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00)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00화(200/325)
200. 뭘 어쩌라는 거야
“혀, 형 오셨어요?”
한길이 방으로 돌아오자,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던 데니가 펄쩍 뛰며 일어났다. 갑자기 스마트폰을 이불 속으로 던지는 모습이 수상했다.
“왜 그리 놀라?”
“안 놀랐는데요?”
“내 욕하고 있었어?”
“요, 욕이라니, 제가 그럴 리가! 형은 저를 뭐로 보시고!”
유난히 동요하는 데니가 이상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었으니까.
“데니, 너 아까 연회장에서 마주친 외국인들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네?”
이번에는 데니가 경직된 얼굴로 눈동자만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수상한 것으로 치면, 이쪽이 더 수상하다.
데니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불 속에서 스마트폰을 찾은 후 자진해서 한길에게 내밀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이거 보세요. 욕은 없어요.”
“내가 한 질문은 이게 아닐 텐데?”
“안 볼 거예요? 꽤 재밌을 텐데?”
왠지 질문을 피하려는 것 같은데…
하지만 본인이 말하기 싫다는데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다.
한길은 데니의 핸드폰을 받아서 화면을 봤다.
존재를 모르고 있던 단톡방이었다.
┗ 1호 국제 데뷔
┗ (셰프 전투복.jpg)
┗ 오오옷! 출전의 시기가 왔는가!
┗ 드디어 세계 정복이 코앞이다!
┗ 이미 한일전 예선 발라버림
┗ 세계 평화를 위해 열일하는 1호!
┗ 한일전도 못 이기면 우리 몽땅 다 파업할 거임 ㅅㄱ
┗ 아, 그 사이 패치 업데이트도 있었음. 영국 귀족 영어 + 분노 패치 + 밉상 패치
┗ 귀족 영어는 또 뭐냐?
┗ 난 밉상 패치가 더 궁금한데?
┗ 셰프가 분노도 하나?
┗ 내 새끼 건드리지 마 같은 건데 나중에 한번 우리끼리 상황ㅇㅇㄴㄴㅇㅇㅇㅇ
┗ 왜 말을 하다 마냐?
┗ 해석 패치 어딨냐.
몇 번 스크롤을 오르락내리락하던 한길에 데니를 빤히 바라봤다.
“내 도촬은 또 언제 했냐?”
“하하, 다들 궁금하다고 상황 업데이트해달라고 해서요. 앗, 벌써 시간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빨리 자야죠. 형도 빨리 주무세요. 전 이만.”
데니는 잽싸게 안대를 쓰고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자는 척만 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5분도 되지 않아 숨을 쌕쌕거리며 잠들었다.
‘나가서 통화하는 게 나으려나?’
한길은 데니까 깨지 않게 조용히 방을 나간 후, 호텔 로비에서 최셰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곳과 한국의 시차는 약 8시간.
지금이 자정 즈음이니, 한국은 아마 아침 8시 즈음 되었을 거다. 오픈 전이라 그나마 레스토랑이 한가할 터.
– 그런 곳에서 페이튼과 마주하다니, 이런 우연도 있군요…
한길은 최셰프에게 페이튼과 나눈 대화를 요약해서 알려주었다.
이탈리안 다이닝은 내키지 않는 뉘앙스였다든지, 페이튼의 서울 호텔 컨셉은 도심 속 정원이라든지, 멸종 위기 재료를 다루는 것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군요! 예상치 않게 수확이 많았네요. 또 뭐라고 하던가요?”
처음에는 질문도 하고 추임새도 넣던 최셰프가 갈수록 조용해 지고 있었다.
“최셰프, 듣고 계십니까?”
– … 네, 물론입니다.
“아무 말이 없어서요.”
– …
긴 침묵이 이어졌다.
최셰프가 겨우 말을 꺼냈을 때는,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 셰프,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방금 멸종 위기에 있는 재료를 다룰 거라고…
“네.”
– 멸종 위기요?
“물론 멸종 위기 재료만 다루는 건 아니고, 시장에서 구하기 어렵거나 도태되어 멸종 위기에 놓인 재료. 아니면 사라져가고 있는 맛을 말하는 겁니다.
– 네, 네, 뭔지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아예 컨셉으로 밀고 나간다는 게… 설마… 그걸… 제가 알아봐야.. 하는 걸까요?
“아니요. 신재료 발굴은 제가 전적으로 맡아서 할 겁니다.”
수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최셰프, 밖입니까?”
– 아닙니다. 레스토랑 안입니다.
“그렇군요. 그것보다, 이번 박람회에서도 수확이 많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기술과 재료가 많더군요. 정기적으로 이런 해외 행사에 참여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 그건 좋은 생각이군요.
“이번만 해도 조금 재밌는 씨앗을 많이 구매했는데, 아마 보시면 꽤 좋아할 겁니다.
– …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 셰프…
“네?”
– 그건 어떻게 들고 오려고 하십니까.
“글쎄요. 저는 바로 스타쥬를 하러 가는 일정이니 우편으로 부치려고 했죠.”
수화기 너머로 다시 돌풍이 일었다.
– 셰프, 이 세상에는 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아무 씨앗이나 내키는 대로 들고 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일단은 확인이 필요하니 구매하신 물품의 사진과 수량을 표시해서 저에게 보내주시죠.
“아니, 방법을 알려주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 … 그냥 빨리 알려주시는 게 도와주시는 겁니다. 이왕이면.. 퇴근 전에요.
묘하게 죄책감이 들었다.
괜히 뻘쭘해져서 한길은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곳에 오니 저보고 일본인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아직도 서양인들에게 동양인은 전부 일본인인가 싶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 아마 미식 관련 행사라 더할 겁니다. 그것도 프랑스 위주의 대회이니까요.
“프랑스에 일본인이 많나요?”
– 그것보다는, 프랑스의 유명 셰프들이 일본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가 많거든요. 알랑 도카스 같은 일류 셰프들은 대놓고 가이세키의 미학을 적용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폴 보퀴즈부터가 일본 요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게다가 요즘은 이국적인 요리나 재료를 적용하는 게 트렌드이기도 하고요.
“보퀴즈?”
– 프랑스 누벨 퀴진의 대부죠. 요리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보퀴즈 도르(Bocuse D’Or)도 보퀴즈 셰프의 이름을 따온 거니까요.
최셰프가 당연시하며 던지는 이름은 하나같이 한길에게는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아무래도 과거뿐 아니라, 현대의 요리 공부가 더 필요해 보였다.
‘일본의 가이세키 요리라…’
가이세키는 일본식 정찬 요리. 정갈하면서도 제철 재료를 잘 살리는 매력 있는 요리임에는 틀림없었다. 서양에서 동양의 요리를 인정해 준다면 좋은 일이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외국인들 시각에서는 한국 요리도 이국적이지 않나요?”
– … 그렇긴 하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견해이지만, 외국인들에게 알려진 한국 음식은 김치, 불고기, 비빔밥 정도거든요. 일본으로 치면 돈가스나 라멘 정도가 아닐까요. 그리고 적어도 파인 다이닝 셰프들은, 일본에서 영감을 받는다 해도 돈가스에서 영감을 받지는 않으니까요.
“… 그렇군요.”
– 셰프, 혹시 다음 지점은 한식으로 생각하고 계신가요?
“아직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이것저것 다 생각해보고 있죠.”
– 그러면…
더 통화를 이어가기 전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셰프, 제가 지금 바로 주방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급한 일이 아니면 저녁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길은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3호점에서 어떤 요리를 다룰지, 결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베스트 고르메>에서 지정하는 스테이지를 토대로 레스토랑을 운영해 왔다. 로마에서 얻은 재료로 지중해풍의 컨템퍼러리 다이닝 레스토랑을 열었고, 이탈리아 스테이지에 진입하면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테이지 선택권이 있다.
한길이 원하는 시대나 나라를 직접 고를 수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선택 범위가 너무 넓어서 어려웠다.
‘뭐, 급한 건 아니니까.’
서둘러 쫓기듯이 결정하기보다는, 차근차근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스타쥬 경험을 쌓기로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3호점부터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에 입점하는 레스토랑이니까.
한길의 목표는 한국에서 레스토랑 경영으로 성공하는 게 아니다.
노리는 것은 하나.
세계 진출.
그렇다면 3호점은 세계로 향하는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 단순하게 수익성이나 국내 소비자의 입맛에 맞춘 레스토랑을 운영해서는 안 된다.
한식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외국인의 시점에서는 어떨지 잘 모르겠다.
‘내일 페이튼을 보면 다시 떠봐야겠네.’
글로벌 호텔 체인 후계자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여기에 온 의미는 충분했다.
그렇게 만족하며 다시 방으로 향하던 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았다.
“슬아야?”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한 시였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할 텐데 여기서 뭐해?”
“잠이 안 와서 잠깐 산책하면 잠이 올까 해서요.”
“같이 가줄까?”
“아니, 지금 막 갔다가 막 방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래.”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길이 들어가려는 순간, 강한 힘이 팔을 끌어당겼다.
슬아가 한길의 소매를 붙잡은 것.
꽤 세게 당겨서인지, 소매의 단추가 떨어져서 바닥 위를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셰프! 호텔에 물어보면 바늘 실 키트가 있을 거예요. 그.. 나중에 셔츠 주시면 제가 달아드릴게요.”
“아니, 셔츠는 또 있으니까 괜찮아.”
“그래도…”
“그것보다, 뭐 할 말 있는 거 아냐?”
“네?”
“나 잡으려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
한길이 단정치 못한 소매를 들어 올리며 웃자, 슬아가 입술을 달싹인 후에 말을 꺼냈다.
“셰프, 저 술 한 잔만 사주시면 안 돼요?”
“그러다 내일 못 일어나면 어쩌려고?”
“딱 한 잔만요! 혼자 가니까 모르는 남자들이 계속 다가와서… 그냥 옆에 앉아만 있어줘도 돼요!”
#
호텔 바에 도착한 슬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테킬라 샷 다섯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한길이 말릴 틈도 없이 잔을 연거푸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말리고 싶었지만, 말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서운 기세로 테킬라를 집어삼킨 슬아는,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리더니 머리를 쿵쿵 찍어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잠시 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슬아가 푸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진짜 내가 미쳤지. 셰프, 나 진짜 무슨 생각으로 지원한 걸까요? ”
“갑자기 왜 그래?”
“다들 4년이나 공부해 왔다니까요? 최소 4년! 거기에 현장 경험까지! 그런데 벼락치기로 되겠냐고요….으으으으으”
아무래도 경력 차가 아직도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슬아는 팔 안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오려면 그냥 몰래 올 것이지, 온대 다 소문내고, 진짜… 메달도 못 따고 돌아가면 어쩌죠?”
“못 따면 못 따는 거지.”
“와! 자기 일 아니라고 막말하는 거 봐! 감정 패치 다운 받았다면서 왜 그래요?”
한길의 답변에 슬아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슬아는 아까 본 단톡방의 멤버인 듯했다.
“지면… 지면… 다들 얼굴을 어떻게 보라고요. 주방 식구들도 다 응원하고 있고.. 그렇게 열심히 도와줬는데…”
슬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한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방에서 언제 너를 도와줬지?”
“왜요? 피드백도 해주고, 같이 메뉴도 맛보고, 와인 오프닝도 해주고 했잖아요.”
“내가 보기에는 그냥 재밌어서 구경하는 것 같던데?”
“그것도 조금은 있겠지만…”
“신경 쓰지 마. 그 녀석들은 설령 실망해도 5초 후면 잊고 넘어갈 테니까.”
“하지만… 유셰프님이랑 최셰프님이랑 노셰프님도 도움 주셨는데… 못 이기면 너무 미안하잖아요…”
그 세 명의 셰프는 실제로 도움을 줬다. 하지만 이유를 따지고 들면, 딱히 슬아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유셰프는 대회가 서양인에게 너무 유리하게 짜여있는 사실에 분개해서 도운 것이었다. 노셰프는 ‘슬아가 기특해서’ 돕는다고 했지만, 보면 안다. 먼지만 쌓이고 있던 오리 프레스를 직접 써보고, 잊고 있던 클래식 메뉴를 다시 만들어보는 데 재미를 붙인 것이다. 최셰프는… 그쪽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도운 것 같고.
“게다가 데니랑 셰프도 여기까지 같이 와줬는데…”
“슬아야.”
“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내 입장은 말할 수 있는데. 난 네가 떨어져도 아무 상관없어.”
“… 뭐예요, 그게.”
“준비 과정만으로도 의미가 있었으니까. 덕분에 주방 애들도 외국 미식 문화를 알게 되었고, 난 여기 와서 새로운 재료도 얻었고, 페이튼까지 만났거든.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
슬아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네?”
“넌 내가 실망할 거라 했지만, 난 내 계획만 짜느라 대회 결과에 대한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었거든. 장담컨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 너무한데요?”
“그러니까, 너도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너 생각만 해. 대회를 앞둔 이 중요한 시기에, 왜 굳이 남의 생각을 하지?”
“…”
“지금만큼은 네 생각만 해도 돼. 지금 이 대회 참가가 무의미하다고 하면, 당장 짐을 싸고 가도 상관은 없어. 넌 뭐가 하고 싶은데?”
“와, 진짜 매정하다. 진짜 매정한데…”
슬아는 잠시 쓴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후련하게 웃었다.
“역시, 난 이기고 싶어요.”
“그러면 여기서 술이나 마시지 말고 가서 복습을 하든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든지 일찍 자. 그리고 레스토랑 딴 놈들 생각은 대회 끝날 때까지 금지야.”
슬아는 남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비스직이 천직이었지만, 반대로 조금 더 이기심을 키울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니, 이기심은 아니고.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슬아야, 난 레스토랑 식구들끼리 서로 의지가 되는 건 좋지만, 의존하는 건 싫어.”
“… 뭔가 어려운 말이네요.”
“그런가?”
슬아가 머리를 긁적이자, 한길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했다.
“이기면 좋지만, 이기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
“하지만 반대로 이기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이기면 좋아.”
“셰프, 술 마셨어요?”
#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다음날 아침,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슬아는 계속 헛웃음을 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하게 취준생 생활을 하고, 평범하게 회사에 취직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미 정해진 길만 보고 달려온, 평범한 인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 대회에 출전하겠다며 유럽에 와 있다. 불과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다.
평범한 삶의 궤도를 틀어버린 건…
– 메트로 도텔이라는 게 있는데.
– 너여서 이 자리를 준다는 건 아니고,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 우리 레스토랑은 다른 그 무엇보다 실력으로 사람을 뽑고 싶거든. 친분이 아니라.
슬아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그 안에 있는 동그란 물체.
어제 한길에게 돌려주지 못한 단추였다.
단추는 금속 소재로, 피부에 닿는 서늘함이 손을 차갑게 식혀 주어 기분이 좋았다.
‘그때도 매정하고 지금도 매정하다니까.’
어제 한길이 한 말이 떠올랐다.
– 난 내 계획만 짜느라 대회 결과에 대한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었거든. 장담컨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 너도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너 생각만 하라고.
어떻게 보면 차가운 말이고 매정한 말인데, 또 어떻게 보면 슬아를 가장 생각해 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 레스토랑은 정말 이상한 곳이었다.
요리사들만 봐도 그렇다.
그들은 서로 사이가 좋아 보이지만, 결코 남의 일을 대신 떠맡아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매일같이 서로를 밟고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서열까지 만들어가면서.
혼자 앞서나가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하나같이 철저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타협이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신뢰할 수 있다.
이상한 관계다.
– 난 우리 레스토랑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가 되는 건 좋지만, 의존하는 건 싫어
‘난 의지하는 걸까, 의존하는 걸까?’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슬아는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 혼자서 홀을 운영했고, 혼자서 공부했으며, 이 대회도 혼자 알아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아마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혼자 어떻게든 했을 거다.
‘그러고 보니… 뭔가 달라지긴 했네.’
슬아는 저도 모르게 다시 웃음을 흘렸다.
한길로부터 메트로 도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슬아는 주방 식구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들만의 돈독한 사이가 부러웠고, 자신도 그 일원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될 수 없음을 자각하고 남몰래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주방은 주방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데.
철저하게 내 길을 걷고 있는데도…
그뿐이 아니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슬아는 또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길이 어디로 갈지, 아직은 뭘 해야 할지도 알 수는 없지만. 완주를 했을 때, 자신에게 큰 변화가 올 거라는 예감은 있었다.
– 이기면 좋지만, 이기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하지만 반대로 이기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이기면 좋아.
한길의 알쏭달쏭 한 말을 떠올리니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되돌이표 질문 같지만, 답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뭘 해도 좋고, 결과가 어찌 되었든 좋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