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05)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05화(205/325)
205. 상황 파악 완료
“얼마나 남았죠?”
“10분이요.”
한길의 질문에 택시 기사가 거센 억양의 영어로 답했다.
‘10분이면 거의 다 왔네.’
한길은 차창 밖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이 앞으로 한길이 5주간 지낼 곳, 로사스다.
로사스(Roses)는 스페인의 카탈루냐(Catalonia) 자치주에 자리한 마을로, 바르셀로나에서 자동차로 2시간 반 거리에 있다.
해안 마을인 만큼 휴양지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게 유명한 휴양지는 아니다. 몇몇 호텔과 리조트들이 모여있지만, 5성급 호텔은 한두 개뿐. 그나마 번화가라고 불리는 곳에도 고층 건물은 거의 없었다.
택시는 마을의 중심가를 벗어나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장소가 조금 의외네?’
주변에 건물 하나 없는 이 외진 길의 끝에 한길의 목적지, <더 불독>이 자리하고 있다.
<더 불독>은 월드베스트 레스토랑 50 어워드(The World’s 50 Best Restaurants Award)에서 다섯 번이나 1위를 수상한 레스토랑이었다.
월드베스트 레스토랑 어워드는 미슐랭 가이드에 견주는 미식 지침. 소희에 말에 의하면, “미슐랭 레스토랑의 랭킹 제도”였다. 그리고 이 랭킹에서 1위를 다섯 번이나 한 레스토랑은, <더 불독>이 유일하다는 것 같았다.
<더 불독>은 특이하게도 1년 중 6개월만 영업하는 시즌제 레스토랑이었는데, 매해 8천 명의 손님만을 받았다. 그 8천 명에 들어가기 위해 2백만 명이 넘는 손님들이 예약 전쟁을 벌였고.
이곳의 음식을 먹기 위해, 볼거리도 없는 이 작은 마을까지 찾아오겠다는 손님이 한 해에 2백만 명이 넘는다는 말이었다.
그걸 가능케 한 인물이 바로 페르난도 아드리아.
<더 불독>의 오너 셰프다.
페르난도 아드리아는 요리 천재,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셰프, 미식 혁명가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또한, 분자 요리의 대표주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캐비어처럼 생긴 작은 구슬을 만드는 구체화 기법(spherification). 레시틴을 넣어 거품을 만드는 폼(foam) 기법도 모두 페르난도가 개발한 조리법이었다.
‘분자 요리라…’
한길은 딱히 분자 요리를 배울 생각은 없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주방에서 분자 요리 기법을 쓰기는 했다. ‘다섯 가지 식감과 맛의 파르미지아노’에서 만든 치즈 거품이라든지, 수비드 요리라든지, 이번 대회에서 슬아가 만든 액체질소 소르베라든지.
하지만 한길에게 있어 분자 요리는, 필요한 식감과 맛을 재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구현하고 싶은 맛이 있어서 자료를 찾던 중 발견한 기술. 아니면 노셰프에게 자문을 구해서 알게 된 기술을 시도해본 것뿐.
분자 요리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요리 스타일을 분자 요리로 규정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그래서 이 자리에 대한 얘기가 들어왔을 때도 고민했지만. 유셰프도, 최셰프도, 노셰프도 모두 무조건 가야 한다고 했다.
– 셰프, 마시모 보투라나 르네 레드제피 아시죠? 세계 1위 랭커들이 다 거기 스타주 생활을 거쳤다니까요? 어떤 곳이길래 그런지, 한번 보기라도 해야죠!
– 그렇습니다. 배웠다고 해서 당장 써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배워둬서 나쁠 건 없죠.
– 분자요리를 배우러 가는 게 아니라 창의력을 배우러 가는 거라니까? 전설의 창의 정신을 배우는 거지.
그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페르난도는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요리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베스트 고르메>에 의하면, 한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경험과 창의력이었다.
‘3호점 구상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
한길이 기획하는 3호점의 컨셉은, 지금껏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컨셉이었다. 참고할만한 사례가 없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던 참이었는데. 페르난도의 주방을 거치면 분명 유용한 힌트를 얻을 터였다.
한길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다시 한번 페르난도의 기사를 정독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정보가 없었는데, 이번 주부터 갑자기 페르난도와 관련된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9년 만에 다시 문을 여는 전설의 레스토랑 <더 불독>!] [<더 불독>, <더 불독 1846>으로 재탄생한다!] [페르난도, “<더 불독 1846>은 레스토랑이 아니다!”]페르난도가 이끄는 <더 불독>은, 영업 중인 레스토랑이 아니다. 지난 2011년, 이미 문을 닫았으니까.
당시 미식가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 <더 불독>은 이미 몇 년째 손해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제가 강의를 다니며 얻는 강의료나 레스토랑에서 출판되는 책 덕분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죠.
문을 닫기 전, 한 인터뷰에서 페르난도가 했던 말이었다.
얼핏 이해되지는 않았다.
<더 불독>의 코스 요리는 1인당 최소 230유로. 한화로 약 30만 원이다. 손님이 끊기기는커녕, 매년 2백만 명의 손님들이 제발 자리를 내달라고 애걸하는데 적자라니…
– <더 불독>은 아직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창의적인 요리를 연구해 나갈 것입니다. 다만, 레스토랑 다음 단계로 진화하는 것이죠.
페르난도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었다.
<더 불독>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다시 오픈할 때는 레스토랑이 아니라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 후로 몇 년, <더 불독>의 변신과 관련해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대학과 협력하는 요리 연구소가 될 거다, 씽크탱크가 될 거다, 요리 박물관이 될 거다, 요리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전시관이 될 거다.
예정된 재오픈 날짜는 2014년이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리고 2020년, 9년이 지난 올해가 되어서야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었다.
‘대체 뭘 하는 곳인지 모르겠네.’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음식은 만들 거다.
연구도 할 거다.
박물관과 같은 곳이 될 거다.
페르난도의 힌트는 모두 모호해서, 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머리를 싸매며 추리할 필요는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제 곧 알게 될 거니까.
#
“스타주 지원자인가요?”
한길이 캐리어를 끌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하얀 조리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와 질문했다. 4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로, 상당히 엄격한 인상이었다.
“네.”
“이름은?”
“이한길입니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명부를 훑어보았다.
“그런 이름은 없는데요?”
“아마 이거 같은데요.”
명부에는 한길의 이름이 ‘Han K. Lee’ 라고 적혀 있었다. 남자는 그 이름 옆에 체크 표시를 그렸다.
“한길이라고 했죠? 발음하기 어려우니 앞으로 행크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는 안토니오. 이번 시즌의 스타주 관리를 맡게 되었죠. 안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첫 번째 문을 열면 창고가 있어요. 일단 거기에 짐을 놔두고 다시 나와주세요. 5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몇 주 전에 받은 메일에는, 늦어도 오늘 오후 5시까지는 도착해야 한다는 안내 사항이 적혀 있었다.
지금 시간은 오후 3시.
아직 2시간이 남아 있다.
짐을 내려놓고 다시 나오자, 안토니오는 플라스틱 통 하나를 한길에게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자동차 와이퍼처럼 생긴 도구와 유리 세정제, 걸레 등이 들어 있었다.
“행크는 키가 크니 유리 청소를 맡기도록 하죠. 눈에 보이는 유리는 다 닦아줘요. 웬만하면 잡담 같은 건 하지 말고 조용히.”
건물 내부에는 한길과 마찬가지로 청소 도구를 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말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은 묘한 분위기.
‘저 사람들도 스타주인가?’
뭔가 생각과는 많이 달랐지만, 한길은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새로운 환경에 갑자기 던져지는 건 늘상 겪는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한길은, 조용히 지켜보며 분위기를 먼저 파악했다.
섣불리 행동하기보다는, 상황을 파악한 후에 움직이는 게 좋으니까.
#
“자기소개는 내일 하고, 일단 오늘은 숙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올해의 스타주는 총 35명.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었다.
안토니오는 명단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차가 있는 사람은 안내된 주소로, 없는 사람은 저희 밴을 타고 숙소로 이동합니다.”
숙소는 레스토랑에서 20분가량 떨어져 있는 저택. 공용 공간인 주방과 거실이 있고, 방이 총 9개가 있는 구조였다.
“한 방에 네 명씩 들어갑니다. 방을 멋대로 변경하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 부르는 사람들은 1번 방입니다. 케이트, 아리엘, 미코, 가브리엘…”
안토니오는 순서대로 9개의 방에 들어갈 사람들을 호명했다.
한길은 9번 방.
운이 좋게 세 명만 사용하는 방이었다.
“내일 아침 10시까지 레스토랑으로 오세요. 참고로, 지각이 두 번 누적되면 실습생 자격을 잃게 됩니다.”
안토니오는 그 말만 남기고 떠났고, 한길은 밴에 실린 캐리어를 찾아서 배정된 방으로 이동했다.
2층 침대 두 개와 옷장 하나만 있는 작은 방. 그 안에는 두 명의 룸메이트들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반가워. 난 매튜, 뉴욕에서 왔어.”
짙은 갈색 머리의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한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길. 행크라고 불러.”
한길의 답변에, 매튜는 갑자기 놀라서 움찔거렸다.
“뭐야, 영국에서 왔어? 영국에서 온 아시아인은 처음 보는데?”
“아니, 한국에서 왔어.”
“그런데 발음이 왜 그래? 인기 좀 있겠다?”
매튜는 장난스레 팔꿈치로 한길을 쿡쿡 찌르더니, 다른 룸메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이름이?”
“크리스토프. 코펜하겐에서 왔어.”
“둘 다 위층보다는 아래층을 선호하지? 난 별 상관없으니까 내가 위층을 쓸게! 그보다, 배는 안 고파? 나가서 뭐 좀 먹고 오지 않을래?”
“그러자.”
“다른 애들한테도 생각 있는지 물어보고 올게!”
매튜는 힘이 넘치는 보더콜리처럼 그대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이미 먹고 왔다는 사람들도 많더라고. 아니면 피곤하다고 일찍 자고 싶대. 우리끼리 가지, 뭐.”
저녁은 숙소 바로 인근에 있는 피자집에서 때우기로 했다. 다른 레스토랑을 가보고 싶었지만, 두 명의 룸메이트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한길도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이거, 진짜 심하게 맛이 없는데?”
“종이 상자를 씹는 것 같네. 저렴한 데는 저렴한 이유가 있지.”
“그래도 배는 채웠으니까. 그리고 첫날부터 무리하면 안 되지! 무보수로 일하는데 먹고 싶은 거 다 먹다가는 개털 될걸?”
스타주는 말하자면, 무급 인턴이었다.
일하는 동안 머물 숙소와 하루 한 끼 식사가 제공되지만, 그 외의 끼니는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 항공권도 개인 부담이었고.
“뭔가 생각이랑은 많이 다르지 않아? 페르난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오자마자 무슨 청소부 대하듯이 일을 시켜서 조금 놀랐는데.”
식사를 마칠 때 즈음, 매튜가 조금씩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페르난도 주방이라고 해서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완전 군대 같아서 놀랐다니까?”
“원래 창의적인 주방일수록 더 엄격해. 노마에서도 이 정도는 당연하고.”
“크리스토프는 노마 출신이야?”
“어, 차가운 요리 담당하는 라인쿡이었어. 여기는 레드제피가 추천해서 온 거야.”
‘노마’와 ‘레드제피’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코펜하겐에 자리한 노마는, 월드베스트 레스토랑 1위를 몇 번 거머쥔 레스토랑이었다. 레드제피는 그곳의 오너셰프였고.
“두 사람 다 라인쿡이야?”
한길의 질문에 두 사람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 온 사람들 다 그럴걸? 학생들도 있다는 것 같지만.”
하긴, 무급 인턴 자리에 셰프가 오지는 않을 거다. 한길 같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말을 해줘야 하나?’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관두기로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한국에서 레스토랑 두 개를 운영하는 셰프야’라고 말하는 것도 웃겼으니까.
“그러면 크리스토프는 스타주를 마치면 노마로 돌아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뭐야, 너도 그 자리를 노리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제안이 들어오면 생각해 봐야겠지.”
“무슨 자리?”
한길의 질문에 매튜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아닌데, 스타주 중에 상임 직원을 뽑을 때도 있거든. 그래 봐야 한두 명 뿐이겠지만.”
“한두명이 안 나올 때도 있지. 레드제피 말로는 2-3년에 한 명만 뽑는다던데.”
“그래도, 뽑히면 페르난도의 주방에서 일하는 거잖아? 스타주가 아니라 요리사로!”
‘이건가?’
그제야 한길은 스타주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기류를 이해했다. 한두 개 뿐인 정직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35명의 무급 인턴들이니까.
물론, 한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얘기였다.
여기서 배울 것만 배우고 자신의 레스토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레드제피가 또 다른 얘기는 안 했어? 그쪽도 스타주 생활을 했으니까…”
“한 얘기는 많은데 기억이 안 나네.”
매튜는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크리스토프에게 연이어 질문했고, 크리스토프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벽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한길은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숙소가 생각보다 멀던데 출근은 어떻게 하지?”
“거기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없더라고. 나는 자동차를 장기렌탈 했어.”
다른 스타주들도 모두 차량을 렌트한 모양이었다. 레스토랑의 밴을 타고 숙소까지 이동한 사람은, 한길을 포함해서 세 명뿐이었으니까.
“차는 뭐로 빌렸어?”
“그냥 작은 승용차지.”
“그러면 카풀 부탁해도 될까? 당연히 비용은 부담할게.”
한길의 말에 매튜가 활짝 웃었다.
“미안, 카풀은 생각 없어. 서로 일정을 계속 맞추는 게 불편하더라고.”
“나도 불편해.”
매튜도, 크리스토프도.
웃으면서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여전히 사람 좋게 웃는 매튜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차량 렌탈 업체의 브로슈어를 꺼냈다.
“난 여기서 빌렸는데 괜찮더라고. 친절하고 저렴하고. 쉬는 날에 한번 가보는 게 어때?”
빌리는 건 별문제가 되지 않지만, 한길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방에서 지내고, 같은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는데. 굳이 1인 1차로 이동하는 게 낭비 같아 보였으니까.
“그러면 이만 들어가자.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까.”
일행은 함께 숙소로 돌아간 후, 10시도 되지 않아 불을 끄고 잠들었다.
#
‘너무 일찍 일어났네.’
다음 날 아침,
한길은 평소의 습관대로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버렸다.
출근 시간은 아침 10시.
앞으로 다섯 시간이나 남아 있다.
방안을 둘러보니, 매튜와 크리스토프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한길은 노트북을 챙겨 들고 거실로 나갔다.
스타주 생활을 하는 동안 최셰프와 유셰프에게 1호점과 2호점을 맡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매일매일 있었던 일을 보고서로 받고, 이틀에 한 번은 페이스톡으로 회의를 하기로 했었다. 오늘은 보고서를 받는 날이다.
‘별일은 없네.’
보고서 확인을 마치고, 이런저런 자료를 읽었는데도 시간은 아직 7시밖에 되지 않았다.
집안은 여전히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모처럼이니까 밖에 나가볼까?’
한길은 동네 산책을 할 겸, 자료 몇 개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일찍 문을 여는 카페가 있어 커피와 오믈렛을 시키고, 혹시 몰라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도 포장주문을 했다. 식사하는 동안에는, 페이튼에게 받은 자료를 읽었다.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 시간은 8시. 이쯤이면 슬슬 일어나서 준비할 때도 되었는데, 숙소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사이에 간 건가?’
한길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택 앞에 줄지어 세워진 자동차들도 사라져 있었고.
한길은 택시를 부른 후,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냥 택시를 타고 다닐까?’
비용은 더 많이 들겠지만, 택시를 타고 다니면 이동 중에 휴식을 취하거나 업무를 볼 수 있다. 한길의 입장에서는 한두 푼 아끼는 것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게 더 중요했고.
“행크, 이제 왔어?”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34명의 스타주들이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 중 매튜가 한길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해?”
“아직 상임 직원들이 안 나와서, 문이 잠겨 있더라고.”
한길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34명 모두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찍 출근했는데, 막상 모습을 보여줄 대상이 나타나지 않아 헛수고하게 된 셈이었으니까.
‘이래서 카풀은 싫다는 거구나.’
남들보다 일찍 나와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어필하고 싶은데, 카풀을 하면 그걸 할 수 없다. 항상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테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여유를 부린 한길만이 눈에 띄게 되었다. 안 좋은 방향으로.
10시까지 출근하면 되는데, 다들 일찍 출근하면 10시에 출근한 사람이 게을러 보인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긴장해야겠네.’
상임 직원 자리에는 관심이 없지만, 한길도 페르난도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스타주가 35명이나 되면, 페르난도가 모든 사람을 일일이 가르쳐주지는 않을 테니까.
매튜도 사람 좋게 웃고 있지만, 만약에 한길이 늦잠을 잤다면 망설임 없이 두고 갔을 거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자업자득이니까.
중요한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자기 생각만 하고 작은 호의도 베풀지 않는다는 점. 모두 서로를 경쟁자로 보고 경계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경쟁이 과열되면, 남을 짓밟아서라도 올라가려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때 가장 먼저 짓밟히는 건, 만만한 사람이고.
상황 파악 완료.
한길의 목표는, 이런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경쟁자들보다 눈에 띄고. 페르난도에 접근해서 3호점에 필요한 걸 배워가는 것이다.
“뭐야, 그 봉투는?”
매튜의 시선이 한길이 들고 있는 종이봉투로 향했다.
“샌드위치. 점심때 먹으려고.”
꼬르륵!
샌드위치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매튜의 배에서 뱃고동이 울렸다. 한길이 웃으며 봉투를 열자, 매튜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한길이 꺼낸 건, 샌드위치가 아니었다. 혹시 몰라서 챙겨온 가게의 명함. 한길은 매튜에게 명함을 건네주며 미소를 지었다.
“숙소에서 한 블록만 가면 있더라고. 아침 7시부터 연다고 하는데, 메뉴도 저렴하고 맛도 괜찮아. 내일 한번 가봐.”
“아, 응…”
“아침은 굶지 않는 게 좋아. 배를 채워야 머리도 잘 돌아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