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85)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85화(185/325)
185. 홀린 거 아니라니까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길버트가 인상을 쓰며 한길의 얼굴을 살폈다.
“꼴이 왜 그래?”
“어제 한숨도 못 잤어.”
“또?”
“잠깐 할 일이 있어서.”
“하아··· 밥이랑 잠만 잘 챙겨도 명줄이 길어지는 법인데, 그렇게 살다간 한 번에 훅 간다?”
어젯밤의 커피 시식회와 요리 과외는 새벽녘에 끝났지만, 자리에 누워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짧은 시간에 연달아 다섯 잔의 커피를 마신 탓이었다.
현실에서도 커피 다섯 잔은 충분히 소화했기에 문제없을 거로 여겼는데···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한길이 빙의한 몸이 커피에 내성이 없다는 사실을.
“스카피는 괜찮으려나?”
“뭐가?”
“아냐, 아무것도. 오늘 아침에는 피그 페커를 만들어보려는데, 길버트 너도 한번 해보자.”
“내가?”
“연회 당일은 내가 세심하게 신경을 못 쓰니까. 지금 배워두면 나중에 영국에 돌아가서도 도움이 될 거고. 혹시 알아? 길버트 너도 마스터 쿡이 될지.”
이번 연회의 규모로 봤을 때, 한길이 모든 요리를 손수 챙기기는 어려웠다. 완성된 요리의 맛을 확인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조리 과정을 일일이 지켜보고 교정해주기는 어렵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 미리 길버트를 훈련하고 수셰프로 삼을 예정이었다.
‘길버트 만한 사람도 없으니까.’
아직 미숙한 점도 있지만, 길버트는 이번 퀘스트에서 한길이 누구보다 신뢰하는 이였다.
일전에 바다에 빠졌을 때도, 길버트가 던져준 나무통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한길은 물고기 밥이 되어 있을 거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현실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게임 오버로 인해 스테이지 진입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길버트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뿐 아니라 길버트는 한길과 재회할 때까지 상복을 한 번도 벗지 않을 정도로 진심으로 한길을 챙겨주기도 했고. 이곳을 떠난 후에도 길버트가 잘되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너무 익었어.”
“항상 이렇게 만들어왔는데?”
“영국식으로 오버쿡하면 여기 사람들은 다 도망가.”
훈련에 집중하는 도중,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쿠오코,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누구?”
주방보조의 몇 걸음 뒤에 트린키안티가 서 있었다. 카빙은 이제 그만 배워도 되는데···
“내가 냅킨 아트를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나. 주방에 들고 오기에는 너무 부피가 커서 밖에 놔두었지. 잠깐 나와보게.”
밖으로 나가자, 안뜰에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걸··· 냅킨으로 만들었다고요?”
냅킨 아트라고 해서 레스토랑에서 가끔 보는 부채 모양의 냅킨을 떠올렸는데,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냅킨 아트는 전혀 달랐다.
허리 높이의 장식물들.
다림질이라도 한 듯 빳빳한 리넨 천으로 주름을 잡고 정교하게 엮어서 만든 장식물은, 냅킨 아트보다는 냅킨을 이용한 대형 종이접기에 가까웠다.
박력 있게 앞발을 들어 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백마. 하얀 나무 아래에 노니는 늠름한 하얀 코뿔소. 꼬리를 펼치고 도도하게 걸어가는 공작새···
“이건 피렌체에서 직접 배워온 기술인데, 피렌체가 제일 유명하거든. 특별한 날에는 이렇게 냅킨 아트를 센터피스로 사용하지. 어때, 한 번 배워보겠나?”
“아뇨.”
“어?”
냅킨 아트를 배우려 했던 건, 슬아의 대회에 써먹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냅킨 장식은 신기하고 재밌긴 했지만, 현실에서의 활용성이 없다.
“이건 배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할 일도 많아서요.”
“그··· 그래도, 연회가 아니라도 영국에 돌아가서 이 기술을 보여주면 대접이 달라질걸? 조금 이름이 있는 가문들은 일부러 집사를 피렌체로 보내서 이 기술을 배워오게 하니까.”
“괜찮습니다.”
트린키안티는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러면 과일 카빙을 배워보겠나?”
“괜찮습니다.”
“그러면 개구리 카빙은 어떤가?”
“아뇨.”
“소머리 카빙도 난이도가 높은데···”
“필요 없습니다.”
트린키안티는 끈질겼다. 거듭 거절하기도 미안해지던 찰나,
“알비치 경,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스카피가 등장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아, 스카피 왔나? 나는 쿠오코와 잠시 연회 상담을 하는 중이었지.”
“연회의 담당자는 집사입니다. 연회 관련 업무라면 저와 하셔야죠.”
“그건 그런데···”
“앞으로 쿠오코와 상의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조건 저를 먼저 거치세요. 그자는 정말 바쁘거든요.”
트린키안티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스카피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저놈은 왜 네놈한테 접근하는 거지?”
“일전에 조금 특이한 카빙을 가르쳐줬거든요.”
“뭘 가르쳐줬다고???”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었다.
그러고 보니 플람베 요리를 만들기로 한 것도, 트린키안티와 거래를 한 것도, 스카피가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플람베에 대한 설명을 들은 스카피는, 머리에서 김이 나올 정도로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아무도 모르는 불타는 고기 굽기 기술을 딴 놈에게 알려줬다, 이건가? 네놈, 다른 계약자들도 있었나?”
“계약한 건 아닙니다.”
“네놈은 내가 소환한 거잖아? 그런데 왜 딴 놈들한테 지식을 마구 나눠주는 거지?”
“전 스카피에게 소환당한 기억이 없는데요.”
“말 돌리지 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차피 이 기술은 트린키안티가 직접 선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미리 알려주고 연습할 시간을 주는 게 맞죠.”
한참의 해명 후에 스카피는 겨우 화를 풀었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를 남겼다.
“앞으로 딴 놈들에게 요리의 ‘요’자고 꺼내지 마. 아니, 아예 주방 밖에 있는 놈들이랑 대화는 일절 금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 홀리고 다니지 말고.”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스카피는 오늘따라 유난히 까칠했다. 인상을 잔뜩 쓴 스카피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뭔가 불길해. 어제도 심장이 콩닥대서 잠을 한숨도 못 잤거든.”
“어제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흥분한 거겠죠. 오늘은 괜찮을 겁니다.”
“그런가?”
“아마도요.”
괜찮을 거다.
오늘은 커피를 딱 두 잔만 먹일 예정이었으니까.
그 이상은 한길도 힘들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무엇 때문에 오신 거죠?”
“아, 어제 만든 커피에 대해 물을 게 있어서 말이야. 냄비는 그 움푹한 걸 쓴 게 열을 가두기 위해서인 것 같고··· 온도는 어떻게 조절하나?”
스카피는 질문과 함께 공책을 꺼내 들었다.
“새로운 재료에 대한 건 다 적어두거든. 기억이라는 건 완전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다 까먹어. 특히 재료가 몇 백, 몇 천 단위로 넘어가면.”
스카피의 집무실에 산처럼 쌓여 있는 종이 더미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번 이렇게 적어두고, 주말이 되면 쓸만한 걸 다시 추려서 옮겨서 적지. 한 달에 한 번, 추가로 알아낸 사항까지 기록해서 정리해두고, 계절마다 다시 한번 그 계절에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다시 취합해서 적어두고···”
평소의 행실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스카피는 엄청난 노력파였다.
직접 재료를 찾아 각지를 다니는가 하면, 찾아낸 재료를 일일이 기록하고, 기록한 내용을 추가로 조사해서 또 정리하고,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복습한다.
이것도 분명 배울 점이었다.
“이 커피콩이라는 거 말이야, 혹시 동으로 만든 냄비를 쓰면 어찌 될까? 무쇠솥은?”
스카피가 새로운 실험을 제안하는 순간, 주방으로 달려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스카피!”
집사 보조였다.
이곳에서 집사 보조는 집사의 비서와도 같다. 그리고 스카피의 집사 보조는, 항상 땀을 뻘뻘 흘리고 울상을 짓는 불쌍한 사내였다.
“왜 또 아무 말씀 없이 주방에 와 계신 겁니까. 그, 그··· 큰일입니다.”
“왜?”
“미켈란젤로가 왔습니다! 그 미켈란젤로가요!”
“벌써?”
“아니, 알고 계셨습니까? 왜 말씀을 해주지 않으십니까. 한 마디만 해주셨어도···”
미켈란젤로는 얼음 조각상의 초안이 완성되는 대로 저택으로 찾아오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게 고작 어제의 일이다. 하루 만에 초안이 나올 줄은 한길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면 커피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네. 미켈란젤로랑 얘기를 마치고 나가시는 김에 주방에도 한 번 들려주세요.”
“왜?”
“잘하면 미켈란젤로의 도움을 받을 일이 또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스카피가 짐을 챙기며 일어서자, 집사 보조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 미켈란젤로가 요리사도 꼭 같이 오시라는데요?”
스카피의 날카로운 시선이 한길에게로 향했다. 의심이 가득 담긴 눈동자.
“전 홀리고 다닌 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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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하네요.”
미켈란젤로의 얼음 조각상은, 초안만 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조개 위에 서 있는 여인의 형태. 조개는 대리석으로, 여인은 얼음으로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여인은 머리 위로 쟁반을 들고 있었다.
“여기에 촛불을 얹는 거지. 그래야 녹는 속도가 조금이라도 빨라질 테니까. 한 코스가 마무리되는 동안 전부 녹아버렸으면 하거든.”
현대에는 냉동기술이 있다. 얼음 조각상을 진열해놓는 공간에 냉동 장치를 두거나 에어컨을 켜두어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당연히 그런 기술이 없다. 4월의 따뜻한 날씨에 얼음 조각이 너무 빨리 녹으면 어떨지 남몰래 걱정하던 한길이었는데··· 미켈란젤로는 녹아야 의미가 있는 조각상을 만들었다.
여인이 녹으면 조개에 물이 차오르고, 분수가 되어 물이 흘러내리는 조각상을 만든 것. 심지어 이 여인의 정체는···
“나이아스, 물의 님프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물의 요정이다.
물의 님프가 녹아서 물이 되는 모습이니 의미까지 있다. 무엇보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문화를 탐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어울리는 조각이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네요.”
스카피까지 입을 벌리며 감탄하자, 미켈란젤로가 미간을 찡그렸다.
“자네 아이디어 아니었나. 녹아야 하는 조각상을 만들라고.”
“저는 그래 봐야 산에 흐르는 폭포를 생각했죠,”
“나를 불러서 폭포나 만들라고 할 작정이었나?”
“미켈란젤로라면 폭포 하나도 기가 막히게 만들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스카피의 입에서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미켈란젤로는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 스카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스카피는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이거, 하나만 만드실 건 아니죠?”
“뭐?”
“나이아스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다섯 종류 다 만들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컨셉에도 딱 맞는데!”
“나이아스가 다섯 종류나 있나요?”
한길이 질문하자 스카피는 흥분을 가두지 못하고 신나게 말을 이어갔다.
“샘의 님프 페가이아이, 분수의 님프 크라나이아, 강의 님프 포타메이데스, 호수의 님프 림나데스, 늪과 습지의 님프 엘레이오노마이! 좋지 않나! 안 그래도 금식의 날인데 때마침 딱 다섯 종류라고! 그것도 다 물이고! 이건 운명이지!”
한길은 스카피의 생각을 곧바로 이해했지만, 미켈란젤로의 미간에 박힌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한길이 통역에 나섰다.
“이번 연회가 금식의 날에 열립니다. 육류가 전혀 없는 주방 요리가 다섯 코스 나가는데, 다섯 님프를 테마로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강의 님프가 나오는 코스에는 강에서 구한 식재료를 쓰는 형식으로요.”
“아, 그런 것이었군.”
그제야 미켈란젤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러면 바다 재료를 못 쓰지 않나?”
“볼베의 조각이 있으면 괜찮죠. 아버지가 대양의 신인 오케아노스인데, 그 정도면 해산물도 사용 가능합니다.”
“그러면 분수대의 모양을 달리해야겠군. 바다는 조개로 하면 되는데 습과 늡지는 시간이 너무 걸리겠어. 아예 이끼나 습지대 식물을 통으로 가져오는 건 어떤가?”
“그거 좋네요! 내친김에 중간중간 나무 조각을 만들어서 과일도 직접 따먹는 방식도 좋겠군요!”
미켈란젤로와 스카피는 서로에 대한 반감도 잊은 채 아이디어 회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희대의 천재 두 명이 손을 잡고 여는 연회.
대화만 들어도,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따온 듯한 그림이었다. 한길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 대단하네요.”
“뭐가?”
“이런 연회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게요.”
한길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두 명 사이에 있으니 자신의 결점이 더욱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부족한 게 경험과 창의력이라고 했었나.’
한길은 아직 이들처럼,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경험을 만들지 못했다.
고대 로마에서도. 한길이 통구이나 풀드 포크 샌드위치를 만들었지만, 그걸 잊지 못할 강렬한 경험으로 만든 건 아피키우스였다.
현실에서 만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밥상도, 영국에서 겪은 식탁을 현실로 적용해서 그대로 따라 한 것이었다.
한길은 적당히 현실의 경험과 퀘스트 속 경험을 따라 했다. 세상에 전혀 없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허공에서 뽑아내는 스카피와 미켈란젤로와는 달랐다.
“제일 사기꾼 같은 놈이 별의별 소리를 다 하네. 네놈이 만드는 요리를 보면 나야말로 말이 안 나오는데.”
“그건 제가 온 곳에서는 누구든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영국에서는 다들 그런 신기한 국수를 만드는가!”
“미켈란젤로는 그것도 모르셨습니까. 상식입니다, 상식.”
스카피가 미켈란젤로의 오해를 더욱 부추기는 사이, 한길은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특별한 게 아닙니다. 제 아이디어는 모두 어디선가 본 걸 조금 고쳐서 내는 것이니까요.”
“그건 당연하잖아?”
스카피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모방으로 시작하지. 그런데 똑같이 모방한다고 해도 네놈 색이 조금씩 묻어날걸? 그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샌가 모방하지 않아도 내 스타일이 나오기 마련이고. 뭐, 1만 번 정도 반복하다 보면 때가 오니까 1만 번을 채우면 되지.”
“자네는 1만 번이나 걸렸나?”
“미켈란젤로는 안 그렇습니까? 돈 받고 했던 작업들 말고, 지금까지 살면서 그렸던 그림들··· 다 통틀어서 남의 그림을 따라한 게 1만개는 될걸요?”
“그야···”
미켈란젤로가 말꼬리를 흐렸고, 스카피는 한길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원래 처음 내는 아이디어의 절반 이상은 버리게 되어 있는데, 네놈은 완벽한 구상이 나오기 전에는 입을 열지 않는 게 문제지.”
그럴 수도 있었다.
혼자 어렴풋이 떠올렸지만 스스로 쳐낸 아이디어도 많았으니까.
“네놈답지 않게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말해. 네놈 세상에서 봤던 것도 괜찮으니까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말하면 완벽하게 다듬는 건 가능하니까.”
“그러면···”
한길이 말을 트자, 갑자기 두 명의 천재가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아까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면서 떠올린 아이디어가 있긴 했다. 아마 실현 불가능할 거라 생각해서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분수를 만들고 싶습니다.”
“에이, 뭐야. 뜸 들이면서 말한 게 고작 분수?”
“편하게 말해보라면서 그렇게 반응하면 어느 누가 편하게 말하겠는가.”
“원래 이런 반응도 다 이겨내며 성장하는 겁니다.”
“그런 막무가내 성격이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도 고생이겠군.”
“그래도 얻는 게 있으니 남아 있는 거겠죠. 미켈란젤로도 성격이 괴팍하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제자는 많지 않습니까.”
“쯧쯧, 자네, 이런 곳에서 참고 일하지 말고 우리 집으로 오는 건 어떻겠나?”
미켈란젤로의 말에 스카피의 눈이 가늘어졌고, 한길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이건 일반 분수가 아니라, 물 대신 음료가 나오는 분수입니다.”
“음료?”
“어제 저희가 먹었던 초콜릿 음료 같지만, 조금 더 걸쭉할 겁니다. 그렇게 흘러내리는 초콜릿 분수에 과일을 찍어 먹는 거죠.”
현대에 있는 초콜릿 분수다.
“대충 이런 모양인데요···”
한길은 종이 위에 현대에서 봤던 분수의 모양을 그려보았다. 현대에는 펌프가 있으니 이런 모양이 가능하겠지만, 이곳에서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부족한 건 미켈란젤로가 해결해 줄 터.
“이건 어렵고 여기 이렇게 관을 만들어주면 가능하지.”
미켈란젤로는 커다란 싱크대처럼 생긴 분수대를 그림에 추가했다. 초콜릿이 고이면 싱크대에 있는 관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 관에 다시 위로 올라가서 초콜릿을 붓는 구조였다.
“이 관은 보기 흉하니까 조각상 안에 만들면 되겠군. 이것도 여신의 형태로 만들면 어떻겠나? 여신이 들고 있는 항아리에서 초콜릿이라는 걸 따르는 모습으로 하면 될 것 같은데?”
“멋지네요.”
“연회에 테이블은 총 몇 개지?”
“10개입니다.”
“그러면 얼음 조각만 해도 50개군. 여기에 아까 말한 나무조각상 10개, 초콜릿 분수도 10개를 만들면 되는 건가?”
“그 물량을 미켈란젤로 혼자 다 만드실 수 있겠습니까?”
“뭐, 오랜만에 노는 김에 제대로 놀아봐야지. 내가 처음 시작하던 시절이 생각나서 좋기도 하고. 고생하는 젊은 친구가 모처럼 낸 좋은 아이디어인데, 어떻게든 살려야지.”
한길을 바라보는 미켈란젤로의 눈빛은 한없이 따뜻했지만, 스카피의 눈매는 매서웠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다.
‘진짜 홀린 거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