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08)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08화(208/325)
208. 거래의 조건
3문 3답은 실습생과의 친밀감을 쌓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다.
친밀감이 목적이었다면, 상대가 어떤 답변을 해도 세 개의 질문을 채워야 한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온몸에 ‘나는 바쁜 사람이다’라는 오라를 두르고 있었고, 흥미가 떨어지면 칼같이 관심을 끊으며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 있는 상임 직원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몇몇은 ‘네가 뭔데 감히 페르난도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 하는 힐난의 시선을 보내왔다.
3문 3답의 진짜 목적.
그건 여기에 모인 실습생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명문 레스토랑 출신이 아닌 실습생들은, 국적이 다양했다.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인도, 아르헨티나, 멕시코와 에티오피아까지.
하나같이 유럽인의 시점에서 보면 이국적인 지역들이다.
“한국에서 온 행크입니다.”
“한국이라… 한국은 아직 가본 적이 없군. 그곳에서는 주로 어떤 요리를 먹지?”
첫 번째 질문은 예상대로의 질문이었다.
페르난도는 서양 문화권이 아닌 곳에서 온 실습생들에게는, 자국의 요리에 대해 물어봤으니까.
하지만 저 질문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 한국인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그런 상식을 얻고 싶어서 질문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아까 인도에서 온 실습생이 ‘카레’라는 단어를 꺼낼 때, 급격히 식은 관심만 봐도 알 수 있다. 여기서 된장, 고추장, 김치 같은 답변을 했다가는 똑같은 반응이 올 거다.
‘모르는 요리에 대해 알고 싶은 거겠지.’
자신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접해온, 새로운 요리나 재료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한길은 그에 대한 답변을 이미 준비해 두었다.
“답하기 조금 어렵네요.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의외로 지역마다 다양한 음식을 먹고 있거든요.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지방으로 출장 갔다가 발견한 재료가 있는데, 서울에 사는 저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음식이었습니다. 도롭이라는 건데…”
“도롭? 빗방울 같은 건가?”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누구든 모르는 재료가 나오면 그 재료가 무엇인지 물어볼 테니까.
“빗방울은 아니지만, 조금 연관은 있네요. 평소에는 바짝 말라 있어서 눈에 띄지 않는데, 비가 온 후에는 빗물을 흡수해서 갑자기 부풀어 오릅니다. 미역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바다에서 나는 미역이 아니라 산에서 나는 미역이죠. 아니, 사실은 미역도 아니고… 청정자연의 지역에서, 비가 오는 날에만 갑자기 마법처럼 솟아나는 재료입니다.”
“그런 건 처음 들어보는군.”
“저도 이번에 처음 봤는데, 전쟁을 겪은 어르신들은 많이 드셨다고 하더군요.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들에게 바구니 하나씩 던져주며 도롭을 주워오라고 했다는데, 지금은 찾기 힘든 재료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굳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마트만 가면 먹을 게 넘쳐나니까요.”
페르난도의 눈이 빛났다.
이것도 계산 대로였다.
단 하루뿐이지만, 페르난도의 재료 취향은 이미 파악해두고 있었다. 한길에게도 익숙한 취향이었으니까.
질병으로 개체 수가 급감해 지금은 대량생산을 하지 않는 굴.
참치 등뼈에서 갓 수확한 신선한 골수.
모두 스카피가 말한, 시장에 나오지 않는 재료였다.
“그래서, 그 도롭이라는 건 어떤 맛인가?”
세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가장 중요한 맛에 대한 정보는 주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이게 조금 특이해서 설명하기 어렵네요. 해초 같기도 하고, 오도독 씹히는 맛도 있습니다.”
“어디서 구할 수 있지?”
“글쎄요. 시장에도 잘 나오지 않는 재료라 저는 인근 주민들에게 부탁해서 비 오는 날, 발견하는 대로 캐서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비가 오면 무조건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 안정적인 수급은 어렵죠.”
‘됐어.’
네 번째 질문까지 유도했고, 강렬한 인상도 남겼다. 한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와중,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 게 또 있나?”
다섯 번째 질문이 들어온 것.
이전까지는 도롭에 대한 후속 질문이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새로운 재료를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여기까지는 생각해 두지 않았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재료는 많았다.
그동안 한길은 한국에서도 시장에 나오지 않는 재료를 탐구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도롭만큼의 임팩트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천연기념물 제주 흑돼지는 한길에게 신기한 재료였지만, 그건 우리에게 친숙한 제주 흑돼지가 사실은 혼종이라는 반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 흑돼지를 모르는 페르난도의 입장에서는 그저 순수 토종 돼지일 뿐이다. 외국에서는 고대 종을 보존하는 곳들도 있는데, 이래서는 임팩트가 약하다. 그래도 관심을 보일 수는 있겠지만…
‘아니, 이건 리스크가 너무 높아.’
한길이 그동안 찾아본 페르난도의 자료에는, 육류 요리가 많지 않았다.
지리산에서 발견한 캐비어도 마찬가지.
한길에게는 한국에서도 철갑상어를 양식한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유럽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괜히 다른 재료 얘기를 꺼내 모처럼 얻은 기대감을 흐트러트리는 것보다는, 도롭과 연관된 방향으로 마무리를 하는 게 좋을 터.
“한국에는 도롭처럼 자연에서 채집하는 재료가 많죠. 영어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는 나물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보면 유럽의 허브와 비슷한데, 종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죠. 취나물, 방풍나물, 돌나물, 고사리, 곤드레나물…”
“코리안 허브군. 유럽 허브와는 많이 다른가?”
“다릅니다. 유럽에서는 로즈메리나 타임을 향신료처럼 쓰는데, 한국의 나물은 채소에 더 가깝거든요. 조리법도 다르죠. 한번 데친 후 양념을 해서 먹거나 들기름을 두르고 볶아 먹어도 맛있습니다.”
“들기름?”
“들깨로 만든 기름이죠.”
“참기름이랑은 많이 다른 건가?”
“참기름보다 향은 더 옅은데, 그래서 오히려 재료 본연의 맛에 방해되지 않게 고소함을 두르기 좋습니다.”
한길의 답변에 페르난도는 고개를 돌리더니, 옆에 앉은 상임 직원에게 무언가 지시 사항을 내렸다. 스페인어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상임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이도, 오이도’를 반복했다.
‘의외네.’
한길에게는 너무나 흔하고 익숙한 재료인 나물과 들기름에 이렇게 관심을 보이다니. 덕분에 질문은 이미 8개에 달하고 있었다.
이윽고, 페르난도의 시선이 다시 한길에게로 향했다.
“재밌는 얘기를 해줘서 고맙네.”
이제 슬슬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는 분위기.
이미 충분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이대로 보내기에는 뭔가 아쉽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게 좋으니까.
“저는 고향 음식 없이는 일주일도 못 버티는 사람이라, 얼마 후에 제 지인이 한국에서 몇몇 재료를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도롭까지는 무리일 수도 있지만, 나물과 들기름은 한번 부탁해보겠습니다.”
한길의 말에 페르난도는 지금껏 본 중 가장 환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10년은 젊어진 듯, 활기가 느껴졌다.
“그렇군! 도착하게 되면 꼭 알려주게! 이왕이면 만드는 방법도 한 번 보여주면 좋겠군.”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실습생들의 부러워하는 눈길은 당연하다.
하지만 상임 직원까지 놀란 눈을 뜨는 걸 보니 이런 일은 흔치 않은 모양이었다.
“옆에,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페르난도는 다음 실습생으로 넘어갔지만, 한동안 모두의 시선은 한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후로도 페르난도는 모든 실습생에게 칼같이 세 개의 질문만을 던졌다.
한길의 기록을 깬 이는 아무도 없었다.
페르난도의 초대장을 받은 이는 더더욱 없었고.
#
저녁 식사 후에는 다시 재료 손질의 시간.
반복되는 단순 노동이 이어졌다.
작업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주위에서 한길을 대하는 태도에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힐끔거리는 시선.
한길을 지나가는 실습생 1로 보던 사람들이 갑자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안토니오는 퇴근을 허가해 주었다. 그리고,
“행크라고 했었지?”
“어.”
“난 앤서니야.”
“난 케이트.”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실습생이 한길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작업 중에는 안토니오의 눈치를 보느라 잡담을 할 수 없었으니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셰프라고 했었나?”
“그래.”
“그러면 네 레스토랑을 갖고 있는 거야?”
“그렇지.”
“어떤 레스토랑인데?”
“그냥 이것저것 몇 개 갖고 있어.”
“몇 개?”
‘아차.’
피곤해서 그런가, 무심결에 곧이곧대로 답하고 말았다.
“여러 개를 운영하는 거야?”
정확히는 레스토랑 두 개에 작은 가게 하나.
그리고 3호점은 호텔 입점을 앞두고 있다.
사실대로 말해도 별 상관은 없지만,
‘굳이?’
그렇게 해서 얻는 건 없다.
몇몇 실습생이 부러워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부러움은 한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질투하거나 경계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괜히 피곤해진다. 득보다 실이 많은 행동은 피하는 게 좋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대충 얼버무리며 사람들 사이를 해치고 탈의실에 당도한 한길은, 문을 열자마자 놀라서 우뚝 멈춰 섰다.
“미안.”
“그냥 빨리 들어와.”
눈앞에 속옷 차림으로 셔츠를 갈아입는 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응 안 되네.’
이곳의 탈의실은 남녀가 함께 사용했는데, 가림막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모두가 거리낌 없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행크, 지금 집에 가?”
한길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매튜가 달려왔다. 아직 조리복을 입은 상태로.
“어, 가려고.”
“어차피 가는 길인데, 태워줄까?”
절로 웃음이 나오는 말이었다.
불과 24시간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과 일정 맞추는 게 불편하다며 카풀을 거절하던 매튜였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갈아입으니까.”
“아니 됐어.”
“어?”
“이미 택시 불렀거든. 괜히 내 일정에 맞출 필요는 없어. 너는 네 할 일 해.”
“아, 그래, 하하하.”
매튜는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아깝긴 했지만, 이곳에서는 호의도 공짜가 아니다. 괜히 차 한번 얻어타기 위해 타인에게 빚을 지는 건 사양이다.
#
“행크, 라이드 필요해?”
“아니, 괜찮아. 택시 불렀어.”
“이 시간에 다니는 택시가 많지 않을 텐데?”
“이미 오는 중이래.”
밖으로 나가 테라스에 앉아 기다리는 사이, 지나가는 실습생들이 매튜와 비슷한 제안을 해왔다.
그들 말대로, 이곳에서는 택시를 잡는 게 쉽지는 않았다. 로사스는 작은 마을인 데다가, 더 불독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산길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길에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아침에 탔던 택시의 택시기사와 이미 모종의 거래를 마쳤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시간에 맞춰서 와달라고 한 것.
기사 입장에서는 고정 손님이 생겨 좋고, 산길까지 오는 비용은 별도로 주기로 했으니 손해 볼 것도 없다. 반면, 한길에게는 개인 운전사가 생긴 셈이니 윈윈이었다.
아쉬운 건 퇴근 후에 바로 전화를 걸어도 20분 후에나 도착한다는 점. 조금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된다.
‘퇴근하는 사람이 별로 없네?’
실습생의 절반 정도는 다시 숙소로 향하고 있었지만, 매튜처럼 탈의도 하지 않고 남아있는 이들도 꽤 있었다.
아침 8시부터 나와서 자정까지, 16시간이나 일했는데. 심지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앉아 있지도 못하고 서서 일만 했는데, 참 대단했다.
‘그래봤자 별 효과도 없을 텐데.’
조금 불쌍하기도 했다.
효율 떨어지는 열정 과시로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딱히 시킨 일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 남아서 대기하는 건, 일하는 것보다도 피곤할 테지.
물론, 한길이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미 페르난도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초대장까지 받은 입장이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조금이라도 눈에 띄기 위해 피곤함을 무릅쓰고 남아 있어야 했을 수도 있다.
‘돌아가서 회의 먼저 하고… 아니, 수산 시장을 먼저 찾아야겠구나. 내일도 나만 늦게 올 수도 있겠는데? 지각만 아니면 괜찮으려나?’
빵빵!
잠깐 일정을 정리하는 사이, 택시가 도착했다.
한길이 짐을 챙기고 레스토랑 입구로 걸어가자, 저 멀리서 택시의 문을 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여자였다.
“이거 예약 차량이에요.”
“예약? 그냥 가주면 안 돼요? 돈은 두 배로 드릴게요.”
“안됩니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고, 거절당한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세게 닫았다.
한길은 여자를 바로 알아보았다.
아직 실습생 얼굴과 이름을 다 외우지는 못했지만, 이 여자는 몰라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라엘라.
오늘 오전에 몰래 굴을 먹다가 걸려서 한 소리를 들었던 실습생이다.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던 라엘라였지만, 한길을 보자마자 표정이 바뀌었다.
“행크? 혹시 이거 네가 부른 택시야?”
“그래.”
“같이 타도 될까?”
“그러면 뭘 해 줄 건데?”
라엘라의 미간이 좁혀졌고, 한길은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
“비용은 반반.”
모두가 경쟁하는 분위기라고 해서, 경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계산은 필요하지만, 계산적인 사람이 되는 건 싫었다. 딱히 같이 가서 손해 보는 것도 아니고.
함께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중, 한길은 핸드폰을 꺼내고 인근 수산시장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딜 하지 않을래?”
옆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이 치고 들어왔다. 한길이 고개를 돌리자, 라엘라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슨 딜?”
“그 안에 있는 거, 나도 보여줘.”
라엘라는 고갯짓으로 한길의 가방을 가리켰다.
가방 안에는 한길이 몰래 얻어온 소스와 액체가 들어 있었다.
‘설마, 본 건가?’
안토니오에게 들키지 않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34쌍의 눈을 모두 피할 수는 없다.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한길이 시치미를 뚝 떼자, 라엘라가 작게 웃었다.
“걱정 마,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들킨다고 해도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을 것 같지만.”
“….”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뭐, 난 똑똑한 사람은 싫지 않거든.”
“진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한길은 다시 시선을 핸드폰으로 돌렸지만, 라엘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도 맛보게 해줘. 그 소스랑 액체. 공짜는 아니고, 그러면 나도 내가 먹은 굴 맛을 알려줄게.”
‘다 봤네.’
이번에는 떠보는 게 아니라 콕 집어서 한길이 챙겨온 재료들을 말하고 있었고, 심지어 거래까지 제안해왔다.
이러면 더 이상 시치미를 뗄 수 없다.
“거절하겠어.”
“왜?”
“거래는 동등한 가치의 물건을 교환하는 거니까.”
계산적인 사람이 되기는 싫지만, 계산이 필요할 때는 해야 한다.
굴 맛을 전해 듣는 것과, 실제 재료를 맛보는 건 전혀 다르다. 거래가 성립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돈은 줄게.”
“미안, 딱히 돈이 필요한 건 아니라서.”
이 재료의 가치는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다.
페르난도의 레스토랑은, 돈이 있다고 예약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한길이 구해온 재료는 그래 봐야 두어 접시를 만들 분량. 첫 번째 접시는 그 맛을 그대로 느끼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접시는 분석하는 데 필요하다.
한 접시 정도는 줄 수도 있겠지만…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 떠올랐다.
“넌 두바이 레스토랑에서 일한다고 했었지?”
“어. 두바이에 있는 야닉 일레노 셰프의 레스토랑이야.”
한길은 핸드폰을 꺼내 야닉 일레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유명 셰프에 대한 공부는 틈틈이 하고 있었지만, 이 이름은 아직 몰랐던 탓이다.
‘유명한 사람이구나.’
야닉 일레노는 프랑스 요리의 대표주자.
특히, 전통 프랑스 요리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셰프였다.
이 정도면 거래할 가치는 충분하다.
“거기서 어떤 파트를 맡았어?”
“육류 스테이션.”
“그러면 그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메뉴는 만들 수 있겠네?”
“그건… 그렇지? 그건 왜?”
라엘라는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한길을 쏘아보았다.
“맛은 맛으로 거래해야 하니까. 네가 일했던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메뉴를 만들어준다면, 나한테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한길이 가장 아쉬워하는 점 중 하나.
모처럼 미슐랭의 본고장인 유럽까지 왔는데, 실습생으로 일하는 동안에는 가서 맛볼 수 없다는 점이다. 무려 16시간이나 근무하는 일정이었으니까.
하지만…
페르난도의 주방에는 전 세계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온 요리사들이 모여있다.
어차피 두바이에 있는 야닉 일레노 셰프의 레스토랑에 가도, 그 요리를 만드는 건 라엘라다. 라엘라에게 부탁한다면, 그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같은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내일 새벽에 수산 시장에 들러서 장을 봐오고 페르난도의 요리를 그대로 재현해 보려고 하거든. 시그니처 요리 하나만 보여준다면, 너도 맛보게 해줄게. 어때?”
나쁘지 않은 제안일 텐데, 라엘라는 턱을 괴며 망설이고 있었다.
“나 예전에 선배들한테 이런 경우에 대한 주의사항을 들은 것 같은데.”
“주의사항?”
“이름 있는 레스토랑에 일하다 보면, 다른 곳에서 스카웃하는 사람들이 많다더라고. 그런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거든.”
“왜?”
“레시피만 빼먹고 단물 빠지면 버려진다고 했으니까.”
한길은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레시피를 알려달라는 건 아냐. 맛만 보고 싶은 거지. 손님들한테도 매일 요리를 내잖아?”
라엘라는 그 후로도 한동안 고민을 했지만, 결심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할게. 하지만 요리는 쉬는 날이 되어서야 만들 수 있을 거야. 재료를 사 와야 하니까.”
“그러면 다음 쉬는 날에 부탁해. 나는 내일 당장 만들 생각인데…”
“내 번호를 줄게. 준비되면 전화 줘.”
세세하게 정리할 사항이 있었지만, 거래는 성립되었다.
그 후로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라엘라는 본인이 잘 한 건지 곱씹고 있었고, 한길은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는 중이었다.
‘여기, 명문 레스토랑 출신 실습생이 몇 명 있었더라?’
예상했던 것보다, 이곳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게 많았다.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