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97)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97화(197/325)
197. 송별회
“너, 웨이터 대회 나간다면서…”
“웨이터 대회 아니고 메트로 디 대회!”
“그래, 그래. 메트로 디 대회 나간다면서 박물관에 나올 도구 꺼내고 듣도 보도 못한 요리나 만들고 있으니…”
“히히, 그러니까요.. 히히..히히히….”
슬아는 마치 태엽 감긴 인형처럼, 영혼 없는 웃음소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내고 있었다.
슬아의 지난 몇 주간의 일정은 혹독했다. 한길이나 최셰프, 소희, 데니는 돌아가면서 ‘강의’를 했지만, 슬아는 모든 강의에 참여해야 했으니까.
그뿐 아니라 레스토랑의 업무도 평소대로 보고 있다. 한길은 준비하는 동안 유급 휴가를 주겠다고 했지만, 본인이 거부했다. ‘월급을 받는 이상, 일은 해야 한다’는 단호한 태도였고, ‘무급 휴가는 사양’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분명.. 분명.. 처음 지원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 뷔페 테이블 차리고, 테이블사이드 요리 몇 개만 한다고 해서… 그냥… 설마… 이렇게… 히히힛.”
그런 슬아를 보며 노셰프가 조용히 ‘큭’하고 웃었다.
“만만하게 보니까 그러지, 미식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은데. 자, 쓸데없는 잡담 말고, 빨리 시작하자. 준비물은 있지?”
루앙 오리의 준비물은 이미 마련해 두었다.
가장 중요한 주재료인 루앙(rouen) 오리는 청둥오리를 개량한 품종. 물론,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재료다.
19세기 초에 개량된 품종이라 상점에도 없었지만, 한국의 청둥오리보다는 상점의 청둥오리가 나을 것 같아 노르망디 지역의 청둥오리를 주문해 놓았다.
“질식사한 거 맞지?”
“네.”
“그래, 이건 피를 써야하니까 목을 잘라서 도축하면 안되거든. 오리가 좋네.”
노셰프는 오리의 상태를 확인한 후, 만족스레 웃고서는 한길을 똑바로 바라봤다.
“네 주방이랑 애들 좀 써도 되겠냐?”
“그러면 고맙죠.”
원래는 한길이 인터넷에서 본 정보를 토대로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프랑스 요리 전문인 노셰프가 직접 나서준다면 고마울 따름이다.
노셰프는 아까부터 슬아 놀리기에 유독 재미를 붙였던 요리사에게 오리를 던지며 지시를 내렸다.
“야, 태현. 이거, 간은 빼내서 퓌레로 만들고 나머지 내장 그대로 넣은 채로 오븐에서 구워와. 온도는 130도. 10분 굽고 12분 휴지. 또 8분 굽고 12분 휴지.”
저온에서 20분도 안 굽는다. 이러면 겉은 색이 변하겠지만, 내부는 날것에 가까운 레어가 된다.
오리가 구워지는 사이, 한길은 노셰프와 함께 테이블사이드 카트를 세팅했다. 준비물은 휴대용 버너와 소스 팬, 프레스 기기, 커다란 도마, 코냑, 오렌지 주스, 카빙 나이프 정도.
“오리 대령입니다!”
완성된 통오리는 미리 세팅한 나무 도마 위에 올렸다.
“우선은 가슴살이랑 다리만 발라내야 하는데…”
노셰프가 카빙 나이프를 들자, 슬아가 앞으로 나섰다.
“셰프님, 카빙은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오리는 좀 힘들 텐데?”
“어차피 제가 해야 하잖아요? 이왕 오신 거,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봐주시면 좋고요.”
노셰프는 옆으로 비켜주었고, 슬아는 능숙한 손길로 오리의 가슴살과 다리 살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노셰프는 잘린 단면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좀 하는데?”
“그렇겠죠. 몇 주간 특훈했는데.”
“그래도 통구이 오리는 까다로운 편인데, 너덜너덜한 부위가 하나도 없네? 태현! 가슴살이랑 다리는 주방에서 미디엄으로 익혀와! 휴지한 후에 카빙하고. 슬아, 넌 저 고기가 익는 동안 손님 앞에서 소스를 만드는 거고.”
그 말과 함께 노셰프는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리의 도톰한 살코기는 주방으로 보내고 남은 건 날개, 갈비뼈, 내장 등의 잔해뿐이다. 그 잔해를 그대로 프레스 기기 안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보통은 메트로 디 옆에 보조가 있어서 이 바퀴를 돌려주지.”
커다란 바퀴를 돌리면, 기기의 천장이 천천히 하강하면서 안의 내용물을 압착한다. 잠시 후, 기기의 주둥이 부분에서 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색이 빨가네요?”
“레어로 익힌 고기를 압착하니까 안에 있는 핏물이 나오거든. 뼈도 분쇄했으니까 골수까지 뽑아내는 거고, 내장도 액화된 채로 섞인 거고, 피 맛만 나는 건 아냐.”
“으으, 뭔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로테스크한대요? 무슨 고문 도구도 아니고.”
오리의 피와 살과 뼈가 담긴 진액을 얻으면, 그 후로는 간단하다.
팬을 달궈서 버터를 두르고, 그 안에 샬롯과 통카 빈, 오렌지 주스를 넣고 젓는다. 오리 진액과 소금, 오리 간과 코냑까지 넣어서 간을 맞춰주면 끝이다.
“명심해야 할 건 온도조절. 피는 63도에서 75도 사이에 응고되거든. 그러면 실키한 소스가 아니라 선지처럼 뭉치니까 맛도 질감도 해쳐. 온도 잘 유지하고, 잘 저어주는 게 중요하지.”
완성된 소스는 약간의 검은 빛을 띠는 붉은 색이었다. 만드는 과정은 특이하지만, 결과물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오리는 아직이야?”
약간의 기다림 후에 조리가 완료된 오리고기가 나왔고, 노셰프는 스푼을 이용해서 오리고기 위에 소스를 뿌렸다.
“이게 끝. 어때, 생각보다 쉽지?”
“그렇네요.”
대회에 나오는 테이블사이드 요리는 모두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엄청난 실력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다행이었다.
슬아는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었으니까.
슬아는 잠시 턱을 괴며 생각에 잠기더니, 한길을 똑바로 바라봤다.
“셰프, 혹시 지금 오리 한 마리 더 해봐도 되나요? 이번에는 저 혼자만요.”
“재료는 있어.”
“그러면 부탁드려요! 그리고 셰프랑 노셰프님, 손님 역할을 맡아주실 수 있으세요? 한번 실전처럼 해보려고요.”
한길과 노셰프는 손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슬아는 총총걸음으로 데니에게 갔다.
“나, 손목시계 좀 빌려줘.”
슬아는 빌린 시계를 조금 특이하게 찼다. 다이얼이 손목의 안쪽에 자리하도록. 그리고 그 위로 소매를 덮었다.
“손목시계는 갑자기 왜?”
“이왕 하는 거, 시간 맞춰가면서 해보려고요. 방금 셰프님이 할 때는 뜨는 시간이 좀 많았거든요.”
“그래?”
“대충 본거지만, 가슴살이 도착할 때까지 10분이 걸렸는데 소스는 5, 6분이면 되는 것 같아요. 음, 여기 잠깐 기다려 주시겠어요? 전 오리가 올 때까지 생각 좀 하고 있을게요.”
슬아는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핸드폰을 꺼내며 무언가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노셰프가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한길에게 말을 걸었다.
“슬아 쟤, 정곡을 찌르는데?”
“왜요?”
“요리사는 요리만 보니까, 사실 손님 쪽은 별로 생각 안 하고 있었거든.”
“아, 전 또 뭐라고. 슬아는 원래 그쪽으로 보는 눈이 뛰어나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 정도 되는 급의 셰프가 눈앞에서 손수 요리하는데, 그 순간에 손님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거든.”
그것이 한길이 슬아를 눈여겨보는 이유였다. 주방에서 그 어떤 화려하고 신기한 요리를 선보여도, 슬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항상 철저하게 손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고 의견을 냈다.
“슬아 쟤, 키울 맛 나겠는데?”
“제 직원입니다.”
“설마 내가 니 직원을 뺏어갈까 봐. 그런데 어디서 구했냐?”
“오리 대령이오!”
그러는 사이, 주방에서 통오리가 나왔다.
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리를 들고 온 요리사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오빠. 부탁할 게 있는데요.”
“뭐?”
“연습이긴 한데, 실제 손님 앞이라고 생각하고 역할 좀 맞춰줄 수 있어요? 약간 이미지 트레이닝 같은 걸 하고 싶어서요.”
평소에 편하게 장난을 주고받는 슬아가 정중하게 부탁하자, 요리사는 무안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래, 그래. 시험 당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게 좋지.”
“그럼 다시 한번 부탁해요.”
슬아는 생긋 웃으며 테이블사이드 카트 앞에 섰고, 요리사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 후에 재입장했다. 이번에는 서빙하는 웨이터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이번 요리는 루앙 오리입니다.”
슬아가 한길과 노셰프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루앙 오리는 프랑스 2대 오리라고 불려요. 저희가 평소에 먹는 오리보다 야생의 향이 더 진해서 풍미가 더 살아있을 겁니다. 우선, 카빙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역시나 깔끔한 손길로 카빙을 마치고. 도려낸 살코기는 접시 위에 올려서 요리사에게 건네주었다.
“걱정 마세요, 가슴살과 다리 살은 다시 한번 조리해서 나올 거니까요. 버리는 거 아닙니다. 그동안, 저는 소스를 만들어드리죠. 이쪽이 오늘 사용할 오리 프레스 기기입니다. 100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이 사용하던 도구인데, 최근에는 구하기 쉽지 않죠. 저희 셰프님이 프랑스 여행 중, 골동품 가계에서 발견하고 직접 구매해 오신 물건입니다.”
슬아는 적절하게 설명을 더하며 시간을 끌었다. 압착을 하는 동안에도 추임새를 넣어주고, 틈틈이 대화를 유도했다.
가끔 손목을 확인하는 게 보였지만, 그 안에 시계가 숨겨져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면 크게 주목할 만한 동작은 아니었다.
“아, 오리가 도착했네요. 이대로 소스를 뿌려드리겠습니다.”
어색한 침묵 없이, 물 흐르듯이 완벽한 타이밍. 옆에서 구경만 하던 요리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했다.
“오오! 역시 전문가는 다르네?”
“그러게? 이러니까 진짜 레스토랑 같다?”
“조금 더 연습하면 손목시계 없이도 하겠다, 야.”
“아니, 시계는 차야 해요.”
“왜?”
“긴장하면 시간 감각이 없어지거든요. 전에도 카빙 할 때 1분은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30초밖에 안 지나고 그러더라고요. 대회 날은 분명 긴장할 테니까, 갖고 가는 게 좋죠.”
슬아의 대답을 들은 노셰프가 크게 웃으며 한길에게 말을 걸었다.
“쟤, 기특하네. 그 대회에 또 뭐가 나오냐? 내가 도와줄 건 없고?”
도와줄 건 많았다.
안 그래도 슬아가 외워야 하는 메뉴 중에는 한길도, 소희도 모르는 프랑스 정통 메뉴가 많았으니까.
지금까지는 최셰프가 틈틈이 만들어 보여줬지만, 최셰프에게는 1호점이 있고 가정도 있다. 안 그래도 계속 부탁하기에 미안한 참이었다.
“우와, 그럼 노셰프님도 준비위원회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 레스토랑 출신은 아니니까 명예위원 정도 되려나?”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데니가 펄쩍 뛰면서 기뻐했다.
“셰프님이 해주면 대박이죠! 혹시 새벽에도 가능하세요?”
“새벽?”
“브레이크 타임이랑 오픈 전은 이미 일정이 꽉 찼거든요.”
“히히히..”
데니의 뒤에서 슬아가 다소 창백한 얼굴로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혼자서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잠은 죽어서도 잘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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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와 달리, 슬아가 잠을 못 자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료’한 과목이 많아서 오히려 대회 일정이 가까워질수록 한가해졌기 때문이다.
그 사이 1호점과 2호점의 신메뉴도 론칭했고, 반응도 좋았다.
한길은 여전히 홀로서기를 장려하기 위해 주방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구조요청을 하러 사무실을 찾아오는 요리사들이 없어졌다. 이제 슬슬 적응이 되나 보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는 한번 상태를 확인해야지.’
오랜만에 2호점의 주방으로 향하는 길.
그런데 주방으로 이어지는 복도에 못 보던 물건들이 걸려있었다. 얼마 전에 촬영했던 프로필 사진이다.
한길, 소희, 경우의 사진이 아빠곰, 엄마곰, 아기곰처럼 크기별로 액자에 담겨 진열되어 있었다. 경우의 사진 옆에는 훨씬 작은 크기로 요리사들의 사진이 2열 6행으로 걸려 있었고.
“어, 셰프?”
사진을 감상하는 사이, 주방에서 소희가 나왔다. 소희는 뿌듯한 얼굴로 사진 앞에 섰다.
“보기 좋죠? 안 그래도 재배치할 때가 됐는데, 잠깐 도와주실래요?”
소희는 벽면에 걸린 액자 하나를 내리고 한길에게 건네준 후, 다른 요리사의 사진을 그 자리에 걸었다. 순서를 바꾸는 거다.
“사흘에 한 번씩 서열 정리를 하고 있거든요.”
“서열?”
“1, 2, 3위는 고정이지만, 나머지는 사흘에 한 번씩 평가하고 있어요.”
뭔가 서바이벌 같은데…
그러면 요리사들에게 너무 부담이 가지 않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안 돼요?”
“아니, 하는 건 유셰프 마음이지만. 요리사들도 부담을 느낄 것 같고, 유셰프도 사흘에 한번 평가하려면 시간을 많이 빼앗기니까요.”
“아, 그런 거라면 전 괜찮아요.”
소희 걱정을 한 건 아니었는데.
소희는 콧노래까지 불러가면서 서열 정리를 마친 후, 다시 한번 뿌듯한 눈빛으로 진열된 사진들을 바라봤다.
“와, 좋네. 꼭 그거 같지 않아요? 그, 왜, 알래스카 같은 데서 썰매 끄는 개들.”
한길이 흠칫 놀라는 사이, 주방에서 요리사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셰프! 서열 정리 완료됐습니까?”
“다들 순서대로 나와! 저번 서열대로!”
요리사들은 한 명씩, 순서대로 나와서 액자를 확인했다. 순위가 떨어진 이들은 절규했고, 순위가 오른 이들은 환호했지만. 사실 어느 쪽이든 즐기는 것으로 보였다.
괜한 걱정이었나.
하긴, 이들을 정상인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지.
먼 발치에서 흐뭇하게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소희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셰프! 내일 출국이죠? 비행기는 몇 시에요?”
“오후 다섯 시요.”
“시간 넉넉하네? 마침 내일 저희도 쉬는 날이니까 오늘 마감하고 그거 해야죠, 그거.”
“뭐요?”
“송별회!”
“… 송별회?”
한길이 소희를 지그시 바라보자, 소희가 천진난만한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안 돼요?”
“저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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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슬아를 위하여!”
“우리는 무조건 1등만 받아주는 거 알지?”
“월드컵을 기대하마!”
“유럽에서 열리니까 유로컵 아냐?”
슬아의 우승 기원 겸 일행의 무사 귀환(?) 파티가 한길의 집에서 열렸다. 요리사들과 홀 직원들은 물론, 준비 위원회 멤버와 카키까지 모이니 나름 큰 주택이 바글바글했다.
노셰프는 특별히 실력을 발휘해서 요리를 해주었고, 카키는 빈티지 포트와인을 다섯 상자나 들고 왔다.
“자, 슬아 사부! 열어 주시죠!”
“왜 가는 날까지 나를 부려먹어!”
“연습은 해도 해도 모자라는 거야. 사이드 뭐로 하지? 역시 스틸톤 치즈?”
“아니, 나는 에그 타르트가 좋던데.”
“캐러멜 사과에 한 표!”
슬아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훈련을 했다. 이제는 포트용 집게를 다루는 손놀림이, 마치 초야의 고수 같았다.
“아, 그런데 오늘 가면 슬아, 앞으로 일주일간 못 보는 건가?”
“그렇죠.”
“그러면 가기 전에 마지막 상담, 받나?”
“나 피곤한데…”
“특별히 두 배로 쳐줄게!”
“흠… 알았어요, 그럼.”
수상한 대화가 오가고, 슬아는 요리사 한 명과 구석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쑥덕쑥덕거렸고, 얼핏 현금이 오가는 것도 보였다.
“와, 누나 가는 날까지도 알바하네. 역시 생활력 갑!”
그 모습을 보고 데니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바?”
“아, 별건 아니고요. 누나, 비행깃값 번다고 알바하고 있었거든요.”
“비행깃값은 비용처리해 줬잖아?”
“그래서 누나도 그만 은퇴한다고 했는데, 주변에서 그걸 놔두지 않으니까.”
“대체 무슨 알반데?”
데니는 망설여지는지 잠시 고개를 긁적였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딱히 불법도 아니니까 말해도 되려나? 상담 겸 분석 서비스 겸 정보제공 서비스에요.”
“그건 뭔데?”
“예를 들면 썸녀의 깨톡 기록을 보면서 이게 썸인지 망상인지 분석해 준다든가, 동생이 친구랑 여행 간다고 하는데 진짜 친구랑 갔는지 알아봐 준다든가, 첫사랑은 지금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알아봐 준다든가. 뭐, 의뢰인 마음이죠. 누나가 SNS는 기가 막히게 하잖아요? 귀신같이 찾아내거든요!”
“뭐야, 셰프는 몰랐어요? 슬아 실력 장난 아닌데!”
반응을 보아하니, 소희도 슬아의 서비스를 이용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한길이 모르는 사이에 별의별 일이 일어나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럼 어디, 나도 한번 의뢰해 볼까?”
취기가 올라서 헤실헤실 웃는 카키는 비틀거리며 슬아 쪽으로 다가가 줄을 섰다. 그러자 테이블에는 노셰프, 최셰프와 소희만 남게 되었다. 노셰프는 갑자기 한길의 옆에 바짝 다가와 다소 위협적으로 어깨동무를 걸쳤다.
“너는 진짜 뭔 놈의 운이 그리 좋냐. 직원도 잘 뽑아, 사업 파트너 잘 만나, 게다가 이번에는 그분의 스타쥬까지? 역시 될 놈 될이라니까?”
“그러고 보니 형이 소개해 준 데 못 가게 돼서 미안해요.”
“신경 쓰지 말고. 나 같아도 당연히 그쪽을 고르지. 그 사람은 진짜 레전드잖아?”
노셰프가 물꼬를 트자, 최셰프와 소희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하, 저도 처음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복귀하는 줄도 몰랐는데, 셰프가 거기에 스타쥬로 가신다고 해서. 생생한 경험담, 꼭 부탁드립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고 싶다니까요? 물론, 1인자도 없는데 2인자까지 자리를 비우면 안 되니까 갈 수 없지만. 셰프, 지금 세계 1위 레스토랑 운영한 셰프들이 다 그 사람 밑에서 스타쥬 했던 거 알아요?”
“그건 몰랐는데요.”
“봐봐,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얻어걸리다니! 진짜 배 아파 죽겠네!”
로씨가 소개해 준 셰프는, 해외 셰프를 잘 알지 못하는 한길조차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요리계의 거장이었다.
미식 혁명가라고 불리던 인물.
세계 최고 셰프로 불리던 그는 9년 전,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레스토랑 문을 닫았다.
그런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미식 혁명가는 9년 만에 레스토랑을 다시 열기로 했다고 한다. 아직 언론에도 나오지 않았고, 알음알음으로 스타쥬를 구하는 단계에서 한길이 뽑히게 된 거다.
한길이 얄미운지, 노셰프는 거센 손길로 한길의 등짝을 후려쳤다.
“너, 제대로 각오해라. 거기, 절대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
“가본 적 있어요?”
“아니, 하지만 소문으로는 들었지.”
노셰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비슷한 표정이 소희, 그리고 최셰프의 안면에도 전염되었다.
“하긴, 셰프는 제대로 톱니가 되는 경험을 안 해보신 것 같던데, 잘 적응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무조건 버텨.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방심하면 안 되고요. 아, 꼬레앙이라고 무시하거나 이상한 성희롱 발언하는 놈들한테는 ■■■■ 새끼, 그딴 식으로 하면 ■■ 다 ■■■ 버린다고 초반부터 못 박아두고요.”
“…”
“…”
“그건 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악질적으로 일부러 뜨거운 물을 쏟거나 하는 사람도 있으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세 명의 셰프는 작정한 듯이 겁을 주면서, 자세한 디테일은 숨겼다. 하지만 한길은 와인을 홀짝대면서 조용히 듣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일 뿐.
“뭐야, 넌 궁금하지도 않냐?”
“어차피 가서 보면 알게 될 텐데요, 뭘.”
“너, 만만하게 보지 마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서, 말도 안 통하는데,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른 싸가지 없는 놈들이랑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니까?”
하지만 정말 두렵지 않은걸.
“더한 경험도 해왔는데요,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