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76)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76화(176/325)
176. 내일 보여줄게
“사실은 웨이터 월드컵이 아니라 메트로 도텔(maitre d’hotel)을 뽑는 국제대회에요. 메트로 디 트로피 대회도 열리던데, 그건 예선을 통해서 여섯 명을 미리 뽑아서 경쟁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제가 참가하기에는 무리이고, 올해에는 안 열려서…”
평소에는 간결하게 필요한 말만 하는 슬아지만, 오늘따라 설명이 횡설수설했다. 한길에게 밝힐 생각이 없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들키게 되어 당황하고 있는 거다.
“다음 달에 자리를 비운다는 게 이것 때문이야?”
“네, 다음 달 중순에 포르투갈에서 열리거든요. 대회는 사흘이지만 왕복 비행시간이랑 시차 적응 시간이 있으니까.. 아마 일주일은 자리를 비울 것 같아요.”
“비용은?”
“숙소는 대회 측에서 제공해줘요. 비행기 표는 제가…”
“왜 말 안 했어? 이 정도 비용은 지원해줄 수 있는데.”
레스토랑을 위해서 참가하는 대회라면 숨길 이유도, 사비로 다녀올 이유도 없다. 한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슬아가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직 갈지 안 갈지 확실하지 않거든요.”
“지원했다며?”
“준비 중이긴 한데, 참가자들이 다 호텔리에 공부를 한 유럽인들이더라고요. 아시아인이 우승한 건 딱 한 번뿐인데, 그것도 일본에 있는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준비하다가 부족하면 안 갈 수도 있어서…”
“그런 마음가짐이면 못 가지 않을까?”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었지만, 슬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길은 ‘아차’ 싶었다. 슬아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아요… 아직 제가 아직 세계 대회에 나갈 수준이 아니라는 거… 하지만 주방 사람들은 항상 열심이잖아요? 다들 달라진 게 눈에 보이는데… 저만 제자리에서 응원만 하는 건 싫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이길 거란 보장은 없고, 괜히 갔다가 망신만 당하고 올 수도 있는데…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에 희미하게 울먹거림이 섞여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뺨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흘러내렸지만, 슬아는 황급하게 눈을 비비는 척하며 눈물을 닦아냈다.
어떤 심정인지는 알 것 같았다. 욕심은 있지만, 자신은 없다. 조용히 다녀와서 결과가 좋으면 알리고, 아니면 없었던 일로 치고 넘어가려 했겠지.
‘내가 말을 너무 직설적으로 했나?’
한길은 그런 슬아를 보며 속으로 반성했다. 평소 요리사들을 대할 때 워낙 엄격하다 보니 슬아에게도 같은 식으로 말한 건데. 그래서는 안 된다. 요리사들과 슬아는 다르니까.
주방에는 한길과 소희가 있다. 조리 기술을 알려주고, 미각도 훈련하고, 전체적인 방향까지 잡아주니 믿고 열심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홀은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다.
SNS상에서 한길의 레스토랑 서비스는 항상 평이 좋았다. 어려운 메뉴도 쉽게 설명해 주고, 바쁜 와중에도 결코 손님을 소홀히 대하지 않으며, 친절하지만 과하지 않은 서비스라 기분 좋게 식사할 수 있었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홀 운영 경력이 없는 슬아에게 전부 맡겨 두었는데. 이 정도도 이미 충분히 훌륭하다고 한길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으로 보면, 그건 기대치가 낮은 것이었다. 주방은 일류 주방을 노리면서, 홀은 욕먹지 않을 정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수준에서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열심이네.’
그런 무관심에도 홀로 노력하는 슬아가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도중에 손을 멈췄다. 너무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건 실례니까. 결국 한길은 손의 방향을 틀어 슬아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미안, 홀은 전혀 신경을 못 썼네.”
“아, 아니에요! 처음부터 맡긴다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혼자 다 하라는 말은 아니었지.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도와줄게.”
“네?”
슬아의 몸이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한길의 ‘도와준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얼어버린 것. 요리사들의 극기훈련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슬아다. 불길한 예감에 갑자기 몸이 잘게 떨려왔다.
“플람베를 연습하고 있다면 대회에서 조리도 해야 하는 거지?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으니까.”
“아, 아니… 조리라고 해도 요리사 수준은 아니에요!”
“맞아요, 형! 형은 형 일로 바쁘니까… 누나는 제가 도와주고 있으니 걱정 마시고 맡겨주세요!”
내내 조용히 지켜보던 데니가 지원사격에 나섰지만, 한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데니, 너는 왜?”
“시험 항목에 와인 상식도 있거든요. 소믈리에 수준은 아니어도 기초는 있어야 하니까 가르쳐주고 있었죠.”
“너도 조리는 못 하잖아? 와인은 네가 가르치고 조리는 내가 가르쳐 주면 되지.”
“그.. 그렇긴 하지만…”
“왜, 내가 도와주는 게 불편해?”
데니는 슬아를 돌아보며 ‘미안, 나는 최선을 다했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슬아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윽고 두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네, 셰프. 그럼 도와주세요.”
결의에 가득 찬 눈빛. 누가 보면 전쟁터에 보내는 줄 알 거다. 그래도 한길은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너무 그렇게 주눅 들지 않아도 돼.”
“뭐가요?”
“정식으로 공부 안 했다고 주눅 들지 말라고. 나도 독학으로 요리를 배웠으니까.”
“아, 정말 그렇네요?”
형광등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슬아의 얼굴이 갑자기 환하게 빛났다.
물론, 한길은 무려 9년 동안 독학을 해왔고, 퀘스트의 도움도 받고 있으니 같은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슬아의 의욕을 북돋아 주는 게 목적이니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도 없고.
“시간이 빠듯하지만 전략만 잘 짜면 어떻게든 되겠지. 오늘은 이만 들어가고, 내일부터 훈련 시작하자.”
#
다음 날.
아침부터 한길의 사무실에는 네 명이 모였다.
한길, 데니, 슬아. 그리고…
“메트로 디 국제대회라고?”
아침에 갓 소식을 전해 들은 소희였다.
“유셰프는 유럽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오래 근무했으니까, 우리보다 아는 게 많을 것 같아서 도와달라고 했지.”
데니와 슬아의 얼굴이 한결 더 창백해져 있었다. 소희는 한길만큼이나 엄격하고 잔혹할 정도의 업무량을 강요하는데, 심지어 말투도 거칠기 때문이다.
“후우… 맞아. 찬물에 들어갈 때도 발만 담그는 게 아니라 그냥 뛰어드는 게 좋다고 했어.”
“뭐?”
“아니에요.”
계속 혼잣말하던 슬아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조지 밥티스트 컵(Coupe Georges Baptiste)의 대회 과정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우선 필기시험이 있는데 레스토랑 홀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 와인 상식, 안전과 청결에 대한 객관식 시험이에요. 이건 제가 알아서 공부하고 있으니 신경 쓰실 것 없고, 문제는 실기 시험인데…”
실기 부문은 총 아홉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시험은 테이블 꾸미기.
꽃꽂이로 센터피스를 만들고, 식기와 냅킨 등을 세팅하여 분위기 있는 식탁을 꾸며야 한다. 필요한 나이프와 포크를 종류별로 올바르게 나열하는 방법도 포함하고 있다.
“이것도 제가 공부해야 하는 거니까 넘어가고요…”
두 번째 시험은 주문받기.
대회 당일, 오늘의 메뉴가 적힌 카드가 주어지면 그걸 외우고 손님의 주문을 받아야 한다.
“이건 슬아가 잘하겠네.”
“그건 그렇죠?”
레스토랑의 신메뉴가 나올 때마다, 메뉴 설명은 슬아가 도맡아왔다. 슬아는 처음 보는 요리도 핵심을 곧잘 파악했고, 손님 입장에서 궁금한 점, 알고 싶은 점을 추려내 설명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난이도가 올라가는 건 세 번째 시험부터다.
“‘차가운 뷔페 프레젠테이션’이라고 하는데 이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사이트가 불어로 되어 있는데, 번역기를 돌려도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한길 역시 처음 들어보는 표현이라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소희는 무언가 아는 기색이었다.
“시저 샐러드 같은 거 아냐?”
“아, 네! 예전에 시험을 본 학생 블로그에 시저 샐러드를 만들었다고 나왔어요.”
“그러면 테이블 사이드로 차가운 요리를 만드는 걸 거야. 연어 타르타르나 새우 칵테일 같은 것도 있었지?”
“맞아요!”
“차가운 요리도 테이블 사이드로 만드는군요.”
한길도 테이블 사이드 메뉴를 만들어봤지만, 당연히 불을 사용하는 요리만 있는 거로 알고 있었다. 시저 샐러드를 손님 앞에서 만드는 건 들어보지 못했다.
“50년대나 60년대쯤에 유행하던 파인 다이닝 문화거든요. 지금은 구닥다… 아니, 클래식한 요리 전문점에서만 나와요. 대충 예상가는 메뉴들이 있으니까 제가 목록 한번 뽑아볼게요. 그 위주로 연습하면 되니까.”
“감사합니다!”
소희의 말에 슬아는 큰 숙제를 해결한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 항목은 유럽 문화를, 그것도 이미 지나간 미식 트렌드를 기반으로 한 항목이었다. 이런 상식은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고, 검색해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소희는 큰 도움이 되었다.
“네 번째 시험은 생선 플레이팅이에요. 포크랑 스푼을 집게처럼 사용해서 개인 접시에 담아주는 건데… 이건 영상은 있는데 공부하는 방법이 안 나오더라고요. 혹시 룰이 있나요?”
“그냥 보기 좋으면 되는 것 아닌가? 이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요즘은 이렇게 서비스하는 곳이 거의 없으니까.”
“왜요?”
“최종 플레이팅도 셰프가 직접 하는 마당에, 요리 트레이닝도 받지 않은 서버에게 맡길 리 없잖아? 아, 무시하는 건 아니고 그만큼 셰프들이 깐깐해지는 게 지금 트렌드니까.”
“그러면 이건 제가 연습할게요. 하나만 도와주시면…”
“뭐를?”
“생선을 만들어주세요. 연습하려고 집에서 생선 요리를 만들어 봤는데… 그… 젓가락으로도 안 뜯어지더라고요. 결국 가위로 잘라야 했다니까요?”
“대체 어떻게 구우면 생선을 가위로 잘라야 하는데?”
소희는 슬아를 외계인 보듯 보고 있었다. 소희 특유의, 악의는 없지만 직설적인 말투다. 한길은 소희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만들어줄게. 하루에 몇 개 필요해?”
“열 개는 너무 많을까요?”
“아예 열다섯 마리로 하자. 스태프 밀로 만들면 연습도 되고, 직원들 식사도 되니까.”
“그러면 관객이 있다는 건데…”
“그것까지 익숙해지면 좋지.”
“후우… 그렇네요. 아, 그럼 생선만 하는 게 아니라 육류도 해주세요. 다음 시험은 육류거든요.”
다섯 번째 시험은 육류 카빙.
로스트비프나 닭고기, 갈빗대가 포함된 립이나 양갈비 등을 카빙 해서 개인 접시에 담아주는 시험이었다.
여섯 번째 항목은 테이블 사이드 디저트.
“지금까지는 항상 플람베가 나왔더라고요.”
“메트로 디한테 창작 요리를 만들라는 건 아닐 테고, 플람베 기법을 쓰는 클래식 메뉴 몇 개가 있으니 이것도 제가 목록 한번 뽑아볼게요.”
마지막 세 항목은 음료였다. 와인, 칵테일, 그리고 커피를 만들어야 하는데, 와인은 데니가 도와주고 나머지는 슬아가 혼자 공부하기로 했다.
“예전에 카지노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칵테일은 자신 있거든요. 바리스타 학원도 다녔었고. 이걸 여기서 써먹게 될 줄 몰랐어요!”
그러고 보니 꽤 오래전, 슬아의 이력서에서 본 기억이 있다.
– 카지노에서는 손님 비위를 잘 맞춰야 팁을 잘 받거든요! 눈치 보는 것만큼은 자신 있어요!
이상한 부분에서 뿌듯해하던 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단둘이 한스키친에서 일하던 시절의 얘기다. 그래 봐야 일 년 전의 일인데, 한참 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한길도, 슬아도 달라졌으니까.
“그러면 일정을 짜볼게요!”
슬아는 지금까지 나온 회의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한길은 혼자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재밌네.’
메트로 도텔의 시험 항목은 어딘가 익숙했다. 퀘스트 속에서 집사가 맡았던 역할과 유사했으니까.
집사는 연회장을 꾸몄고, 차가운 요리가 차려진 크레덴자를 담당했다. ‘차가운 뷔페’의 요리를 그릇에 담아서 손님에게 내주고, 요리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다.
집사의 관할 아래에는 와인을 담당하는 보티글리에로(bottigliero)와 카빙을 담당하는 트린키안티(trincianti)가 있었다. 전부 이번 실기 시험의 항목이다. 어떻게 보면, 집사 뽑기 대회라고 봐도 되었다.
‘레스토랑은 귀족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나와서 차린 게 유래라고 했었으니 당연한 건가?’
퀘스트 속 세상은 르네상스 이탈리아이니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다면 한길이 조금 보탬이 될 거다.
#
슬아의 훈련 일정은 굉장히 빠듯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필기시험 항목을 공부했고, 한길이 생선 요리를 만들어주면 플레이팅 연습을 했다. 슬아가 담아준 생선은 스태프 밀로 상에 올라갔다.
“슬아, 너 왜 승환이만 이뻐하냐?”
“무슨 말이에요?”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저놈 생선이 더 크잖아? 차별하지 말라고.”
“그리고 껍질은 이렇게 담는 게 더 먹음직스럽지 않나?”
요리사들의 피드백을 받으며 스태프 밀을 마치고. 테이블 세팅 공부를 하고. 정신없는 런치 서비스를 치르고 나면 브레이크 타임에 맞춰 한길이 육류 요리를 내왔다. 카빙 연습을 하고, 요리사들의 피드백을 받고, 디너 서비스를 시작하고.
라스트 오더가 들어가고 주방 정리를 하는 동안은 데니와 와인 공부를 한다. 모두 퇴근한 후에는 한길과 요리 훈련이다.
“데니, 너는 왜 남는 건데?”
“끝나면 누나랑 같이 가려고요. 어차피 집도 같은 방향이고, 늦은 시간에 누나 혼자 택시 태우면 불안하잖아요?”
“피곤하지 않아?”
“신사는 레이디를 모셔다드려야죠.”
“아씨, 오글거려. 너,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마치면 한길이 직접 슬아를 집까지 태워다 주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면 데니가 실망할 것 같아 그냥 놔두기로 했다.
두 명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한길은 서둘러 필요한 준비물을 세팅했다. 훈련 메뉴는 소희가 짜 주었지만, 실제 조리는 한길이 알려주기로 했다. 식당 일만으로도 바쁜데 소희에게 이 업무까지 떠넘길 수는 없었고, 어차피 지금 가장 한가한 사람은 한길이니까.
“오늘은 크레프 수제트(crepe suzette)를 만들 거야. 플람베 디저트 중에 가장 유명한 요리라고 하는데…”
크레프 수제트는 쉽게 말하면, 크레프에 오렌지 캐러멜 시럽을 뿌리고 불을 붙이는 요리다.
한길은 밀가루와 우유, 계란을 섞어 반죽을 만들고 얇은 크레프를 구워내서 작은 접시 위에 탑처럼 쌓아 올렸다. 오렌지를 반으로 썰고, 껍질도 잘게 갈아놓았다.
“여기까지는 밑 작업이고, 이제부터는 손님 앞에서 보여주는 부분이니까 잘 봐.”
이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스 만들기.
한길은 새로운 팬을 꺼내서 불 위에 올리고, 팬 위에 설탕을 고루 흩뿌렸다. 그 위에 버터를 한 스푼 올리고, 버터가 녹으면 스푼으로 휘휘 저어준다.
“타면 쓴맛이 올라오니까 절대 태우면 안 돼. 열을 받을수록 설탕 색이 진해지면서 갈색으로 변하거든. 잘 지켜보다가 딱 이 색깔이 되면 오렌지즙을 넣어줘.”
치이이이익!
한길이 준비해둔 오렌지를 짜며 오렌지즙을 팬 안에 떨어트리자, 연기와 함께 소리가 터졌다.
“스푼으로 잘 저어주고, 오렌지 껍질을 넣어줘. 기다리면 점도가 조금 변할 거야. 딱 이즈음에 크레프를 넣어.”
오렌지 캐러멜 소스가 흥건하게 고여 있는 팬 안에 크레프를 넣는다. 소스 맛이 충분히 스며들도록 크레프에 소스를 잔뜩 묻히고, 스푼으로 보기 좋게 부채 모양으로 접어준다.
“이러면 피날레로 불을 붙여야지.”
한길은 알라딘 램프처럼 생긴 작은 단지에 담아둔 술을 꺼냈다.
그랑 마르니에 (Grand Marnier).
오렌지 엑기스와 코냑을 블렌딩한 리큐어다.
술을 넣고 팬을 기울이면, 자박자박하게 고여 있는 갈색 소스가 한쪽에 고인다.
“내 몸에서 가장 먼 쪽에 소스가 고이게 기울여. 이러면 화구에서 불이 옮겨와서..”
화르륵!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족히 1미터는 넘는 붉은 화염이 팬 안에서 넘실거렸다.
“금방 사그라들 테니까 기다려. 너무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겁먹은 것처럼 보이니까 손잡이를 잡고 살짝만 흔들어줘. 너무 세게 흔들면 옷에 불이 붙을 수 있으니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불길은 얼마 안 있어 사라졌다.
그러면 조금만 기다리다가 플레이팅. 스푼 두 개를 이용해서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아주면 된다.
촉촉한 크레프 위에 소스도 충분히 뿌려준다. 오렌지빛을 머금은 소스가 올라간 크레프는,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셰프, 먹어봐도 되죠? 맛은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
“저도?”
“먹어봐.”
슬아와 데니는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달려들었다. 서둘러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입안에 넣자,
“맛있어!”
“형! 이거 대박!”
버터와 설탕을 녹여 만든 캐러멜 소스는 메이플시럽처럼 찐득했지만, 오렌지 향이 더해져 산뜻하기도 했다. 알코올 특유의 쓴맛은 불에 날아가고 코냑의 깊이만 남았다. 덕분에 가볍게 달착지근한 캐러멜이 아니라, 깊은 맛의 캐러멜 소스가 되었다.
“제가 만들어도 이런 맛이 날까요?”
“연습해야겠지.”
“해볼게요!”
순식간에 접시를 비운 슬아는 의욕을 불태우며 바로 실전에 들어갔다. 한길이 알려준 대로 크레프를 굽고 준비물을 마련하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셰프, 저 못 믿어요?”
“왜?”
“방금 움찔거렸잖아요. 데니, 너 소화기는 언제 들고 온 건데?”
“안전제일.”
“화재는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우려와 달리, 슬아는 화재를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과물이 좋은 건 아니었다.
“왜 똑같이 했는데 맛이 이럴까요?”
“맛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똑같이 하지도 않았고.”
“모양은 연습할 거예요. 그것 말고 뭐가 문제일까요?”
총체적 난국이었다. 크레프는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했고, 입에 넣고 싶지 않을 정도의 짙은 검은색 얼룩이 져 있었다.
슬아는 요리에 재능이 없었다.
“설탕을 너무 태웠어. 오렌지즙을 너무 늦게 넣으니까 캐러멜이 이미 타버린 거지. 그래서 맛이 융합이 안 되는 거고.”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냥 버터 넣고 속으로 숫자 몇까지 세어보라고 알려주시면 안 돼요?”
“절대적인 시간이 있는 건 아니니까. 대회에서는 화력도, 팬의 두께도 다르잖아? 직접 만들어보면서 감각을 키우는 수밖에 없어. 귀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색이랑 점도를 보면서 익혀야지.”
“후우… 쉽지 않네요.”
새벽 세 시까지 연습을 해봐도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초반부터 무리해서 좋을 것 없으니까. 슬아는 설거지하고, 데니는 나랑 카트 정리하자.”
정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오자, 한길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슬아야, 내일은 여권 사본 좀 보내줘. 비행기표는 미리 구매해두는 게 좋으니까. 데니, 너도.”
“앗, 저도요?”
“같이 가려는 거 아냐?”
“그… 그게, 와인도 심사위원이 대회 당일에 정하는데 각자 모국 와인을 세 종류 정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따라가서 현장에서 보고, 예상 와인을 알려주면 성공 확률이 높으니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고, 사본 보내. 숙소는 나랑 같은 방을 쓰자.”
“형도 가요?”
“셰프도요?”
때마침 오늘 스타쥬 일정도 잡혔다. 로씨 셰프가 몇몇 레스토랑 목록을 보내왔고, 노셰프가 그 목록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을 골라주었다.
“너네는 대회 끝나고 바로 돌아오고, 나는 일이 있어서 한 달 정도 있다가 올 거야.”
“그런데 형, 영어는 할 줄 알아요?”
“너네는?”
“저야 해외에서 조금 살았으니까 당연히 할 줄 알고, 슬아 누나도 교환학생 다녀온 적이 있어서 기본은 가능하대요. 시험도 영어로 치잖아요? 그런데 형은?”
“할 줄 알아.”
“진짜? 한번 들어봐도 돼요?”
“나중에.”
“에이, 그동안 공부하려고요? 한마디만 해줘요, 어차피 실력이 하루 이틀에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아니, 하루아침에 달라질 예정이었다.
지금의 한길은 영어를 할 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번 퀘스트는 파이널 퀘스트.
일전의 스테이지 완료 보상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언어 보상이 주어질 거다. 영국 퀘스트였으니 영어를 얻게 되는 거다.
‘이번에는 할 게 많네.’
황제의 연회도 차리고. 그 시절의 카빙 전문가도 만나서 슬아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도 얻어와야 한다. 물론, 영어도 배워와야 하고. 직접 배우는 건 아니지만.
“형, 제발! 딱 한 마디만! 진짜 안 놀릴게! 궁금해서 그래요!”
데니가 포기하지 않고 옆에서 계속 칭얼대자, 한길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내일 보여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