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63)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63화(163/325)
163. 방금 한 말, 정말 책임질 수 있나?
한길은 칠면조 요리를 들고 주방의 구석진 곳에 숨어 있다가, 서빙하는 하인들 틈에 섞여서 정원으로 향했다. 최대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고개를 푹 숙이면서.
“거기 내려놓고 가도록.”
다행히 집사는 음식을 나르는 하인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다. 손님들을 살피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한길은 크레덴자의 빈자리에 칠면조를 내려놓고 다른 하인들 틈에 섞여서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집사의 특별 공연은 막을 내리고 손님들은 다시 한번 열띤 토론 중이었다.
“그랬다가는 이탈리아가 신성로마제국의 앞마당이 되는 것 아닙니까.”
“맨입으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작위를 나눠주면서 마당 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있습니까. 메디치 공작도 그렇게 공작위를 얻었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후작 부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네, 덕분에 만토바도 공작령이 되었죠. 하지만 저는 떳떳합니다. 교황청도 예전만큼의 힘이 없죠. 로마의 약탈 사건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군인들은 이 로마조차 짓밟고 전대 교황 성하를 포로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바뀐 거죠. 이제는 각자가 현명하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심각한 분위기다.
손님들은 대화에 열중하느라 식사의 진행이 멈춰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모처럼의 요리가 다 식은 상태로 나가게 된다.
“알비치, 카빙은 여기서 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심지어 집사는 칠면조도 크레덴자에서 카빙을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칠면조 요리의 하이라이트는 카빙이다.
다른 새고기와 비교를 거부하는 압도적인 크기. 그 외관에 한번 놀라고, 잘 구워진 고기를 썰어서 먹는 게 맛의 큰 축을 담당한다.
다 썰어서 낼 거라면 굳이 칠면조를 만들 필요가 없다. 애당초 잘게 조각을 내서 서빙을 할 거라면, 보다 맛있게 조리하는 방법도 많고.
그뿐 아니라, 썰어놓으면 육즙이 빠져나간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기는 퍽퍽해진다.
‘침착하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칠면조를 들고 가서 상에 내려놓고 싶지만. 눈앞의 상황에 당황해서 섣불리 행동하면 안 된다.
대주교는 손님들 앞에 보이는 모습에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집사의 체면을 세워주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주방의 요리사가 집사의 허가도 없이 요리를 손님상에 낸다면? 오히려 요리사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며 스카피의 지휘력이 의심받을 거다.
최대한 손님들이 어색해하지 않는 방법으로 칠면조를 상 위에 올려야 한다. 그러려면 한길이 들고 가서는 안 된다.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 최적의 인물이 있으니까.
한길은 집사가 등을 돌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한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트린키안티에게로.
‘분명 이 사람도 불만이겠지.’
카빙은 연회의 꽃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연회의 초반을 제외하고 트린키안티는 구석진 곳으로 추방당한 상태였다.
손님들의 눈이 닿지 않는 크레덴자 앞에서 카빙을 하면서도 일일이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수고스러운 방식으로 카빙을 한다는 건,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는 뜻이다.
집사의 행동은 그 자부심을 짓밟는 행위였다.
“아쉽네요.”
“네놈은 누구지?”
한길이 다가가서 속삭이듯 말을 걸자, 트린키안티는 불쾌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번 만났는데도 한길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일전에 칠면조 카빙을 봤었던 요리사입니다.”
“요리사가 허락도 없이 다가와 말을 걸다니, 예의에 어긋나네. 이런 행동은 삼가도록.”
“실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다만, 너무 아쉬워서 저도 모르게 말을 걸고 말았습니다.”
“아쉬워?”
“칠면조를 카빙 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는데 말이죠. 손님들도 보셨으면 분명 좋아하셨을 테고요.”
“그건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네.”
“네, 죄송합니다.”
한길은 바로 사과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더 이상 자극할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트린키안티는 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안 움직인다면…’
그에 따른 대비책도 마련해 두었지만, 다행히 한길이 직접 행동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잠시 후, 집사가 악사들에게 다가가자 트린키안티가 기다렸다는 듯이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가지.”
“앞으로요?”
“손님상 앞으로 간다.”
트린키안티의 말에 보조 두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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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로마에 오신 것도 그런 의미 아니겠습니까? 이 김에 누가 누구 편에 서는지 확인하시려는 거죠.”
대주교는 난감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적당히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연회를 열고 필요한 정보를 얻었지만. 이상하게 분위기가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쯤에서 끊어주면 좋으련만.’
그렇다고 대주교가 대화를 끊을 수는 없다. 그런 행동은 잘못 해석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누구의 편을 들으려 한다거나, 아니면 이 주제 자체가 거북하다는 신호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는 눈치 빠르게 집사가 나서주는 게 제일이지만,
‘대체 뭘 하는 건지.’
집사는 저 멀리에서 악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역시 모라티는 미숙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오늘 연회는 순조롭게 흘러갔지만, 이런 부분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스카피 보다는 낫겠지.’
스카피의 능력이 아까워 집사로 고용해볼까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스카피는 순박한 시골 청년이다. 그에 반해 모라티는 태어날 때부터 귀족의 예절을 배우고 어깨 너머로 식탁 위의 정치를 지켜본 인물이고.
무엇보다. 모라티 위로 스카피를 올리게 되면, 자식을 부탁한 모라티 백작을 모욕하는 행위다. 얻는 건 없고 손해만 보는 행동은 취할 수 없다.
“어머나?”
“세상에! 이건 또 뭐죠?”
“칠면조 구이입니다.”
과열된 분위기를 깨고 갑자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손님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트린키안티가 거대한 새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짙은 갈색으로 구워진 칠면조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했다.
자연스레 모든 대화가 종료되었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카빙을 시작하겠습니다.”
트린키안티는 범상치 않은 손놀림으로 칠면조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실력이 좋았지만, 작정을 하고 나왔는지 전에 본 적 없는 빠른 손길로 거침없는 칼질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차례대로 날개, 다리, 가슴살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져 접시에 올려졌다. 트린키안티는 부위별로 다른 소스를 뿌려주고 접시를 서빙했다.
“가슴살은 밀라노 아몬드로 만든 아몬드 소스를 곁들였습니다. 날개살은 사과와 양파 소스, 겨드랑이 부위는 체리 소스, 다리는 석류 소스입니다.”
연회의 막바지라 배가 불렀지만, 저 짙은 갈색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어려웠다. 칠면조는 악마의 유혹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고기 한 점을 포크로 찍어 입안에 넣자, 유혹에 대해 보상을 해주듯 엄청난 맛이 입안을 덮쳐왔다.
바삭한 껍질이 씹히고 육즙이 터질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칠면조의 독특한 향을 아몬드 소스가 감싸 안았고, 고소한 풍미가 기분좋게 입안에 퍼졌다.
“이건… 놀랍군요.”
후작 부인은 믿기 어렵다는 듯이 멍한 얼굴로 칠면조를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분위기를 과열시켰던 부인의 관심이 요리로 향한 건 달가운 일이었다.
“무엇이 그리 놀라우신 겁니까. 후작 부인이라면 칠면조도 많이 드셨을 텐데.”
“물론 많이 먹어봤죠. 이 새는 악마의 새거든요.”
“악마의 새라… 적절한 이름이군요. 정말 악마의 유혹 같은 맛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 어떤 조리법을 시도해도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이라 악마의 새라고 불렀었죠. 어떻게 칠면조로 이런 맛을…”
후작 부인이 다시 한번 트린키안티 쪽을 바라보자, 그는 눈치 빠르게 고기 한 점을 더 썰어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적포도 소스를 곁들여봤습니다.”
후작 부인은 방금전의 대화는 말끔히 잊은 채, 오로지 칠면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 흐름을 유지하는 게 좋다.
“예하, 혹시 주방장을 불러주셔도 될까요?”
“주방장 말입니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 요리를 백번도 넘게 시도해봤지만 이렇게 육즙이 나온 적이 없습니다. 절대 주방장을 앗아가지 않겠다고 약속드리죠. 이 비결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듣고 싶습니다.”
후작 부인은 애걸하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거절을 한다면 그녀는 무안해져서 조금 전의 주제로 대화를 이어갈 거다.
그건 대주교 쪽에서 사양이다.
“스카피를 불러오게.”
하인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 그건 안 됩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함에 가까운 성량이 신경을 긁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눈에 띄게 당황한 집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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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건 안 됩니다!”
스카피를 불러오라는 대주교의 지시를 듣고, 집사인 모라티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대 안 돼!’
그놈이 이 자리에 서면 분명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다.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집사가 후작 부인의 편지를 위조한 건, 위험부담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연회의 메뉴와 재료를 담당하는 건 집사와 스카피. 둘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대주교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스카피에게만 위조된 편지를 보여주고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놈이 쓸데없이 눈썰미가 좋아서 후작 부인의 필체를 최대한 유사하게 따라 했지만, 집사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 편지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요리사와 손님 사이에 접점은 없다.
설령 스카피가 엉망인 요리를 만들어도, 손님은 예의상 큰소리로 불평을 하진 못할 거다. 대주교도 손님 앞에서 스카피를 불러 면박을 주지는 않을 거고.
완전 범죄였다.
그런데 설마 스카피가 칠면조를 너무 맛있게 만들어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부를 줄이야.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군, 모라티.”
언짢은 표정의 후작 부인을 보며, 집사는 최대한 얼굴을 가다듬었다.
“굳이 요리사까지 부르실 것 뭐 있으십니까. 레시피가 궁금하시다면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이 요리는 어떻게 만든 거지?”
“그… 오븐에 넣고…”
모라티는 요리를 잘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촉촉한 거면…
“칠면조를 칠면조 육수에 넣어 삶은 후 오븐에서 구웠습니다.”
대충 그럴듯한 조리법을 말했지만, 후작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번 삶고 오븐에 넣으면 껍질이 이렇게 바삭할 리가 없는데?”
“삶은 후 충분히 말려두고 오븐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육즙이 이 정도로 살아있지 않네.”
후작 부인은 자신의 거짓말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녀는 직접 요리하지 않았지만, 지인들에게 맛있는 조리법을 알려주는 게 취미였다. 분명 요리사들과도 대화를 많이 나눴을 거다.
“주방장을 불러오게.”
“그, 그런 천한 사람과 부인이 직접 대화를 나누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정 필요하시면 제가 알아내고 레시피를 편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집사의 말에 후작 부인의 표정이 더욱더 싸늘하게 식었다.
“신분이 너무 천하니 나와 대화도 나눌 수 없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천한 손으로 만든 요리는 먹어도 되고?”
“그건…”
“가서 스카피를 불러오게.”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자, 대주교가 차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지만, 분노를 간신히 참는 목소리였다.
스카피가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방법을…
“스카피, 인사드립니다.”
하지만 스카피는 생각보다 빨리 등장했다.
너무 빠르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네로군. 번거롭게 주방에서 불러내서 미안하네.”
“이 시대 최고의 미식가로 알려진 후작 부인께서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이 칠면조의 조리법이 궁금해서 불렀네.”
제발…
제발…
집사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기도했다.
조용히 레시피만 알려주고 떠난다면…
이대로 넘어갈 수 있다.
“기름 안에 넣고 통으로 튀겼습니다.”
“통으로 튀겼다고?”
“네. 냄비 가득 기름을 넣고 튀기면 촉촉하게 조리할 수 있습니다. 단, 섣불리 시도하면 위험하니 부인의 요리사를 보내오시면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튀기다니, 신기한 조리법이군.”
“후작 부인께서 모처럼 보내주신 칠면조인 만큼, 최상의 맛을 빚어내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내가 보냈다고?”
스카피의 혓바닥을 잘라버리고 싶다. 저놈은 정말이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다.
그것보다.
지금 당장은…
큰일이다.
이렇게 된 이상, 스카피에게 책임을 전가해야 한다. 스카피가 잘 보이고 싶어서 칠면조를 멋대로 구해온 것처럼…
이것도 궁색한 변명이지만. 요리사와 집사의 주장이 부딪히면 자신이 절대로 유리하다.
자신의 뒤에는 백작가가 있다.
백작가의 아들을 의심하면, 백작가를 의심하는 거다.
“나는 보낸 적이 없네만? 설마 내가 친분 있는 예하께 이런 악마의 새를 보낼 리가 있나.”
“분명 후작 부인이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증거가 있는걸요.”
스카피가 품에서 꺼내는 종이를 보며 집사는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편지다.
집사가 위조했던 편지.
태워버리려다가 연회 직전에 스카피가 말을 안 들을 경우를 대비해 간직하고 있었다. 연회가 끝난 후에 처분하려고 자신의 책상 안 비밀 서랍에 넣고 잠가두었는데… 저 편지를 어떻게…?
집사가 당황하는 사이, 후작 부인은 이미 편지를 읽고 있었다.
“신기하군. 내 필체는 맞는데 나는 이런 내용을 쓴 적이 없는걸?”
“저 역시 후작 부인이 칠면조 얘기를 한 걸 읽은 적이 없는데 말이죠.”
대주교도 편지를 확인했다.
이윽고 차가운 시선으로 집사에게로 향했다.
편지는 대주교의 손을 떠난 후, 집사의 손을 거쳐 스카피에게로 들어갔다. 집사가 의심을 받는 건 당연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마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모라티, 자네가 읽을 때는 어떤 내용이었나?”
“이상하군요. 저에게 왔을 때는 이미 칠면조에 대한 얘기가 적혀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당황하면 안 된다.
아직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하지만 편지가 저에게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개봉된 상태였으니까요. 누구든 조작을 할 수 있었죠.”
필체를 위조한 마테오에게는 거금을 쥐여주고 잠시 ‘집안에 일이 생겨’ 자리를 비우도록 만들었다. 자신의 보조 실비오에게도 큰돈을 건네주었다.
그 두 사람이 없다면.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불쾌합니다. 제 필체를 이렇게까지 똑같이 따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제가 얼마나 많은 편지를 보내는데, 이러면 제 편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위조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밝혀야겠군요.”
아무래도 조용히 넘어가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떠넘겨야 한다.
희생양이 필요하다.
“스카피, 자네도 글을 쓸 줄 알았지?”
“스카피는 이런 일을 할 인물이 아닐세.”
스카피에게로 화살을 돌리려 했지만, 말을 꺼내자마자 대주교가 그 가능성을 쏘아 내렸다.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또 다른 희생양이 필요하다.
대주교가 의심할 법한 사람.
이왕이면 주방과 연관 지을 수 있으면 가장 좋고.
다음 희생양을 떠올리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하의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은 모두 다년간 함께해온 사람들이죠. 우리 중에는 이런 행동을 저지를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 한 명, 최근에 저택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죠.”
“최근에?”
“주방에 새로 합류한 요리사 중에 영국인이 있습니다. 계약서를 쓸 때 보니 글도 쓰더군요.”
“마크는 이런 일을 저지를 인물이 아닙니다.”
스카피는 항의했지만, 고작 주방장의 말에는 힘이 없다.
이대로 밀어붙인다.
“심지어 신분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요리 실력이 확실하다는 스카피의 말을 믿고 고용했지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영국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요리사를 불러오게.”
대주교의 지시에 집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완벽하다.
영국인이 발뺌하더라도, 하루만 고문하면 술술 자신의 죄를 털어놓을 거다. ‘진실’을 털어놓게 할 수단은 셀 수 없이 많다. 뒷배도 없는 외국인이라면 자유롭게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 하지만,
“자네가 이런 곳에 웬일인가?”
영국인이 등장하자, 의외의 인물이 그를 알아보았다.
손님 중 한 명이다.
그것도 다른 손님도 아니고 무려 메디치 공작이 영국인을 알고 있었다..
“이 요리사를 알고 계십니까?”
“얼마 전에 피렌체에서 요리 대회를 열었는데, 그때 우승했던 요리사지. 메디치가의 일자리를 거절하길래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예하의 주방에 오기 위함이었군.”
집사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잠시 스친 인연이다.
“공작 저하께서는 운이 좋으셨군요.”
“운이 좋아?”
“공작 저하와 예하의 저택을 차례차례 잠입하는 외국인이라니, 더 수상하지 않습니까. 얼른 저택에 사람을 보내 내부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는지 확인해 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집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국인이 고개를 돌려 집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다.
괜히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뭐?”
“제가 어떤 신분인지 모르시는 상태에서 그렇게 억측을 하면 책임질 수 있는지 묻는 겁니다.”
“이 천한 것이, 감히 누구 앞에서!”
집사는 최대한 큰소리를 쳤다.
“네놈은 내가 누군지 아느냐? 어디서 어중이떠중이가 감히 백작가에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지? 지금 이 행동만으로도 채찍질을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나?”
“어중이떠중이는 아닙니다.”
요리사는 갑자기 옷 안으로 손을 넣어 품속의 무언가를 꺼내려고 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뭣들 하나? 이놈을 끌고 가지 않고!”
집사는 영국인의 손을 붙잡고 주위를 둘러보며 보초를 불렀다.
빨리 이 자리에서 이놈을 치워야 한다.
직접 심문한다고 하고, 진실을 불게 만들어야 한다.
그때,
모라티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다가왔다. 등 뒤의 그림자는, 모라티를 스치고 그대로 요리사를 덮쳤다.
옷차림을 보면…
분명 손님 중 한 명이다.
잠시 변소에 가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손님.
위팅턴 백작이라고 했던가.
영국에서 온 사절단이다.
“이런, 마크 아닌가! 자네, 살아있었는가!”
영국인을 힘차게 끌어안고 어깨를 세차게 두드리는 모습을 보니, 보통 사이가 아니다. 이건 스치는 인연이 아니라 친밀한 사이다.
영국 사절단과 영국인…
그럴 리가 없겠지만…
설마…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위팅턴 백작은 집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걸어오는 길에 잠깐 들었는데, 저택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는 외국인이 있다고 했던가?”
“… 이 외국인과 아시는 사이입니까?”
간신히 목소리를 냈지만, 불길한 예감에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마크라는 인물로, 우리 사절단의 일행일세. 오는 길에 잠시 사고가 있어서 헤어졌었지.”
“사절단…?”
사절단이라면…
사절단의 시중이라면…
아직은 자신이 유리하다.
자신의 뒤에는 모라티 백작가가 있다.
아무리 사절단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고작 하인이다. 이대로 밀고…
“마크는 영국에 계신 왕비 전하의 전속 요리사지.”
“왕비… 전하…?”
머리가 백지가 되었다.
입만 뻥긋대는 집사를 보며, 위팅턴 백작은 비웃듯이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왕비 전하의 요리사가 후작 부인의 편지를 교묘하게 조작하고 대주교 예하와의 관계를 깨트리려고 했다는 의심을 받는 상황이 맞나?”
이렇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더 이상 귀족들 사이의 해프닝이 아니다.
그건 집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작은 확인사살을 하듯, 다음 말을 이어갔다.
“이건 국제적 사안이지. 이 정도 의심을 받으면 자칫하면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고. 자네, 방금 한 말, 정말 책임질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