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79)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79화(179/325)
179. 악마의 계약
미술을 잘 모르는 한길도 미켈란젤로는 안다. ‘다비드’나 ‘피에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나 ‘마지막 심판’은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들이니까.
그런 미켈란젤로가 연회를 돕는다면?
전율이 흘렀다.
그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자리가 될 거다.
그동안 한심한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잊고 있었는데, 스카피 역시 역사적인 요리사였다. 한길은 저도 모르게 홀리듯이 중얼거렸다.
“역시 스카피는 대단하네요! 발이 넓은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미켈란젤로까지 알고 있다니…”
“당연하지.”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건가요?”
“아직 만난 적은 없는데?”
“네?”
한길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의문이 가득한 눈이 스카피를 옭아매며 해명을 요구했다.
“왜 그렇게 보는 건데?”
“아까 미켈란젤로를 알고 있다면서요.”
“알고는 있지. 로마 사람이라면, 아니 지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고.”
“하지만 아는 사이는 아니라고요?”
“오늘 만나면 아는 사이가 되는 거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막무가내로 찾아가겠다는 말이었으니까. 컴퓨터 수리하겠다고 마이크로소프트 본사를 쳐들어가 빌 게이츠 내려오라고 우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한껏 부풀린 기대가 급격히 식으면서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려 했지만. 한길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스카피는 막무가내이긴 해도, 멍청한 인물은 아니다. 찾아가서 무작정 떼를 쓰지는 않을 거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미켈란젤로 앞에서.’
노치니와 함께 다닐 때, 미켈란젤로의 이름을 자주 들었었다. 피렌체 여관에서도 수시로 나오는 이름이었다.
연예인을 언급할 때와 비슷한 태도.
아니, 그 이상이었다.
미켈란젤로의 별명은 일 디비노 (il divino).
‘선택받은 자’다.
“미켈란젤로가 친구도 아닌, 생판 남의 부탁으로 연회의 조각상을 만들어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돈으로 움직일 것 같지도 않고요.”
“하긴, 그 양반은 돈이 아쉬운 양반이 아니지. 다 쓰고 죽지도 못할 만큼 모았을 테니까. 아내라도 있다면 바가지 긁을 사람이라도 있겠지만, 독신인 데다가 애도 없어. 게다가 자존심도 엄청나고, 까탈스럽기로 유명하지. 예전에 교황 성하가 의뢰만 하고 비용 지급을 미루니까 열 받아서 피렌체로 도망갔었잖아? 의뢰인이 완성된 작품을 보고 투덜대면 다른 고객에게 넘기거나, 그도 아니면 돈을 두 배로 내라고 요구한다니까.”
“그런 사람이 연회 장식품을 만들지는 않을 테니, 뭔가 계획이 있는 거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놈은 그냥 지켜보라고.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계획은 있지만, 한길에게는 알려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며칠 전, 한길의 협박은 완벽하게 잊은 모양이다.
“말했잖습니까. 이 연회는 스카피 혼자 여는 연회가 아닙니다. 계획이 있다면 공유해야죠.”
“그래서 같이 가는 거잖아? 그리고 이건 ‘요리사’의 업무가 아니라 ‘집사’의 일이니 알려줄 필요도 없고.”
그 후에도 한길은 끈질기게 질문했지만, 스카피는 끝내 말을 아꼈다.
‘돌아갈까?’
한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듣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 당장 마차를 돌려 저택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지만… 한길은 마차를 돌리지 않았다.
‘어차피 반나절일 텐데.’
대주교와 사절단에서 애써 마차와 호위까지 준비해줬는데, 아무 수확 없이 돌아가면 미안해진다. 이왕 움직였으면, 무엇이라도 얻어가는 게 좋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스카피가 운 좋게 미켈란젤로를 설득한다면… 최상의 결과를 얻게 된다. 한길에게도 이득이다.
그리고 실패하면 실패하는 나름대로 얻는 게 있을 거다.
‘스카피도 현실을 깨닫게 될 테니까.’
미켈란젤로에게 제안은커녕 만남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을 느끼면, 조금은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겸손해질 테지.
안 그래도 자기애가 강한 스카피였지만, 최근 들어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한길의 개입으로 이례적인 성공궤도에 오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저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안 되지.’
원맨쇼로 혼자 끌고 가는 건 본인에게도 이롭지 않다. 아랫사람을 잘 꾸리고 이끄는 것도 셰프의 역량이다. 한길 역시, 혼자 일하는 것보다 최셰프, 소희, 슬아가 있어서 레스토랑을 확장하고 꾸려갈 수 있었으니까.
그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현실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조심스레 행동하고, 주변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게 스카피에게는 필요하다. 그리고 솔직히…
‘조금 보고 싶기도 하고.’
남의 불행을 바란 적 없는 한길이었지만, 스카피의 콧대가 납작해지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두어 시간 짬을 내는 건 아깝지 않았다. 아니, 은근 기대도 되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성당에 도착했다.
#
“미켈란젤로를 볼 수 있나?”
“어디서 오셨죠?”
“캄페지오 대주교 예하의 저택에서 왔네.”
마차에서 내리자 스카피의 태도가 돌변했다.
근엄한 표정과 위엄있는 말투. 점잖은 분위기.
처음 한길이 스카피를 만났을 때처럼 무게를 잡고 있었다.
그게 통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게..”
현장의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처음 스카피를 봤을 때는 의심이 가득했지만, 스카피 뒤에 있는 으리으리한 마차와 호위를 본 후에 태도가 달라진 것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책임자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자, 스카피가 한길을 돌아보며 얄밉게 웃었다.
얼마 후에 온몸에 물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청년이 나타났다.
“스승님을 찾으신다고요?”
“그래, 미켈란젤로는 없나?”
“오늘은 안 나오셨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저택은 어디에 있지?”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기 전에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제자의 태도는 단호했지만, 스카피는 실망하는 대신 턱을 더욱 치켜들었다.
“나는 캄페지오 대주교 예하의 저택에서 왔네. 찰스 5세 황제 폐하와 관련된 일로 극비에 미켈란젤로를 찾고 있지.”
“들은 얘기가 없습니다.”
“들은 얘기가 없는 것은 당연하지. 자네 같은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 얘기니까.”
스카피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최대한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네. 정말 꼭 들어야 하는가?”
이건 마치…
듣는 순간, 듣는 이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그… 그게요….”
제자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지만. 스카피 뒤의 마차와 우람한 호위를 보며 굴복했다.
마차는 지나치게 화려했고, 호위는 지나치게 건장해 보였다. 한길이 보기에도 그들은 중대한 일로 행차하는 일행으로 보였다.
‘이럴 줄 알면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마부에게 미켈란젤로의 저택 주소를 알려주는 제자를 보며 한길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스카피, 거짓말을 그리 밥 먹듯이 하면 천벌 받을 겁니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하는 거지? 대주교 예하의 집에서 온 것도, 황제의 연회라는 중대한 사안으로 미켈란젤로를 찾는 것도, 전부 사실이잖아? 연회가 미리 알려지면 효과가 반감되니 극비리에 진행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
“뉘앙스가 그게 아니었잖아요.”
“그건 저놈이 어림짐작한 거지.”
“어림짐작하도록 유도했으니까요.”
“네놈, 솔직히 여기 온 것도 쫓겨나서 온 거지? 그렇게 고지식하고 딱딱하게 굴면 숨이 막힌다고. 악마면 악마답게, 조금 자기 처신을 제대로 하는 게 어때?”
스카피는 전혀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저택에 도착해서도 똑같은 행동을 취했으니까.
“캄페지오 대주교 예하의 사정으로 긴히 할 말이 있어 왔다고 전해주게.”
분명 문전박대당할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하인은 순순히 고개를 조아리며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저를 따라오세요.”
하인을 따라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스카피의 발걸음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들어가시죠.”
하인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지자, 스카피가 한길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내 뭐라고 했나? 남자가 제대로 마음먹고 덤벼들면, 그 어떤 문이든 열린다니까?”
정말로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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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는 검은 옷차림을 한 짙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나이는 중년과 노년의 사이.
삐쩍 마르고 꼬장꼬장해 보이는 인물.
어딘가 스크루지를 닮은 인상이었다.
남자가 짜증스럽게 눈매를 좁혔다.
“캄페지오 대주교의 집에서 나를 왜 찾는 거지?”
“미켈란젤로 되십니까?”
“그렇다네.”
“처음 뵙겠습니다. 캄페지오 대주교 예하의 스칼코, 바르톨로메오 스카피라고 합니다.”
“왜 찾느냐고 물었을 텐데?”
미켈란젤로는 인내심이 없어 보였다. 만나자마자 용건만 말하라고 닦달하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스카피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예하께서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조각상을 만들려고 하십니다. 그걸 만들어…”
“거절하겠네.”
미켈란젤로는 문장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거절 의사를 밝혔다.
“나는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안 그래도 미완성 의뢰도 잔뜩 쌓여있는데 시스티나 성당의 일도 잡혀버렸지. 향후 10년은 새로운 일감을 받을 수 없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저희도 2주 내로 필요한 작업물이니 말입니다. 이건, 찰스 5세 폐하를 위한 작품이거든요.”
찰스 5세라는 말에 미켈란젤로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단숨에 호의적으로 변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호기심은 보이는 눈빛.
“무엇이길래?”
“대주교 예하께서 조만간 찰스 5세 폐하를 위한 연회를 여실 예정입니다.”
“연회?”
“연회의 식탁에 올라갈 조금 특별한 조각상이 필요합니다.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닌데, 미켈란젤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연회 조각상?”
미켈란젤로는 처음에는 황당한 표정을, 이후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자네, 내가 누군지 아는가?”
“미켈란젤로죠.”
“내가 고작 성직자의 식탁 장식품을 만드는 인간으로 보이는가?”
미켈란젤로의 시선에는 조용한 분노가 담겨 있었지만, 스카피는 당당했다.
“제가 듣기로는 천하의 다빈치도 스포르차 가문의 연회나 축제의 연출을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인간은 원래부터 그쪽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출신이 천해서 피렌체에서 식당을 운영한 적도 있었지. 쫄딱 망해버렸지만.”
“그래도 요리의 미학을 잘 아시는 분이었지요. 그분이 살아계시기만 했다면, 어디까지고 찾아갈 텐데…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더는 계시지 않죠. 제가 만들려는 조각상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재의 도움이 필요한데, 다비치가 안 계시니 혹시 미켈란젤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 왔습니다. 하지만 안 된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죠.”
말의 뉘앙스가 이상하다. 다빈치가 없으니 마지못해 미켈란젤로라도 보러 왔다는 것처럼 들렸다.
“잠깐.”
스카피가 돌아서자, 미켈란젤로가 그를 불러세웠다.
“한번 들어는 보지.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스카피는 이 상황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음절 한 음절 강조하며 천천히 답했다.
“얼음 조각상입니다.”
“얼음 조각상?”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한길도 사뭇 놀랐다.
현대에서는 얼음 조각상을 흔히 볼 수 있지만, 르네상스 이탈리아는 냉장고도 없는 시대이다. 한겨울도 아닌 시기에 얼음으로 조각을 만든다는 발상은, 이곳 사람들이 쉬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세상 최고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도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얼음은 녹는다는 걸 모르나? 그런 재질로 조각상을 만들 수는 없네. 게다가 지금은 4월인데.”
“얼음 중에는 녹는데 조금 더 오래 걸리는 얼음도 있습니다. 저희 저택 창고에 있는 얼음덩어리를 꺼내 봤더니, 땀은 흘리지만 그래도 반나절 동안은 형태가 유지되더군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덩어리와 조각은 다르지. 불가능한 일이네.”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게 천재겠지요.”
스카피는 미켈란젤로의 매서운 눈길을 보고도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일전에 우연히 다빈치의 공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기계부터 파스타를 뽑는 기계까지, 대단한 발명품이 많더군요. 계란을 공기로 자르는 기계도 있던데…”
“상상만 하는 건 누구나 가능하지.”
“아니, 실제로 만들려고 도면까지 다 만들어 두셨더라는 겁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시도를 했다는 자체가 천재와 범인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미켈란젤로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다빈치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뺨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안 되신다면 저도 이해합니다. 이럴 때는 라파엘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분도 이 세상에는 없으니… 혹시 미켈란젤로의 제자 분 중에 추천할 사람은 없습니까?”
“없네.”
“없으면 어쩔 수 없죠. 로마 중의 모든 장인을 찾아가는 수밖에. 그런데 미켈란젤로도 못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도전할 사람이 있을지… 다빈치가 살아 있었더라면!”
‘저건 협박인가?’
한길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이대로 로마 중의 모든 예술가를 찾아가서, 다빈치라면 만들 수 있었을 조각을, 미켈란젤로는 지레 겁먹고 시도도 안 하고 거절했다고 소문을 내겠다는…
아무래도 그렇게 받아들인 건 한길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분노가 더욱 짙어졌으니까.
“얼음 조각상은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네. 못하는 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지. 작품을 만들어내는 그 창조의 과정은 자네 같은 인물이 감히 알 수 있는 게 아니네.”
“도전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아닙니까. 해보고 못 한다는 말을 하면 모를까, 시도가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쉬워 보이면 자네가 하지 그러나.”
“아쉽게도 저는 조각은 못 합니다. 그래서 천재 조각가를 찾는 것이죠.”
미켈란젤로는 한쪽 입술을 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집사라고 했던가? 그러면 자네의 전문인 요리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한번 만들어보게. 이 세상에 없는 요리를 당장 만들어 보여줄 수 있다면, 나도 이 세상에 없는 조각에 한 번 도전해 보도록 하지.”
“하하, 전 또 뭐라고. 그 정도는 어렵지 않죠.”
스카피는 기다렸다는 듯이 웃은 후, 옆에 서 있던 한길의 등짝을 두드렸다.
“그 정도는 제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 있는 제 요리사가 하도록 하죠. 대신, 정말 불가능해 보이는 요리를 만들어내면, 미켈란젤로도 도전해 보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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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이 주방입니다.”
하인은 주방으로 안내만 하고 바로 사라졌다. 단둘이 남게 되자 한길이 스카피를 쏘아 보였다.
“왜 스카피가 똥을 싸고 제가 치우는 거죠?”
“‘이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요리라잖아? 이건 네놈 전문이니까, 아무거나 뚝딱 한번 만들어봐!”
평소라면 투덜거리고 결국 요리를 만들어줬겠지만, 이번에는 한길도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목을 좌우로 굴리며 스트레칭만 할 뿐.
“할 수는 있지만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뭐?”
“제가 움직일 이유를 주셔야죠.”
“치사한 자식, 툭하면 계산적으로 나오네.”
“툭하면 공짜로 부려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계산을 시작할 수밖에요.”
“뭘 원하는데? 한번 들어는 보지.”
“계약이요.”
“뭐?”
“계약을 하고 싶습니다.”
스카피는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놀란 눈을 뜨고 있었다.
‘이쪽이 더 효과가 높을 것 같으니까.’
한길은 의식적으로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웠다.
평소라면 이런 어설픈 연기는 하지 않겠지만. 필요할 때에는, 가끔 원치 않은 일도 해야 하기도 한다.
“계약하고 싶습니다. 저와의 계약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겠죠? 죽어도 곱게 죽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의 몸에 뼈 한마디, 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을 것이며 영혼은 산산이 분해되어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겁니다.”
“나는 천국에는…”
“미련이 없겠죠. 물론, 영혼이 분해되면 지옥에도 가지 못할 겁니다.”
스카피는 천국은 믿지 않는다면서 매일같이 천국과 지옥을 언급했다. 한길을 악마취급 하는 것도 장난인가 싶었지만, 진심인 것 같기도 했고. 현대인인 한길에게는 와닿지 않았지만, 이 시대에서 종교와 영혼은 현세만큼이나 중요했다.
현실에서의 협박이 먹히지 않는다면.
악마가 되어줄 수밖에.
“제가 왜 지금 계약한 사람이 없을까,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까?
”… 계약?“
”사실 몇 명 있었습니다. 셀 수 없을 만큼 여럿. 하지만 지금은 없죠. 지상에도, 천국에도, 물론 지옥에도요.“
꿀꺽.
스카피의 눈에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기대도 가득했다. 생각해보면, 스카피는 처음부터 한길에게 계약을 요구했었으니까.
”계약 조건은 뭐지?“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는 무조건 제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스카피의 모든 행동에 대한 거부권이 있습니다. 또한, 이번 연회의 쿠치나 요리의 메뉴는 전적으로 제가 다 맡겠습니다. 그 대신, 저는 미켈란젤로를 위한 요리를 만들고 황제의 연회를 돕겠습니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스카피는 자신이 집사로 승격되고 황제의 연회를 맡게 된 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계약을 거절해도 되지만, 그러면 제가 주었던 걸 앗아갈 수도 있겠죠.”
“이 순간을 위해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렇죠.”
스카피의 눈이 더욱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한길은 더는 시간을 끌지 않기로 했다.
“거절해도 됩니다. 그러면 저는 지금 당장, 제 마차와 호위를 데리고 돌아가죠.”
미켈란젤로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요리도 만들지 못하고 마차 대신 혼자 걸어서 돌아가야 한다. 자기애가 강한 스카피가 그걸 좋아할 리 없다. 게다가 황제의 연회도 집사의 자리도 빼앗긴다고 하는데.
“계약을 하도록 하지.”
“종이는 있나요?”
“있기는 하지만… 잠깐.”
스카피는 품에서 종이를 꺼냈고, 한길은 주방을 훑으며 준비물을 찾았다.
어떤 계약이든 구두 계약은 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종이에 대고 글자만 적는 계약은 악마스럽지 않았다. 조금 더 악마스러운…
그때, 한길의 눈에 바늘과 비슷하게 생긴 도구가 들어왔다. 왜 이곳에 바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길은 바늘을 들고 와서 그 위에 술을 뿌려 소독했다.
“손을 내미세요.”
“손?”
스카피는 망설이긴 했지만, 순순히 손을 내밀었고, 한길은 그의 손가락을 바늘로 땄다. 체할 때 하듯이 살짝 따니 핏방울이 맺혀왔다.
작은 종자에 스카피의 피와 와인을 섞은 후. 한길은 그 피를 잉크 삼아 종이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약속을 어기면 영혼을 앗아가겠다는 문서입니다. 참고로 종이를 불태워도 효력은 지속합니다. 조금의 페널티가 붙겠지만요.”
“그래. 그런데 그건 무슨 언어인가?”
“저만이 볼 수 있는 언어입니다.”
스카피의 눈에는 한길이 쓴 문자가 이상해 보였나 보다. 그럴 수밖에. 한글이었으니까.
– 나, 스카피는 앞으로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으며 이한길의 말을 잘 듣는 얌전한 집사가 되겠습니다….
한길은 스카피의 계약서를 읽어내려가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장 중요한 스카피를 처리했다면.
이제는 미켈란젤로를 놀라게 할 저세상 요리를 만들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