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65)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65화(165/325)
165.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
요리사들을 주방으로 보내고, 한길은 연회 계획을 세우기 위해 스카피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스카피에게는 집사가 사용하던 방이 주어졌다. 한길도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한번 들렀던 적이 있지만,
“정말 같은 방인가요?”
“며칠 전에도 왔었잖아?”
“그래서 묻는 겁니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종이 더미는 그렇다 치고. 바닥에는 각종 쟁반과 그릇, 냅킨 등이 어질러져 있어 마치 미친 모자 장수의 피크닉 현장 같았다. 모자 장수의 병세가 더 악화해서 테이블 사용법까지 까먹었다면 말이다.
방 안에 장식용으로 세워진 동상의 어깨에는 금실로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진 새빨간 드레스가 걸쳐져 있었다.
“이건 또 뭐죠?”
“왜, 마음에 들어? 하나 줄까?”
“제가 이걸 가져서 뭘합니까.”
스카피는 손가락으로 한쪽 귀를 젖히면서 말을 이어갔다.
“의상이야. 마드리갈을 먼저 할지, 그리스 연극이나 모레스카를 먼저 할지 고민 중이라. 요즘은 루찬테가 유행이라는데..”
“그건 또 뭔가요?”
“엔터테인먼트.”
이곳의 연회에서는 공연이 중요했다. 그 공연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게 집사의 역할이었으니, 이제부터는 스카피의 일이다.
“마드리갈은 반주 없는 합창 같은 거고, 모레스카는 스페인식 음악과 댄스라고 생각하면 돼. 아무래도 손님이 황제 폐하라면 그쪽을 많이 넣는 게 좋겠지. 루찬테는 요즘 유행하는 즉흥 희극이고…”
영국에서도 식사 시간에 각종 연극과 공연이 곁들여졌었지만, 이탈리아의 공연은 영국과 조금 달랐다.
보다 화려하고 정교하다.
소품도, 의상도, 연주도.
비단 공연만 그런 게 아니라, 식사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궁전에서는 은쟁반에 요리를 서빙하고, 개인 접시는 백랍 식기를 사용했다. 접시 위에는 베이글처럼 생긴 꾸덕꾸덕한 트렌처(trencher) 빵이 올라가 있어 모든 소스를 흡수해 주었다. 그래서 접시를 계속 갈아주는 대신, 빵을 갈아주면 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는 트렌처 빵이 없다. 접시가 더러워지면 일일이 새로운 접시로 교체해주고, 개인 접시도 투박한 백랍 접시가 아니라 성경이나 신화의 한 장면이 그려진 도자기 접시였다.
영국에서는 귀족과 왕족도 손으로 대부분의 요리를 먹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포크를 사용했다.
영국이 중세 식탁이라면, 이탈리아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유럽 귀족의 식탁에 더 가까웠다.
연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달랐다.
영국은, 말하자면, 셰익스피어의 연극이다.
배경과 소품은 투박하지만, 익살스러운 요리와 스토리를 곁들여 먹는, 재미와 위트가 있는 식탁이었다.
반면, 이탈리아는 오페라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무대, 의상, 오케스트라 반주. 턱시도 슈트를 입고 품위를 지키며 감상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고 보니…
스카피가 훗날 자신의 조리서에 붙이는 이름 역시 ‘오페라’였다.
그만큼 더 세련되고, 정교하고, 복잡한 에티켓이 많으며, 준비물도 많다.
한길이 자신이 앉을 공간을 정리하는 사이, 젊은 남자 한 명이 방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스칼코! 아, 손님이 계셨습니까?”
“손님이 아니라 우리 주방장.”
“그러면 업무 얘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스카피가 고개를 끄덕이자, 보조는 말을 이어갔다.
“오늘 중으로는 정말 주문을 넣어야 해서, 컨페티는 정말 베네치아산이면 됩니까?”
“어제도 말하지 않았나?”
“그… 마에스트로도 알고 계시나 해서요.”
그 후로 한동안 업무 얘기가 이어졌고, 남자가 나가자마자 스카피는 툴툴대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튤립 모양을 만들고 세차게 흔드는 이상한 동작을 하면서.
“뭔 짓들인지! 집사 밑에 있던 멍청한 놈들은 하나같이 말을 안 들어.”
옆에서 보기만 해도 문제가 무엇인지는 보였다.
아직 신뢰가 없다.
주방에서는 그 누구도 스카피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집사의 영역에서는 모두가 불신하고 있었다.
“제가 도울 건 없나요?”
“네놈도 그렇게 한가하진 않을 텐데?”
스카피는 백과사전 두께의 종이 더미 하나를 한길에게 던지며 말을 이어갔다.
“이전에 모라티와 짠 계획에는 크레덴자 5코스, 쿠치나 7코스, 총 12코스를 내기로 했지. 바꾸려면 바꿀 수 있겠지만, 그러면 식기부터 다시 정리해야 해서 이왕이면 이대로 갔으면 좋겠는데,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한길은 묵묵히 첫 번째 백과사전을 훑었다.
서비스에 필요한 식기를 기록해둔 목록이었데, 무려 세 페이지에 달했다.
냅킨 장식 130개,
서빙 쟁반 (대) 150개
서빙 쟁반 (중) 200개
서빙 쟁반 (소) 350개.
마욜리카 (소) 420개.
…
종류도 다양했지만, 아이템별 수량이 어마어마했다.
“이번에는 설거지를 안 합니까?”
“설거지? 당연히 해야지.”
“그런데 접시가 왜 이리 많죠?”
스카피는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중요한 걸 말 안 했네. 이번에는 손님이 조금 많거든.”
“몇 명이나 되는데요?”
“정확한 숫자는 어딘가에 적혀있을 텐데, 그건 나중에 찾고. 내 기억으로는 분명 황제 폐하와 최측근 내각이 15명, 시중드는 귀족이 50명 이상, 성직자가 75명이던가? 게다가 폐하의 식솔 하인들이 300명 정도, 무슨 공작도 2명이 오는데 각각 하인을 200명 데리고 온다고 하고…”
엄청난 규모에 한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금 말한 명단만 해도 귀족이 140명, 하인이 700명, 총 840명이나 된다.
“몰랐나?”
“몰랐습니다.”
“황제 폐하는 수도가 없어. 스페인과 이탈리아, 독일을 번갈아 가며 돌아다니시니까 폐하가 계시는 곳이 수도인 셈이지. 그리고 사흘간은 우리가 그 수도가 되는 거고.”
“이 저택에는 800명이 넘는 손님들이 들어올 공간도 없을 텐데요?”
“하인들 다수는 인근 여관과 농가에 머물 거야. 그건 마에스트로가 알아서 하겠지.”
순간 아찔해졌지만, 스카피는 한길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걱정 마, 다 먹일 필요는 없으니까. 하인들 요리는 인근 여관 세 군데를 섭외해서 그쪽에서 알아서 해줄 거고.”
“그러면 귀족 연회만 신경 쓰면 되네요.”
한 코스당 최소 스무 개의 메뉴가 올라간다고 하면, 12코스에 240개의 메뉴를 준비하면 된다. 못할 건 아니다.
그런데 스카피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뭐죠?”
“뭐가?”
“숨기는 게 또 있는 거잖아요.”
“그… 폐하가 도착하는 날이 목요일이고, 정식 연회는 금요일이라서.”
금요일.
금식의 날이다.
육류를 사용할 수 없다.
고기 없이 240종류의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
“건포도는 도착했나?”
“네, 쿠오.. 아니, 스칼코!”
“건포도는 이탈리아보다 그리스 물건이 맛있거든. 특히 코린트의 뮈스카 포도, 그것도 청포도로 만든 게 더 맛있지.”
주방으로 돌아온 스카피는, 활기가 넘쳤다. 돌아다니며 재료를 확인하자, 주방보조가 달려왔다.
“스칼코! 철갑상어가 도착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다 연못에 있나?”
“네.”
“한 마리만 가져와.”
얼마 후, 주방에 철갑상어가 도착했다.
철갑상어는 ‘상어’라고 불리지만, 상어는 아니다. 공룡이 있을 무렵부터 지구상에 살던,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도 불리는 고대종이다.
국내에는 흔한 재료가 아니라 한길도 직접 다룬 적은 없지만, 사진으로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주방에 온 철갑상어는 사진 속 모습과는 달랐다. 그 길이가 무려 2미터에 달했으니까.
“네놈은 이걸 다뤄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그러면 내 메뉴를 보여도 되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네놈도 덧붙여도 되고.”
한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바였다.
이탈리아에 온 이후로 내륙을 중심으로 이동해서 해물은 거의 접하지 못했었다. 이번 기회에 이탈리아의 해물 요리를 배울 수 있다면, 고마울 따름이다. 그것도 특히 철갑상어라면.
“철갑상어는 바다에도 강에도 나는데, 강에서 잡은 게 맛있어. 이놈은 페라라 공작령 근처의 스텔라타라는 곳에서 잡아 온 건데…”
스카피는 무언가 설명을 했지만, 한길의 시선은 스카피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뱃가죽을 뚫고 균열을 만들자, 그 안에서 검은 무언가가 보였다.
알이다.
철갑상어의 알.
“색이 좋군. 검은 것일수록 맛이 좋거든.”
스카피는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검은 구슬을 꺼내서 손으로 살짝 눌러보았다. 한길은 그러다 알이 터지지는 않을지, 조마조마한 눈길로 보고 있었고.
철갑상어의 알은 현대에서도 세계 3대 진미로 불린다.
캐비어다.
스카피는 가장 먼저 캐비어를 분리해낸 후, 금속체에 살살 문지르며 알집의 세포막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작은 나무 상자 안에 캐비어를 넣고 소금, 올리브유로 양념을 해주었다. 작은 나무 상자는 또 다른 커다란 나무 상자 안에 들어갔다.
“네놈도 좀 들어.”
“어디로 들고 가게요?”
“오븐까지.”
“오븐에 굽는다고요???”
한길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캐비아는 염지를 하고 몇 달간 숙성한 후, 생으로 먹는다. 먹자마자 입안에 터지는 구슬. 그 식감과 함께 쏟아지는 희미한 바다향과 섬세한 해산물 향을 즐기는 음식이다.
그런데 이걸 굽는다고?
“나도 생으로 먹는 걸 더 좋아하지만, 염지한 건 서민들만 먹으니 어쩔 수 없잖아?”
다행히 오븐 안에 들어간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나무 상자는 열전도율이 낮아 오븐에서 굽는 것보다는 살짝 데워주는 용도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 후로 스카피는 나무판자를 들고 와서 따끈따끈한 캐비어를 지그시 눌러주어 크림 형태로 만들었다.
톡톡 튀는 식감이 사라졌다.
속이 쓰렸다.
“한번 맛을 볼래? 이건 여기서만 맛볼 수 있거든.”
윤기가 나는 검은 크림의 맛은…
예상외로 좋았다.
어딘가 캐러멜 덩어리를 떠올리는 질감이었다. 혀 위에 올리고 살살 녹여가며 먹으니 올리브유의 단 향과 캐비어의 바다향이 섞여서 독특한 맛이었다. 오히려 초보가 먹기에는 이쪽이 더 맛있을 거다.
“그럼, 일 좀 해볼까? 오늘 중으로 저 한 놈 다 처리하려면 할 게 많은데?”
스카피는 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요리를 시작했다.
철갑상어는 크기가 어마어마한 만큼, 그 하나로도 수많은 요리를 만들 수 있었다.
화이트 와인에 졸인 철갑상어찜.
포도즙을 넣고 끓인 철갑상어 죽.
철갑상어와 아몬드 속을 넣어 만든 라비올리,
철갑상어와 민트, 파슬리를 넣고 만든 라비올리.
동그란 어묵처럼 빚어낸 철갑상어 완자.
배 모양으로 만들고 튀겨낸 철갑상어 완자.
…
그중 한길이 가장 좋아한 건, 철갑상어 소시지였다. 생선 살을 잘게 다지고 와인에 졸인 당근, 잣, 정향, 너트맥, 타임 등을 넣어 소시지 모양으로 빚어준다. 소시지의 표면에는 참치 뱃살을 얇게 썰어 덮어주고, 사과나무를 태워 훈향을 입혀준다.
“오늘은 이쯤 하지? 내일은 참치랑 농어, 가다랑어랑… 아, 슬라보니아에서 들여온 황돔도 있지….”
해산물만으로 240개의 요리를 만들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철갑상어 하나만으로 벌써 서른 개가 넘는 메뉴가 나왔다. 이 정도면 문제는 없다.
‘아쉽네.’
이왕이면 조금 더 배우고 싶었는데…
이번 체류는 여기까지다.
카운트다운 시계에 표시된 시간은 다섯시간이 채 남지 않았으니까.
“마크, 오늘은 빨리 들어가야 하나?”
“아뇨, 급한 건 없습니다.”
“그러면, 와인 한 잔 어때?”
#
“꼭 이런 곳에서 마셔야 합니까?”
“왜, 운치 있고 좋잖아?”
스카피가 고른 와인 파티 장소는, 저택의 옥상이었다.
옥상에서는 로마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달빛에 비친 건물들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제법 운치가 있었지만…
난간이 없다.
야밤에 술을 마시기에 좋은 장소라고 할 수는 없다.
“떨어지면 죽습니다.”
“뭐, 네놈이 있는데 떨어져서 죽을 일은 없잖아?”
“아직도 그 소립니까. 인간이라니까요.”
“네놈이 인간일 리 없잖아?”
“왜요.”
“내가 모르는 요리를 알고 있는 인간이 있을 리 없으니까.”
“영국 왕실 요리사입니다.”
“더 수상하지. 지상에 지옥의 출입구를 만든다면, 누가 봐도 그 장소는 영국이잖아?”
“하아… 알아서 생각하세요.”
바보 같은 말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한길이 스카피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한길이 끌어들이는 바람에 스카피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집사 보조들의 태도와 어마어마한 연회의 규모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이러다 스카피가 실수라도 한다면?
너무 이른 시기에 데뷔해서 오히려 일을 망친다면?
스카피는 아피키우스나 불린 왕비와는 다르다.
그 둘에게는 예정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스카피는 원래대로 행동하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머쥐게 된다.
한길의 결정으로 스카피의 선택권을 앗아간 게 마음에 걸렸다.
“스카피.”
“왜.”
“만약에 말이에요. 이번 연회를 안 맡고 물러나면 나중에 교황 성하의 개인 요리사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스카피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드디어 계약인가?”
스카피의 눈이 반짝였다.
“아뇨.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입니다.”
“교황 성하의 요리사라고?”
“네, 그것도 두 명의 교황 성하를 섬기게 되죠. 백작위를 받고, 메이스베어러(mace-bearer: 교황청 권력의 상징인 권표를 받드는 사람)가 된다면. 이 연회를 포기하고 그 길을 가시겠어요?”
“혹하기는 하는데, 그게 언제 일어나는 일인데?”
역사상으로는 1571년이다.
지금은 1536년이고.
“앞으로 35년 후요.”
“이런 미친 X새끼 같으니!”
스카피는 입으로 차마 담지 못할 욕설을 한길에게 쏟아부었다.
“네놈은 그걸 조건이라고 내건 거냐? 뭐, 35년 후? 차라리 그냥 지금 죽으라고 하지?”
“노년에는 엄청난 인정을 받게 되고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생각 없어.”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이미 일을 벌이고 허가를 받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잘 생각해 보세요. 스카피도 아직은 집사 업무가 낯선데, 준비가 덜 된 상태로 황제의 연회를 맡으면 모든 걸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리 없어.”
스카피는 실패의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역시…’
자신이 이 시대로 온 이유는, 스카피를 만나기 위함이다. 재료에 대한 이해도, 조리법 등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 외에도 스카피에게는 무언가가 있었다.
요리사가 홀대받는 세상에서, 요리 하나로 교황의 내각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모두가 무시하는 천한 신분으로 역사에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이 시기는 그가 처음으로 움직인 시기고.
한길 역시 정식으로 요리를 공부한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이제 막 파인다이닝에 발을 내딛는 시점이다. 분명, 스카피를 보면서 무언가를 배우라는 거다.
그렇다면, 가장 궁금한 게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을 수 있죠?”
“뭐가.”
“성공을 너무 확신하니까요.”
“이 시대는 내 시대니까. 난 역사에 남는 요리사가 될 거거든.”
설마 본인 입으로 저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쳇, 네놈도 안 믿는 건가?”
스카피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로마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이 시대 최고의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지?”
“글쎄요. 미켈란젤로의 벽화?”
“미켈란젤로의 벽화가 평범한 화폭에 그려져 있었다면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
“나는 이 시대 최고의 예술이 건축이라고 생각해. 그 어마어마한, 믿을 수 없는 형태의 건축물이 눈앞에 보이고 그 위에 벽화가 그려지니까 경이로운 예술이 되는 거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길은 예술도, 미술도, 건축도 잘 알지 못했으니까.
“지금까지 집사들은 화폭에만 그림을 그려왔어. 그리고 아무리 아름다워도 화폭은 상상의 세상이지.”
“…”
“하지만 나에게는 기술이 있지. 기초를 닦고, 토대를 세우고, 화려한 건물을 세우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그게 가능한 시대이고, 아직 누구도 요리에서는 그 일을 한 적이 없지.”
지금까지의 귀족은 보여주기 위한 연회를 열었다. 최고의 맛이라고 불렀지만, 눈으로 그 화려함을 보여주고 막상 혀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스카피는 맛까지 갖춘 연회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납득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스카피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아보며 한길을 똑바로 주시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목표가 뭐지?”
“요리를 배우려고요.”
“거짓말. 왜 나한테 온 거지?”
스카피는 여느 때보다 진중한 눈빛이었다.
화살처럼 피부를 꿰뚫는 시선이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요리를 배우고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고 싶습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웃기시네. 요리할 때는 눈이 살아있는데, 지금 그 말을 할 때는 썩은 도미 눈깔인데?”
“….”
“솔직해져 봐. 네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거짓말이 아니었다.
한길이 정말 원하는 건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는 거다. 언젠가 한국을 벗어나고, 자신의 요리로 세계로 나가서…
“세계 제일의 요리사가 되고 싶습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에 한길은 스스로 조금 놀랐다.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면서도, 그렇게까지는 될 리 없다고 스스로 차단해온 생각이었으니까. 퀘스트를 완료하면서 자신감도 붙었고. 잘 될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정점까지 노린 적은 없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크큭, 그 정도는 되어야 내 오른팔이지. 좋았어!”
스카피는 한길의 답변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내가 역사를 가질 테니, 세계 정도는 양보해주지.”
“누가 보면 스카피가 세계의 주인인줄 알겠습니다.”
“뭐, 그러면 안 되나? 누가 나타나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스카피는 와인잔을 한 번에 입안에 털어놓고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다시 꿰뚫는 시선이 한길을 향했다.
“그러면 숙제를 내주지.”
“숙제?”
“하루에 두 번, 거울을 보면서 열 번씩 큰 소리로 말해. ‘나는 세계 제일의 요리사가 될 거야’라고.”
“그런 민망한 짓을 어떻게 합니까.”
“진짜 해보라니까? 효과가 좋거든. 나도 매일 하고 있고.”
아침저녁으로 거울에 대고 ‘나는 역사적인 요리사다’라고 말하는 스카피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다.
“뭐, 자기 암시라고 해야 하나? 인간이라는 게 태생이 겁쟁이라 조금만 방심하면 나약한 생각을 하게 되거든. 그런데 이걸 매일 반복하다 보면 깡이 생긴다니까. ‘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나는 무조건 될 거니까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라!’ 정도로 밀어붙여야지. 남자라면 말이야, 안 그래?”
#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정산을 시작합니다.]반투명 창과 함께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길의 방이었다.
최근에는 레스토랑 대신, 집에서 메뉴를 연구하느라 퀘스트를 시작할 때도 집에서 넘어갔었다.
보상 창을 확인하려 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일단 닫아두고 노트를 들고 왔다. 한길은 스카피에게 배운 것들과 자신이 느꼈던 점들을 서둘러 메모했다. 기억이 생생할 때 적어두고 싶었으니까.
‘역시… 달랐어.’
스카피와의 만남은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한길을 뒤흔들었다.
지금까지의 퀘스트와는 다르다.
재료나 조리법을 얻는 게 아니라…
아피키우스를 만났을 때처럼…
요리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니, 흥분만 하지 말고 앞으로 할 일을…’
잊기 전에 다시 계획을 정리하고, 내친김에 소희에게도 간단하게 카톡을 보내고 나니 시간은 새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씻고 일찍 자자. 내일부터는 할 일이 많으니까.’
한길은 세수를 마치고 세면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나는 세계 제일의 요리사가 될 거다.”
역시 아직 스스로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조금 민망했다. 그렇게 낯짝이 두껍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하고 싶다.
아니,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
이제부터는 이 모습에 익숙해져야 한다.
거침없이 달릴 거니까.
“나는 세계 제일의 요리사가 될 거야.”
다섯 번 더 반복하자, 조금은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댕그랑.
갑작스러운 소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화장실 입구에 경우가 서 있었다. 경우의 발밑으로 플라스틱 컵과 칫솔이 나뒹굴고 있었고.
“셰, 셰프, 죄송합니다! 아래층 화장실이 줄이 너무 길어서…”
최근 레스토랑이 바빠지면서 한길의 집이 요리사들의 숙소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평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앞으로 2층 화장실은 출입금지다.”
“넵. 그… 셰프, 전 정말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왜, 보면 곤란한 게 있었나?”
“아닙니다!”
“다른 애들에게도 전달해.”
“죄, 죄송합니다!”
경우는 서둘러 칫솔과 컵을 챙겨 들고 달아났다. 어디까지 전달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민망하긴 해도 상관은 없었다.
한길은 다시 거울 속 자신을 봤다.
숙제는 끝내야 하니까.
“나는 세계 제일의 요리사가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