다.
‘진짜 간단하네.’
카치오 에 페페는 조리법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쉬웠다.
우선, 끓는 물에 피치 파스타를 삶는다.
면이 적당히 삶아지면, 커다란 보올에 다진 페코리노 치즈를 넣고 면수를 조금 추가해서 섞어준다. 숟가락으로 쉴 새 없이 휘휘 저어주면, 치즈는 뜨거운 면수에 녹아서 아이보리빛 치즈 소스로 변한다.
그다음에는 통후추를 갈아서 별도의 팬에서 살살 볶아준다. 치즈 소스에 볶은 통후추를 넣고, 파스타가 완성되면 이 치즈 소스에 넣어서 버무려준다.
그러면 완성.
“어때, 아름답지 않나?”
“맛을 봐도 되나요?”
“그럼, 맛도 안 보고 똑같이 만들려고?”
심플한 요리지만, 스카피의 말대로 아름다운 요리였다.
파스타는 피치 파스타.
스파게티의 세 배 굵기는 되어 보이는 굵은 면이다.
면은 반들반들 윤이 나고 있었다.
하얀색도 아이보리색도 아닌, 진줏빛.
어딘가 영롱한 느낌을 주는 신비로운 하얀 옷의 중간중간에 후추 얼룩이 묻어있었다.
버터, 올리브유, 우유, 크림.
그 어느 것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호사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로 크리미해 보였다.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고 입안에 넣자,
“…!”
치즈의 풍미를 온몸에 두른 면발이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억센 페코리노 향은 어느새 무뎌져 적당히 펑키한 향만 내고 있었다.
꼬릿함과 고소함의 사이.
강렬한 치즈 냄새가 코를 자극했지만, 맛은 놀랄 만큼 순하면서도 특유의 풍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동통한 면발.
농후한 맛의 치즈.
매콤한 후추 향.
다른 요리에서는 후추가 간을 맞추기 위해 사용되지만, 이 요리에서는 맛의 주축을 담당했다.
페코리노만 사용하면 느끼했을 거다. 후추가 적당량만 들어가도 마찬가지이고.
하지만 한번 볶아 두 배의 매콤함을 두른 후추는, 넉넉한 양으로 들어가 있어 치즈에 팽팽하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어때, 똑같이 만들 수 있겠나?”
“한번 해보겠습니다.”
스카피는 자리를 비켜줬고, 한길은 작업대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후루룩 뚝딱 만드는 것 같지만, 스카피의 조리법에는 수많은 비법이 숨어있었다.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관찰하면서 ‘이건 왜 이러지?’하는 의문이 들었던 부분들이 있다. 그게 비법이다.
‘우선은 파스타.’
스카피는 파스타 면수에 소금을 조금만 넣었다. 페코리노 치즈에 염분이 많으니 소금 농도를 낮춘 거다.
파스타 물도 많은 양을 쓰지 않았다. 일부러 조금 부족한 양을 사용했다.
‘전분 때문이겠지.’
면수의 전분 농도를 높이기 위해서.
현대의 과학지식이 있는 한길은, 오히려 스카피 보다도 그 원리를 더 잘 이해했다.
치즈에 그냥 물을 넣으면 잘 섞이지 않는다. 치즈에는 유지방이 있으니까.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
그래서 전분을 쓴다.
파스타의 전분이 담긴 면수는, 물과 기름을 엮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전분의 농도가 높을수록, 소스는 조화롭게 유화된다.
‘다음은…’
냄비가 보글보글 끓어오르자, 한길은 국자를 이용하여 면수를 조금 덜어냈다. 면수는 바로 치즈에 투입하는 대신, 조금 식혀둔다.
‘온도를 맞춰야지.’
페코리노 치즈는 까다로운 치즈다. 녹는 점이 애매하니까.
미지근한 온도에서는 잘 녹지 않지만, 너무 뜨거운 물을 부어도 단백질 결합이 깨지고 만다. 그러면 실키한 소스가 아니라, 지저분한 덩어리가 된다.
적당히 식혀준 면수를 쓰고 사정없이 저어주면, 벨벳처럼 매끄러운 소스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파스타를 넣고 버무린다.
“완성되었습니다.”
눈을 크게 뜨며 옆에서 지켜보던 스카피는, 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정도는 당연한 건가?”
“네?”
“아니. 다음은 그리치아로 가지, 파스타는 리가토니! 홈이 있어서 소스가 착 달라붙거든. 쉽게 말하면, 이 아름다움에 돼지를 끌고 오는 거고!”
로마의 두 번째 명물 파스타.
리가토니 알레 그리치아(rigatoni alla gricia).
이건 4대 파스타 중 덜 알려진 편에 속한다. 방금 만든 치즈-후추 파스타에 구안찰레를 추가해서 만든다.
구안찰레는 겉보기에는 베이컨 같다. 하지만 돼지의 볼살로 만든 살루미로, 훈제향도 없다.
“판체타를 대신 사용하면 안 되나요?”
“절대 안 돼!”
현대에서는 구안찰레를 구하기 어려우니, 베이컨이나 판체타를 대신 사용할 때가 많다.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스카피는 온몸에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구안찰레는 구안찰레! 판체타는 판체타! 순해 빠진 판체타로 페코리노에 이길 수 있겠나?”
하긴.
비슷해 보여도, 고기는 부위마다 맛이 다르다.
항정살과 가브리살도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고. 등심과 안심은 그 차이가 더 심하다. 그완찰레와 판체타도 당연히 다른 맛이고.
이번에도 한길은 유심히 스카피의 조리법을 지켜보았다. 열중해서 관찰하고, 위화감이 드는 부분을 마음속에 메모해 둔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그 이유를 생각하면, 금방 비법이 보였다.
“할 수 있겠나?”
“물론이죠.”
이번에는 굳이 눈을 감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치아 파스타의 비결은 구안찰레.
차가운 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은 상태에서 구안찰레를 볶아준다. 시간이 지나면,
지글지글!
구안찰레의 지방이 빠져나와 팬 안에 가득 고인다.
렌더링 (rendering) 기법.
한길의 레스토랑에서 오리고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저온에서 조금씩 온도를 높여주면, 고체화된 지방을 모두 기름으로 변환할 수 있다. 돼지기름에서 볶아낸 베이컨인 셈이다.
짙은 갈색으로 바삭하게 구워진 구안찰레를 덜어내고, 돼지기름 안에 삶은 파스타를 넣는다.
치이이익!
면수를 넣어주고 휘휘 저어주면, 돼지기름 소스가 파스타에 찰싹 달라붙는다.
이 과정을 마치면, 아까와 마찬가지로 치즈-후추 소스에 버무린다. 바싹 익힌 구안찰레는 고명으로 올려준다.
스카피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은 스파게티 알라 카르보나라 (spaghetti alla carbonara). 돼지를 끌어왔으면, 이번에는 계란을 더해줘야지!”
이번에는 한길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카르보나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파스타다.
한국에서 자주 먹는 카르보나라는, 미국 이민자들에 의해 변형된 형태다. 우유나 크림이 들어간 소스를 사용하니까.
정통 이탈리아 카르보나라에는 우유도, 버터도, 크림도 들어가지 않는다.
추가되는 재료는 단 하나.
방금의 그리치아에 계란이 들어간다.
이번에도 한길은 스카피의 조리법을 보고 비법을 그대로 복사했다.
렌더링으로 구안찰레를 저온에서 볶아 기름을 빼준다. 파스타 면수를 삶는다.
여기까지는 같지만…
한 가지 과정이 추가된다.
계란을 풀어 계란물을 만들고, 치즈-후추 소스에 더해준다.
‘이것도 결국은 온도네.’
지나치게 뜨거운 면수를 사용하면, 치즈도 뭉치지만 계란도 스크램블 에그가 된다. 적당히 식힌 면수를 사용하는 게 비법이다.
어떻게 보면 허무할 정도로 쉬운 비법이지만… 각 재료의 특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빠르고 간편하게 조리하는 요리다.
“완성입니다.”
카르보나라는 새하얀 진줏빛이 아니다. 계란이 들어간 노란 크림이 면발을 하나하나 코팅하고 있다.
“저도 먹어봐도 될까요?”
처음 만든 카르보나라 맛이 어떤지 궁금해졌다. 스카피의 허락을 받고 넉넉한 양을 돌돌 말아 입안으로 넣자,
후루룩!
면발이 튕기듯이 말려서 들어왔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돼지의 향.
구안찰레는, 베이컨과 삼겹살 중간의 향을 품고 있었다. 먹으면서도 절로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향이다. 잘 익은 구안찰레가 빠작빠작 씹힐 때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쾌감이 온몸을 꿰뚫었다.
한국에서 먹는 카르보나라보다 짜다.
수분으로, 우유로, 크림으로 맛을 흐리멍덩하게 만들지 않았으니까.
진한 돼지 향에 똑같이 진한 페코리노 치즈가 맞선다. 매콤한 후추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윤택하면서도 부드러운 계란 노른자가 이 모든 맛을 어루어 달래며 엮어준다.
푸근하고 편안한 맛은 아니다. 짭조름하면서도 톡 쏘는, 생기 넘치는 맛이다.
“축하하네, 오늘부터 함께 일하겠군.”
스카피가 합격을 알렸지만, 그건 이미 예상하던 바였다. 파스타를 만들 때부터 스카피의 태도가 누그러져 있었으니까. 중요한 건, 합격이 아니라 어떤 포지션인지.
“바로 쿠오코(cuoco)로 합류해도 되겠군.”
“쿠오코도 예하의 요리를 만드나요?”
“참나, 이놈 봐라?”
스카피는 웃고 있었다. 마냥 즐거운 웃음이 아니라, 살짝 비틀린 아이러니한 웃음이다.
“쿠오코 델 포레스티에리(cuoco dell forestieri), 예하의 손님을 담당하는 요리사지. 손님이 없을 때는 다른 구역에도 투입되고.”
헤드 셰프는 아니지만, 제법 높은 지위다.
“건방진 놈이네, 이거. 원래 같으면 보조부터 시작하는데 말이지.”
“그런가요?”
“뭐, 건방진 것도 당연한 건가? 그럼, 결정 난 김에 당장 가볼까?”
“어딜요?”
“어디긴, 허락을 받으러 가야지.”
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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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온 요리사라고?”
“그렇습니다. 오늘부터 계약하고 바로 시작했으면 합니다.”
스카피는 한 명의 남자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한 말투로 답했다. 아까의 활발한 태도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상대는 생각보다 젊었다.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
남자는 한 손으로 연신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제법 멋들어진 콧수염과 턱수염이지만, 어딘가 나이에 맞지 않은 느낌이었다. 어린아이가 양복을 입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가발을 쓴 사람을 보면 계속 시선이 가듯이, 한길은 저도 모르게 계속 남자의 콧수염을 살피게 되었다.
‘저 사람이 스칼코인가…’
이곳에 오는 도중, 스카피가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눈앞의 인물은 엔리코 모라티라는 인물로 이 집의 소프라스칼코(soprascalco). 즉, 총괄 집사를 맡고 있다고.
까탈스러운 인물이니 질문에만 답하고 조용히 있으라는 말도 했었다.
“이름이 뭐지?”
“마크입니다.”
“마크?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가?”
“영국에서 왔습니다.”
“참나, 영국?”
역시나.
집사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하, 저도 어이없긴 했지만, 사람 구하기 어려운 시기 아닙니까. 조만간 있을 ‘행사’ 때문에 여관 요리사도 구하기 힘든데, 아쉬운 대로 영국인이라도 써야죠.”
“그건 그렇지.”
스카피는, 이번에는 태평해 보이는 말투로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간단한 조리 실력 정도는 확인했습니다. 조금 손이 많이 가지만, 제가 책임지고 어떻게든 끌고 가겠습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손이 두 개라도 달려 있으니 좋죠. 지금 상황에서는 말귀를 알아듣는 당나귀라도 있으면 도움이 되니까요.”
집사는 대답 대신 수염을 쓰다듬었고, 스카피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말투로 보나 태도로 보나, 스카피는 집사를 직속상관처럼 대하고 있었다.
‘원래 집사가 더 높은 건가? 영국에도 이랬던가?’
영국 궁전에서는 집사라는 직책에 딱히 신경을 쓴 적이 없다. 워낙 관리가 많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한길은 왕비의 전속 요리사인 만큼 자유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집사가 감히 왕비의 마스터 쿡에게 딴지를 걸 수는 없었다.
‘아피키우스 때는…’
그때도 필요한 재료는 항상 집사가 구해왔지만, 주방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피키우스는 황제의 미식 자문이었다.
일반적인 귀족은 아니다.
“계약 조건은 일반적인 조건으로 진행했으면 좋겠는데요.”
스카피는 한길을 대신해서 임금 협상에 들어갔다. 이곳의 임금 수준은 잘 모르지만, 집사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일그러지는 걸 보아하니, 제법 후하게 쳐준 모양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요리사의 대우도 포함했으면 합니다. 침대가 마련된 방, 양초는 일주일에 다섯 개, 방에 빗자루 하나와 추운 날 사용할 장작은 일반 소토 스칼코(sottoscalco: 집사 견습생) 수준으로…”
계약 조건에는 기본 주거 환경뿐 아니라 하루에 얻을 식량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엄청 상세하네.’
한길은 티를 내지 않았지만, 계약 조건에 놀라는 중이었고, 그건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유는 달랐지만 말이다.
“영국인에게 이탈리아인과 똑같은 조건을 제공한다고?”
“그래야 의욕이라도 생겨서 능력 이상을 발휘하지 않겠습니까? ‘행사’ 때문에 사람이 안 구해져서 저도 똥줄이 탑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제 할 몫을 못 하면 바로 쫓아내야죠.”
“행사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때 늑대고기를 들여오는 건 어떨까 싶네. 아는 분의 사냥터에 요즘 늑대가 나온다는데 구해올 수 있을 것 같거든. 흔치 않은 재료니까 화제가 되지 않겠나?”
“그게… 사실, 제가 늑대는 다뤄본 적이 없지 말입니다. 이렇게 인력이 부족한 시점에 새로운 요리를 만드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하하하…”
연이어 계속 나오는 단어 ‘행사.’
한길의 추측이 맞다면, 황제의 방문을 뜻하는 거다.
집사는 기분이 좋지 않은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자세한 건 늑대가 들어오면 다시 얘기하고. 내일은 금요일이군. 점심은 바다거북이, 저녁은 참치를 냈으면 하는데.”
“거북이는 당장 준비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도축해도 피가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살을 연하게 만드는 작업도 하루 이상 필요합니다. 다음 주 금요일에 만들어보겠습니다.”
“참치는?”
“그것도 원래 생선을 잘 다루던 요리사가 갑자기 그만둬버려서 당장은 어렵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지금 주방에는 갓 쿠오코로 올라온 견습생들뿐입니다. 아까운 참치만 난도질 할걸요, 하하. 차근차근, 지금부터라도 훈련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
“스칼코는 평일 식사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으시니까요. 이런 사소한 일은 제가 처리하죠. 그럼, 이만 식사 준비를 해야 해서 나가보겠습니다.”
스카피는 공손한 말투와 능글맞은 웃음을 번갈아 사용하며 거절하기 바빴다. 그럴 때마다 집사의 얼굴은 더욱 구겨졌다. 둘 사이의 신경전에 한길이 불편할 정도였다.
인사를 하고 출구로 향하는 도중에도, 등 뒤에서 집사가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이봐, 영국인!”
한길이 돌아보자, 집사는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실수하지 말고 제대로 해, 네놈이 실수하면 스카피가 곤란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