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10)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10화(210/325)
210. 노예도 노예 나름
9개의 선택안 중 7개는 주방에 있는 스테이션. 콜드 스테이션, 스타터 1, 스타터 2, 육류, 생선, 스몰 키친, 그리고 페이스트리다.
그 아래에 있는 구매(purchasing)와 크리에이티브(creative)는 처음 들어보지만, 무엇을 하는 부서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재료 구매와 메뉴 개발을 하는 곳이겠지.
‘정말 메뉴 개발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구나.’
어제의 통화에서 소희가 그럴 가능성을 언급하긴 했지만, 진짜 있는 모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레스토랑의 메뉴 개발 부서라니. 당연히 구미가 당기지만,
‘나만 그렇진 않겠지.’
슬그머니 곁눈질로 보니, 한길의 주위에 있는 다섯 명 모두 같은 내용을 적고 있었다.
1 지망 크리에이티브.
2 지망 스타터.
스타터는 더 불독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파격적인 요리가 많이 나오는 스테이션.
육류와 생선은 스테이션이 하나씩만 있는 것에 비해, 스타터는 두 개의 스테이션이 운영되는 것만 봐도 그 위치를 어림잡아 볼 수 있다.
‘1지망 크리에이티브, 2지망 스타터가 가장 무난한가…’
실습생이라면 누구나 같은 선택을 할 거다.
하지만, 한길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입장이 다르니까.’
다른 실습생들의 목표는 상임 직원이 되는 것. 배우고 싶은 욕구도 있겠지만, 주요 부서에서 활약하고 페르난도의 인정을 받는 게 주목적이다.
하지만 한길은 설령 상임 직원 오퍼를 받는다고 해도 응할 생각이 없다.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미슐랭 레스토랑의 주방과 요리를 경험하기 위해서.
더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얻은 경험과 배움을 자신의 레스토랑에 적용하기 위함이다. 페르난도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당장 레스토랑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얻어가는 게 중요하다.
그런 한길의 입장에서는, 스타터보다 매력적인 선택안이 있었다.
구매 부서.
그곳에 가면 미슐랭 레스토랑에서는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 희귀한 재료는 어디서 어떻게 공급받는지, 재료 수급이 안정적이지 않을 시에는 메뉴에 어떻게 반영하는지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지금껏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재료를 도입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멸종 위기종 혹은 잊힌 재료를 주 컨셉으로 내세우려는 한길에게는 귀중한 경험이 될 터. 하지만…
‘고민되네.’
모처럼 페르난도의 주방에 왔는데, 메뉴 개발 부서로 갈 기회를 놓치면 그것도 아깝다.
둘 다 경험해 보는 게 베스트지만, 그게 가능할 리는 만무.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을 내리기 어려워 펜을 굴리던 그때,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희망 부서는 왜 물어보는 거지?’
이왕이면 실습생들이 원하는 부서에 넣어주려고?
그럴 리 없다.
이곳에서 실습생은 요리사가 아니다.
쉴 틈 없이 굴러가는 공장의 일손, 수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다.
그리고 공장주인은 톱니바퀴의 의사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원하는 부서로 가면 의욕이 넘치니 열심히 하겠지만,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는 잘하는 사람을 기용하는 게 당연하다.
35명이나 되는 실습생의 요리 실력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으니, 이럴 때는 이력서를 먼저 참고할 거다.
‘명문 레스토랑 출신이 유리하겠지.’
그들은 이력서에 올라간 스펙이 다르다.
다양한 기술과 신기한 조리법을 이미 알고 있고, 비슷한 생태의 레스토랑에서 일해봤으니 적응도 더 빠를 거다.
그런 면에서는 한길이 불리했다.
두 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셰프지만, 이곳에서는 이름 모를 레스토랑의 셰프보다 유명 레스토랑의 라인쿡을 더 신뢰했으니까.
‘설문지는 자기소개서랑 비슷한 건가?’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한번 읽어 보는 정도. 1차 결정은 이력서를 토대로 내리고, 무언가 부족하거나 애매한 경우에는 자기소개서를 읽을 거다.
한길의 이력서는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간혹 자기소개서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기용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선택은 완료되었나요? 이제 모두 걷겠습니다.”
“오이도.”
“오이도.”
안토니오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한길은 볼펜을 내려놓았다.
결정은 내렸다.
후회는 없다.
#
설문지를 제출한 이후, 주방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원래도 경쟁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번 설문지를 작성하면서 모두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한정된 자리를 노리는 라이벌이라는 사실을.
“다음 재료는 페르난도가 꽤 좋아하는 재료, 유바입니다. 유바를 만들어본 사람이 있나요?”
안토니오의 질문에 세 명의 실습생이 번개 같은 속도로 손을 들었다. 나머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걸 보니, 유바의 정체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들어보지도 못한 겁니까.”
“…”
“거기 세 명, 유바를 설명해 주시죠.”
“두유를 서서히 가열할 때, 단백질이 응고되면서 형성되는 얇은 막입니다.”
입을 연 사람은 클레어 왕.
어제의 3문 3답 세션에서 페르난도가 유일하게 가정사에 대해 질문을 했던 실습생이라 기억에 남는다.
어머니는 홍콩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중국인, 아버지는 그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프랑스인 셰프라고 했었나. 그리고 그 레스토랑은 미슐랭 별을 세 개나 받은 곳이었다.
“중국에서도 먹는 재료이니 클레어는 잘 알겠군요. 이것 역시 페르난도가 일본에 가서 발견한 재료입니다. 아는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으니, 방금 손을 든 세 명에게 부탁하겠습니다.”
“오이도.”
“오이도.”
안토니오는 세 명의 실습생을 주방 한쪽에 있는 화구로 데려갔다. 먼발치에서 보니, 유바를 만드는 과정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말 그대로 가열만 하면 되니까. 물론, 가열하는 데에도 요령이 필요했다.
“저희는 레이저 온도계를 사용합니다. 두유는 73도에서 응고되기 시작하는데, 이 온도를 너무 벗어나면 거품이 생겨서 찢어지기 쉽죠. 시간은 한 장에 25분 정도 소요될 겁니다.”
세 명이 유바를 만드는 동안, 중앙 조리대에 있는 인원은 두유를 만들었다.
“두유 역시 레스토랑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합니다. 시중에 판매되는 두부는 맛이 너무 연하기 때문이죠. 저희는 진한 향이 필요합니다.”
두유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하룻밤 내내 물에 불려놓은 대두의 껍질을 벗겨낸 후, 믹서기에 갈아준다. 치즈 직포를 이용해 건더기는 걸러내고, 뽀얀 액체만을 냄비 안에 넣는다. 물을 조금 추가해 농도를 맞추고, 한소끔 끓이다가 불을 줄이고 20분간 끓여주면 완성.
작업하는 도중, 저 멀리서 안토니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해본 적이 있어서 잘하시는 군요. 전혀 안 찢어지고, 좋네요.”
고개를 돌려보니, 크리스토프가 냄비에서 유바를 꺼내는 중이었다. 유바라는 명칭은 생소했지만, 완성물은 한길에게도 익숙했다. 두부피와 매우 유사해 보였으니까.
“이번에는 페르난도의 참깨 렌틸콩을 만들어보겠습니다. 혹시 이 요리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몇 명이 손을 들었고, 그중 세 명은 주방의 다른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이번에도 손을 들지 못한 한길은, 먼발치에서 만드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참깨 렌틸콩을 만드는 방법은, 일전에 한길이 노셰프에게서 배운 구체화 기법과 유사했다. 주사기 안에 반죽을 넣고 용액 안에 떨어트리면, 캐비어 같은 작은 구슬이 생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요리에는 그 어떤 화학 첨가물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
참깨 페이스트에 녹인 버터를 넣고 반죽을 만들 뿐이었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는 성질을 이용해서 작은 구슬을 만드는 것. 물론, 이것도 요령은 필요한 모양이었다.
“라엘라, 크기가 모두 다르지 않습니까. 주사기에서 반죽을 밀어내는 압력이 일정해야 합니다. 너무 세게 밀면 총알 모양이 되는데, 저희는 똑같은 크기의 방울이 필요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건 전부 폐기입니다. 다시 시작하세요. 한 명당 250개의 방울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기억하시고요.”
“오이도.”
지시를 모두 내린 안토니오는 다시 중앙 작업대로 돌아와 남은 인원을 훑어보았다.
“매튜를 기준으로 왼쪽은 두유를 더 만들고 오른쪽은 렌틸콩 반죽을 추가로 만드세요. 행크와 아메드는 내일 두유를 만들 때 사용할 대두를 세척하고 불려주고요.”
“오이도.”
“오이도.”
남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어두웠다. 안토니오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노예 공장에서도 계급을 나누는 것.
순수 노동을 할 자와 조리 노동을 할 자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선택받은 자들이 유바와 렌틸콩을 만드는 동안,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두유와 참깨 반죽을 준비해서 갖다 바치고 있었다.
상등급 노예는 모두 명문 레스토랑 출신.
하등급 노예는 일반 실습생.
물론, 한길 역시 후자에 속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때, 안토니오가 새로운 밑바닥을 보여주었다.
“이제부터는 접시 닦는 법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설거지는 아니고, 홀로 나가기 전에 접시를 닦고 지문을 지우는 작업입니다. 저희 레스토랑에서는 진을 사용해서 모든 그릇을 닦습니다. 다른 알코올에 비해 향이 연하고 맛에 방해되지 않기 때문이죠.”
열과 성을 다해 접시를 닦는 일은, 열과 성을 다해 요리하는 것보다 힘들었다.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접시 닦는 일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이도.”
그 와중, 조금만 게으름을 부리면 안토니오의 지적이 바로 들어왔다.
“이동 중에는 ‘케모’를 외칩니다. 이런 작은 일도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이도.”
닦은 접시는 탑처럼 쌓아서 주방에 있는 각 스테이션으로 전달했다. 몸도 고단했지만, 요리와 전혀 관계없는 노동을 한다는 자각이 피로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렇게 몇 시간을 일했을까.
“이제 슬슬 저녁 준비를 하죠. 5분 내로 준비해 주세요.”
“오이도.”
“오이도.”
드디어 강제 노동의 끝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식사 시간에 페르난도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용무가 있어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안토니오가 실습생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오늘은 페르난도가 없으니 모든 공식 업무는 마감입니다.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데, 모처럼이니 일찍 퇴근하셔도 좋습니다. 숙소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해도 좋고, 원한다면 주방을 오픈할 테니 남아서 요리 연습을 해도 좋습니다. 단, 재료는 워크인 냉장고에 있는 파란 통에 담긴 재료만 사용해야 합니다.”
파란 통은 밑 작업을 하고 남은 재료. 즉, 유통기한이 임박한 재료들이다. 어차피 쓰레기통으로 향할 재료들을 처분하려는 속셈이 훤히 보였다.
당연하지만, 귀가하는 실습생은 없었다.
“주방 사용과 관련해서 질문이 있다면 받겠습니다.”
“플란차 그릴을 사용해도 됩니까?”
“그릴, 팬, 오븐을 포함한 주방에 있는 모든 기기를 사용하셔도 됩니다. 단, 파트장들도 작업 중일 테니 한번 씩 물어보고 사용하고, 사용 후에는 즉시 정리를 해야 합니다.”
“혹시 시식을 부탁드려도 됩니까?”
“제가 한가해 보인다면 와서 물어봐도 됩니다. 오늘은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다른 상임 직원에게 부탁해도 되겠네요. 그분들이 응해줄지는 별개이지만요.”
“파란 통 재료가 아니라 다른 재료도 사용 가능한가요? 재료 비용은 별도로 지불하겠습니다.”
“레스토랑 재료를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핸드폰은 사용 가능합니까?”
“개인 요리이니 사용 가능합니다.”
여기저기서 질문이 쇄도했다.
얼굴만 봐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명문 레스토랑 출신의 실습생들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본 실력을 보여줄 수 있겠군’ 하는 표정이었다.
반면, 그릇만 닦던 실습생들은 ‘내 요리를 보면 나를 다시 보겠지?’ 같은 생각을 하며 행복한 상상 회로를 돌리는 것 같았다.
‘나도 해야 하나?’
이곳에 도착한 후로, 주방에는 있었지만 요리는 하지 못했다. 요리에 대한 갈증이 극심했지만…
‘그것보다는 쓸모있는 일을 하는 게 좋겠지.’
놀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온 게 아니다.
1분 1초도 허비할 수는 없다.
실습생들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한길이 보기에는 전혀.
주방을 오픈한다는 건 말 그대로 ‘쓰고 싶으면 써’의 의미이지, ‘너희들의 숨겨진 실력을 보여줘’의 의미는 아니다. 이건 확신할 수 있다.
‘나도 그랬으니까.’
한길 역시 요리사들에게 자신의 주방을 개방했고, 가끔 요리사들이 시식을 부탁하면 맛을 보고 조언도 해주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요리사들이 무얼 하는지, 자세히 관찰한 적은 없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윗사람은 그리 한가하지 않다. 요리사 개개인의 자질은 업무 시간에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
심사위원도 없는 이상한 요리 대결에 열을 올리는 것보다는,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네, 행크.”
“주방만 오픈하는 겁니까, 아니면 냉장고와 재료 창고도 모두 오픈하는 겁니까.”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네요.”
“이곳의 재료 인벤토리를 한번 보고 싶습니다.”
“…”
한길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질문이 특이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안토니오가 턱을 괴며 꽤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겼기 때문도 있었다.
“허락해 드리죠. 단 프티 푸르(petit four: 한입 디저트) 룸은 접근 금지입니다. 온도나 습도에 민감한 재료가 많아 페이스트리 직원들도 꼭 필요할 때만 들어가는 곳이니까요.”
“오이도.”
“그리고 재료를 살펴보는 건 좋지만, 용기에서 꺼내는 건 금지입니다. 그럴 일 없겠지만, 재료 수량도 모두 표시되어 있으니 혹여라도 다른 생각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이도.”
“추가 질문은 없습니까?”
“….”
실습생들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빛내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그러면, 오늘은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이도!”
“오이도!”
안토니오의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신호탄이라도 발사된 것처럼 실습생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파란 통에 남아 있는 재료 중에서 좋은 재료를 선점하기 위함이다.
“달리기는 금지입니다!”
“오이도!”
“오이도!”
워크인 냉장고의 입구는, 꽉꽉 막힌 출근길의 풍경과도 유사했다. 앞서 나가려는 자, 끼어들려는 자, 매너 없이 새치기했다고 소리를 지르는 자. 그야말로 난장판.
그 난장판을 지켜보는 한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뒤에서 안토니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크.”
“네.”
“혹시… 이 주방에 대해서 무언가 들은 게 있습니까?”
“아무것도 들은 건 없습니다.”
“….”
“혹시 제가 곤란한 질문을 한 겁니까?”
“… 아닙니다.”
안토니오는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동안 입을 달싹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안토니오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