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30)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30화(230/325)
230. 세 가지 조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기시는군요.”
“서프라이즈는 미리 공개하면 김이 빠지니까요.”
뚜껑을 덮은 접시를 본 에티올 부인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뚜껑은 한길의 아이디어였다.
요리를 처음 봤을 때 의뢰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싶었으니까.
“처음으로 보여드릴 요리는 완두콩 수프입니다.”
그 말과 함께 한길은 조심스레 뚜껑을 들어 올렸다. 이동 중에 내용물이 흐트러지지 않았을지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한길이 세팅한 모습 그대로였다.
생동감 넘치는 연둣빛의 완두콩 수프.
그릇 위에 걸쳐진 반투명에 가까운 순무칩.
반들반들 윤이 나는 캐비어 열매.
“아!”
에티올 부인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얼굴에는 지금껏 유지한 단정한 표정 대신, 순수한 놀라움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이건… 완두콩… 어떻게… 이게… 수프?”
더듬거리는 말투가 왠지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한동안 고장 난 장난감처럼 문장 대신 단어만 나열하던 에티올 부인은, 갑자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몇 초 후, 다시 눈을 뜬 그녀는 정갈한 미소를 지으며 무티에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무슈 무티에르. 제가 원래 말을 이렇게 못하는 사람이 아닌데, 너무 놀라서 그만 언어를 모두 잊었지 뭐예요. 역시 파리 제일의 요리사라는 명성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군요.”
“만족스러우시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고민이 있어 이렇게 일찍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고민?”
무티에르가 추가 설명을 위한 운을 띄우자, 에티올 부인이 허공에 손을 들어올려 그를 저지 시켰다.
“죄송해요, 무슈. 자세한 대화는 시식을 마친 후에 해도 될까요? 아무 편견 없이 이 요리를 대하고 싶어서요.”
“물론입니다.”
그 말과 함께 에티올 부인이 시식을 시작했다.
시식한다고 해도, 실제로 맛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요리의 외관을 살피는 데에만 한참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수프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피고. 순무칩을 조심스레 건드렸다가 재빨리 손을 회수하는 걸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린아이 같네.’
반짝이는 눈으로 요리를 관찰하는 모습이, 처음으로 바깥세상 나들이를 나온 호기심 가득한 새끼고양이 같았다.
실제로도 에티올 부인은 젊었다.
이곳은 현대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하니 ‘부인’이라 불리고 있었지만, 외관상으로는 슬아와 비슷한 나이려나.
관찰을 마친 에티올 부인은 순무칩부터 들어 올렸다.
와자작!
순무칩을 한입 베어먹은 그녀는, 깨지는 소리에 많이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내 표정을 추스르며 열심히 입을 오물거렸지만, 수프를 한 스푼 홀짝인 후에는 다시 한번 눈이 동그래졌다.
‘마음에 드나 보네.’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입술에 묻은 순무칩의 흔적을 야금야금 핥으면서 열심히 수프를 홀짝거리는 그녀는,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입을 연 건 캐비어가 올라간 부분을 먹었을 때였다.
“어머! 과일인 줄 알았는데!”
“캐비어입니다.”
“네, 물론이죠. 그냥 예상을 못 해서… 아니, 자세한 얘기는 다 먹은 후에 하죠. ”
결국 에티올 부인은 완두콩 수프를 남김없이 깨끗하게 비웠다.
두 번째 요리에서도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먹기 아깝다는 듯, 이런저런 각도에서 요리를 살피고. 눈을 감으며 맛을 음미하고.
“하아…”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후에는 여운이 남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서는 어딘가 복잡한 표정으로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고 보니 무슈가 그런 말씀을 하셨죠.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시겠다고. 그게 무슨 뜻인가 했는데, 말씀 그대로네요.”
“그렇습니까.”
“엄청난 요리네요.”
“감사합니다.”
무티에르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항상 미간에 자리 잡은 주름이 활짝 펴져 10년은 젊어진 듯한 얼굴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저희는 이 요리를 하나씩 낼 예정입니다.”
“하나씩?”
“네, 손님의 앞에 하나씩, 개인 접시에 담아서 올릴 생각입니다.”
에티올 부인은 무티에르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한사람 앞에 한 그릇이 나가는 코스요리가 그만큼 생소했으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티올 부인을 향해, 무티에르가 치명타를 날리듯, 마지막 문장을 못 박았다.
“저희는 논란이야말로 최고의 소문이라 생각하거든요.”
그 말에 에티올 부인이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동그란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였고, 이따금 ‘흐윽’하며 흐느끼는 듯한 이상한 소음이 들려 왔다.
‘뭐지?’
의아하게 여긴 한길이 몸을 조금 굽히자, 푹 숙인 얼굴에 숨겨진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껏 휘어진 눈매. 잘근잘근 깨문 입술.
에티올 부인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눈가에 눈물까지 고여있었다.
“논란이라, 후훗. 생각지도 못했는데….”
“물론, 이 방식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조금 조절할 수도 있습니다. 적당히 신기한 요리를 한두 접시 정도만 올리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아뇨.”
에티올 부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논란은 죽이는 게 아니라 키우는 거죠. 이왕 할 거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해주세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단, 조건이 세 개 있어요.”
“조건?”
“별 건 아니랍니다. 적어도 무슈에게 그렇게 해가 되는 조건은 아닐 거에요.”
어느새 에티올 부인은 평소의 차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선 하나, 제가 제공하는 재료를 사용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재료라니…”
“제가 작은 정원과 온실을 가꾸고 있는데, 그곳에 있는 재료를 써주셨으면 해서요. 거창할 필요는 없고, 딱 이 정도 느낌으로만요.”
이 정도 느낌의 요리.
한길의 방식으로 플레이팅한 요리를 뜻했다.
무티에르의 시선이 접시를 수거하기 위해 에티올 부인 옆에 서 있는 한길에게로 향했다. 한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무티에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다행이군요. 그리고 두 번째. 무슈 무티에르께서 제 전속 요리사가 되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전속… 말입니까.”
“소문의 주인공이 되려면, 이 요리는 저만 만들 수 있어야 하니까요.”
무티에르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안 그래도 최대한 빨리 고정 고객을 확보하는 게 무티에르의 목적이었으니 기쁠 수밖에.
“앞으로 1년간, 다른 의뢰는 일절 받지 않고 오로지 저를 위한 요리만 해주셨으면 해요. 이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일주일에 세 번, 살롱을 운영할 계획이랍니다. 예산도 이번 의뢰와 비슷한 수준이니 다른 고객을 받을 필요성은 느끼지 않으실 거예요. 가능하실까요?”
“무,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 조건은, 무슈 무티에르뿐 아니라 무슈의 밑에 있는 직원들에게도 해당하는 조건입니다.”
순간 에티올 부인이 고개를 돌려 한길을 바라봤고, 눈이 마주쳐버렸다.
‘알아차린 건가?’
무티에르는 논란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이 플레이팅을 누가 담당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방금 한길과 몰래 신호를 주고받았지만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는데, 에티올 부인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알아차렸다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길이 처음부터 노린 것은, 그녀의 전속 요리사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번 의뢰에 3인분을 추가하고 싶어요. 손님이 조금 늘어날 것 같거든요.”
“그것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무티에르의 말에 에티올 부인은 화사한 미소로 답했다. 그녀는 즐거움을 도무지 감출 수 없는지,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논란이라… 재밌네요. 원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거든요.”
#
살롱까지 남은 기간은 사흘.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시식 다음 날, 한길은 니콜라와 함께 에티올 부인의 저택을 방문했고, 집사의 안내를 받아 정원과 온실을 둘러보았다. 에티올 부인이 내건 조건 중 하나인, 정원과 온실 재료를 이용한 요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아직 한겨울이라 정원에는 사철나무만이 녹색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온실 안은 달랐다. 화려한 색상을 자랑하는 이국적인 꽃, 열대지역에서 갖고 온 야자수까지 있어 온실보다는 식물원에 가까웠다.
“와, 별의별 게 다 있네요.”
“에티올 부인은 식물학에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이쪽은 신대륙에서 가져온 꽃들이고, 이쪽은 아시아에서 가져온 나무들이죠. 하지만 이국 재료는 식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아직 안전성이 증명되지 않아서, 요리 재료는 이쪽을 보시면 될 겁니다.”
집사가 안내한 곳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아직 한겨울이라 시장에 나온 채소는 양배추나 당근, 양파, 셀러리 등이 전부였는데. 이곳에는 파릇파릇한 채소가 가득했다.
한길은 사용 가능한 재료를 일일이 기록한 후, 작업실로 돌아가 회의를 열었다.
“마스터, 샐러드도 하나 올리면 어떨까요.”
“샐러드라…. 평소라면 나쁘지 않지만, 지금은 1인 1접시를 차리기로 하지 않았나. 샐러드 하나만 올리기에는 너무 초라하지 않을까 걱정인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뭐, 자네가 그렇다면 한번 만들어보도록.”
무티에르가 한길의 요청을 거절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길은 이 주방에서 가장 중요한 인력이었으니 말이다.
한길은 플레이팅과 관련된 장식과 요리만 담당하기로 했지만, 이번 살롱 요리의 핵심이 바로 플레이팅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실상 한길이 총기획을 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르셀, 이것도 한 번 담아보겠나.”
무티에르와 니콜라, 라올은 메뉴를 완성하면 한길에게로 해당 요리를 들고 왔다. 그러면 한길은 그 요리를 맛과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플레이팅했다.
“완성되었습니다. 모두 확인하시죠.”
한길이 최종 결과물을 선보이면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시식했다.
“어? 계란을 계란 껍데기 안에 담았네?”
“네.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살려보려고요. 의뢰인도 정원 재료를 사용해달라는 말씀을 하셨으니, 컨셉도 비슷한 것 같고요.”
“이건 수프야 소스야?”
“딱 그 중간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은데요.”
“이런 문양은 대체 어떻게 그린 거지?”
플레이팅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한길이 조리법을 손보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니콜라나 무티에르가 한길의 조리법을 수정할 때도 있었다.
“마르셀, 샐러드 드레싱은 햄을 사용해보지 않겠나. 지금 사용한 식초 드레싱은 산미가 너무 강해서 맛이 충돌하는 느낌인데, 충돌은 좋지 않지.”
“햄으로 드레싱을 만든다고요?”
“햄을 한번 디글레이징해서 사용하면 묵직한 베이스가 형성되어 안정적으로 맛을 잡아주지. 니콜라가 보여줄 걸세.”
‘또 하나 배워가네.’
무티에르의 조리법은 현대에서 사용하는 것과 사뭇 달랐다. 생소한 맛의 조합이 많았는데, 현대인의 입맛에 맞지 않은 것도 있는가 하면, 왜 이런 레시피가 사라진 걸까 의문이 들 정도로 신선하면서 맛있는 조합도 많았다.
한길은 가리지 않고 모든 레시피를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하지만 이번 경험에서 얻은 것은 레시피만이 아니었다.
‘플레이팅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항상 요리를 완성한 후에 플레이팅을 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플레이팅에서 시작하는 단계를 거쳐야 했다.
어떤 외관이 가장 눈에 띄는지를 고민하고, 그 외관에 맞는 재료와 조리법을 연구하는 것도 나름 흥미로웠다. 역순으로 작업하는 것만으로 평소와 전혀 다른 아이디어가 샘솟았고.
‘이것만 해도 온 보람이 있네.’
한길은 이번 스테이지에 진입한 이래 가장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직접 요리를 하는 데다가, 한길이 만든 요리를 일일이 첨삭해주는 스승도 있었으니까.
다만, 이런 식으로 여러 번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레시피를 다듬으니 하나의 요리를 만드는데에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살롱에는 9코스 메뉴를 올리기로 했는데, 사흘 안에 새로이 9개의 요리를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길뿐 아니라 주방 모두가 밤잠을 줄여가며 요리에 매진했고, 며칠 후, 모두의 눈가에 익숙한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눈가가 검지? 이거, 무슨 병 걸린 거 아냐?”
유난히 자신의 외모를 아끼는 니콜라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크 서클을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사라질 테니까.”
“넌 이게 뭔지 알아?”
“잠이 부족하면 생기는 겁니다.”
“잠이 부족하면? 그러면 너 때문에 생긴 거 아냐?”
“저 때문은 아니죠.”
“맞잖아? 네가 조금만 욕심을 덜 부렸어도 잠은 제대로 잤을 거 아냐.”
조금 뜨끔하긴 했다.
생각해보면 로마에서도, 영국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한길이 오기 전에는 모두가 다크 서클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이쯤 되면 다크 서클의 전도사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진짜 잠만 자면 다시 사라지는 거 맞지?”
“네.”
“그러면 내일만 지나면 되는 건가?”
에티올 부인의 의뢰는 고정의뢰였다. 일주일에 세 번 이런 코스 요리를 차려야 하니, 앞으로는 지금보다도 준비 기간이 짧을 거다.
평소의 니콜라라면 이런 일정 관리를 확실히 했겠지만, 피로에 지쳐서인지 완전히 놓치고 있었다.
하지만 한길은 굳이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니콜라가 침울해하면 작업 속도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의뢰를 전부 마치면 괜찮아질 겁니다.”
“정말?”
거짓말은 아니었다.
1년간의 고정 의뢰를 마친 후에는, 원 없이 잘 수 있을 테니까.
누가 그랬더라?
잠은 죽어서도 잘 수 있다고.
“네, 정말이요. 그러니까 빨리 소스나 만들어주세요.”
“벌써 내일이라니! 이걸 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생각만 해도 두근거린다니까!”
니콜라는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모른 채, 콧노래를 부르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살롱의 날이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