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72)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72화(172/325)
172. 허점이 있을거야
심사를 위해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차 안.
“… 저도 유별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저를 뛰어넘는 집착이 느껴지더라니까요? 이탈리아 식재료를 저보다 더 잘 아는 동양인이라니, 이건 그냥 검은 머리 이탈리아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하.”
“그거 기대되는군.”
알레산드로는 쉴새 없이 떠들었고, 그의 옆자리에 앉은 로씨 셰프는 적당히 말을 맞춰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조수석에서 앉은 엘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하지, 알레산드로? 누가 보면 레스토랑 홍보직원인 줄 알겠네.”
엘리오는 이탈리아 상공회의소의 소장이었다. 평소라면 레스토랑 심사에 동행하지 않지만, 오늘은 예외적으로 함께 나선 참이었다.
소장은 못마땅한 눈으로 알레산드로를 쏘아봤지만, 알레산드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색하게 가는 것보다는 대화하면서 가는 게 좋잖아?”
“심사의 공정성을 해치는 말만 하니까 그러지.”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나.”
“오늘은 통역으로 온 것 아니었나? 통역에만 집중해줬으면 좋겠군.”
소장은 기초적인 한국어를 할 줄 알았지만, 로씨 셰프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상공회의소의 다른 직원을 통역 삼아 데려올 예정이었지만, 알레산드로는 음식에 한해서는 자신이 더 정확할 것이라며 통역을 자처했다.
하지만 지금 행동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아무리 봐도 꿍꿍이가 가득했다.
“자네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심사하러 간 심사위원이, 심사 도중에 갑자기 사업 제안을 하다니. 너무 경솔하지 않나? 그런 건 심사를 마치고 나서 해도 되잖아?”
“합격한 직후에 내가 사업을 같이한다고 하면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잖아? 그랬다가는 분명 결과를 매수했네 어쩌네 말이 나왔을걸? 안 그대로 이상한 오해를 받고 있는데.”
그렇긴 했다.
평소라면 오스피탈리타 이탈리아나의 인증을 받든 말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인증제도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레스토랑은 달랐다. 무슨 연예인과 얽힌 논란이 있었고, 전 국민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 와중 심사를 마치자마자 심사위원이 해당 레스토랑에 재료를 납품하기로 했다고 하면 분명 의심이 짙어질 거다.
“그런 곳이랑 사업을 하다니, 무슨 생각인지.”
“나는 확신하네. 한국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이탈리아 재료를 알리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고. 뭐, 지금은 약간의 오해를 받고 있지만.”
“오해인지 아닌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잖아?”
“천연기념물 돼지로 살루미를 일일이 만드는 놈이야. 쉬운 길을 가려고 머리 쓰는 인간이 아니라는 건 장담하지.”
그러니까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어차피 이미 지나간 일이다. 무엇보다, 알레산드로의 변덕으로 심사가 미뤄진 건 소장의 입장에서 다행이었다.
‘이대로 합격을 주면 곤란하니까.’
알레산드로가 심사할 때만 해도, 홍보를 과하게 한다며 이슈가 되고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갈 정도의 관심. 무료 홍보의 기회. 그걸 보며 이번 심사를 쾌속으로 진행한 이는 다름 아닌 소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홍보가 문제가 아니라, 탈세한 연예인이 탈루액으로 차린 레스토랑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안 그래도 나보다 돈이 많은 상대를 보면 배가 아프기 마련인데. 나는 성실하게 납부하는 세금을 빼돌리고, 심지어 그 돈으로 식당을 차렸는데 떼돈을 벌고 있다면? 용서될 리 없다.
그런 레스토랑을 인증한다면, 상공회의소 역시 비난을 피하지 못할 거다.
“원래는 이런 의혹이 나온 시점에서 심사를 무산시켜야 하는데 말이지.”
“마녀사냥도 아니고, 증거도 없고 의혹만 있는데 탈락시킨다고?”
“여론이 어떨지 생각은 안 해봤나?”
“우리가 언제부터 여론까지 신경 썼지? 이 제도는 이탈리아의 요리를 제대로 알리는 해외 레스토랑을 선정하는 게 취지 아니었나?”
지난 몇 주간, 소장과 알레산드로는 마주치기만 하면 이 문제로 말다툼을 해왔다.
소장이라고 해도, 정해진 절차를 무시하고 행동할 수는 없다. 위원회의 임원이 저렇게 강경하게 나온다면 더더욱. 그리고 알레산드로는 자신의 사업이 걸려있는 만큼,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레산드로 말이 맞네. 우리는 레스토랑을 심사할 뿐이지. 요리 외의 사항은 볼 필요가 없네.”
“그건… 그렇지요.”
가만히 듣기만 하던 로씨 셰프가 단호한 말투로 알레산드로의 편을 들자, 소장은 금방 태도를 바꾸고 수긍하는 척했다.
‘로씨에게 나쁘게 보여서 좋을 것 없으니까.’
알레산드로는 어디까지나 통역으로 동행할 뿐이다. 소장 역시 소장 신분으로 동행하는 것이고. 이번 심사의 최종 결정은 로씨 셰프가 내린다.
그동안 로씨 셰프에게도 탈락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힌트를 주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요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하며 고집을 부리는데, 무려 교황 성하의 인정을 받은 셰프를 그 이상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
‘저놈 속셈은 뻔하지.’
알레산드로는 심사 내내 옆에서 추임새를 넣으면서 레스토랑 편을 들어줄 거다. 고집이 센 로씨 셰프가 그런 얕은수에 넘어갈 거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옆에서 계속 찬양을 하면 ‘그런가?’ 하면서 저도 모르게 넘어가게 되는 게 인간이다. 반면, 옆 사람이 불평을 토로하면 안 보이던 단점도 보이기 마련이다. 그건 소장이 해야 할 일이다.
‘절대 실패하면 안 돼.’
저들은 심사만 하고 나면 끝이지만, 소장은 수습을 해야 한다. 이 정도로 기사화되는 레스토랑을 인증하면 분명 여러 매체에서 연락이 올 것이다. 그걸 일일이 상대하고 해명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절대로 합격시키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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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도 추가로 맛보시겠어요?”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헤드 셰프라는 여자 셰프가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시설을 안내해 주었다.
알레산드로를 통해 사전에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살루미를 만드는 과정을 보니 놀라웠다. 시식해보니, 수입해서 들여오는 제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풍미와 맛이 혀끝을 간질였다.
“신경을 많이 썼군요.”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씨 셰프는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시설과 재료에 있어서만큼은 상당히 만족한 듯했다.
투어를 마치고 홀에 자리를 잡은 후 메뉴를 살필 때도 반응이 좋았다.
“와인 메뉴가 좋군.”
이곳의 와인 리스트는 무려 열두 장에 달했다. 100% 이탈리안 와인으로 이루어진 목록은, 한눈에 봐도 봐도 이탈리아 와인 문화를 잘 아는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
프랑스는 몇몇 값비싼 명품 와인이 유명하다면, 이탈리아는 보다 편하게 일상생활에서 즐기는 와인이 많았다. 이 리스트는 단순하게 유명 와인을 취합하는 게 아니라, 금액대 별로 풍미 별로 다양한 와인을 다루고 있었다.
요리 메뉴 역시 네치라든지, 피치 파스타 같은 독특한 토스카나 요리를 포함하고 있어 흥미가 일었다.
“특이한 메뉴가 많군.”
“저희 레스토랑 컨셉은 이탈리아의 20개 주 밥상입니다. 주기적으로 돌아가면서 평소에는 잘 접해보지 못한 각 지역의 요리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로씨 셰프 역시 신기했는지 수시로 질문을 했고, 테이블을 담당하는 여자 서버는 생긋 웃으며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서버의 설명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지만, 그 뉘앙스가 그대로 전달되지는 않았다.
“이 레스토랑은 이탈리아 20개 주 요리를 돌아가면서 다룹니다. 한국에서 네치 같은 요리를 맛보다니, 정말 색다른 경험 아닙니까! 세상에 이런 레스토랑이 어딨습니까!”
알레산드로라는 통역기를 거치면 몇 배로 과장되어 나왔으니까. 그 모습이 못마땅해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알레산드로를 보고 있자니, 서버가 소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세분 모두 셰프의 테이스팅 메뉴와 와인 페어링으로 드리면 될까요?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부,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싱그러운 미소에 소장은 저도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굽신거리게 되었다. 배배 꼬인 마음을 단숨에 무장해제시키는 미소였으니까.
‘무슨 외모로 사람을 뽑나?’
아까 셰프도 그렇고, 지금 서버도 그렇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절로 표정이 풀어지게 될 정도의 미인이었다. 이탈리아인이 미인에 약하다는 걸 알고 일부러 사람을 뽑은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이런 미인계에 넘어가면 안 된다.
‘집중하자, 집중.’
소장은 다시 속으로 전략을 준비했다.
로씨 셰프와 알고 지낸 지도 언 2년이다.
그의 성향은 파악하고 있다.
로씨 셰프는 술이 조금만 들어가면 요즘 젊은 요리사들은 너무 뻔한 요리를 만든다느니, 그도 아니면 무슨 서커스처럼 음식으로 장난을 친다고 투덜거렸다. 이탈리안 파인 다이닝이 프랑스만큼 발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고.
이 부분을 공략한다.
요리가 나오면 ‘진부하다,’ ‘장난을 친다’ 혹은 ‘이건 이탈리아 요리가 아냐.’ 셋 중 하나로 포인트를 잡고 흉을 보면 된다.
그렇게 속으로 전략을 정리하는 사이, 첫 번째 요리가 나왔다.
“아무쥬 부슈인 ‘캐비어의 두 얼굴’입니다. 가볍게 튀겨낸 수제 감자칩에 크렘 프레슈를 얹고 캐비어를 올렸습니다. 캐비어 본연의 맛에 집중할 수 있게 최대한 심플하게 만든 요리입니다.”
그 말대로 단순한 요리였다. 노란 감자 칩에 하얀 크림 한 스푼, 그 위에 캐비어 한 스푼을 올린 요리.
첫 번째 공격 포인트를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캐비어라니, 평이하군요. 요즘은 레스토랑 가는데 마다 캐비어는 꼭 나오는 것 같습니다.”
고급 요리를 아예 안 먹어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적당히 먹어본 사람 입장에서 캐비어는 식상한 재료였다. 눈알만 굴려서 보니, 로씨 셰프 역시 적잖이 실망한 모습이었다.
소장은 마지못해 먹는다는 듯이, 감자 칩 하나를 들어 올려서 대충 입안에 욱여넣었다.
와자작!
감자 칩은 유리가 깨지듯 선명한 소리와 함께 입안에서 바스러졌다. 얇은 칩은 부서지면서 감자 칩 특유의 고소함을 터트렸다. 약간의 텁텁함이 느껴지려는 찰나, 크림이 부드럽게 감자 조각을 감싸며 촉촉함을 더했다.
그리고 캐비어가 터졌다. 그 맛이 감지되자, 소장은 저도 모르게 멈칫하게 되었다.
‘캐비어가 원래 이런 맛이었나?’
입안에 바닷바람이 머물다간 느낌.
바다의 풍미와 감칠맛.
분명 익숙한 캐비어의 맛인데…
무언가가 달랐다.
보기에도 평범하고, 특별한 향신료가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진한 여운이 남았다. 한 입 더 맛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소장만이 아니었다.
“로씨 셰프께서 이 캐비어는 어디 캐비어인지 질문하시는데요.”
“경상남도 지리산 인근의 양식장에서 수확한 캐비어입니다. 저희 셰프가 직접 양식장을 찾아가서 갓 수확한 철갑상어알을 염지해서 만든 것이죠. 맛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게 소금 비율을 조절해서 만들었다고 해요.”
그제야 소장은 깨달았다.
캐비어가 짜지 않다.
소금기가 느껴지기는 하되, 향만 뽑아낼 정도의 소금만 더해져 있었다. 언젠가 진정한 셰프는 소금만으로도 맛을 낸다고 들은 기억이 있는데, 직접 경험하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 소금만 줄였는데 이렇게까지 맛이 달라진다고? 지금까지 먹은 캐비어는 왜 이걸 안 한 거지?’
그 답은 알레산드로의 통역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오직 이 레스토랑만을 위해 디자인한 캐비어입니다! 절묘하게 염지해서 맛이 다르죠? 캐비어 하나도 시장에 나온 제품이 아니라 직접 양식장을 찾아가서 본인의 비율로 염지를 하다니! 아시다시피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걸 안 하려고 하거든요. 소금이 줄면 빨리 상하고, 레스토랑에 소량 납품하는 재료를 일일이 번거롭게 맞춤형으로 만들어주려는 곳도 없으니까요. 그걸 설득하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런 디테일, 이런 정성이 놀랍다 이 말입니다!”
침이 튈 정도로 열심히 통역하는 알레산드로를 보니 짜증이 몰려왔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껏 먹어온 캐비어 중에 가장 맛있었으니까.
소장은 인상을 쓰며 같은 접시에 올라간 두 번째 갑자 칩을 들어 올렸다. 아까는 건성으로 봐서 몰랐는데, 두 번째 감자 칩 위에는 검은 구슬 대신 네모난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이건 뭐죠?”
“이쪽은 캐비어를 살짝 녹여서 만든 캐비어 페이스트입니다.”
“캐비어를 녹인다고요? 그런 아까운 짓을!”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귀족들은 이렇게 살짝 녹인 캐비어를 먹었다고 해요. 이건 저희 셰프가 이탈리아의 옛 조리서를 보고 재해석한 그 시대의 캐비어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500년 전 이탈리아 귀족의 캐비어라니. 그 스토리가 입혀진 것만으로도 지루하던 요리가 다시 보였다.
르네상스면 메디치의 시대인가?
메디치가 먹던 캐비어라니…
괜히 그 맛이 궁금해져서 입맛을 다시게 되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감자 칩을 입에 넣었다.
와자작!
아까와 똑같은 감자 칩과 크렘 프레슈였지만,
“…!”
캐비어의 맛이 전혀 달랐다.
아까 먹은 캐비어의 족히 다섯 배는 되는 듯한 진한 향.
“일반 캐비어보다는 향이 조금 진할 겁니다. 캐비어 수확 중에 터진 알로 만든 건데, 꾹꾹 눌러서 만드니까 보다 농축된 맛이라고 보시면 돼요.”
미뢰를 자극하는 풍미.
미역이나 해초에서 나는 바다 향이 느껴졌는데, 꼬들꼬들한 식감 대신 크림처럼 부드럽게 입안에서 무너졌다. 은은하게 페이스트리에서 날 법한 버터 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삼킨 후에도 입안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맛.
이런 캐비어는 처음이었다.
“이건 진귀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탈리아 귀족 캐비어라니! 사라진 이탈리아 맛을 불러오다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알레산드로는 날뛰는 말처럼 흥분하며 계속 ‘제가 뭐랬습니까?’를 반복하고 있었다. 소장은 단점을 찾아내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입안에 남는 여운이 생각을 방해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자.’
테이스팅 메뉴는 이제 시작이다.
만회할 기회는 많을 터.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소믈리에가 따라주는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니, 탄산처럼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액체가 청량감을 더해주었다. 정말 짜증 나게도, 와인 페어링까지 완벽했다.
이윽고 다음 요리가 등장했다.
“푸아그라 크로칸티노입니다. 아이스크림을 드시듯이 들고 드시면 됩니다.”
다음 요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생긴 요리였다. 젤라토같이 컵이나 콘에 담고 먹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어린 시절에나 많이 먹었을 법한 하드바.
나무 막대기를 들고 먹는 푸아그라 하드바는, 견과류 갑옷을 두르고 있어 울퉁불퉁했다.
소장의 눈이 다시 빛났다.
“푸아그라라… 캐비어 다음은 푸아그라인가요? 요즘은 레스토랑에 가면 항상 이 둘은 나오는 것 같군요. 다음은 트러플이 아닐는지.”
“워낙 유명한 식재료니까 그러지.”
“그렇긴 하지만 푸아그라 하면 프랑스 느낌이 강하지 않나? 특이해 보이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직접 들고 먹으라니…”
이건 3단 공격이 가능한 메뉴였다.
푸아그라는 진부한 재료고, 프랑스 요리에 많이 사용되었다. 특이함을 주려고 아이스크림 모양으로 만들었지만, 식기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들고 먹으라니 너무 품위가 없어 보였다. 무슨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일단 맛은 보고 평가해야지.”
로씨 셰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무 막대기를 들고 푸아그라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먹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한입을 베어먹은 로씨 셰프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뭔가 있나?’
그 반응을 본 후에야 소장도 맛을 보았다.
와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견과류 갑옷이 먼저 씹혔다. 진한 고소함을 품은 아몬드와 달달한 고소함을 품은 헤이즐넛이 기분 좋게 입안에서 뒹굴었다. 견과류는 가볍게 캐러멜라이징 되어 있었다. 오렌지 향이 나는 캐러멜을 두른 견과류였다.
‘이게 푸아그라?’
견과류 갑옷 안에 있는 푸아그라는 익숙한 푸아그라의 맛이 아니었다. 정향과 시나몬이 더해져서 어딘가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했다.
푸아그라는 살찌운 거위 간으로 만든 만큼, 지방이 많다. 그 지방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혀의 온도에 바로 녹아내렸고, 안에 가둬진 향과 풍미가 화악 퍼져나갔다.
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황홀한 맛이었다.
한 입을 더 베어먹자, 갑자기 진득한 무언가가 입안으로 쏟아지며 짜르르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온몸에 퍼졌다.
발사믹.
묵직한 발사믹 식초가 용암처럼 당당하고 느릿느릿하게 혀 위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건 발사믹 식초보다는 새콤달콤한 발사믹 시럽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았다. 설탕에서 나오는 가벼운 단맛이 아니라, 오래 숙성시킨 와인에서 날법한 농후한 단맛. 톡 쏘는 식초의 산미가 아니라, 그윽하고 어른스러운 산미가 느껴졌다.
“이건 무슨 발사믹이죠?”
“모데나에서 만든 전통 발사믹으로, 25년 숙성된 엑스트라 베키오(extra vecchio) 발사믹입니다.”
“역시, 제가 구해온 그게 맞죠? 제가 발품 팔아서 모데나의 발사믹 장인이라는 장인은 다 만나서 구해온 발사믹인데 말이죠…”
알레산드로는 본인이 공수해온 재료여서 더욱 흥분했는지, 족히 5분도 넘게 발사믹에 대해서만 지껄여댔다.
하지만 그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보물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발사믹이었으니까.
꾸덕꾸덕할 정도의 발사믹 식초는 오로지 세월이 빚어낼 수 있는 호사스러운 맛을 간직하고 있었다. 푸아그라를 압도할 정도의 향. 게다가 발사믹의 산미가 푸아그라의 기름기를 말끔하게 정돈해 주었다.
‘처음부터 발사믹이 주인공이었구나.’
이 아이스크림은 처음부터 심장에 품고 있는 발사믹을 돋보이기 위해 만들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으뜸이라고 치는 푸아그라를 선보이고, 뒤늦게 발사믹이 푸아그라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걸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보물인 발사믹을 축복하는 요리였다.
“이렇게 손으로 들고 먹는 것도 재밌네요. 어린 시절도 생각나요. 그때만 해도 배가 고프면 체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달려들어서 먹고 했었는데 말이죠. 고상한 푸아그라를 어린아이가 먹을 하드바로 만들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위트 있지 않습니까! 순수하게 먹는 즐거움을 주는 요리라고 해야 할까요!”
배경에 들려오는 알레산드로의 말을 최대한 무시하면서 소믈리에가 건네주는 와인을 홀짝였다. 과일 향이 진한 레드 와인이었는데, 타닌이 거의 없어 실키한 푸아그라의 식감과도 잘 어울렸고, 발사믹의 잔향과도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다.
‘뭔가 불안한데…’
트집을 잡는 정도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한 문장도 반박할 수 없는 요리가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래도…
계속 이럴 리가 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어딘가에서 실수가 나올 거다.
그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있자니, 다음 요리가 등장했다.
“이번 요리의 이름은 ‘추억의 모르타델라 샌드위치’입니다.”
접시 위에 올려진 분홍색 거품과 노란 빵 한 조각. 그 주변에는 녹색 가루와 하얀 액체가 뿌려져 있었다.
그 요리를 보고 소장의 눈이 다시 빛났다.
감히 모르타델라로 거품을 만들다니!
이번에야말로 너무 멀리갔다.
모르타델라란 무엇인가.
어린 시절에 먹는 추억의 음식 아닌가.
연한 핑크색에 박혀있는 하얀 점이 주는 설렘이 있잖은가. 실크 리본처럼 곱게 접히는 모습만 봐도 입맛을 다시게 되는데… 그걸…
“모르타델라의 원형을 다 뭉개버렸군요. 굳이 이걸 거품으로 만들어야 했는지, 이래서는 모르타델라의 부드러운 식감이 다 망가졌군요.”
모르타델라는 특유의 식감이 매력인 살루미다. 그걸로 거품을 만들다니. 특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귀한 재료로 장난질하는 것 않는가.
그것도 감히 모르타델라로!
모르타델라로 거품을 만드는 건, 한국인으로 치면 된장국으로 크림 수프를 만드는 것과도 같았다. 어딘가 거부감이 들었다.
“식감이 다르지만, 대신 모르타델라 향을 최대한 살렸습니다. 옆에 녹색 가루는 피스타치오 가루, 하얀 소스는 마늘과 우유로 만든 소스입니다. 취향에 맞게 발라서 드시면 됩니다.”
서버의 설명을 듣고 안내받은 대로 거품을 빵에 발라서 맛을 보았다.
‘어? 정말 맛이 진하네?’
모르타델라는 유일하게 발효를 하지 않고 열로 쪄낸 살루미다. 소시지 같은 살루미라고 봐도 되는데, 맛이 은은한 편이다.
그런데 이 거품은 그 은은한 맛을 여러 번 덧대서 강조시켰다. 원형을 살린다면 절대로 느껴보지 못하는 맛. 평소 모르타델라를 먹을 때마다 감질났는데, 가려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주고 있었다.
‘이 빵이랑도 기가 막히게 어울리고.’
스펀지처럼 생긴 빵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는데, 거품을 바르니 기공 안까지 모르타델라가 스며들어 두 가지 맛이 더 잘 어우러졌다.
빵에서는 밀가루 향 대신 침샘을 자극하는 베이컨 맛이 베어져 있었다. 게다가 빵 안에서 씹히는 무언가….
“이 안에 뭔가 들어갔나요?”
“판체타와 치치올리(ciccioli)가 들어가 있습니다.”
판체타는 돼지 삼겹살로 만든 살루미. 이것까지는 모두 아는 재료이니 그렇다 치고.
치치올리는 돼지고기의 자투리 부위를 활용한 재료다. 자투리 부위를 일차적으로 끓여서 기름을 모두 빼내어 라드(lard)를 만들고, 기름기가 빠져나간 살점은 건조해서 치치올리로 만든다. 버리는 곳 없이 알뜰하게 돼지의 모든 부위를 먹을 수 있도록.
“과연, 판체타만 이용하면 너무 염도가 강할 텐데. 치치올리가 들어가니 보다 입체적으로 향을 더할 수 있군. 게다가 찌꺼기 재료를 이렇게 살리다니, 이 안에 담긴 철학도 좋고.”
로씨 셰프의 입에서 호평이 쏟아졌다.
그 말을 듣고 소장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허점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입은 즐거웠지만, 이대로면 자신의 계획이 실패할 게 뻔했다.
‘아니, 계속 이렇게 나오지는 않을 거야.’
사람인 이상 실수는 하기 마련이니까. 테이스팅 메뉴의 모든 요리가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자기 암시를 걸듯 반복해서 속으로 되뇌었지만,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