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95)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95화(195/325)
195. 빨리 컸으면
소희를 보낸 후에는 최셰프와의 회의가 이어졌다. 1호점의 안건도 2호점과 같았다.
“신메뉴를 론칭하고 싶은데요.”
한길의 말에 최셰프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주머니에서 손바닥 크기의 메모장을 꺼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는 손길로 페이지를 휘리릭 넘겼다.
“그렇지 않아도 신메뉴와 관련해서 상의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메뉴 얘기를 꺼낼 걸 알고 있었나요?”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셰프는 안주하는 걸 싫어하니까요.”
그건 그랬다.
1호점도 2호점도 평가가 좋지만, 지금 이미지 그대로 굳어지는 게 싫었다. 계속 발전하고 진화하는 레스토랑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고, 그렇다면 이제 슬슬 변화를 줘야 할 시기다.
“지금까지 1호점은 이국적인 재료나 특이한 재료를 주로 사용해 왔는데, 이번에는 한국 토종 재료도 써보면 어떨까 해서 목록을 조금 만들어… 왜 그러시죠?”
“아니, 저도 이번에는 국내 재료를 활용하고 싶었거든요.”
안 그래도 스카피에게서 배운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를 더 탐구해보고 싶던 한길이었다.
하지만 ‘시장에 나오지 않는 재료’는 모두 토종 재료. 이탈리아 정통 요리를 선보이는 2호점에서는 다룰 수 없기에 1호점에서 시도해 보려고 했는데… 최셰프의 입에서 먼저 그 말이 나와 조금 놀란 것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제주도 천연기념물 흑돼지도 그렇고, 지리산 캐비어도 그렇고. 셰프가 그쪽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아서 저도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 역시 최셰프는 대단하네요.”
“네?”
“뒤에서 조용히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등장하는 히어로 같은데요.”
“사람마다 특기가 있으니까요.”
최셰프는 이상할 정도로 후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은 셰프를 보면서, 그리고 후배들을 보면서. 제 한계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기발한 요리를 만들거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능력은 부족하죠. 노력은 할 수 있지만, 그 노력이 즐겁기보다는 스트레스가 되더군요. 저는 그런 요리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죠.”
소희가 통통 튀는 요리사라면, 최셰프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듬직한 나무 같은 요리사였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기본에 충실하고 안정감 있게 모두를 끌고 가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것도 대단하다고 보는데…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하나 싶었지만, 최셰프는 위로가 필요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 대신이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저는 길을 개척하지는 못해도, 이정표만 있으면 안내하는 데에는 소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셰프의 비전을 실현하거나, 후배들의 과한 아이디어를 가다듬는 것은 제 능력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즐겁기도 하죠. 이게 제 역할이구나 싶습니다.”
레스토랑의 다른 직원들이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풍선이라면, 최셰프는 그들을 땅에 묶어둘 끈이었다.
“여러 가지 고민이 많으셨는데, 제가 모르고 있었군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제가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자상한 아빠 미소를 짓는 최셰프를 보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퀘스트에서도 현실에서도.
한길의 주변에는 괴짜가 많았다.
스카피는 두말할 것 없고. 소희는 멀쩡해 보이지만,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구석이 있었고. 요리사들의 경우, 열정은 인정하지만 하나같이 나사가 반쯤 풀려 있었다.
최셰프는 이 레스토랑에서 귀하디 귀한 존재.
정상인이었다.
역시…
“최셰프에게 또 부탁을 드릴 게 있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1호점과 2호점을 총괄하는 역할을 해 줬으면 합니다.”
유언장까지 쓰고 가라는 소희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건 아니지만, 그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한길의 부재에 대비한 매뉴얼은 정해두는 게 좋았다.
“총괄이라. 제가 2호점에 관여하는 건 조금 불편하군요. 그쪽도 헤드 셰프가 있는데…”
“유셰프에게 지시를 내리라는 건 아니고, 가끔 필요할 때 개입해줬으면 합니다. 유셰프는 그.. 갑자기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할 때가 있으니까요.”
“흠, 그건 그렇군요. 유셰프는 유능하지만, 가끔 주위를 안 보고 돌진하는 성향이 있죠. 외야에서 소리를 질러서 정신을 다시 차리게 해주는 정도라면 가능합니다.”
“제가 원하는 게 딱 그 정도입니다.”
역시 마음이 편했다.
최셰프라면 소희와 갈등 없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되어줄 터.
레스토랑이 정리되었다면 다음 안건.
“대회에 대해서 알아보셨나요?”
최셰프는 프랑스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현지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슬아가 참가하는 조지 밥티스트 대회는 프랑스에서 주최하는 대회인 만큼, 최셰프의 인맥을 동원해서 추가 정보를 알아봐달라고 했었다.
“정보가 많지는 않더군요. 주로 유럽인들이 참가하는 대회인 데다가 매해 참가자도 많지 않아서 알아보는데 애먹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래도 수확은 있었습니다. 대회 약 2주 전에 협회 측에서 메일을 보내서 구체적인 시험 범위를 알려준다고 합니다. 대회 구성은 매년 다르지만,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뭐죠?”
“지나칠 정도로 프랑스 중심의 대회라는 겁니다.”
#
한길은 한동안 주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1호점과 2호점 모두, 독자적으로 메뉴 개발을 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동안 한길은 재료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지만, 아직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운이 어지간히 좋지 않은 한, 시장에 나오지 않은 재료는 하루 만에 뚝딱 발견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외출하지 않을 때는 슬아의 대회 준비를 돕거나, 현대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사무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주방에 들어가고 싶어 근질근질했지만 겨우 참고 있는데,
똑똑.
“셰프!”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고 달려 들어오는 요리사가 있었다.
이번에도 2호점 주방의 요리사다.
최근 2호점 요리사들이 불쑥불쑥 찾아와 별 의미 없는 말을 꺼내다 사라지는 일이 많아졌다.
이번에 찾아온 요리사는 조현우.
갓 파스타 스테이션으로 배치된 요리사다.
“무슨 일 있어?”
“살려주세요, 셰프! 유셰프님은 미쳤어요. 제발 저희를 살려… 헉!”
요리사가 문장을 마치기도 전에, 입구에 소희가 서 있었다. 활짝 웃는 표정이지만, 어딘가 가면 같은 섬뜩한 웃음이었다.
“현우야, 여기서 뭐 하고 있니?”
평소와 다른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의심스러웠다.
“셰프!”
“화장실 간다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길래 걱정되어서 따라와 봤잖아. 화장실은 저쪽 아닌가?”
소희의 등장에 요리사는 창백해졌다.
말려야 하나 고민을 하는 사이, 소희의 웃음 가면이 한길을 향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셰프. 요즘 너무 열심히 일하다 보니까 애들이 정신이 조금 없어서 그래요.”
“방금 살려달라고 한 것 같던데.”
“요즘 저희 주방에서 유행하는 놀이에요, 놀이. 저희 요리사들이 조금 이상하잖아요? 자, 가자, 현우야.”
절망에 빠진 요리사를 보니 대체 주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더 궁금해졌지만. 한길은 간신히 호기심을 억눌렀다.
보조 바퀴를 떼야 하니까.
넘어져서 무릎 몇 번 까졌다고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된다. 소희에게 맡겼을 경우 무슨 일이 생기는지도 확실히 봐둬야 하고.
그리고 얼마 후,
각 레스토랑의 신메뉴가 나왔다.
이번 시식은 다른 요리사들이 보지 못하게, 한길의 사무실에서 헤드셰프들만 불러서 진행했다.
2호점의 미션은 에밀리아로마냐 (Emilia-Romagna)주의 메뉴를 만들 것.
에밀리아로마냐 주는 이탈리아의 ‘장바구니’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파르마 프로슈토, 발사믹 식초 등 이탈리아 명물 재료의 원산지이자 볼로네제 파스타 같은 유명 요리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소희는 신메뉴에 볼로네제 파스타를 포함했다. 스파게티 대신 넓적한 타글리아텔레 파스타를 이용한 전통 모습 그대로.
그 외에 잘 알려지지 않는 요리를 넣기도 했다. 소시지를 프로슈토와 소고기에 돌돌 말고 람브루스코 와인에 쪄낸 코테키노 인 갈레라(cotechino in galera)는, 세 종류의 고기 맛이 각각 도드라지면서, 와인 소스가 느끼함을 잡아주어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돼지고기를 우유와 허브에 넣고 장시간 삶는 마이알레 알 라떼 (maiale al latte)라는 메뉴도 있었다. 리코타 치즈처럼 몽글몽글 뭉치는 우유 소스가 지저분해 보이긴 했지만, 우유에 돼지고기의 지방이 녹아들어 캐러멜라이징 된 소스는 풍미가 가득했다.
시금치와 근대, 판체타와 파르미지아노를 넣은 에르바쪼네(erbazzone)라는 얇은 파이도 특이했고.
쿠션처럼 생긴 빵 튀김인 뇨코 프리토(gnocco fritto)도 독특했다. 어떻게 보면 이탈리아식 꽃빵 같기도 했다. 생김새가 꽃빵을 닮은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꽃빵을 연유에 찍어 먹을 때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프로슈토를 위에 얹고 함께 먹으면 그 궁합이 기가 막혔다.
“어때요?”
소희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한길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좋네요.”
“정말요?”
어딘가 시골스러운 정겨운 맛.
할머니의 손맛을 담은 따뜻한 향토 요리다.
손맛은 언뜻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재현하기에는 어렵다. 맛을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는지 알 것 같았다.
“단, 마이알레는 서빙 전에 소스를 다시 한번 믹서기에 갈아서 쓰죠. 이대로는 너무 지저분해 보이니까요.”
“원래 저렇게 생긴 건데…”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걸 모르니까, 모르는 사람이 봐도 먹음직스럽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합니다.”
“예스, 셰프! 코멘트는 그게 끝인가요?”
“네, 그 외에는 그대로 올리죠.”
다음으로 시식한 최셰프의 요리 역시 훌륭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샐러드.
30여 종의 채소가 들어간 샐러드는 당근, 연근, 고구마, 감자, 양송이, 표고버섯 등 익숙한 재료도 사용하는가 하면. 펜넬, 라디치오, 엔다이브 등의 생소한 양식 재료도 들어가 있었다.
소스는 치즈와 유청, 버터를 사용한 소스.
느끼할 것 같지만, 그 느끼함을 완벽하게 잡아주는 재료가 있었다.
“이게 방아인가요?”
“네, 깻잎처럼 생겼는데 경상도에서는 자주 먹는다고 하더라고요.”
“어딘가 고수 같네요.”
고수를 먹을 때 느껴지는 강렬한 향.
허브보다는 비누나 샴푸에 더 가까운 향이다.
그냥 먹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치즈 소스가 방아의 날카로운 향을 덮어주어 초보도 먹기 쉬울 것 같았다. 한편, 방아의 향이 청량감을 더해주어 치즈의 느끼함을 잡아주었다.
“고등어 요리도 의외로 괜찮네요.”
“그렇죠?”
초벌로 훈연한 고등어를 수비드 조리한 후, 당근 소스와 솔방울 피클을 곁들인 메뉴. 등 푸른 생선 특유의 비린내는 없고, 촉촉한 살코기와 달짝지근한 당근 소스, 상쾌한 솔방울 피클이 딱 맞아떨어지며 중독성 있는 맛을 자아냈다.
그 외에도 민어를 포로 만들어 생강 소스를 바르고 구운 요리도 있었는데, 쥐포와 비슷한듯하면서 다른 맛과 꼬들꼬들한 식감이 매력적이었다.
“이것도 그대로 가죠.”
한길의 말에 소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최셰프는 수정사항이 하나도 없나요?”
“네, 이대로 좋네요.”
“저도 맛봐도 되죠?”
소희가 어딘가 분한 표정으로 시식을 시작했다. 한길이 최셰프를 후계자(?)로 지정한 이후, 소희는 묘하게 최셰프를 의식하고 있었지만. 최셰프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 모든 걸 받아주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슬아가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 셰프님들? 제가 방해하는 건 아니죠?”
“아니, 다 끝나던 참이었어. 무슨 일 있어?”
“그게… 대회 측에서 메일이 와서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소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해요? 빨리 어벤져스 소환해야죠!”
“어벤져스?”
“아, 그.. 대회 준비위원회요.”
#
한길, 최셰프, 소희, 데니, 그리고 당사자인 슬아로 구성된 대회 준비위원회의 긴급회의가 열렸다.
최셰프의 말대로, 슬아가 받은 메일에는 대회 당일, 시험에서 다룰 상세한 범위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최셰프의 말대로, 그 범위는 프랑스에 치중되어 있었다.
한 가지 예로, 필기시험에는 프랑스의 유명 은 식기에 대한 상식, 노르망디를 비롯한 북부 프랑스의 미식 문화, 노르망디의 음료와 사과주 등에 대한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회 레스토랑’ 메뉴 역시 마찬가지.
대회 당일, 모든 참가자는 가상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메트로 디를 연기하며, 심사위원들에게 레스토랑 메뉴를 서빙해야 한다.
그런데 그 메뉴가 거의 암호 수준이었다.
“대체 파리지앵 서대기 (Filets de sole a la Parisienne)가 뭔가요?”
“서대기를 버섯 주와 생선 스톡에 살짝 졸이고, 화이트 와인 소스를 덮어준 후, 그 위에 트러플과 하얀 버섯을, 옆에는 가재를 곁들이는 요리죠.”
“처음 들어보는데…”
“클래식 요리입니다. 아마 20세기 초반에 에스코피에가 개발한 요리였던 것 같습니다.”
소희가 인상을 쓰며 질문하자, 최셰프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을 해주었다.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일한 소희조차 알지 못하는 메뉴다.
“그리비슈 소스는 저도 알고… 크레프 마드모아젤(crepe mademoiselle)은 또 뭐죠?”
“이것도 클래식 메뉴를 재해석한 건데, 한동안 인기가 많았죠. 크레프 수제트에 즉석 아이스크림을 얹는 겁니다. 한쪽에서는 플람베로 크레프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질소로 즉석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서 함께 서빙하죠.”
“가비용의 오페라(l’opera de Gavillon)는 또 뭐고요?”
“모나리자 쿠키 사이에 커피 버터크림과 초콜릿 가나슈 레이어를 둔 케이크 같은 거죠. 이것도 클래식 메뉴입니다.”
그렇게 외워야 하는 메뉴가 18개.
개중에는 슬아가 직접 테이블 사이드로 조리해야 하는 메뉴도 다수 있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대회 레스토랑’ 말고도 실기가 몇 개나 있네? 뷔페 테이블 차리기는 세팅이니까 넘어간다 쳐도, 루앙 오리? 이거, 그거죠? 오리 피로 소스 만드는 거.”
“그렇죠.”
“과일 플람베는 그나마 쉬울 것 같은데… 추가로 사용할 재료 세 개를 본인이 들고 오라는 게 걸리고.”
왜 시험 항목을 사전에 알려주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복잡한 요리들을 대회 당일에 알려준다면, 합격자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까.
소희는 질문하면서 갈수록 언성을 높이고 있었고, 최셰프는 침착하게 소희를 달래고 있었다. 슬아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서 허탈하게 웃고 있었고, 데니는… 눈치 없게 활짝 웃고 있었다.
“뭐야? 테일러 포트 와인이 나오네? 대박!”
“그건 또 뭔데?”
소희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데니가 준비운동을 하듯, 목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거 진짜 제대로 된 빈티지 와인이거든요. 와인 병을 따는 방법이 진짜 특이한데… 뭐, 나중에 보실 테니까 그때 설명하죠. 와~ 이게 나오네? 오랜만에 도구 좀 꺼내야겠는걸?”
준비 기간은 딱 2주.
그동안 이 모든 걸 마스터해야 한다.
아직도 얼이 빠진 슬아를 대신하여 소희가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일부러 어렵게 만들려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프랑스 사람만 우승하도록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잖아요?”
“그래도 해볼 만 하죠.”
당일에 벼락치기로 이 메뉴를 준다면 승산이 없겠지만. 미리 시험 항목을 알면, 보다 철저하게 준비된 자세로 임하는 자가 유리하다.
하지만 한길의 말에도 소희의 열은 식지 않았다.
“공부가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잖아요? 서대기 같은 건 한국에서 구하지도 못하는데, 맛도 못 본 요리를 어떻게 설명해요? 루앙 오리도, 한국에는 없는데 조리법을 어떻게 연습하고요?”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죠.”
“무슨 수로요?”
“비밀입니다.”
한길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자, 소희가 수상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한길이 아니었다면 아마 더 따지고 들었겠지만. 소희는 막 나가는 듯하다가도 한길의 앞에서는 깍듯했다.
“네, 우리 셰프만 믿어요.”
그 후로는 각자 어떻게 슬아를 훈련할지에 대한 대책 논의가 이어졌다. 최셰프와 소희, 한길, 데니가 각자 메뉴를 정하고 슬아에게 1대1 과외를 하는 형식으로 업무를 분담했다.
회의를 마칠 때 즈음, 데니가 한길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형은 뭐가 그리 좋아서 계속 웃어요?”
그제야 한길은 자신이 웃고 있음을 자각했다.
“아니, 그냥 재밌어서.”
“뭐가 재밌어요?”
“그냥 그런 게 있어.”
슬아가 처음 대회 참가 사실을 알렸을 때만 해도, 단순하게 레스토랑에 올릴 이력만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한길에게는 그 외에도 원하는 게 생겼다.
콜라보레이션.
퀘스트 속 콜라보와는 조금 형태가 다르지만, 지금의 이 모임 역시 콜라보였다.
최셰프는 한길이 잘 모르는 클래식 요리를 꿰뚫고 있고, 요리사들을 안정적으로 지휘해 주었다. 소희는 유럽의 파인 다이닝 트렌드를 파악하고 있었고, 특이한 실험을 마다하지 않는 동료였다. 데니는 한길이 상상도 못 한 와인의 세계를 통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한길의 시선이 슬아에게로 향했다.
슬아는 아직 가출한 영혼이 돌아오지 않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길의 최종 비전에는 집사가 필요하다.
스카피처럼, 연회장을 믿고 맡길 사람.
이 콜라보에서 빠질 수 없는 일각이었다.
‘스카피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감히 나를 뛰어넘는 인간이 어딨냐’고 호언장담하는 스카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이상하게 맞대결을 하고 싶어졌다.
슬아는 센스도 있고 열심이지만, 아직은 스카피나 미켈란젤로처럼. 최셰프나 소희, 데니처럼 믿고 의지할 파트너는 아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하게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길도 새로운 경험을 통해 성장했듯이, 슬아도 이번 대회를 겪으면 달라질 터.
슬아는 이제 갓 싹이 난 모종과도 같았다.
아직은 많이 어리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 가능성을 알 수 없다.
다 자란 상태로 만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직접 두 손으로 가꾸고 키울 수 있다.
잘 자라기 위해 필요한 햇살, 거름, 물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마련해 줄 테고.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한번 웃음이 나왔다.
한길의 미소를 보고 슬아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왜 그래요, 셰프?”
“아니, 빨리 컸으면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