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23)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23화(223/325)
223. 진상에 대처하는 법
‘내가 많이 무뎌진 모양이군.’
무티에르는 새삼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파리 제일의 요리사라는 명성에, 고정 고객이 주는 안락함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는데.’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상대는 교활했다.
이중으로 함정을 파놓은 것을 보면.
우선은 무티에르가 로스트를 구하지 못하게 막고. 당황한 무티에르가 편법을 써서 로스트를 구하면, 경찰을 데려와 범법 사실을 확인하고 무티에르를 현행범으로 만든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저 사람인가.’
경찰의 옆에는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고 귀족들이나 쓸법한 하얀 가발을 쓴 사내가 서 있었다.
아마도 저 사람이 이 함정을 파놓은 자.
그리고,
‘저 사람이 무슈 볼란드인가 보군.’
엄격한 인상의 경찰은 이 구역의 폴리스 코미세르, 무슈 볼란드일 터였다.
파리는 총 48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구역마다 담당 폴리스 코미세르가 있었다. 그들은 각종 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관이자, 서민들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해주는 판사이기도 했다. 길드 간의 분쟁은 그들의 관할이었다.
무슈 볼란드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법을 곧이곧대로 따라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평이 있지만, 나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적어도, 매수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법대로만 하면 승산은 있다.
“자네가 무티에르인가?”
“그렇습니다.”
“잠시 시간 좀 내어주겠나.”
“물론입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티에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작새처럼 화려한 남자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 드라 발리에르에서 작업실을 운영하는 트레퇴르, 장비에르입니다. 파리 제일의 요리사 중 한 분을 직접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격한 환영 인사군.”
“존경하는 분이니까요. 상황이 이래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장비에르가 고개를 들자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겼고, 가발에서 하얀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절로 눈살이 구겨지는 모습이었다.
최근 들어 부유한 요리사들이 가발을 애용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티에르의 눈에는 그런 행동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가발은 청결하지 않다. 수시로 가발 장인에게 보내 이를 제거하지만, 그럼에도 제거되지 않는 벌레들이 득실거렸다.
그뿐 아니라 가발에 바르는 하얀 밀 전분은 밀착력이 좋지 않아 수시로 떨어졌고, 저 곱슬곱슬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동물 기름은 불길에 취약했다.
‘그래, 요리할 때는 벗겠지.’
목숨이 아깝다면 말이다.
하지만 평소에 저런 진한 향수를 바르고 다니면 후각이 둔해질 텐데.
불현듯 몇 주 전, 동료 요리사들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말이야.
무티에르가 주방에 처음 섰을 때, 그의 나이 9살이었다. 그로부터 이미 40여 년이 흘렀고,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렸다.
무티에르가 처음 요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미식을 추구하는 자들은 귀족뿐이었다.
하지만 전대 국왕 루이 14세의 서거 이후, 모든 것이 급속도로 바뀌었다.
현 국왕인 루이 15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8년간의 섭정 기간 동안 프랑스의 정치 중심지는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옮겨왔다.
베르사유에 있던 귀족들은 파리에 집결했고, 시내에는 수많은 살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으며, 그 살롱에는 부르주아들과 학자들이 초청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미식은 귀족만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부유한 부르주아들은 귀족의 패션을 따라 하듯 식탁까지 따라 하기 시작했고, 연회 요리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야말로 연회 요리의 황금기.
연회 요리사들은 어마어마한 부를 모을 수 있게 되었고, 귀족 주방과 수도원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은 너도나도 파리에 작업실을 차리기 시작했다.
트레퇴르가 너무 많아지는 바람에, 한동안 연회 요리사들은 추가 견습생을 받으면 안 된다는 규제령이 내려질 정도였다.
시장이 활성화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에 대한 부작용도 있었다. 기본도 안 된 요리사들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
눈앞의 장비에르라는 남자가 어떤 부류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요리사라면 향수와 가발을 애용할 리 없으니 말이다.
무티에르는 장비에르를 무시하고 시선을 경찰에게로 돌렸다.
“무슨 일인지 아직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출처를 알 수 없는 고기를 사용한다는 제보가 있었네.”
“헛소문입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장비에르가 다시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슈 무티에르라면, 길드에서 여러 규정을 만드는 이유를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길드의 룰이 없으면, 무분별한 경쟁으로 인해 차마 입에 담지 못 하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실제로, 상한 고기를 구해와서 향신료를 떡칠하고 헐값에 판매한 사례도 있지 않았습니까. 대중의 건강을 위협하는 행동을 막고자 위대하신 국왕 전하께서는 로티세리 길드에만 로스트의 판매를 허가하신 거죠.”
“지금 나에게 로티세리 길드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인가.”
“물론 잘 알고 계시겠죠. 다만, 최근 들어 무슈 무티에르가 정체불명의 고기를 사용한다는 소문이 들리지 뭡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면 이는 중대한 사안이기에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장비에르라는 남자는, 단순한 길드 규정 위반을 ‘대중을 위협하고 국왕의 명을 거스르는 행위’로 포장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 포장이 경찰에게 먹혔다는 것이다.
“로스트를 확인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무티에르는 순순히 들고 있는 쟁반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갓 구운 양갈비 로스트가 그 어여쁜 자태를 드러냈다.
“좋은 로스트군요. 어디서 구한 로스트입니까.”
“내가 직접 만들었네.”
“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로티시에 길드 소속도 아닌 무슈 무티에르가, 국왕 전하의 명을 어기고 이 로스트를 직접 만드셨다고요?”
장비에르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경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로스트의 판매를 허락할 수 없네.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설명이 필요하니 내 사무실로 따라오겠나.”
무티에르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마르셀에게로 향했다.
‘정말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어찌 되었을지.’
마르셀 덕분에 미리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설마 상대가 함정을 파놓고 잠복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 이미 모든 대비는 마친 상태였다.
무티에르는 경찰을 보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로스트를 만든 건 맞지만, 이 양갈비는 고객이 직접 전달한 고기입니다. 이런 경우, 규정상으로 연회 요리사도 로스트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음, 그랬었나?”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하는 게 아니라 고객의 입에 들어갈 음식을 고객이 직접 제공하는 것이니까요. 적어도 ‘대중의 건강을 해치는 행위’는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당신의 행위는 마스터십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비에르가 다급한 목소리로 따지기 시작했다.
폴리스 코미세르는 거리의 판사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지금 길거리 법정이 열린 셈이다.
“국왕 전하께서는 ‘로스트를 판매할 권리’를 로티세리 마스터십이라는 형태로 허락해주셨습니다. 마스터십이 없는 자가 로스트를 판매하는 것은, 국왕 전하의 뜻에 거슬리는 행위이죠.”
“음, 그것도 그렇네.”
“하지만 저는 로스트를 판매한 게 아닙니다. 청구서를 보시면 아실 겁니다. 고객이 고기를 제공했고, 저는 그 고기를 조리하는 데 들어간 수고비만 청구했습니다. ‘로스트’라는 ‘제품’를 판매한 것이 아니라, 제 ‘요리 기술’만을 판매한 것입니다. 여기, 청구서를 확인해 보시면 제가 말한 그대로일 것입니다.”
“호오, 그렇군.”
청구서를 확인한 경찰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판결이 무티에르의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신호였다.
“제가 파리에서 요리를 한 지도 어느덧 40여 년입니다. 그 기간 내내, 저는 로스트가 필요할 때는 항상 로티세리를 이용해왔습니다. 제 납품처인 로티세리에서 바로 확인이 가능할 겁니다. 지금 와서 굳이 제가 법을 어길 이유가 없잖습니까. 제 명성에 흠집을 내면서까지 말입니다.”
무티에르는 원칙을 지키는 요리사였다.
40여 년 동안 쌓아온 신뢰와 명성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내가 이겼군.’
경찰의 표정을 보며 무티에르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장비에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런데, 무슈 무티에르의 뒤에 있는 사람들은 다 누구입니까?”
무티에르의 손발이 차게 식었다.
“직인이라고 하기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네요. 견습생입니까? 길드 규정상 견습생은 2명만 두어야 하는 걸 모르진 않으실 텐데요?”
최근 트레퇴르가 급증하며, 연회 요리사 견습생들에 대한 규제가 심해지고 있었다.
그건 무티에르의 동료들 얘기만 들어봐도 알 수 있었다. 정말 견습생을 두 명만 고용하고 있는지, 기습적으로 업장을 습격하며 확인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네 명이네요.”
“그건…”
무티에르가 해명을 하려 했지만, 경찰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저들에게 직접 물어보도록 하지. 진실이 하나뿐이라면, 모두의 말이 일치할 테니. 자네는 이름과 직책은 어떻게 되는가?”
경찰이 무티에르를 지나쳐 인력거 주위의 직원들에게 다가갔다.
“니콜라, 직인입니다.”
“자네는?”
“알랭, 견습생입니다.”
니콜라와 알랭은 머뭇거리면서도 마지못해 답을 했다.
이제 남은 인원은 둘.
“자네는?”
“파비앙입니다. 그.. 견습생 후보입니다.”
“후보?”
“직인으로 승격된 견습생을 대체한다고 뽑으셨는데…”
“그렇다면 자네는 견습생 후보인가 아니면 견습생인가.”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끝이군.’
이제 곧 견습생 고용 규정 위반으로 무티에르는 폴리스 코미세르의 사무실로 끌려가게 될 거다. 조사를 받는 동안에는 주방에 설 수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식사 시간에 맞춰 요리를 낼 수 없다.
이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단순히 의뢰인을 잃거나, 금전적 손해를 입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지난 40여 년간 지켜온 철칙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럴 바에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나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티에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네는 누군가?”
암흑 속에서 경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곧이어 마르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런데 마르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항상 총기 넘기는 말투 대신, 어딘가 어눌하면서도 경박한 말투였으니까.
“저요? 심부름꾼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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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답해야 하는 걸까?’
경찰이 일일이 견습생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사이, 한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무티에르는 견습생을 둘만 고용할 수 있었다.
첫날부터 그 말을 했었고, 원래라면 지금쯤 한길과 파비앙, 둘 중 한 명만을 남겼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이 터지면서 그 결정을 일주일 미루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
잘은 알 수 없지만, 장비에르라는 남자의 태도를 보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게 뻔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손님 집 앞에서.’
다른 그 무엇보다 이 사실이 거슬렸다.
현대로 치면, 진상 손님이 레스토랑 홀에 난입해서 경찰까지 출동한 상황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길이 골목식당을 운영한 시절부터 항상 지켜온 철칙이 있었다.
주방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손님이 그 사실을 알아차려서는 안 된다.
요리사는 오로지 접시 위에 올라간 요리로만 평가를 받아야 한다. 접시를 내기 전에 앞뒤로 불쾌한 상황이 발생하면, 맛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거슬리는 상황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어졌다. 최대한 빨리.
‘그러면 그 방법이 제일인가.’
한길의 머릿속에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방법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금 내키지 않는 방법이라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면 무티에르와 니콜라가 나를 이상하게 볼 텐데…’
모처럼 성실하고 열정적인 견습생의 이미지를 쌓아왔는데. 지금부터 할 행동은 그 이미지를 단번에 무너트릴 터였다.
하지만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이미 한길의 차례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자네는 누군가?”
“저요? 심부름꾼인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한길의 말에 장비에르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한길은 그런 장비에르를 똑바로 바라봤다.
“왜, 제가 심부름꾼이면 안 되는 겁니까?”
장비에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표정을 추스리고 사람 좋은 척하는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마스터에 대한 충성심은 알겠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자네 마스터가 국왕 전하의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느냐 마느냐를 보는 것 아닌가. 국가적인 사안이네.”
“그렇군요.”
“그래도 자네가 심부름꾼이라고 고집하겠나?”
“심부름꾼이어서 심부름꾼이라고 말하는 걸 어쩌라는 겁니까.”
한길의 답에 장비에르의 입술이 뒤틀렸다.
“이미 다 알고 있네. 자네는 지난주부터 인근 로티시에와 파티시에, 여관 주인들에게도 무티에르의 견습생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나! 증인이 이렇게 많은데 계속 우길 속셈인가!”
장비에르가 태도를 돌변해서 성을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난동을 부리는 진상 손님과 겹쳐 보였다.
그리고 진상을 물리치는 방법은 단 하나.
더 심한 진상이 되어야 한다.
한길이 아는 세계 최강의 진상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뻔뻔하게 나가! 내가 그렇다는데 지가 어쩔 건데?
‘후우…’
한길은 속으로 한숨을 삼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심부름꾼은 거짓말도 못 합니까?”
“…?”
“제가 ‘무티에르네서 왔습니다’하는데 다들 ‘새로운 견습생이군’ 하더군요. 그 상황에서 굳이 ‘아뇨, 견습생은 아니고 심부름꾼입니다’라고 해야 했던 겁니까? 그게 얼마나 비참한지 압니까?”
“….”
“솔직히 좋더군요. 견습생이라고 하니 다들 심부름꾼보다는 좋게 봐주고, 가끔 어여쁜 마드모아젤들이 미소도 지어주시고. 네, 그래서 거짓말 좀 했습니다. 그게 바쁘신 경찰 나리를 불러올 정도의 대죄입니까?”
한길이 억울하다는 눈으로 경찰을 바라보자, 경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게 보였다.
‘조금만 더…’
한길은 인력거를 니콜라에게로 넘기고 경찰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내밀었다. 이대로 포박해가라는 몸짓이었다.
“그게 죄라면 그냥 잡아가세요, 잡아가! 파리가 무서운 곳이라 듣긴 했지만, 견습생 시늉 좀 했다고 감옥까지 가는 곳인 줄은 몰랐네요.”
“….”
“이렇게 되면 제가 파리에 와서 했던 거짓말도 모두 자백해야 하는 겁니까? 한둘이 아니라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돈이 있는데도 없다고 여관비를 깎아달라고 했고, 술집에서 만난 사람한테 고향에 어여쁜 약혼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짓말도 했고, 길 가다가 동전을 주웠는데 아무한테 말하지 않고 꿀꺽한 적도 있었죠. 그리고 또…”
한길은 최대한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하찮은 거짓말을 일일이 나열했다.
한길이 빙의한 마르셀은, 이제 막 소년에서 벗어난 앳된 청년이었다.
한길은 지금 이 사태를, 길드 간 일어난 분쟁이 아닌, 젊은 청년의 허세 때문에 경찰이 출동한 황당한 사건으로 만들고 있었다.
“조사하려면 그냥 저를 잡아가세요! 여기서 마스터 시간을 더 빼앗다가는 저, 심부름꾼 자리에서도 잘립니다. 가시죠!”
“그럴 필요는 없네.”
경찰이 얼음장같은 싸늘한 시선으로 장비에르를 쏘아보았다.
“장비에르. 나는 이 구역 파리지앵들의 안전과 평화를 수호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있지. 하찮은 심부름꾼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닐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네.”
“아, 아니.. 무슈 볼란드! 이 자는 정말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무티에르가 견습생 규정을 위반한 게 확실합니다! 조금만 더 증거를…”
“증거요? 아! 그리고 보니 일주일 전에 술집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무티에르의 견습생이 되었다고 으스대긴 했었죠. 그건 사람들이 오해한 게 아니라 제 입으로 말하긴 했는데.. 뭐, 술이 죄지 뭡니까, 하하하. 그 사람들 이름을 기억 못 하겠는데 어쩝니까?”
“아니, 저딴 게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증거가…”
“그만하게!”
경찰의 목소리에는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장비에르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고, 그 사이 경찰은 무티에르에게로 다가갔다.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했네. 어서 볼일 보게.”
“무, 무슈 볼란드!”
장비에르가 애처롭게 외쳤지만, 한번 등을 돌린 경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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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마무리된 후.
무티에르 일행은 인력거를 끌고 호텔 주방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짐을 내리는 동안에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역시 실망했나?’
문제는 해결했지만, 이제는 그 후폭풍을 감당할 차례였다.
한길은 저들의 싸늘한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길 역시 스카피의 뻔뻔함과 억지와 진상 짓에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익숙해지면 미운 정이라도 생기지만, 처음부터 그 모습을 보면 불편하고 실망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리는 다 되었나.”
“네, 마스터.”
“그러면 니콜라와 마르셀을 남기고 모두 떠나도록.”
다른 견습생들과 물건 옮기는 것을 도와주던 하인들이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단 셋이 남게 되자,
“이 자식!”
갑자기 뒤에서 니콜라가 한길을 덮쳤다. 기쁜 듯이 껴안고 있지만, 결국 그게 목을 조를 듯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뭐야, 이 자식! 촌뜨기에 얼뜨기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약아빠졌잖아? 덕분에 살았다, 진짜! 우리 복덩이!!!!”
니콜라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재미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장난이 아닌데? 완전 마음에 드는데 이거? 안 그렇습니까, 마스터?”
당황하는 한길이 시선을 돌리자, 눈가가 촉촉한 무티에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현명한 아이군. 자네와도 같은 사람이 필요했네. 정말 믿음직스러워.”
무티에르는 한길의 한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벅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귓가에서 얄미운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내가 뭐라고 했나! 세상은 나 같은 인간을 필요로 한다지 않았나! 하하하!
잘 해결되었으니 좋은 일이지만,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한길의 말에 무티에르는 눈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다시금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빨리 시작해야지. 오늘은 내가 자네에게 요리를 가르쳐주기로 하지 않았나.”
가르쳐주기로 한 건 아니었다.
보조 역할을 해달라고 한 거지.
하지만 굳이 그 말을 고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