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83)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83화(183/325)
183. 강요하는 건 아냐
커피와 카카오의 쓴맛을 톡톡히 본 스카피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하지만 먹다 만 콩을 코에 갖다 대고 향을 맡은 후에는, 미간에 박힌 주름이 펴졌다.
“맛은 어찌 되었든 간에 향은 좋군.”
반면, 같은 향을 맡은 한길은 실망하고 있었다.
‘오래 됐네.’
상인이 건네준 커피콩과 카카오콩은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
카카오는 본래 열매에서 꺼낼 때는 하얀색으로, 발효와 건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아몬드처럼 흐릿한 갈색으로 변한다. 커피콩 역시 생두는 연두색에 가까운 녹색이다.
이렇게 짙은 갈색에 윤기까지 흐르는 것은, 이미 한번 볶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커피와 카카오의 향과 풍미는 볶은 직후가 가장 강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연해진다. 이 향을 처음 접하는 스카피는 알지 못했지만, 한길이 느끼기에는 이미 향이 반이나 사라진 상태였다.
“볶지 않은 생두는 없나요?”
“생두? 있긴 한데··· 물량이 그리 많지는 않은데?”
“얼마나 있죠?”
“잠깐···”
상인은 물품을 뒤적거리다가 축구공만 한 크기의 자루를 두 개 꺼냈다.
“이게 전부인가요?”
“돌아가서 찾아보면 더 있을지도.”
“최대한 구할 수 있는 물량은 전부 갖고 와 주세요. 우선 생두를 쓰고 그래도 양이 모자라면 그때는 볶은 것도 추가로 주문을 하겠습니다.”
“추가로? 이름도 모르는 재료를?”
옆에 있던 스카피가 투덜거리자, 상인이 잽싸게 답변을 해주었다.
“이 동글동글한 건 동쪽에서는 카페(kahveh)라고 불리고, 이 길쭉한 것은 초코아틀(xocoatl)이라고 부르더라고.”
“초코아틀은 어느 나라 말이지? 스페인어 같지는 않은데?”
“신대륙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라고 하던데? 그냥 먹으면 조금 쓴데, 갈아서 물에 타 먹으면 그렇게 맛있어!”
콩을 만지작거리며 두 사람의 대화를 흘려듣기만 하던 한길이 갑자기 시선을 들어 상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걸 직접 드셔보셨나요? 신대륙에서 먹는 방식으로?”
“뭐··· 지인이 그쪽으로 가는 항해선에 근무하는 선원이라, 몇 번 만들어줘서 먹어본 적은 있지.”
이 시대 신대륙에서 먹던 카카오라고 하면, 아즈텍이나 마야 문명에서 먹던 초콜릿이라는 뜻이다.
“보여주실 수 있나요?”
“오늘은 할 일이 많은데··· 빨리 가서 미룬 일도 봐야 하고···”
“물론, 수고비는 드리겠습니다.”
상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길이 동전 한 잎을 내밀자 활짝 웃었다.
“하하, 뭐, 어차피 한두 시간 일을 미뤄도 세상이 망하는 건 아니니까.”
“지금 바로 보여줘도 될까요?”
“잠깐, 짐만 정리하고.”
상인이 짐을 정리하는 사이, 스카피가 다가와 속삭이듯이 질문했다.
“네놈, 저거 사용법도 모르는 거였나?”
“알 것 같은데 한번 확인해 두려고요.”
“알 것··· 같다고?”
정확히 말하면, 커피는 다룰 줄 안다. 꽤 오래전에 카페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데, 그때 가게에서 직접 로스팅까지 했으니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카카오다.
현대에서는 카카오 생두를 구하기 힘들다. 이론적으로는 어떻게 조리해야 할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기왕이면 한번 확인해 보고 움직이는 게 좋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궁금하기도 하고.’
아즈텍 초콜릿이 어떤지 보고 싶었다. 원주민이 보여주는 게 아닌, 그곳을 잠시 방문한 선원의 지인이 알려주는 방식이니 정확성은 떨어지겠지만.
어쨌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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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대로 들면 되는 건가? 생각보다 무거운데···”
상인은 누가 봐도 요리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설픈 동작으로 프라이팬 손잡이를 들고 있었는데, 저렇게 허술하게 움직이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프라이팬이 바닥에 떨어질 뿐 아니라 숯이 담긴 숯 통도 쏟을 터였다.
한길은 서둘러 팬을 낚아채고 상인을 슬그머니 옆으로 밀었다.
“조리는 제가 하죠. 뭘 해야 할지 알려주시면 제가 손발이 되겠습니다.”
“아, 역시 그게 좋겠지? 그··· 처음에는 콩을 넓은 팬에서 저어주면서 볶더라고. 색이 변할 때까지.”
설명을 들은 한길은 바로 카카오 생두를 몇 줌 집어서 팬에 넣었다. 그리고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쉴 새 없이 저어주며 콩을 달달 볶아 주었다. 모든 신경을 후각에 집중하면서.
어떤 재료든, 타는 순간에 쓴맛이 올라온다. 눈을 감으며 카카오의 향에 집중하다가 훈향이 짙어지는 순간, 콩을 불에서 내렸다.
달궈진 카카오는 껍질이 바싹하게 구워져 있었다. 땅콩껍질처럼 얇은 껍질은, 손으로 몇 번 비비니 그대로 벗겨졌다. 꼼꼼하게 모든 껍질을 벗겨내자, 다음 지시가 이어졌다.
“이걸 이상한 도구를 이용해서 으깨더라고. 무슨 돌판에 콩을 올리고 밀대로 밀면 부서지던데··· 그런 돌판이랑 밀대는 없겠지?”
“다른 걸 쓰면 되죠.”
도구가 무엇이든 간에, 카카오 콩을 으깨서 갈아주면 되는 거다.
한길은 막자사발에 구워진 카카오를 넣고 막자로 쿡쿡 내리찍어 으깨준 후, 적당히 작은 크기로 쪼개진 카카오를 갈아주었다.
볶은 콩을 갈면 코코아 가루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물은 예상외였다. 물을 넣지도 않았는데 물기가 나오면서 진득한 갈색 페이스트가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기름이 많은 거구나.’
카카오 안의 수분은 볶는 도중 날아갔지만, 기름은 증발하지 않았다. 콩을 으깨면 으깰수록, 더 많은 기름이 빠져나와 걸쭉한 카카오 반죽이 되었다.
“여기에 무슨 이상한 작물을 갈아서 넣더라고. 엄청 매운 건데 그건 이름을 모르겠네.”
신대륙에서 나는 매운 작물이면 고추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스카피의 주방에는 아직 고추가 없었다.
“그러면 대용품을 써 보죠.”
아즈텍 방식 그대로 맛을 낼 수 없는 건 아쉽지만, 한길은 바로 고추를 대체할 재료를 찾았다.
한길의 선택은 시나몬 가루.
시나몬과 초콜릿의 궁합이 좋은 건 이미 알고 있으니 망설임은 없었다.
카카오 반죽에 시나몬을 두 꼬집 넣어주고 다시 고루 섞어주자, 다음 안내가 이어졌다.
“이 반죽을 손바닥 크기로 동그랗게, 납작하게 빚어주면 되지. 그걸 살짝 말려주면 작은 접시 모양이 되는데, 먹을 때마다 하나씩 꺼내서 뜨거운 물을 부어서 먹더라고.”
카카오 반죽을 물에 타서 먹는 음료.
코코아다.
“이대로 딱딱하게 먹는 방법은 없나요?”
“내가 듣기로는 음료로만 먹는다던데?”
적어도 상인이 아는 바로는, 이 시대에는 코코아만 있고 초콜릿은 아직 없었다.
한길이 설명대로 카카오 반죽을 적당한 모양으로 빚어내자, 상인이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섰다.
“자, 이걸 물에 탈 때 특별한 방법이 있거든. 병 두 개만 준비해줄 수 있나?”
상인은 하나의 병 안에 초콜릿 반죽을 넣고 끓는 물을 부어주었다. 그리고 기다란 주걱으로 반죽이 충분히 풀어지도록 휘휘 저어준 후, 목청을 가다듬었다.
“크흠, 이게 정말 중요한 부분이거든. 이걸 병에서 병으로 여러 번 옮겨서 거품을 내야 해.”
병 안의 코코아를 그대로 다른 병으로 옮겨 따르자, 피처에서 맥주를 따를 때 그러하듯, 코코아 위에 소복하게 거품이 쌓였다. 다섯 번이나 병에서 병으로 옮기는 작업을 반복하니, 라떼와도 같은 폭신한 거품이 만들어졌다.
“이러면 다 된 거지. 그쪽에서는 이걸 차갑게 식혀서 먹는다는데, 따뜻하게 먹어도 맛있어.”
한길은 두 개의 잔을 가져와 완성된 코코아를 따르고, 하나의 잔을 스카피 앞으로 내밀었다.
“한번 드셔 보시죠.”
“···.”
스카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래도 잘 알지도 못하는 재료를 비싼 값에 구입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킁킁!
스카피는 사냥감의 채취를 좇는 사냥개처럼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빨아들였다. 이윽고 날카로운 눈매가 조금 풀어지면서 눈꼬리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초콜릿 특유의 묵직한 향과 시나몬 향.
그 앞에서 사나운 표정을 유지할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달그락. 달그락.
스카피는 코코아를 충분히 저어준 후, 스푼으로 거품 아래의 진한 갈색 액체를 관찰했다. 그리고 그대로 코코아 한 스푼을 입에 넣어 물었지만,
“윽! 왜 이렇게 써?”
곧 얼굴을 다시 심하게 구겼다.
뒤늦게 한길도 맛을 보았지만, 한길 역시 인상을 쓰게 되었다. 코코아의 향과 풍미는 굉장히 좋았지만, 혀에 감지되는 맛은 한약처럼 썼기 때문이다.
예상을 해야 했다. 현대에서도 카카오 함유량이 높은 초콜릿은 쓴맛이 강하니 말이다. 열을 가해주면 초콜릿의 풍미는 강해지지만, 그렇다고 쓴맛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뭐야, 맛있다면서 이런 걸 그렇게 비싸게 파는 건가?”
“하하, 그럴 리가. 사실은 여기에다가 꿀도 넣어줘야 하거든. 그런데 꿀을 넣으면 이 향이 조금 변하니까 본연의 맛을 느껴 보라고 그냥 줘본 거지. 자네, 꿀은 없나?”
스카피의 불평에 상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해명했다.
“꿀보다 좋은 게 있죠.”
“꿀보다 좋은 것?”
한길이 내민 것은, 꿀이 아닌 설탕이었다.
이 시기에 신대륙에는 설탕이 없으니 마지못해 꿀을 사용했을 테지만, 초콜릿의 풍미를 방해하지 않고 단맛을 더하기에는 설탕이 더 좋다.
설탕을 몇 스푼 넣으며 당도를 맞춘 한길은, 스카피의 코코아에도 설탕을 타주었다. 그리고 소금도 한 꼬집 추가했다. 소금은 초콜릿 특유의 향을 강조하면서 쓴맛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충분히 저어준 후 다시 컵을 건네자, 스카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래 봐야 얼마나 달라진다고···”
“그래도 맛은 봐야죠.”
“···.”
두 번이나 쓴맛을 본 스카피는, 한참을 머뭇거린 후에야 다시 조심스레 코코아를 맛보았다.
“···!”
한 스푼. 두 스푼.
이윽고 스푼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컵을 잡으며 벌컥벌컥 마시는 걸 보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훨씬 낫네.’
한길의 입맛에도 이제야 코코아다웠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카카오 반죽으로 만든 코코아는, 가루를 타서 먹는 코코아보다 진한 향을 자랑했다. 수프라고 느껴질 정도로 어딘가 꾸덕꾸덕한 맛이었다.
그 맛을 더욱 빛내주는 것은 거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코코아 위의 거품이 윗입술을 간질였는데, 라떼와는 달리 비눗방울처럼 가벼운 거품이었다. 게다가, 우유 맛이 아닌 코코아 맛이 나는 거품이고.
“어떻게··· 이런 맛이···”
스카피는 어느새 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혓바닥으로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이거··· 맛도 맛이지만 입안이 가득 차는데? 버터를 먹는 것처럼, 아니, 버터가 아니라 이걸 뭐라고 부르지?”
“··· 그렇네요.”
역시 스카피의 미각은 예민했다.
이 코코아가 현대의 코코아와 다른 점은, 바디감이었다. 진한 커피를 마실 때 입안 가득 풍미가 차오르는 것처럼, 농축된 초콜릿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하나만··· 더 마셔봐도 되나?”
“네, 물론이죠.”
스카피는 코코아를 한잔 더 따르고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그 맛을 음미했다. 가끔 눈을 뜰 때는, 황홀한 눈빛으로 넋을 잃고 허공을 보고 있었다.
‘역시 처음 먹으면 더 강렬한가?’
한길은 이미 초콜릿을 맛보았으니 어느 정도 이 맛에 익숙했지만, 스카피에게는 전혀 새로운 맛일 거다.
이 시대에는 아직 디저트가 없었다.
이곳의 코스 요리는 차가운 요리와 뜨거운 요리로 나뉘고, 하나의 코스에 샐러드와 메인 요리, 디저트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현대와는 확연히 다른 문화다.
디저트와 유사한 요리로 설탕에 졸인 견과류나 페이스트리가 있긴 했지만, 그런 요리는 혀끝으로만 가볍게 단맛이 느껴진다.
초콜릿의 단맛은 다르다.
특유의 벨벳 같은 묵직함. 사치스러울 정도로 윤택하면서도 입안을 꽉꽉 채우는 단맛.
그뿐 아니라 초콜릿에는 타이로신이라는 성분이 들어있는데, 타이로신은 도파민의 구성성분이다. 도파민은 희열과 쾌감, 짜릿함과 만족감을 주는 호르몬이고.
“어떤가요?”
“···”
“아마 저 반죽의 기름을 짜내고 말리면 가루가 될 겁니다. 그 가루를 밀가루와 섞어서 구워내면, 이 맛의 빵을 만들 수도 있죠.”
“···.”
“제가 말한 대로 주문을 넣어도 되겠죠?”
스카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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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량을 확인한 후에 내일 아침 중으로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추가 물량을 구해올 수도 있거든요.”
“네, 부탁드립니다.”
상인을 보낸 후, 한길은 다시 스카피를 돌아보았다. 그 사이 코코아를 한잔 더 타 먹은 스카피는 한껏 풀어진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한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애써 얼굴을 굳혔다.
“스카피, 이후에 할 일이 있으신가요?”
“왜?”
“이제부터 오르톨랑도 한번 만들어 볼까 하거든요.”
“오르톨랑?”
오르톨랑은 현대에서는 구하기도 힘들고, 설령 구한다 해도 조리할 수 없는 재료다. 오로지 이곳에서만 다룰 수 있는 재료. 그래서 어서 스카피에게 오르톨랑 조리법을 배워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스카피는 떨떠름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 저녁 식사 준비는 안 하나?”
“이미 지시는 내려두었습니다.”
오늘내일은 대주교가 외부일정이 있어 집을 비우기 때문에 하인들 식사만 차려주면 된다. 차릴 메뉴는 이미 정해두었고, 주방에 지시를 내려두었기 때문에 이틀간은 오롯이 연회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런데 스카피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빛도 어딘가 싸늘했고.
“너무 업무에 소홀한 것 아닌가? 잘 되어가는지 확인이라도 해야지 않나?”
“··· 그건 그렇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기다릴 필요가 있나? 나도 바쁜 사람인데, 나머지는 내일 하도록 하지.”
“오르톨랑 맛을 보지 않아도 되나요?”
“밤사이에 새가 어디 도망이라도 가나? 오늘은 피곤하니 이쯤 하지.”
오늘 일이 많기는 했다. 아침부터 미켈란젤로를 찾으러 다니고, 미켈란젤로의 시험을 치렀으며, 장을 보고 초콜릿까지 만들어 먹었으니 말이다.
스카피는 크게 입을 벌려 하품을 했지만, 왠지 억지로 쥐어짜는 하품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저 표정.
툭툭 쏘아붙이는 말투.
아무리 봐도···
‘삐졌나?’
스카피가 기분이 상한 건 알고 있었다. 한길이 초콜릿과 커피를 주문했을 때부터 스카피의 표정이 굳고 말이 짧아졌으니 말이다. 한길은 초콜릿과 커피의 맛을 알지만, 그 맛을 모르는 스카피 입장에서는 비싼 재료를 대량으로 주문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코코아를 세 잔이나 타 먹은 후에도 토라진 이유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오르톨랑은 내일 만들까요?”
“그건 엄밀히 말하면 ‘연회 준비’는 아니잖아? 네놈이 개인적으로 만드는 거니 네놈이 혼자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한길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지만, 돌아오는 건 코웃음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길은 다시금 피로감을 느꼈다.
‘이번에는 또 무슨 변덕인지···’
스카피의 재료에 대한 이해도나 요리 실력은 인정하는 바였지만, 이상하게 팀워크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순탄하게 가는가 싶다가도 계속 덜컹거렸다.
항상 침착한 아피키우스와 달리, 스카피는 기분에 따라 행동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가며 작업하는 기분도 들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 한길과는 정반대이기도 했고.
“내일은 해산물도 봐야 하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도록 하지.”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이 생길 텐데, 시간이 있을 때 할 일을 미리 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제는 내 스케줄까지 정하려는 건가? 선 넘는 짓은 그만하지?”
“스케줄을 정하는 게 아니라···”
대답을 하던 한길이 말꼬리를 흐렸다.
스카피가 기분이 상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선을 넘었구나···.’
이곳에서는 집사가 주방의 일인자였고, 요리사는 집사의 밑에서 일했다. 즉, 스카피가 셰프고 한길이 수셰프인 셈이었다.
그렇게 치면, 한길의 행동에 스카피가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재료 구매는 스카피가 결정할 사항인데, 아무리 확신이 있다고 해도 한길이 멋대로 결정을 내려버렸으니까.
만약 소희나 최셰프가 한길에게 말하지 않고 멋대로 비싼 재료를 주문하고, ‘결과가 좋았으니 된 것 아니냐’라고 되묻는다면, 한길 역시 기분이 좋지는 않을 터.
그걸 자각하고 나니, 스카피와 호흡이 맞지 않는 원인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문제였어.’
고대 로마에서 아피키우스와 일할 때만 해도, 지시를 내리면 무조건 믿고 따랐다. 그때만 어려운 결정을 위에서 내려주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으니까.
하지만 어느새 한길은 지시를 따르는 것보다 결정을 내리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서 스카피의 주도권을 앗아가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고.
레스토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서와 위계.
그 위계를 무너트리는 이는, 다름 아닌 한길이었다.
자신의 레스토랑에서는 자신이 셰프여도, 남의 레스토랑에 가서도 셰프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퀘스트 속에서도 마찬가지이고.
“··· 제가 잘못했네요.”
“뭐?”
“초콜릿과 커피를 보는 순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먼저 움직이고 말았어요. 상인이 보는 앞에서 멋대로 결정을 내리는 건 스카피의 체면도 상하게 하는 행동이었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으면 스카피를 먼저 불러내서 상의한 후에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진심 어린 사과를 하자, 스카피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또 뭔 속셈이지?”
스카피가 계속 한길을 악마라고 부르는 것도, 아마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터.
이곳에서는 한길이 수셰프 역할을 해야 한다.
셰프가 두 명인 주방은 혼란만 올 테니까.
하지만 수셰프 역할도 자신은 있었다.
현실에서 뛰어난 수셰프를 두 명이나 두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사과다.
이번이 마지막 퀘스트고, 스카피로부터 배울 시간은 이제 열흘이 고작이다.
어딜 가도 스카피처럼 상세하게 재료에 대한 해설을 줄 사람은 없다. 스카피에게 밉보여서 귀한 정보를 놓쳐서는 안 된다.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인정해야죠. 하지만 정말 악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화를 푸세요.”
“누가 유치하게 이런 걸로 화를 낸대?”
“피곤하시면 들어가셔도 됩니다. 저는 혼자서 일 좀 마무리하고 들어갈게요.”
오르톨랑이 궁금하긴 했지만, 이기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너무 몰아붙이기만 하니 스카피가 저렇게 삐딱하게 나오는 거다.
그렇게 한길이 반성하며 마음을 굳힐 때, 스카피가 입을 열었다.
“··· 다른 콩은 안 만드나?”
“네?”
“다른 콩을 만드는 방법은 확실히 알고 있냐고.”
여전히 날카로운 말투이지만, 아까처럼 가시가 돋은 말투는 아니다. 그리고 그 누그러진 말투는, 한길이 방금 세운 결심을 무너트리고 있었다.
‘진짜 그냥 보내려고 했는데···’
하지만 앞으로 남은 기간은 고작 열흘이다.
“커피는 확실하게 만들 줄 압니다. 하지만··· 제가 만드는 방식이 이곳 사람들 입맛에 맞을지 확신이 없네요.”
“하긴, 네놈은 지상의 맛은 모르니까. 그것만 하고 들어가도록 하지.”
한길은 저도 모르게 크게 미소를 지었다.
“커피콩은 볶는 정도에 따라 맛이 다르거든요. 우선 크게 다섯 가지 방식이 있는데, 스카피가 시식해보고 가장 좋은 맛을 알려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겠지.”
“이틀에 걸쳐서 시식할까요, 아니면 오늘 다섯 종류 다 맛보시겠어요?”
“하루 안에 맛보는 게 비교하기는 좋으니까··· 근데 네놈은 또 왜 그리 웃는데?”
“제가 웃고 있나요?”
“그것도 그냥 웃음이 아니라 사악한 웃음인데?”
“설마요.”
한길은 의식적으로 웃음을 지으려고 했지만,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커피 다섯 잔이라···’
카페인에 익숙지 않은 스카피에게는 그 효과가 더 클 거다.
오늘 구매한 재료만 한 아름이다. 오르톨랑 뿐 아니라 현대에서 다뤄보지 못한 재료의 정보를 최대한 많이 얻고 싶었다. 내일은 해산물도 배워야 하는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건 내키지 않았고.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다.
“분명 스카피가 직접 말한 겁니다? 커피 다섯 잔 모두 맛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