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98)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98화(198/325)
198. 비밀 시장
출발 당일.
일행은 한길의 집에서 집합한 후, 함께 이동하기로 했다.
공항까지는 카키가 태워주기로 했다. 리무진 버스를 타도 되지만, 카키 본인이 ‘어차피 매주 이 시간에는 공항까지 드라이브한다’고 한사코 우기는 바람에 알겠다고 한 거다.
“사장님, 이건 못 보던 차네요?”
“저번 주에 새로 뽑았어.”
“오~ 멋지네요!”
먼저 도착한 슬아가 카키의 신차를 감상하고 있을 때,
“우와! 우리 롤스 타고 공항 가는 거예요?”
뒤늦게 데니가 등장했다.
데니를 위아래로 훑은 일행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 아무것도 아니야.”
“어, 안녕.”
“빨리.. 가야지?”
데니의 패션 때문이었다.
살구색과 핫 핑크색을 섞은 듯한 눈부신 분홍빛 재킷.
머리에는 깃털이 꽂힌 페도라 모자.
슬아와 카키, 한길이 차마 꺼낼 수 없던 말을, 이제 막 마당으로 나온 요리사가 대신 해주었다.
“데니, 너 오늘 꼭 그거 같다?”
“뭐요?”
“발정 난 공작새.”
“공작새는 그렇다 치고 ‘발정 난’은 또 뭐에요.”
“공작새가 꼬리 펼치고 빙글빙글 부채춤 추는 거. 발정 나서 구애할 때 그러는 거 아냐?”
“흠, 좀 과한가?”
데니는 자신의 의상을 다시 한번 점검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는 형이 회색이나 검은색이나 남색 계열 옷만 입게 해서 못 입은 옷이 많거든요. 이 기회에 맘껏 입으려고 다 가져왔죠.”
데니는 거대한 캐리어를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슬아의 캐리어보다도 두 배는 됨직한 크기였다.
“슬아, 우승해라! 금메달 따와!”
“유로컵이라니까 그러네?”
“선물은 인당 3개 인 거 알지?”
“조심히 다녀오십쇼!”
“보고 싶을 겁니다, 셰프! 빨리 오십쇼!”
배웅하는 요리사들 사이로,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는 소희도 보였다.
“셰프, 뒷일은 저한테 맡겨주시고 마음 편히 가세요!”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 공항까지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카키가 도구함에서 작은 상자 세 개를 꺼내서 하나씩 나눠주었다.
“이건 뭐죠?”
“우리 레스토랑 첫 해외 원정팀이잖아요. 단체복을 만들까 하다가 그건 너무 촌스러워서 대신 이걸로 준비해 봤죠.”
카키는 고개를 까닥거리면서 지금 당장 열어보라는 몸짓을 했다.
상자의 내용물은 시계였다.
명품 브랜드의 시계.
“이거 비쌀 것 같은데…”
“일부러 부담 느끼지 말라고 300만 원 대로 골랐는데요?”
한길이 눈썹을 찡그리자, 카키가 서둘러 덧붙였다.
“슬아가 시계 필요하다고 들어서 사는 김에 샀어요.”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하죠.”
“… 2+1 행사였거든요.”
“명품 브랜드에서?”
“VIP한테만 하는 행사에요.”
이런 비싼 시계는 받을 수 없다.
무엇보다, 슬아가 시계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손님들 몰래 시간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이런 샹들리에 같은 시계는, 소매로 아무리 가려도 숨길 수 없다.
“알았어요, 사장님. 원정 나가는 동안 빌려주시는 거죠? 잘 쓸게요! 저희는 늦으면 안 되니까 빨리 갈게요?”
한길과 카키가 대치하는 사이, 슬아가 상황을 정리하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카키를 보낸 후, 한길이 슬아에게 물었다.
“의외네? 슬아 넌 이런 거 받는 거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가끔은 받아줘야죠. 너무 안 받으면 카키 사장님 또 시무룩하잖아요? 게다가 이번만큼은 나, 진짜 받을 자격도 있고. 이건 인센이에요, 인센!”
“그러네.”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한길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첫 출국.
세계로 가는 첫 발걸음이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이 순간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
“셰프, 그렇게 좋아요?”
한길의 옆좌석에 앉은 슬아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나, 셰프 이런 얼굴 처음이야!”
“어디? 나도, 나도!”
뒷좌석에 앉은 데니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지만, 이미 한길이 표정을 추스른 후였다.
“뭐야, 또 나만 놓쳤어? 둘만 나란히 앉고, 너무 치사하지 않아?”
“자리 바꿔줄까?”
“누나는 창가 자리가 좋다면서요.”
“아니면 이코노미로 옮겨?”
“에이, 그러면 모처럼 퍼스트클래스로 바꿔준 사장님한테 실례죠. 그나저나…”
데니는 다시 한번 고개를 빼꼼 내밀면서 씨익 웃었다.
“형, 와인 하나만 주문해 주면 안 돼요?”
“직접 해.”“에이, 나 평생 부탁이니까 형이 해줘요. 영어, 할 줄 안다면서요?”
이번 대회는 포르투갈의 파로라는 도시에서 열린다. 파로는 포르투갈 남부에 있는 해안 도시로, 한국과의 직항노선이 없어 뮌헨에서 한번 경유해서 가야 한다.
그래서 항공사도 독일 항공사.
퍼스트클래스를 담당하는 승무원도 모두 서양인. 한마디로, 질문하려면 영어를 쓸 수밖에 없다.
“이 항공사, 퍼스트클래스 요리랑 서비스가 엄청 유명하거든요. 형도 관심 있을 것 같은데.”
“그래?”
한길이 속는 셈 치고 호출 버튼을 누르자, 금발의 승무원이 다가와 생긋 웃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와인 설렉션을 볼 수 있을까요?”
“메뉴와 와인 리스트는 이 안쪽에 있습니다.”
승무원은 메뉴를 꺼내 건네주면서 친절한 설명을 더 했다.
“저희 와인 메뉴는 소믈리에 월드 챔피언이 매달, 4종류의 레드와인과 4종류의 화이트와인을 선별해서 리스트를 만듭니다. 더불어 비행 도중 한 번은 캐비어 서비스가 나가는데, 와인과 함께 드릴까요?”
“그건 나중에 한번 맛보겠습니다. 케비어는 어떤 캐비어를 쓰시죠?”
“칼비시우스 캐비어입니다. 주문하실 때 토핑을 선택해서 곁들이실 수 있고, 원하신다면 보드카도 있습니다.”
칼비시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생산하는 캐비어 브랜드다. 메뉴를 보니, 캐비어와 곁들일 빵도 토스트, 비스킷, 혹은 블리니, 토핑으로 나올 양파, 생크림 등도 고를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기내식으로 나오는 메뉴도 특이한 게 많았다.
사프란 바닐라 퓌메와 파슬리 뿌리 퓌레를 곁들인 농어구이, 독일의 전통 국수인 슈페츨레를 곁들인 송아지 고기 굴라시, 세몰리나 밀가루로 만든 디저트용 만두와 자두 콤폿…
“램스 레터스(lamb’s lettuce)는 뭐죠?”
“샐러드 채소인데, 작고 동글동글한 게 양의 혓바닥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한길은 기내식의 수준에 놀라며 생소한 요리나 재료에 대해 질문했고, 승무원은 웃으며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승무원이 떠나자,
“.. 형.. 영어가 왜 그래?”
데니가 귀신 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왜 영국 발음이야? 그것도 그냥 영국 발음도 아니고… 포쉬 잉글리시?”
“그건 또 뭔데?”
“몰라요?”
“모르니까 묻지.”
“옥스퍼드 영어, 여왕님의 영어, BBC 영어. 이래도 몰라요?”
“무슨 소린데?”
“상류층이 쓰는 영어라고요. 영국에서도 인구 2-3%밖에 안 쓰는 건데… 그걸 어디서 배운 거야?”
“앱으로.”
“무슨 앱?”
데니가 너무 깊게 파고드니 조금 불편해졌다. 질투가 가득한 눈을 보니, 쉽게 놓아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런 게 있어. 그것보다 조금 재밌는 걸 들었는데, 소믈리에 월드 챔피언은 뭐야?”
갑자기 데니가 정색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난 안 해요.”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묻는 건데?”
“몰라요, 헛소문이야. 이럴 때가 아니죠. 비행기 안에서 자둬야 시차 적응하니까.”
데니는 안대를 쓰고 바로 좌석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비행 내내,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안대를 벗지 않았다.
#
호텔은 대회가 열리는 컨벤션 센터 바로 옆에 자리한 곳으로 예약을 해 두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건 자정을 넘은 시각.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일찍 컨벤션 센터로 나오니, 아직 아홉 시도 안 되었는데 꽤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생각보다 대회가 크네?”
“원래는 소규모 대회인데 올해에는 예외적으로 크게 열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 사람들은 대회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식음료 무역박람회를 보러 온 걸 거예요. 대회가 컨벤션 이벤트 중 하나로 하는 거라 했거든요.”
슬아는 유난히 반짝이는 손목을 내려다본 후에 입을 열었다.
“전 오늘 필기시험이랑 다른 참가자 일정이 있거든요. 안 그래도 셰프랑 데니가 기다리면서 심심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여기라면 심심하지 않겠죠?”
“그래, 걱정 말고 다녀와. 시험 잘 보고.”
“저녁에는 웰컴 디너 겸 칵테일 파티가 있으니까 늦어도 네 시까지는 다시 모여야 해요. 여기서 흩어지면 찾기 힘들어지니까 두 사람은 꼭 같이 다니고요!”
“알았다니까! 누나 홧팅!”
“그럼!”
슬아는 벌써 시차 적응을 마쳤는지, 씩씩한 발걸음으로 떠났다.
한길과 데니는 박람회 구경을 위해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인파가 외국인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한국에서 흔히 열리는 무역박람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형! 나중에 연락해요!”
“그래.”
슬아의 당부가 무색하게, 전시장에 들어선 지 5초 만에 한길과 데니는 각자의 길을 갔다. 저 멀리 와인 부스가 보이자, 데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기 때문이다.
한편, 한길은 정 반대 방향에 있는 부스로 다가갔다. 시식용으로 진열된 제빵류에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한번 맛보시겠어요?”
부스를 지키는 직원이 스콘 하나를 내밀며 싱긋 웃었다.
“곤충 밀가루로 만든 디저트입니다! 프랑스산 귀뚜라미를 건조하고 분쇄해서 밀가루와 혼합한 제품이죠.”
“귀뚜라미요?”
“네, 소고기보다 단백질이 2배나 많고 칼슘은 우유의 20배나 되죠. 갑각류 알레르기는 없으시죠?”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귀뚜라미가 유전자적으로 갑각류랑 유사해서 주의해야 하거든요. 한번 드셔보세요.”
한길은 직원이 나눠주는 스콘은 물론, 브라우니, 토르티야, 쿠키까지 모두 맛보았다. 귀뚜라미 밀가루는 처음 먹어보는데, 일반 밀가루에 견과류를 갈아 넣은 것처럼 고소했다.
‘레스토랑에서 쓰면 손님들이 다 도망가겠지? 그래도 이거로 파스타 만들면 어떤 맛인지 궁금한데…’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실험용으로 10 봉지만 샀다.
직원은 밀가루와 함께 팸플릿을 건네주었다.
팸플릿에는 농작물 생산에 소비되는 에너지양에 대한 통계와 귀뚜라미가 친환경 식재료로 각광받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곤충을 먹는 건 지구를 살리는 일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어서 오세요! 레스토랑 운영하시는 분이신가요?”
귀뚜라미 부스를 벗어나자, 옆에 있는 부스에서 한길을 불렀다.
이번에는 음식 모형을 진열하는 부스.
휴게소에서 흔히 보는 음식 모형과 비슷하지만, 파인다이닝 풍의 요리 모형이었다.
“정교하죠?”
“이건 뭘 판매하는 거죠?”
“저희는 3D 푸드 프린팅 솔루션을 제공합니다. 3D 프린터가 있으면, 저희 프로그램을 설치만으로도 간편하게 이 수준의 모형을 찍어낼 수 있죠. 재료당 선택할 수 있는 탬플릿만 50가지가 넘는데…”
남자는 자신의 컴퓨터로 시범을 보여주었다. 간편하게 몇몇 설정을 입력하자, 순식간에 현장에 있는 3D 프린터에서 출력이 시작되었다.
‘저걸로 신메뉴 비주얼을 연구한다면…’
… 갖고 싶다.
필요 없다는 건 알지만.
저걸 쓸려면 3D 프린터도 구매해야 하고, 그러면 일이 너무 커진다. 알긴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팸플릿은 챙겨왔다.
‘또 뭐가 있지?’
한길은 놀이동산에 온 어린아이처럼, 이 부스 저 부스를 돌아다녔다. 수 백 개의 부스 모두 각기 다른 특색이 있어서 재밌었다.
그리고 A 구역을 모두 쓸고 B 구역에 진입하는 순간, 한길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짙푸른 녹색.
색색별의… 농작물.
A 구역에는 식품업계와 관련된 스타트업이나 식기, 와인 등이 있었는데. B 구역은 모두 신선한 재료만 진열되어 있었다.
“이건 뭐죠?”
가장 가까운 부스로 달려가니, 네모난 화분 안에 처음 보는 작물이 있었다. 초콜릿 모형처럼 생긴 이건…
“미니 초콜릿 피망입니다.”
“이게 피망이라고요?”
한길이 놀라자, 부스 직원은 피망을 잘라서 속을 확인시켜주었다. 신기하게도, 겉은 초콜릿인데 속은 여느 빨간 피망과 같았다.
‘이것도 갖고 싶네.’
하지만 국내로 농작물 반입은 안 되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아쉬움을 달랠 때,
“이 화분은 LED 조명을 사용해서 어두운 실내에서도 사용할 수 있죠. 정유를 활성화하는 조명이라 풍미도 더 뛰어날 겁니다. 물통에 물을 채워주면 알아서 적절한 시기에 물이 투입되니 방치해도 건강하게 자라죠.”
“이 화분을 파는 건가요?”
“네, 화분이랑 씨앗을요.”
씨앗이라면… 가져가도 되지 않을까?
한길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이거 하나, 아니 세 개만 주시고요. 다른 건 또 뭐가 있죠?”
“일본인입니까? 저희, 시소도 팔고 있는데!”
“아니, 한국인입니다.”
“… 아! 네, 불고기! 맛있죠!”
“…”
뜬금없는 대화의 흐름에 한길이 고개를 갸웃하자,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른 화분을 꺼내 보여주었다.
“요즘은 아시아 식재료도 수요가 많아져서요. 여기 시소도 있고, 미츠바도 있고, 코마츠나랑 미부나도 있죠!”
“미츠바가 뭐죠?”
“모르시는군요, 하하. 일본 파슬리라고 하더라고요. 코마츠나는 일본의 겨자 시금치라고도 불리고. 아시아 재료가 별로면 이건 어떠신가요? 야생 딸기인데 색은 훨씬 흐리지만, 맛은 전혀 흐리지 않죠!”
한길은 종류별로 부스에 있는 모든 씨앗과 화분을 구매했고, 남자는 커다란 상자 두 개에 구매품을 담아 주었다.
두 손 가득 상자를 안고 나서는데, 바로 옆에 있는 부스에도 재밌는 게 보였다.
“비트입니다! 저희가 직접 품종 개량한 배저 플레임 비트(Badger Flame Beet)라고 부르죠.”
일반적인 비트는 빨갛고 동그랗지만, 이건 잘 익은 홍시처럼 진한 주황색이었다.
“비트의 단점이 흙 맛이 난다는 거죠. 지오스민(geosmin)이라는 성분 때문인데, 이 비트는 지오스민 수치가 낮아서 굉장히 달고, 굳이 굽지 않고 날로 먹어도 맛있습니다.”
“하나 주세요.”
“아, 비트를 판매하는 건 아니고 씨앗을 파는 거라…”
한길의 입에 걸쳐진 미소가 더욱 크게 번졌다.
“또 무슨 씨앗이 있죠?”
“많죠! 이건 업스테이트 어번던스(Upstate Abundance) 감자인데, 버터를 넣지 않았는데도 버터를 넣은 맛이 나죠. 저희 셰프님과 코넬 대학교의 월터 교수님의 콜라보로 만든 품종입니다.”
“셰프와 콜라보?”
“아! 모르셨습니까! 저희 회사는 댄 바브로 셰프님이 차린 회사거든요.”
남자는 팸플릿 하나를 한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댄 바브로 셰프는 미국에서 팜투테이블로 유명한 셰프. 팸플릿에는 바브로의 인터뷰도 실려 있었다.
「흔히들 요리는 도마 위에서 시작된다고들 생각하죠. 요리사들은 재료를 구매하는 게 요리의 시작이라고도 하고요. 하지만, 땅속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어떨까요? 저희는 땅속에서부터 맛을 디자인합니다.」
「기업식 농업은 수확량과 일관적인 품질을 우선시합니다. 그래서 재료가 모두 안정적이지만, 특색은 없죠. 저희 회사는 맛과 다양성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셰프가 디자인한 맛을 농부가 구현해주는 콜라보입니다.」
세프와 농부의 콜라보.
생각지도 못한 협업 관계였다.
“그래서, 뭘 드릴까요?”
“다 주세요.”
씨앗은 부피가 나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상자의 빈 공간에 쑤셔 넣고 다시 이동하는데, 또 다음 부스에서 다시 걸음이 멈춰졌다.
“이건 무슨 토마토죠?”
신기한 토마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면의 90% 이상이 과육으로 가득해서 어딘가 낯선 생김새였다.
“이건 모기지 리프터 토마토라고, 비프스테이크 종의 에어룸(heirloom) 토마토입니다. 1930년대에 교배해서 만든 품종이죠.”
“에어룸?”
“농부들이 대대로 보존해온 품종이라서 가보(heirloom) 혹은 유산(heritage) 작물이라고 부르죠.”
남자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씨앗이 담긴 봉투를 들어 올렸다.
“예를 들면, 이건 미국의 일리노이주의 코바크 가문에서 200년 동안 가보로 내려온 고추 품종인데, 맛이 기가 막힙니다.”
“있는 거 다 주세요.”
“그… 저희는 씨앗을 파는 회사는 아니고요.”
남자도 역시 팸플릿 하나를 내밀었다.
“‘에어룸 씨앗 도서관’이라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회비를 내면 매년 종자 책자를 보내드리는데, 그중에서 6개의 품종을 선택하시면 배송해 드리고 있죠.”
“이 종자들은 어디서 난 거죠?”
“농부들이 대대로 보관하는 걸 기부하거나, 대학에서 연구용으로 보존하는 걸 받아올 때도 있습니다.”
한길은 입꼬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그동안 계속 찾아다녔던 것이 여기 모두 모여 있었으니까.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
이곳은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를 모두 모아둔 비밀 시장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게 생겼다.
“멸종되었다고 여겨진 농작물이 뒤늦게 발견되기도 하나요?”
“가끔 그런 경우도 있죠. 작년에도 콜로라도 오렌지라는 사과 품종이 재발견되었으니까요. 이게 1904년에는 상도 많이 탔던 품종인데, 수익성이 안 좋아서 지금은 아무도 키우지 않거든요. 멸종되었다고 여겨졌는데, 작년에 콜로라도주에서 100년 된 사과나무가 발견되어서 구조해 냈습니다.”
100 년 전에 멸종되었던 사과라.
“훨씬 더 오래전에 멸종된 것이라면요?”
“예를 들면?”
“2천 년 전에 멸종된 실피움이라는 작물에 대해 들어봤거든요.”
“아!”
남자는 큰 소리로 웃었다.
“가끔 그런 말을 하는 학자들도 있죠. 실피움은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라고. 자연적으로 교배되는 사이 형태는 달라졌겠지만요. 하지만 고대 기록과 대조하는 것만으로는 그게 실피움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죠. 막말로, 누가 유사하게 생긴 작물을 들고 와서 이게 실피움이라고 해도,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아, 잠시만 실례합니다.”
하고 싶은 질문은 더 있었지만, 남자가 전화를 받는 바람에 기다려야 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교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컨벤션 내내 여기 있을 테니 나중에 다시 오실 수 있으신가요?”
“네, 그러죠.”
혹시 몰라 교대로 온 직원에게도 질문했지만, 방금 전의 남자처럼 모든 걸 알지는 못했다.
‘연구 기관을 소개 해달라고하면 해 주려나?’
여기저기 흩뿌려진 점이 연결되고 있었다.
분명, 멸종 식물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있을 거다. 새로운 작물의 재배법을 연구하는 전문가들도 있고. 멸종 작물이 재발견 되는 사례도, 셰프가 나서서 품종을 개량하는 사례도 있다.
그리고…
한길에게는 실피움 뿐 아니라, 수천 개의 사라진 농작물들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출처를 댈 수 없어서 사용 못 하고 있었지만, 정당한 출처만 만들어 준다면…
지이이이잉!
갑자기 뒷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생각의 흐름이 깨졌다. 전화를 받으니, 앙칼진 목소리로 슬아가 타박을 주었다.
“셰프! 데니도, 셰프도, 왜 이리 전화를 안 받아요?”
시계를 보니, 어느새 네 시였다.
“미안, 지금 갈게!”
그래, 급한 건 아니니까.
생각은 나중이다.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