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67)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67화(167/325)
167. 이건 여기서만 먹을 수 있거든
목적지인 경상남도 함양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여덟 시가 넘어있었다.
숙소 인근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자, 노셰프가 짐 속에서 검은 병 하나를 꺼냈다.
“컵 좀 들고 와봐. 형이 너 위로해주려고 아끼는 거 들고 왔다.”
“위로?”
“요즘 이런저런 일이 많았잖아?”
검은 병의 정체는 위스키였다. 상당히 독한 술인데도, 노셰프는 콜라 마시듯이 연거푸 술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고, 덕분에 혀가 고꾸라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쒜끼드리 마뤼야! 인터넷이라고 아무 말이나 씨부리고, 어? 카키, 고놈이 보기에만 건방지지, 얼마나 예의 바르고 귀엽고 순진한 놈인데, 안 그래? 고런 놈을 모롸부쳐!!”
한길이 퀘스트를 수행하는 동안, 현실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즉, 레스토랑의 상황은 아직 좋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성공을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 실력 대신 돈으로 연예인을 매수하고 레스토랑을 홍보했다는 의혹. 거기에 탈세 의혹이 제기되면서 카키는 국세청으로부터 세무조사까지 받게 되었다.
카키는 숨길 게 없으니 기꺼이 조사에 응하겠다고 선언했고, 한길 역시 실력으로 레스토랑을 키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스피탈리타 이탈리아나 심사를 받겠다고 선언했었다.
원래라면 지금쯤 레스토랑 심사 결과는 나와 있어야 했지만…
“그 쉐끼 이름이 뭐라고? 고 이딸리아 놈!”
“알레산드로요?”
“그래, 싼드로! 뭐 그딴 놈이 다 이쒀! 너, 그딴 새끼랑 일하는 거 아니다! 남자가 말야, 당했으면 또까취 돌려줘야지!”
“이미 돌려주는 중이에요.”
“뭐?”
지금쯤 알레산드로는 소희가 건네준 103개의 재료 목록을 보며 열심히 야근을 불태우는 중일 거다. 한길의 재료 목록은 아직 건네주지도 않았다. 그 목록도 짧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짧아지지 않을 거다.
한순간의 통쾌함보다는 장기적으로 되돌려주면서, 동시에 레스토랑에도 도움이 되는 복수였다.
“시발, 이건 내가 나설 수도 없고.”
노셰프는 그래도 답답했는지, 갑자기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이번 사태에는 노셰프가 나서면 오히려 상황이 악화한다. 안 그래도 실력 대신 유명인들의 인기에 편승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니.
“… 얼마나 더 견딜 수 있냐?”
“아직 두 달 정도는.”
“이 새끼, 그래도 많이 벌어놨나 보네?”
한길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웃기만 했다.
초반에 워낙 장사가 잘되어 어느 정도 여유자금이 있었지만, 이 상태가 지속하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미 2호점의 예약 절반가량이 취소되었고, 1호점의 손님도 현저히 줄었다.
손님이 없어도 매일같이 밑 작업을 해야 하고, 직원들의 월급도 챙겨줘야 한다. 한 달 내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니까.
“다음 주에 심사를 받기로 했어요. 유명 셰프가 평가하는 거니 오히려 더 잘된 거죠.”
“다음 주? 그런데 지금 여기 와 있어도 되냐?”
“그러니까 온 거죠. 이번에는 테이스팅 메뉴로 심사받을 거니까.”
“아, 맞다. 캐뷔아라고 했지? 걱정 마, 임마! 이 형이 말이야, 진짜 존경하는 형님이 만드는 캐뷔아니까! 미국에서 철갑상어 연구를 하시던 분이 은퇴하고 고향에다 양식장을 차린 거거든? 다른 곳이랑 차원이 달라! 이거 먹고 꼬투리 잡으면 그 쉐프라는 놈도 혓바닥이 이상한 거니까…”
“술도 다 비웠으니까 그만 일찍 자죠.”
“그래, 빨리 비우고 일찍 자야지.”
내일은 할 일이 많다.
한길이 깨끗하게 비운 술병을 쓰레기통 안에 넣고 다시 뒤를 돌아보자, 노셰프의 손에 또 다른 병이 쥐어져 있었다. 방금 버린 병이랑 똑같이 생긴 병이.
“무슨 마술 하세요?”
“마, 아끼는 동생인데 설마 한 병만 들고 왔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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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괜찮아요?”
“넌 어째 멀쩡하냐?”
“그러게 적당히 마시라고 했는데.”
“운전이나 똑바로 해. 지금 무슨 묘기 부리냐?”
양식장은 지리산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기어가는 속도로 운전을 하고 있었지만, 굽이굽이 굽어진 산길이라 숙취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깐! 여기서 세워봐!”
“아직 5분 더 가야 하는데?”
“그러니까. 체력 좀 보충해야 하거든.”
적당한 공간에 차를 세우자, 노셰프가 짐가방 안에서 검은 물체를 꺼내 한길에게도 하나 던져주었다. 이번에는 흑염소 진액이었다.
“먹어둬. 그 형님,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존경하는 형님이라면서요.”
“그러니까 존경하는 거지. 만만하면 존경하겠냐?”
염소 진액을 마시면서 노셰프는 간단한 설명을 했다. 양식장 사장과는 몇 년 전, 노셰프가 출연하는 방송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형님!”
“문배 왔냐?”
“여기, 제 동생입니다.”
“딱 보아하니 친동생은 아니고, 이 친구도 요리하는 친구인가 보지?”
“에이, 친동생일 수도 있죠.”
“딱 봐도 겹치는 유전자가 하나도 없구먼. 반가워요, 박춘복이에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한길입니다.”
중년의 남자는 머리가 희끗거렸지만,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악수를 마친 사장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한길의 어깨와 등을 차례차례 토닥거렸다. 반가움이 담긴 손길이 아니라, 가축의 상태를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좋아, 좋아. 키도 훤칠하고 체격도 좋고, 일 잘하게 생겼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시작하지?”
“형님, 숨 돌릴 시간도 안 줍니까.”
“숨은 돌리는 게 아니라 쉬는 거야. 숨 쉬는 건 일 하면서도 할 수 있고.”
양식장 내부는 거대한 수조로 가득했다.
수조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사장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말투는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 부모로 변했고.
“물이 정말 깨끗하지? 이게 다 지리산 지하에서 끌어온 물이야. 이놈들이 깨끗한 물에서만 알을 까거든.”
철갑상어는 연어와 마찬가지로, 산란할 시기가 되면 강의 상류로 이동한다. 그래서 최대한 강의 상류와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이놈들이 눈으로 봐서는 알이 찼는지 안 찼는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적당한 크기가 되면 초음파 검사를 하고 배를 살짝 째서 알 상태를 확인하지. 알이 가득하면 별도의 수조로 옮겨서 4주에서 6주간 굶겨야 해. 이놈들이 원래 산란 전에는 굶거든. 그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게 비결이지!”
쉴 틈 없이 설명을 이어가던 사장은, 하나의 수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안에는 다섯 마리의 철갑상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때마침 오늘 중으로 이놈들을 다 처리해야 했는데, 참 기가 막힌 타이밍에 왔어?”
“형님은 항상 기가 막힌 타이밍에만 부르잖습니까.”
“원래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는 건, 운에 맡겨두는 게 아니거든. 자, 서둘러!”
사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수조 옆에 준비해둔 작업복을 노셰프와 한길에게 하나씩 던졌고, 둘은 옷을 갈아입고 상어잡이에 나섰다.
노셰프가 헤엄치는 철갑상어를 붙잡으면, 한길이 커다란 들것을 들고 다가갔다. 그 들것 위에 철갑상어를 싣고 수조 가장자리로 끌고 가면, 사장이 마취를 했다.
마취된 철갑상어를 작업장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숨통을 끊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안 추워? 뭐 입을 거라도 줄까?”
“아니 괜찮습니다.”
“그래, 역시 젊어서 좋네. 빨리빨리 하자, 30분 내로 처리해야 하니까. 신선도가 생명이거든.”
작업실은 냉장실처럼 낮은 온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캐비어의 가공 방식은 스카피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워낙 섬세한 재료이다 보니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철갑상어의 배를 갈라 알집을 제거하고, 철망에 알집을 살살 문질러준다. 그러면 철망 아래로 알이 하나하나 분리된 상태로 떨어진다. 그 알을 세척하고, 넓적한 판 위에 올려서 터진 알을 일일이 족집게로 골라낸다.
“생각보다 많이 터졌네요?”
“이놈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알을 다시 흡수해 버리거든. 산란 시기가 지났는데 알을 못 낳아도 다시 흡수해버리고. 흡수가 시작되면 껍질이 흐물흐물해지니까 손질 도중에 터지는 거야. 어쩔 수 없어, 스트레스를 하나도 안 주는 것도, 산란 시기를 정확하게 맞추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아무리 조심해도, 완벽하게 모든 알을 수확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이 한 마리에서 나오는 알이 천만 원을 호가한다고 했다.
“한번 맛 볼래?”
“그래도 되나요?”
“손등에 올려놓고 먹어봐. 손이 그나마 상어 조직이랑 비슷해서 수저를 쓰는 것보다 그쪽이 맛을 느끼기 좋거든.”
방금 수확한 철갑상어의 알은 신선했다. 바다를 연상하는 특유의 향이 느껴지긴 했지만, 조금 밍밍했다.
“소금이 없으니까 별맛 없지?”
“나긴 나는데 흐리네요.”
사장은 캐비어의 무게를 재고 필요한 소금을 계산한 후, 염지를 하고 통에 담았다. 그대로 두 달 이상 숙성을 시켜야 캐비어가 완성된다.
“남은 네 마리도 금방이겠네, 안 그래?”
캐비어는 신선도를 위해 한 마리씩만 작업한다. 또다시 수조로 가서 철갑상어를 잡고, 작업실로 옮기고, 알을 수확하는 작업을 네 번 반복하니 제법 피로감이 몰려왔다.
모든 작업을 마치자, 사장이 다가와 다시 한번 한길의 어깨를 토닥였다.
“힘도 좋고 섬세하네. 좋았어! 준비운동 끝났으면 이제 실전에 들어가야지?”
“실전이요?”
“저놈들을 잡으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아?”
이번에 사장이 안내한 수조는 달랐다. 한길의 가슴팍까지 오는 수심. 그 안에는 철갑상어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성인 남자의 키에 달하는 크기의 철갑상어였다. 이 정도면 퀘스트 속 철갑상어와 비슷한 크기다.
“아까 놈들은 세부르가(sevruga) 종인데, 맛은 많이 떨어지지만 7년만 되면 성체가 되거든. 빨리 수확할 수 있으니까 대량 판매용으로는 저놈들을 많이 내보내는데, 내 야심작은 이쪽이지! 칼루가(kaluga) 종인데 다 자라려면 15년이나 걸려. 이놈이 딱 15살이고!”
철갑상어도 종에 따라 맛이 다르다. 같은 소고기라고 해도, 와규나 한우의 맛이 다르듯이.
27종의 철갑상어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건 벨루가(beluga)다. 하지만 벨루가는 카스피해에만 서식해서 러시아나 이란 등의 인근 국가에서만 수확 가능하다. 러시아 캐비아가 명물로 알려진 이유는, 벨루가 캐비어가 러시아에서 오기 때문이다.
벨루가 다음으로 맛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게 눈앞의 철갑상어. 강에서 구하는 벨루가라고 불리는 칼루가 종이다.
“야, 문배! 너 자꾸 우리 애 괴롭힐래? 애 스트레스 주지 말고 똑바로 해! 애정을 갖고 다가가!”
“아씨, 그러면 형님이 하세요!”
“내가 이 나이에 새파랗게 젊은 놈을 둘이나 두고 물에 들어가야겠냐? 내 나이에 들어가면 뼈까지 시려!”
“우리 없을 때는 매일 하면서…”
“그러니까 하루라도 쉬어야지. 제대로!”
애정을 담아(?) 철갑상어를 수확하는 건 쉽지 않았다. 2미터에 달하는 상어를 작업실로 옮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고.
하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한 눈으로 봐도 캐비어의 품질이 달랐으니까.
“크기가 다르네요.”
“그렇지?”
알이 더 크다.
이번 알은 짙은 올리브색이었다.
알집을 걷어내고, 알을 분리하고, 염지할 순서가 되자, 이번에는 한 번에 작업하는 대신 여러 통에 나눠서 작업에 들어갔다.
“형님, 함초소금 구해왔습니까?”
“그래, 이거 값도 만만치 않더라.”
“이번에 에이징은 한 달 반부터 일주일 간격으로 확인해 보죠.”
칼루가 철갑상어에서 수확한 알의 절반은 노셰프의 레스토랑을 비롯한 서울 시내에 있는 몇몇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납품하고 있었다. 남은 반은 이렇게 맛을 발전시키기 위한 실험에 사용하고 있었고.
한길이 돼지고기로 지하실에서 살루미를 만들 듯이. 노셰프는 이곳에서 캐비어로 실험을 하고 있었던 거다.
“한번 먹어볼래? 국내 최고의 캐비어!”
모든 작업을 마친 노셰프가 진공포장이 된 캐비어를 들고 다가왔다. 따각 하는 소리와 함께 진공이 풀리자 캐비어의 자태가 드러났다.
올리브색의 알은 빛을 받을 때마다 황금빛 광택이 돌아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그 맛은…
“….”
“어때, 죽이지?”
“….”
감탄사도 나오지 않았다.
백화점에서 파는, 한 통에 3백만 원짜리 캐비어를 아득히 뛰어넘는 맛이었다.
물론 국내에서 가공하니 더 신선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맛이 설명되지 않았다.
“소금을 덜 넣었거든.”
“소금이요?”
“해외에서 들여오는 건 아무래도 소금을 많이 쓰니까. 저렴한 건 소금을 8%까지도 사용하고, 대부분은 4-5%를 쓰거든. 고급 캐비어는 말로솔(malossol) 공법이라고 해서 소금을 3%만 사용하는데, 우리는 거기에 더 나아가서 2% 조금 아래로 써봤지.”
캐비어가 짤 수밖에 없는 이유. 보존 기간을 늘리기 위해 소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전체 무게의 5%에 달하는 소금을 사용하면, 60일간 냉장 보관이 가능하다. 소금 비율을 3%로 줄이면, 그 기간이 한 달로 줄어든다. 3% 아래면 아마 1-2주 내로 써야 할 거다.
이 캐비어는, 보존 기간을 대폭 줄이는 대신 맛을 택한 재료였다.
“… 압도적인 맛이네요.”
“그럼. 누가 만들었는데. 하하, 이 친구, 정말 보는 눈은 있어?”
사장은 한길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셰프의 말이 맞았다.
국내에서 이 이상의 품질을 구하기는 어렵다.
아니, 이건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캐비어였다. 직접 판매자를 만나서 맛을 디자인해서 만들어내는 캐비어였으니까.
“사장님, 이 캐비어, 저도 받아 갈 수 있을까요?”
호탕한 웃음과 함께 한길의 등을 대견하다는 듯이 두드리는 사장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답변은 칼같이 단호했다.
“안 돼.”
“네?”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어. 한 마리 키우는데 15년이라니까? 수확량의 반은 실험에 쓰고, 남은 반은 이미 대기 명단이 있거든. 새치기는 안 되지.”
노셰프도 어쩔 수 없다고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주기 싫다는 게 아니라, 물량이 없어서 줄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한길보다 먼저 이 재료를 발굴한 셰프들이 있었고, 웨이팅 리스트가 있었다. 수요가 늘었다고 해서, 성체가 되는데 15년이나 걸리는 철갑상어를 갑자기 부추겨서 성체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른 레스토랑에 납품할 물건을 대신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설령 그렇게 부탁을 해도 거절할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 최상의 캐비어가 있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저걸 주시면 안 되나요?”
“저거?”
한길이 가리킨 것은, 작업 중에 족집게로 걸러낸 알이었다. 껍질이 허물어져서 레스토랑에 납품하지 못하는, 망가진 알.
“저건 어차피 못 쓰는 거긴 한데…”
“못 쓰는 거면 저에게 주시죠.”
“못 쓴다니까?”
“쓸 수 있습니다. 저라면요.”
한길이 자신 있는 태도로 나오자, 사장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내 새끼들이 어디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줘? 여기서 나가도 혹시나 자네가 잘못 사용해서 먹는 사람들이 탈이라도 나면, 그것도 다 내 책임이라고.”
“그러면 잠시 주방 좀 빌려도 될까요? 직접 보여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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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장의 집이 있었다. 아내와 함께 생활하는 집이라 기본적인 주방 도구는 갖추고 있었지만, 레스토랑과 비교하면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거로 뭐 하려고?”
“그냥 조금 본 게 있어서요.”
한길이 만들려는 것은 스카피의 캐비어.
르네상스 귀족들이 먹던 캐비어다.
철갑상어의 알은 껍질이 망가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 내부에 캐비어의 즙이 고여 있었다. 즉, 식감은 잃었지만, 맛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거다.
한길은 그 알 위에 소금을 몇 꼬집 뿌리고, 적당량의 올리브유를 두르고 조심스레 버무려 주었다. 일반 마트에서 파는 올리브유인 게 아쉬웠지만,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
‘나무 상자도 없네.’
스카피는 두꺼운 나무 상자를 이중으로 사용했지만, 당연히 그런 도구를 구할 수는 없었다.
아쉬운 대로, 한길은 실리콘 용기를 찾아 그 안에 철갑상어알을 넣었다. 열을 차단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열전도율이 낮은 용기이니까.
오븐은 작은 토스터 오븐 하나.
예열한 오븐에 손을 넣어 기억 속의 온도를 재현할 수밖에 없었다.
적당한 온도가 되었을 때, 한길은 불을 껐다. 스카피도 빵을 모두 구운 오븐에 캐비어를 넣었으니까. 장작이 거의 불타고 희미하게 남은 잔열을 이용했었다.
한길은 실리콘 용기를 오븐에 넣고, 계속 주시하며 눈으로 변화를 확인한다. 반질반질한 껍질이 살짝 가라앉을 듯 말 듯한 그 순간, 꺼내야 한다.
나무주걱으로 흐물거리는 캐비어를 꾸욱 눌러주고, 그 위에 접시를 올려서 무게를 얹어주고 냉장고 안에 넣어서 굳힌다.
“이대로 몇 시간 기다려야 하는데요.”
“별 희한한 조리법이네. 처음 보는걸?”
신기해하는 사장과 달리, 노셰프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그건 어떻게 알았냐?”
“뭐가요?”
“그거, 파유스나야(payusnaya)잖아.”
한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노셰프가 이 요리를 아는 게 더 놀라웠지만, 그렇다고 퀘스트 속에서 봤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냥 어디서 본 적이 있어서요.”
“역시, 이 자식 공부 열심히 하는구먼!”
노셰프는 기특하다는 듯이 한길의 등짝을 마구 때렸다.
“형은 저걸 어떻게 아세요?”
“아, 저게 옛날에 러시아에서 먹던 거잖아? 거의 사라졌었는데 최근에 페펭이 무슨 캘리포니아 캐비어 회사랑 합작으로 다시 만든다더라고. 프레스드 캐비어인가, 케비어 페이스트라고 부르면서.”
페펭은 해외의 유명한 셰프이자 요리 연구가다. 그 역시 이 조리법을 되살리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었던 거고.
하지만 검색을 해보니, 페펭이 만드는 페이스트는 한길의 것과는 달랐다. 소금을 훨씬 더 많이 사용하는, 서민용 캐비어 잼이었다. 한길의 캐비어는 귀족들이 먹던 음식이고.
“그 양반 말로는 60년대나 7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 식당에서는 캐비어 페이스트를 먹었다나 봐. 그런데 어느샌가 사라지더니 지금은 아무도 기억을 못 한다면서 그걸 다시 만들어보겠다고 한 거지.”
“좋겠네, 그 양반은. 조리법은 사라져도 다시 불러올 수 있으니까.”
노셰프의 설명에, 옆에서 잠잠히 듣기만 하던 사장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더니 냉수를 들이켜 마셨다.
“그거 아나? 한국에도 토종 철갑상어가 있었다는 거?”
“아뇨.”
“7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에 살고 있었지. 뭐, 쥐도 새도 모르게 멸종되었지만. 중국에도 몇 년 전에 야생 철갑상어 하나가 멸종했다더라. 그놈의 양쯔강 댐 때문에.”
철갑상어는 강의 상류로 헤엄쳐서 알을 낳는다. 그 길목에 댐을 세우면 알을 낳을 수 없다.
“한국 토종 철갑상어는 어떤 맛일지 궁금한데, 아쉽네요.”
한국에 토종 철갑상어가 남아 있었다면, 한국의 토종 캐비어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치? 죽기 전에 한 번 먹어볼 수 있으려나?”
“사라졌는데 어떻게 먹어요.”
“사라진 건 남쪽이지. 옥류관에서는 최근에도 철갑상어 메뉴를 내놓았다는데?”
“…!”
“얄궂지 않냐? 캐비어에 한해서는 공산주의 국가가 좋더라니까? 소련이 있을 때만 해도 철갑상어가 멸종 위기까지는 아니었거든. 거기 높으신 양반들이 지들 먹겠다고 아무도 못 잡아가게 철저히 관리했으니까. 그런데 소련이 붕괴하고 10년도 안 되어서 멸종 위기가 되고 값이 몇 배나 뛴 거지.”
캐비어는 항상 고급 음식이었지만, 지금처럼 압도적인 가격의 희귀한 재료는 아니었다. 그렇게 변한 건 90년대. 생각보다 최근의 일이었다.
“에휴. 이런 얘기 하지 말고. 여기까지 왔는데, 밥이나 먹고 가야지, 안 그래?”
사장은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쉰 후에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 비가 그쳤네? 자, 그렇게 멀뚱하게 서있지 말고 나가자! 이것도 하나씩 들고!”
한길과 노셰프에게는 소쿠리가 하나씩 건네졌다.
“이건 뭡니까?”
“뭐긴, 밥 먹으려면 밥값을 해야지. 따라와.”
이번 목적지는 뒷산.
등산로도 없는 거친 산길을 한참 걸어야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 역시 있네. 저거야, 저거. 가서 좀 따와. 최대한 많이.”
사장이 가리킨 곳은 평범한 산길이었지만. 비 온 후 축축하게 젖은 땅 위에 짙은 녹색, 혹은 검은색의 무언가가 엎어져 있었다. 흐물거리는 해초같이 생긴 무언가가. 눈으로 봤을 때는 미역국을 바닥에 쏟은 것으로 보인다.
“형님, 저건 또 뭡니까?”
노셰프도 처음 보는 재료 같았다.
“아, 서울 사람들은 모르려나? 하긴, 요즘은 함양 사람들도 내 나이 또래가 아니면 모르니까. 저건, 도롭이야.”
“도녹?”
“도롭.”
“그거 한국말입니까?”
“어디 말인지 알 게 뭐야, 그냥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불러왔는데. 이건 비 오는 날에만 먹을 수 있거든.”
사장은 노셰프에게서 시선을 떼고 한길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너무 불평하진 말라고, 나름 귀한 경험이니까. 이건, 여기서만 먹을 수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