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96)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96화(196/325)
196. 이런 레스토랑이 어딨어
다음날.
런치 타임을 앞둔 오전 시간에 특이한 손님들이 레스토랑을 찾아왔다.
거대한 조명과 각종 장비를 들고 온 손님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개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카키? 이게 무슨 일이죠?”
“오늘 촬영이라면서요.”
“촬영?”
한길의 레스토랑은 방송 촬영을 모두 거부하고 있다. 최셰프나 소희가 촬영 일정을 잡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한길이 곧 자리를 비우는 이 시기에, 그 둘이 말도 하지 않고 일을 벌이지 않을 터.
그때, 한길의 등 뒤에서 데니가 반갑게 뛰쳐나왔다.
“와, 사장님! 진짜 촬영팀 꾸려준 거예요? 슬아 누나 좋아하겠네.”
데니, 슬아, 촬영.
그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조지 밥티스트 대회 참가자들은 평상시에 일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서 대회 측에 보내야 한다. 평가에 중요한 항목은 아니고, 참가자들이 실제로 레스토랑에 일하고 있는지, 일하는 곳의 분위기는 어떤지 파악할 용도인 것 같다.
그 촬영을 오늘 하려고 했는데…
“설마, 이 촬영팀으로 하겠다는 건 아니죠?”
“누구 레스토랑인데,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인사해요, 셰프. 이쪽은 제 뮤비 감독님, 이쪽은 조명 감독님. 장비도 CF 촬영에만 쓰는 조명이랑 장비에요. 하루에 얼마게요?”
“모르겠는데요.”
“500만 원.”
카키는 ‘나 잘했지’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비 대여료만 500 만원.
촬영이 필요하단 사실은 어제 알게 되었으니 하룻밤 안에 이 스텝과 장비를 구했다는 건데…
“우와, 천만 원은 깨졌겠는데요?”
어느새 밖으로 나온 소희가 입을 떡 벌리며 감탄하고 있었다. 카키는 ‘천만 원’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뭐, 천만 원쯤이야.”
카키는 그 주제로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소희의 관심은 이미 데니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그런데 데니, 너 카사장님이랑 연락하는 사이였어?”
“연락은 아니고, 그냥 아침저녁으로 깨톡 넣어드리는 건데요? 오늘 우리 레스토랑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만 알려드리고.”
“그게 연락 아닌가?”
“그냥 안부 인사죠. 직원인데, 당연하잖아요?”
“사회생활 잘하네.”
둘 사이에 대화가 오가는 사이, 장비를 든 스텝들이 레스토랑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한길은 서둘러 그들 앞을 막아섰다.
마음은 고맙지만,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
저 장비가 다 들어가려면 테이블 몇 개는 치워야 한다. 무엇보다, 이런 대규모 촬영은 손님들이 불편해할 거다.
“카키, 미안하지만 이건 못 써요.”
“왜요?”
카키의 뿌듯한 표정을 보니, 사실대로 ‘이건 민폐다’라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나름 좋은 의도로 준비한 거니까.
“대회 쪽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어 달라고 한 건데, 광고 조명과 전문 감독이 찍어준 영상은 너무 작위적으로 보여 오히려 역효과일 겁니다.”
“아.”
카키는 바로 납득했지만, 평소의 옅은 미소가 증발해 버렸다. 그 와중, 소희가 눈치 없게 추임새를 더했다.
“와, 아깝네. 지금 와서 환불도 안 될 테고, 돈 천 버리는 거네요.”
“뭐, 천만 원 정도는.”
“천만 원을 쓰는 거랑 천만 원을 버리는 건 다르죠.”
“…”
소희의 말에 카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희는 카키로부터 등을 돌리고 한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지 말고 셰프, 감독도 있고 장비도 있는데, 이 김에 프로필 사진 한번 찍으면 어때요?”
“프로필 사진은 딱히 필요 없는데요.”
“나중에 필요할 수도 있고, 바쁠 때 급하게 촬영하는 것보다 한가할 때 해놓으면 좋잖아요? 그리고…”
소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왕 하는 거, 헤드 셰프들도 하나씩 찍고.”
이걸 노리고 있었나.
“셰프, 제가 쏘는 거니까 한번 찍죠.”
주눅 들어 있던 카키가 소희의 제안을 듣고 활짝 웃었다. 여기서 한 번 더 거절하면 왠지 불쌍하다.
“유셰프의 말도 일리 있습니다.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찍죠. 그러면 나중에 서면 인터뷰를 할 때 쓰기 좋을 겁니다.”
어느샌가 밖으로 나온 최셰프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결국 모두의 부추김에 갑작스러운 촬영이 이어졌다.
“셰프님, 사진발 죽이네. 찍는 맛이 있어! 시선 조금 더 왼쪽으로! 좋아요! 그대로 멈추고…”
카메라 감독은 신이 나서 촬영을 했고, 어느새 촬영 현장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큰길가에 자리한 레스토랑인데, CF 촬영에나 쓰는 거대한 장비와 수많은 스텝이 모여있으니 행인들의 이목을 잡은 것. 게다가 입구에는 유명인인 카키가 서 있었고.
촬영하는 동안, 몇몇 사람들이 다가가 카키에게 말을 걸고 사인을 요청하거나 같이 사진 찍는 게 보였다. 촬영을 마친 한길에게도 다가오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셰프님 사인도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사인이 딱히 없는데요.”
“그러면 사진이라도…”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한길 셰프님 팬이에요! 앞으로도 응원할게요!”
방송 출연도 잘 하지 않는 한길의 팬일 리 없다. 그래도 이름을 알고 있으니 어느 정도 인지도가 오른 건가… 생각하는 사이, 최셰프가 카메라 앞에 섰다.
‘아까도 저 헤어스타일이었나?’
어느새 최셰프의 헤어스타일이 달라져 있었다. 왁스를 바르고 머리를 고정한 모습은 처음 본다.
한길의 옆에서 소희도 열심히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있었다. 소희가 화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다.
“뭘 봐요?”
“의외여서요. 촬영은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왜요?”
“전에 홍보 영상 찍을 때 그래 보였으니까요.”
“그거랑 이건 다르죠. 그것보다 셰프, 포즈 좀 골라주세요.”
소희는 자신의 핸드폰을 한길 앞에 내밀었다. 화면 속에는 수많은 유명 셰프들의 사진이 있었다.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친근하게 웃는 사람도 있었고. 여유롭게 기대면서 카메라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이 포즈가 제일 마음에 드는데, 너무 건방져 보이죠? 오너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직 오너는 아니니까요.”
“아직?”
“아, 말이 헛나왔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소희가 카메라 앞에 서자, 이번에는 경우가 은근슬쩍 한길의 옆으로 다가왔다. 경우의 머리에도 왁스가 발라 있었다.
“너도 찍으려고?”
“카키 사장님이 어차피 오후 2시까지 촬영 일정 잡아놨다고, 찍고 싶은 사람은 줄 서라고 했거든요. 아, 물론 밑 작업 끝난 사람만 하는 겁니다. 절대 서비스에는 지장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셰프.”
아무래도 주방에도 촬영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궁금해서 주방으로 들어가 보니,
다다다다다!
“야, 막내! 생선 더 가져와!”
“아니, 고기부터!”
“저 새끼보다 내가 서열 더 높은거 알고 있지? 너, 줄 잘 서라!”
요리사들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칼의 움직임이 묘기에 가까웠다.
뒤늦게 한길을 본 요리사들이 일제히 손을 멈췄다.
“어, 셰프?”
“그렇게 서두르다가 다치겠다. 평소대로 해.”
“그럴 순 없죠. 오픈하려면 앞으로 한 시간! 지금까지 한 사람당 15분 걸렸으니까 앞으로 딱 네 명까지 가능하거든요. 인생 기회인데, 놓치면 안 되죠.”
뭔가 절박함이 느껴지는 요리사들의 태도에 괜히 미안해졌다. 저렇게까지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는데…
“걱정 말고 천천히 해. 한 명씩 순서대로 찍게 해줄 테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점심 서비스가…”
“찍는 동안 스테이션은 내가 맡으면 되지.”
원래는 점심시간에 슬아의 일하는 모습을 찍으려고 했는데, 그건 저녁에 해도 상관이 없다. 한동안 주방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모처럼 요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정말입니까, 셰프?”
“저희를 위해서?”
“이런 레스토랑이 어딨냐!”
“진짜, 평생 따르겠습니다, 셰프!”
요리사들이 지나칠 정도로 감격에 겨워하자, 한길은 괜히 죄책감을 느꼈다.
#
촬영은 브레이크타임까지 이어졌다. 내내 촬영장을 지켜보던 카키는, 스텝들이 떠난 후에도 남아서 직원들과 함께 식사했다.
“이게 스태프 밀이에요? 레스토랑 요리만큼이나 맛있는데요?”
오늘 메뉴는 라구 파스타.
2호점의 신메뉴로 만든 볼로네제식 라구에 와인을 조금 바꿔본 것이다. 메뉴 다듬기 겸 직원들 식사 메뉴로 만든 요리였는데, 입에 감기는 감칠맛이 정말 뛰어났다.
“아까 감독님한테 슬쩍 보여달라고 하니까, 실물 다섯 배 정도는 잘생기게 나오던데! 이러면 소개팅 성공률 올라가겠지?”
“기대치를 너무 높여놓으면 오히려 성공률은 떨어지지 않나?”
“찬물 끼얹지 말고, 카사장님 덕분에 연예인 촬영도 해보고! 오늘 일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충성!”
소란스러운 요리사들의 반응에 카키는 만족스러운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칠 때 즈음, 데니가 카키에게 물었다.
“사장님, 오늘 바쁘세요?”
“아니, 왜?”
“모처럼 좋은 선물 주셨으니까 제가 재밌는 거 보여드리려고요.”
“뭔데?”
“잠시만요.”
데니는 부산스럽게 일어서며 어딘가로 향하더니, 커다란 나무 상자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건 뭔데?”
“브레이크타임에 슬아 누나한테 포트 와인 따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했거든요. 이게 진짜 신기한데, 아마 국내에서 이 장비 가진 사람은 손에 꼽을걸요?”
데니는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상자의 내용물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알코올램프 두 개.
가열용 집게 하나.
물이 담긴 커다란 은색 통.
유리로 만든 디캔터.
과학 시간에 실험실에서 봤던 도구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서 훨씬 보기 좋았다.
신기한 광경에 카키는 물론, 요리사들까지 빙 둘러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와인을 딴다고?”
“모든 와인은 아니고, 빈티지 포트 와인 딸 때 쓰는 방법이거든요. 포트용 집게(port tong)로 여는 거거든요.”
데니는 가열용 집게를 들어 올리며 설명했다.
포트용 집게는 일반 집게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끝부분이 원형 링처럼 생겼다. 와인병의 주둥이를 두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링이다.
“포트 와인은 알코올이랑 설탕 함유량이 많아서 코르크가 빨리 상하거든요. 빈티지 와인의 경우는 더하고요. 일반 와인오프너로 따면 코르크 부스러기가 안에 떨어지니까 아예 병을 잘라서 열어요.”
“병을 자른다고?”
“한번 시범 보여줄 테니까 잘 보세요.”
데니는 특유의 화려한 손동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이고, 그 불에 집게를 가열한다. 그동안 별도의 작은 램프에는 작은 냄비 같은 용기를 올리고, 그 안에 밀랍을 녹이기 시작했다.
“이제 엽니다. 집게로 집는 위치는 코르크 아래에. 아니면 코르크 부스러기가 같이 떨어지니까요.”
데니가 충분히 달궈진 집게를 들고 와인병의 주둥이에 갖다 대고 기다리자,
깡!
청명한 소리와 함께 와인병의 윗부분이 절단되었다.
“병은 유리니까 순간적으로 고온을 가하면 깨지거든요. 깔끔하게 떨어져 나가니까 내부에 유리가루가 떨어질 일은 없어요. 대신에 절단면이 날카로우니까 조심해야죠.”
데니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절단된 윗부분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집게는 물통에 넣어 식혔다. 그리고 와인 병의 내용물을 디캔터에 따랐다.
“마무리도 중요해요. 절단면에 손이 배일 수도 있으니까 밀랍을 발라주거든요.”
데니는 미리 녹여놓은 밀랍에 절단된 면을 푹 담갔다. 그러자 촛농 같은 하얀 코팅막이 절단면을 덮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이걸 기념품으로 손님들에게 주기도 해요. 그냥 밀랍으로 봉하면 멋이 없으니까 레스토랑 이름이 적힌 인장도 찍어주고요. 우리는 없으니까 패스.”
마지막으로 데니는 와인병의 몸통도 밀랍으로 봉해주었다.
“자, 이제 끝.”
짝짝짝!
데니의 시범이 끝나자, 구경하던 요리사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데니는 마술쇼를 마친 마술사처럼 허리를 굽어 인사를 했다.
“앵콜! 앵콜!”
“와! 이런 것도 다 있네.”
“데니, 맨날 촐싹대더니, 이러니까 사람이 달라 보인다? 뭔가 멋있는데?”
“그러니까, 진짜 있어 보인다?”
와인 하나 따기에는 상당히 번거로운 방법이지만, 그래서 더 대접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데니의 화려한 복장 때문인지. 마치 귀족들이 살던 시대에, 집사의 서비스를 받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진짜 이런 걸 하는 레스토랑이 있다고?”
“요즘은 포트 와인이 별로 인기 없으니까 잘 안 하는데, 최근에는 몇몇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퍼포먼스 식으로 하더라고요. 뭐, 유행은 돌고 도는 거니까요.”
“유행?”
“이 방법을 처음 쓴 게 18세기인가 그렇다고 들었거든요.”
“오!!!”
“자, 시범 봤으면 이제 실전이죠. 누나, 빨리 한번 해봐요.”
짧은 Q&A 타임 후에 데니가 슬아를 부르자, 요리사 몇 명이 불만을 표했다.
“나도 한번 해보면 안 되나?”
“왜 슬아만 해보는 건데? 데니, 너 슬아만 너무 편애하는 거 아냐?”
“저기요. 이거 그냥 보여주는 게 아니라 슬아 누나 시험에 나오니까 하는 거거든요.”
“아, 맞다!”
“아, 그랬지?”
슬아는 무대로 나오면서 입술을 뾰로통 내밀었다.
“다들, 나 응원한다고 하면서 말뿐이죠?”
“에이, 그럴 리가! 하루에 두 시간씩 슬아 이기라고 기도하는데?”
“나는 세 시간.”
“그냥 재밌어하는 거면서.”
“시끄럽고, 봐줄 테니까 한번 해봐!”
관객이 보는 앞에서 슬아가 첫 시도를 하자, 요리사들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슬아, 손놀림이 별론데?”
“그러게, 아까 데니처럼 해봐! 그… 약간 지휘봉 잡는 것처럼 손가락 세우고!”
“촬영 중이니까 제대로 하고!”
“촬영은 왜 하는데요?”
구경꾼 중 절반은 스마트폰을 꺼내서 슬아의 연습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다.
“연습 영상 보고 직접 리뷰하라고 그러는 건데, 도와주는 데도 불만이냐.”
“아, 그러네? 고마워요!”
슬아가 다시 와인 따기에 집중하자, 요리사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열중하는 슬아는 듣지 못했지만, 한길의 귀에는 그들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증거 남겨둬야지. 주변 사람들한테 우리 레스토랑에서 이런 일 한다니까 안 믿더라고.”
“야, 말도 말아라. 우리 와이프는 내가 직접 돼지까지 잡는다고 하니까 이상한데 들어간 거 아니냐면서 직접 확인하러 오겠다던데?”
“그래도 이 재미에 여기서 일하지. 요즘 세상에, 이런 레스토랑이 어딨냐?”
생각해보면 그랬다.
멸종위기 종인 고기를 수입해서 차린 소고기 만찬, 이상한 나라 앨리스 컨셉의 방 탈출 코스요리, 신메뉴 개발을 위한 내부 경연대회, 직접 돼지를 잡아서 살루미를 만들고, 이제는 박물관에 나올법한 기구를 이용하는 각종 서빙법까지.
새삼 왜 이 레스토랑에 멀쩡한 요리사들이 없는지 알 것 같았다. 평범한 요리사들은 이 주방을 1-2주만 겪고 도망가 버리니까. 이런 특이한 이벤트를 즐기는 똘아이들만 남은 거다.
“슬아야, 남은 한 병은 우리한테도 양보하는 게 어때?”
“저기요 님들, 이거 나 훈련하는 거라니까요?”
“한 번 정도는 괜찮잖아?”
“흠… 사실 이제 감 잡은 것 같기도 한데. 다른 공부도 해야하고…”
슬아의 말에 요리사들이 우르르 몰려갔고, 불과 몇 초 사이에 데니 앞에 기다란 줄이 생겼다. 그 사이에는 카키도 끼어 있었다.
“야, 니들은 그만 놀고 들어가서 디너 준비해야지!”
“에이, 셰프! 딱 한 번만요!”
“진짜 한 번씩이다? 두 번 서는 놈들은 각오해!”
소희가 허락을 해주자, 요리사들은 순서대로 다가가 와인 따기를 시도했다. 그 사이, 소희는 한길의 옆으로 다가와 투덜거렸다.
“왜 저걸 해보고 싶다는 건지 모르겠네.”
“신기하잖아요?”
“그렇긴 한데… 뭔가 그 프랑스 특유의 케케묵은 분위기가 나서 전 별로거든요. 꼭 ‘우리에겐 역사가 있다,’ ‘프랑스가 최고다’하는 그 느낌이 나는 것 같아서. 솔직히 저런 기술은 박물관에나 어울리는 거지, 메트로 디가 굳이 익힐 필요가 있나요? ”
소희는 팔짱을 끼면서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희는 어딘가 프랑스 요리에 대해 적대적인 편이었다. 왠지 한길이 맞장구쳐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전 좋은데요?”
“네?”
“18세기이면 아마 집사가 있을 시기일 테니까요. 그때만 해도 집사가 손님들 앞에서 저런 서비스와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게 중요했을 겁니다. 이런 대회를 통해서, 저런 기술이 사라지지 않게 계속 전수해 주는 것도 좋은 것 같은데.”
한길이 반대입장을 표하자, 소희가 태도를 바꾸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죠? 유행은 돌고 도니까요. 최근 들어 디저트 카트나 옛날식 빵 서비스를 도입하는 파인다이닝도 많아졌더라고요. 카빙 세레머니를 하는 곳도 있고. 그래도…”
“그래도?”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레스토랑이 너무 어수선해지는 것 같아요. 저 바보들, 한번 신이 나면 뭔가 제어가 안 된다고 해야 하나.”
“그건 그렇지만, 오늘 하루뿐이니까 즐기게 하죠.”
#
하지만 소란은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밤, 카키가 다시 레스토랑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빈티지 와인이 가득 들어 있는 상자 두 개를 들고서.
“어제는 일반 와인병으로 했잖아요? 빈티지 와인 오픈하는 방법이니까 진짜 빈티지 와인으로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어차피 유리병을 여는 기술은 일반 와인이나, 빈티지 와인이나 다를 게 없으니까.
“그리고 슬아 연습 끝나면 이번에는 맛도 보는 게 어떨까 해서요.”
“역시 카사장님!”
“이 맛에 여기서 일한다니까!”
이쪽이 카키의 진짜 목적이었다.
빈티지 와인을 옛 방식대로 따고 맛보는 것. 요리사들은 근무 시간에 와인을 못 마시니, 일부러 모두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온 거다.
“나,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100점 받을 거 같아요… 이제 연습 그만해도 될 듯.”
연달아 와인 두 상자를 오픈한 슬아는 어딘가 지친 기색이었다.
두 상자의 와인은 요리사들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요리사들은 한길의 거실 바닥에 그대로 엎어져 잠들었고.
며칠간 난장판이 이어졌다. 그리고 조금 진정되었다 싶을 때, 레스토랑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여! 오랜만이네!”
“대선배님!”
“우와, 대선배님 납셨다!”
노셰프였다.
“형, 제가 직접 가려고 했는데…”
“이건 말로 설명해 주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노셰프는 양손에 들고 있는 짐꾸러미를 들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한길이 빌려달라고 한 장비였다.
이번 대회에서 슬아는 질소 아이스크림과 루앙 오리도 만들어야 하는데, 둘 다 특별한 준비물이 필요해서 노셰프에게 도움을 요청한 참이었다.
질소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 사용하는 액체 질소는 그나마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하나의 준비물은 도저히 구할 방법이 안 보였는데. 혹시나 해서 노셰프에게 물어보니 갖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너, 진짜 운 좋은 줄 알아! 이거 갖고 있는 사람은 진짜 많지 않거든? 나도 우연히 고물상 지나가다가 신기해서 충동구매 한 거고. 이거 하나에 2만 불이라니까?”
“2만 불이요? 2만 불이면 얼마야, 대체…”
“역시 대선배님은 스케일이 남다르십니다!”
노셰프가 꺼낸 건 처음보는 도구였다.
어떻게 보면 아날로그 팥빙수 기계처럼 생겼는데, 은으로 만들어져 있어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기기의 가장 위에는 커다란 바퀴가 달려 있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루앙 오리 소스 만들 때 쓰는 프레스 기계지.”
“루앙 오리는 뭡니까.”
“니들은 요리한다는 놈들이 공부도 안 하냐?”
노셰프는 가까이 서 있는 요리사의 뒤통수를 장난스레 치며 면박을 주었다.
“루앙 지역에서 먹는 전통 요리인데, 이 기기 안에 오리 뼈랑 살을 넣고 피를 쥐어짜거든. 그 피로 소스를 만들어.”
“윽.. 뭔가 잔인한데요?”
“선지도 먹는데 피로 소스를 만드는 게 어때서. 이게 한때는 엘레강스의 최고 정점이라고 불렸던 클래식 메뉴거든. 지금은 잘 먹지 않고 기기 구하는 것도 힘들지만.”
노셰프의 설명을 들은 몇몇 요리사들은 시선을 슬아에게로 돌렸다.
“넌 대체 무슨 대회에 나가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