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60)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60화(160/325)
160. 8코스, 380접시
D-5
“정신 차리고 똑바로 들어. 시간이 없으니까.”
“연회는 5일 후 아닌가요?”
“예하께서 앞으로 며칠간 출타하시니까. 그동안 미리 준비 안 하면 나중에 똥줄 타거든.”
대주교가 없는 날에는 저택의 식솔들을 위한 간단한 요리만 한다. 그나마 한가한 편이니 연회에 집중할 수 있다.
스카피는 아침 일찍 주방 요리사들에게 오늘 만들 메뉴를 전달한 후, 한길을 끌고 마당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꺼낸 종이 더미에는 재료 목록, 메뉴명, 좌석 배치도 등이 그려져 있었다.
“왜 그리 싱글벙글하냐?”
“뭐가요?”
“바보처럼 실실 쪼개지 말고 빨리 읽어둬. 지금까지 집사랑 진행한 내용이니까. 읽어야 대화가 되지.”
한길은 의식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어 보려 했지만, 다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심장 박동도 평소보다 빨랐다.
드디어…
이탈리아 귀족 연회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이후로 한길은 계속 서민 음식밖에 접하지 못했다. 노치니들과 함께 다닐 때는 시골 농가만 방문했었고, 피렌체에서도 서민들이 드나드는 여관에만 있었다. 메디치가의 요리대회에 참가하긴 했지만, 단편적인 메뉴만 볼 수 있었고.
노치니의 살루미도, 코시모의 요리도 대단했지만…
‘귀족의 요리는 다르니까.’
이곳 다이닝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귀족의 식탁. 그중에서도 다이닝의 꽃이라고 불리는 연회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다.
‘분명 배울 것도 있을 테고.’
현실에서 한길은 오스피탈리타 이탈리아나 심사를 앞두고 테이스팅 메뉴를 준비해야 한다. 가정식 메뉴가 아닌, 파인다이닝 메뉴를. 분명 이곳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될 거다.
“손님이 한 명이 더 늘었다고 하니까 최종적으로 일곱 명, 예하까지 합하면 총 여덟 명이 되겠네.”
“생각보다 수가 적네요.”
“몇백 명 단위의 연회는 촌스럽잖아? 최근에는 결혼식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소규모 연회만 열어.”
이곳에도 음식의 유행이나 트렌드가 있는 모양이었다.
“오전에는 마상경기가 있고 그다음에는 살레타(saletta: 작은 방)에서 연극을 보고, 또 다른 살레타로 이동해서 연주를 감상하고, 마지막으로 정원으로 이동해. 저녁 식사는 야외 정원에서, 시간은 아마 밤 10시쯤 될 테고.”
이탈리아는 식사 시간이 늦었다.
영국에서는 하루 두 끼,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 식사를 했지만, 이곳에서는 정오를 지나서야 첫 끼를 먹었다. 어제도 점심이 오후 두 시 경, 저녁은 해 질 무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녁을 밤 10시에 먹는다고요?”
“일정이 빠듯하니까 그쯤 되겠지.”
“10시에 시작하면 몇 시에 끝나죠?”
“글쎄. 보통 이러면 새벽 서너 시까지 가는데 이번에는 어떨지.”
영국에서도 연회가 밤늦게까지 이어지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늦다. 이상한 건 그뿐이 아니었다.
“점심 메뉴가 없는데요?”
“이번에는 점심 없이 콜라시오네(collatione)로 갈 거야.”
“콜라시오네?”
“알고 싶나?”
무의식중에 스카피의 말을 되풀이한 한길은, 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스카피가 품에서 밀랍 태블릿을 꺼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식 ‘궁금하면 500원’이다.
“이건 업무랑 관련된 일이니 당연히 알려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쿠오코가 이런 기본 상식도 모르는 게 문제잖아? 수고비는 당연히 받아야지.”
치사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점수는 4대 8 한길이 훨씬 앞서 있다. 한길이 동의의 뜻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스카피는 자신의 이름 아래에 작대기를 그으며 입을 열었다.
“콜라시오네는 손으로 들고 먹는 음식이야. 마상경기나 연극을 보면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는 거지. 작은 비스킷이나 파이, 과일 같은 걸 준비하고.”
한마디로 핑거푸드다.
이것도 영국과는 다른 문화였다.
“코스는 이미 정해져서 못 바꿔. 콜라시오네는 3코스, 저녁은 크레덴자 2코스, 쿠치나 2코스가 나가고 레바타(levata)로 마무리하지.”
레바타가 무엇인지 질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문맥상 디저트 같았으니까. 굳이 질문 하나를 투자해서 알아낼 정보는 아니다. 그것보다는…
“메뉴를 먼저 추려내야겠네요.”
한길은 메뉴 목록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무려 열두 장에 달하는 메뉴를 간추리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릴 거다. 그런데,
“그게 다 최종인데?”
“네?”
“그거 다 만들 거라고.”
“이걸 다요?”
“코스랑 접시랑 수량도 다 적혀있잖아?”
적혀있긴 했다.
모스타치올리 (나폴리식/로마식) 30개 5접시.
신선한 피뇨카타 30개 5접시.
자두 파이 5개 5접시.
로톤도에서 온 올리브 300개 5접시….
각 메뉴당 올라갈 음식물의 개수, 필요한 접시의 개수, 그리고 전체 메뉴에 필요한 접시의 개수까지. 스카피는 친절하게 그 수량을 모두 적어두었다.
접시는 무려 75개에 달했다. 문제는, 이게 모두 첫 번째 콜라시오네의 구성이라는 점.
한 코스가 75접시라는 뜻이었다.
“이런 걸 여덟 코스나 만든다고요?”
“당연하잖아?”
한길은 서둘러 종이를 넘기며 암산을 시작했다. 숫자가 너무 많아 계산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첫 번째 콜라시오네가 75접시, 두 번째는 85접시, 세 번째는 30접시. 본격 저녁 메뉴는 첫 번째 크레덴자가 45접시, 첫 번째 쿠치나가 37접시, 두 번째 쿠치나가 39접시, 두 번째 쿠치나와 레바타까지 69접시.
무려 380접시다.
고작 여덟 명의 손님을 위한 상차림인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손님들과 함께 온 하인들, 마부들까지 먹여야 한다.
“아, 예하께서 아티초크와 가지는 꼭 넣어달라고 하셨으니 그것도 넣고. 뭐, 따로 추가하고 싶은 게 있나?”
“여기서 추가를 한다고요?”
“가능할지 모르겠네. 주방 인력이 부족하니까.”
“알고 이런 메뉴를 만드신 겁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이 정도는 기본인데.”
영국 궁전에서 하루에 천인분의 식사를 만든 한길이지만, 궁전에는 요리사가 훨씬 더 많다.
스카피의 주방에는 지금 요리사가 여섯 명, 견습생은 열 명 뿐이다.
창백해지는 한길과 달리, 스카피는 거드름을 피우듯 몸을 뒤로 기댔다.
“아, 메뉴를 따로 추가할 필요는 없겠군. 이 중에서 가장 병신같은 메뉴를 골라내, 집사 놈이 적었던 거니까. 빼고 남은 자리에 제대로 된 요리를 넣지.”
“그렇게까지 하면 집사가 가만히 있을까요?”
“가만 안 있으면 어쩔 건데?”
#
D-4
주방에 이상한 배달이 왔다.
검은 깃털, 부채처럼 펼쳐진 꼬리, 비대한 몸.
머리에서 목까지 길게 늘어진 오돌토돌한 피부.
칠면조다.
칠면조가 한 마리도 아니고, 서른 마리나 유유히 걸어 다니고 있었다.
“데스테 후작 부인의 요청이니까 신경 써서 만들어. 자네 정도면 알아서 잘하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스카피를 바라보는 집사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보는 눈이 없었다면 당장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을 거다.
집사가 떠난 후, 스카피는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렸다.
“쯧쯧, 나이가 이제 내일모레 열아홉인데 언제 철들려고 저러는지. 하여간 저 때는 눈에 뵈는 게 없어, 안 그래?”
“열아홉…이요?”
“왜, 궁금해?”
“아뇨.”
스카피는 바로 칠면조 무리에게 다가가 한 마리를 안고 들어 올렸다.
“와, 소문으로 듣긴 했는데 뭘 먹고 자랐길래 이렇게 크다냐.”
“이걸 전부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니죠?”
“이 정도 크기면 상에 한 마리만 올려도 될 것 같은데… 문제는 이걸 어떻게 통으로 굽느냐는 거지.”
이 시대의 새 요리는 대부분 통으로 조리되었다. 스카피의 뉘앙스로 봤을 때, 그건 선택이 아닌 필수인 모양이었고.
“네놈, 이건 본 적이 있나?”
“글쎄요?”
“봤다는 거야, 말았다는 거야.”
“그건 스카피 하기 나름이죠.”
“이런 인간미 없는 새끼…”
스카피는 한길의 얼굴에 대고 이상한 제스처를 취했다. 집게손가락과 새끼손가락만 들어 올린 이상한 동작.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좋은 뜻이 아니라는 건 뻔했다.
“루이지! 저놈들 중 통통한 놈으로 한 놈 잡아서 털 뽑고 갖고 와! 스테파노는 트린키안티(trincianti)에게 내일 도구 좀 들고 찾아와 달라고 하고.”
“네, 세뇨르 스카피!”
트린키안티가 뭔지도 궁금했지만.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내일 알게 될 테니 호기심은 일단 내려두었다. 그것보다는…
‘칠면조라…’
한국에서 흔한 재료는 아니지만, 조리해본 적이 있다. 아마 5년 정도 되었을 거다.
흔치 않게 크리스마스에 쉬게 되었는데,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한번 도전해봤었다. 외국 영화의 크리스마스 장면에 항상 등장하는 요리였으니까.
아직 주방 알바로 일하던 시절이라 칠면조 한 마리가 하루 반 급여에 달했지만, 큰맘 먹고 구입했었다. 그때 집에 있던 가정용 오븐은 저가형이어서 간신히 칠면조를 쑤셔 넣는 게 전부였다.
결과는… 처참했었다.
불 조절이 안 되었는지, 엉망진창으로 군데군데 새까맣게 탄 부분과 덜 익은 부분이 섞여 있었다. 말라비틀어지기도 했었고.
다음에 만들 때는 조금 더 제대로 만들어보겠다고 공부는 해뒀지만, 엄두가 안 나는 금액대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잊고 말았다. 이제야 다시 만들어보게 되는 거다.
“세뇨르 스카피, 가져왔습니다.”
한길이 주방에서 필요한 준비물을 정리하자, 주방 보조가 손질된 새를 들고 왔다. 한길은 오븐 조리용 팬을 대보고 사이즈 먼저 확인했다.
“오븐구이인가?”
“안 그래도 맛이 밍밍한데 삶으면 맛이 더 흐려질 테니까요.”
“역시 먹어본 적이 있나?”
“글쎄요.”
한길은 스카피의 질문을 무시하고 다른 준비물을 확인했다. 버터와 판체타, 그리고 얼음.
어느새 스카피는 눈을 크게 뜨고 한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얌전하다.
“이 새를 요리하는 게 어려운 이유는, 두 종류의 살코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슴살은 핏기가 없는 하얀 살이고, 다리 살은 핏기가 많은 빨간 살이죠.”
닭과 칠면조 등 날지 않는 새는, 날개보다 다리가 운동량이 월등히 많다. 그리고 운동량이 많으면, 근육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한 미오글로빈이 많아진다. 미오글로빈이 많을수록 살코기는 붉은색을 띤다.
통닭에서 가슴살은 새하얗고, 닭 다리는 덜 익은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붉은빛을 띠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부위마다 미오글로빈 함유량이 다르니까.
조류의 미오글로빈은 그대로 두면 불쾌한 피 맛이 나기 때문에 고온에서 분해해야 한다. 하지만 가슴살은 저온에서 조리하는 편이 맛있다.
부위별로 나눠서 각자 알맞은 온도에서 조리하면 둘 다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통구이는 그럴 수 없다. 결국, 다리를 제대로 익히기 위해 가슴살을 희생시키는 꼴이 된다.
그 해결책은…
“얼음?”
“가슴살 부위에만 얼음을 문질러서 차갑게 해줘야 합니다.”
“그러면 더 늦게 익잖아?”
“일부러 그런 겁니다. 조금이라도 늦게 익으라고요.”
가슴살에 얼음마사지를 해서 온도를 낮춰준다. 이렇게 온도 차 문제를 해결했으면, 다음은…
“칠면조는 워낙 커서 제대로 익으려면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 소요되죠. 하지만 이 새는 지방층이 너무 얇아서 서너 시간이 지나면 속살이 다 말라버립니다.”
“그래서 해결책은?”
“지방을 채워주면 됩니다.”
방법은 간단하다.
한길은 칠면조의 껍질을 살짝 분리하고, 껍질 안으로 손을 넣어 버터를 문질러주었다. 지방이 부족하면 버터를 발라 인위적으로 지방층을 만들어주면 된다.
그리고 오븐에 들어가기 전, 칠면조의 가슴살 부위에 얇게 썬 판체타를 올려주었다. 이것도 돼지 지방을 추가하는 작업이다.
“이렇게만 하면 되는 건가?”
“한 번에 되진 않을 겁니다. 일단 이렇게 넣고 한 번 구워보고 시간을 기록해 두죠.”
현대에서라면 온도계를 꽂는 것만으로 적당히 익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일일이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알맞은 조리 시간과 온도를 찾아야 한다.
세 시간 후, 완성된 칠면조는…
“판체타 맛이 더해져서 좋은걸? 껍질도 바삭바삭하고. 문제는…”
“아직 건조하네요.”
“그놈의 가슴살이 문제네, 젠장. 뭐 숨겨둔 방법이 더 있나?”
“그건 스카피 하기 나름이죠.”
스카피는 다시 한길의 얼굴에 대고 이상한 손짓을 했지만, 한길은 그걸 가볍게 무시했다.
‘내일은…’
칠면조를 소금물에 재워두는 브라이닝 기법을 시도할 생각이다. 살코기에 수분을 채워주고, 살짝 염지를 해서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작업이다. 최소 12시간 동안 재워둬야 하니, 내일이나 되어야 확인이 가능하다.
#
D-3
“오오! 이건 꽤 맛있군!”
브라이닝을 마친 칠면조는 제법 촉촉했다. 육즙 폭탄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입안의 침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사막 같은 느낌은 없어졌다.
베이컨 향 같은 판체타의 향이 입혀지고, 전기구이 통닭과 비슷한 껍질 맛이 더해지니. 그냥 먹을만한 수준이 아니라 정말 꽤 맛있었다.
적절한 조리 시간을 알아내기까지 세 마리의 칠면조를 희생시켜야 했지만, 결과물은 좋다. 그렇게 만족하고 있을 때, 주방에 손님이 왔다.
“이게 그 새로운 요리인가?”
“트린키안티! 오셨습니까!”
스카피의 태도로 보나, 손님의 복장으로 보나. 귀족이다. 트린키안티는, 고기를 썰어주는 카버(carver)였다.
그는 스카피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바로 칠면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건 한 손으로는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겠군.”
“그렇죠?”
“두 명도 힘에 겨울 수 있겠는데, 한번 해보지.”
트린키안티의 뒤에는 보조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들고 온 가방을 테이블 위에 놓더니, 그 안에서 수많은 도구를 꺼냈다.
길쭉한 포크, 짧은 포크, 긴 칼, 휘어진 칼, 곧은 칼, 이상한 집게까지.
각종 도구를 가지런히 진열하는 모습은, 수술대를 준비하는 간호사와도 같았다.
두 명의 보조는 가장 큰 포크를 사용하여 양옆에서 칠면조를 찌르고 들어 올렸다. 칠면조를 공중부양시킨 거다.
그러자, 트리키안티가 수술용 메스 대신 작은 포크와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나이프를 들고 칠면조에게 다가갔다.
쓰윽.
화려하게 칼을 휘두르면서 한쪽 날개를 썰고. 또 칼을 이리저리 공중에 돌려가며 반대편 날개를 썰고. 가슴살 껍질을 분리하고.
스테이크를 써는 동작이 아니라, 펜싱이라도 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 화려한 손놀림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스는 왼쪽 날개, 오른쪽 날개, 가슴살 껍질, 목 부위 살코기, 날개 부위 살코기, 오른쪽 다리, 왼쪽 다리 순서로 마련해주게. 서빙할 때 왼쪽에서 오른쪽 순서로 올려주고.”
의사가 진단을 내리는 듯한 태도로 지시사항을 전달한 트린키안티는, 바로 수술 도구를 챙겨 들고 떠났다.
“어때, 대단하지?”
“신기하긴 하네요.”
“연회의 꽃이 카빙이니까.”
영국 궁전에서도 귀족 출신 카버가 있었지만, 이렇게 화려한 퍼포먼스는 없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접시에 내려두고 야만스럽게 썰어 먹는다며? 귀중한 고기를 그런 푸대접 하다니.”
“여기서는 고기를 일일이 저렇게 들어 올리고 썰어주나요?”
“그렇지. 이것도 하나의 예술이니까. 나중에 연회도 직접 한번 보라고.”
#
D-2
“이 또라이 새끼! 이젠 별의별 짓 다 하네! 미친 새끼가 연회 장소를 바꿨어. 예하의 별장에서 한다더군.”
“이렇게 갑자기 변경할 수 있나요?”
“그럴 리가 있나. 중간에 하인 한 명이 ‘실수’로 전달 못 했다고 하는데.”
주방이 갑자기 바뀌어서는 곤란하다.
새로운 주방에서 일할 것이라면 최대한 빨리 넘어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좋다.
그러려면 준비물을…
“난 뭐 좀 갖고 올 테니까 주방 보고 있어!”
스카피는 걸어가면서도 하늘을 향해 주먹을 몇 번 날리고,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차분했다.
“이삿짐 목록이야. 바로 정리하지. 오늘 밤 중으로는 옮기는 게 좋으니까.”
수십장에 달하는 목록은 지나치게 상세했다.
막자사발, 냄비, 토르트 팬, 체, 그레이터 등의 조리도구 종류와 수량. 고기를 벽에 걸어둘 갈고리, 갈고리를 설치하기 위한 못과 망치. 필요한 참숯의 종류와 수량. 들고 가야 하는 필수 향신료와 식초.
심지어 식수가 깨끗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거대한 항아리에 물을 챙겨가고, 그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이동 중 사용할 가죽 덮개의 수량과 로프의 필요 수량까지 적혀 있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몇 마리의 말이 필요한지, 수레에 싣고갈 물건은 무엇인지. 미리 들고 이동 가능한 재료와 당일 옮겨야 하는 재료 등등. 병적으로 꼼꼼하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원래라면 준비물을 정리하는 데에만 최소 하루가 걸릴 텐데…
“스카피, 이렇게 될 걸 예상했나요?”
“아니, 그건 10년 전부터 정리해 둔 거야.”
“10년 전에?”
“귀족들은 툭하면 사냥이니 연회니 하면서 이동할 때가 많거든. 그때그때 허둥지둥하지 않도록 필요 품목을 정리해둔 거지. 나중에 내가 올라가면 써먹으려고.”
새삼 스카피를 다시 보게 되었다.
10년 동안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철저히 준비해 왔던 거다.
10년…
한길이 셰프가 되기 전 거쳤던 준비 기간도 그쯤이다.
“왜 웃냐?”
“지금 집사의 얼굴이 볼 수 있다면 볼만할 것 같아서요.”
회심의 일격이었겠지만, 발목을 잡은 시간은 고작 두 시간.
스카피에게는 10년의 내공이 있었다. 이 정도는 잠깐 덜커덩거리고 스쳐 갈 뿐이다.
#
D-1
별장의 주방은 로마 저택만큼 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설을 제법 잘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 미친놈! 정신이 나간 거 아냐?”
오븐이 문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지만, 불을 피워보니 안에서 시꺼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굴뚝에 문제가 있는 거다.
공기가 순환되지 않으니, 장작에서 나온 해로운 연기가 오븐 안에 가둬진 거다.
스카피는 화를 내며 마에스트로와 집사를 찾아갔지만, 겨우내 방치되었던 오븐의 굴뚝까지 관리하지 못 한 건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답변을 들었다.
당장 수리할 수도 없었다. 굴뚝 수리는 제법 손이 많이 가는 데다가, 기술자를 구해와야 하는데 시간이 맞지 않다.
“마에스트로까지 어쩔 수 없다고 하던가요?”
“그 늙은이도 귀족이니까. 높으신 양반들은 상상만 하면 뭐든 뚝딱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거든. 고기를 맛있게 굽기 위해서 오븐 관리가 필요한데, 그런 걸 신경 쓰는 건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
“그보다 젠장, 이건 어떻게 해결하지?”
한참 동안 욕설을 퍼붓던 스카피는, 손톱을 깨물며 처음으로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한길을 향했다.
“마크.”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도와달라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