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37)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37화(237/325)
237. 물감과 붓
베르사유의 요리는 올드하다.
돌이켜 보면, 이번 스테이지에 진입할 때부터 그런 얘기를 듣긴 했다. 술집에서 만난 사기꾼도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요즘 누가 촌스럽게 베르사유에서 일하나? 미식의 중심은 파리지! 요리는 절대적으로 파리가 우수하다고!
이 시대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지금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파리는 유행의 도시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항상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유행을 선도하는 살로니에르와 귀족들은, 지금 누벨 퀴진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가볍고 섬세하며 심플한 요리를 으뜸으로 여겼다. 반면, 베르사유는 호화로운 요리를 고집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화려함을 자랑하는 요리를.
파리의 요리가 ‘아는 사람만 아는 명품’이라면, 베르사유의 요리는 명품 시그니처를 과할 정도로 온몸에 칭칭 감은… 말하자면, 카키의 패션과도 같은 요리였다.
‘대체 왜?’
그것이 의문이었다.
왜 베르사유는 트랜드를 거부하는 걸까?
그걸 알아야 앞으로 움직일 수 있다.
무조건 최신 트렌드를 내세운다고 통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건 카키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카키는 ‘아는 사람만 아는 명품’을 갖고 있어도, 그걸 입지 않았다. 모처럼 구매한 400만 원짜리 스웨터를 아무에게나 선물로 주며 처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해도, 본인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루이 15세의 미식 취향이 명품을 칭칭 휘감는 것이라면, 맞춰 줘야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화려함과 스케일로 압도하는 요리 역시 한길의 전공이었으니 말이다. 스카피와 아피키우스에게도 인정받았는데, 루이 15세쯤이야.
‘우선은 제대로 확인해야지.’
베르사유의 요리가 과거에 머무른 이유가 루이 15세의 취향 때문인지, 아니면 별도의 이유가 있는 건지. 확실히 알아낸 후에 노선을 정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한길이 다시 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제사상처럼 세팅된 테이블로.
전략을 짰으면 다음은 맛을 볼 차례.
한길은 주저 없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
그리고 다음 순간, 다시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니콜라가 한길의 옷깃을 붙잡고 강제로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야야야! 너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니콜라는 상당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뭘 하긴요. 먹으려는 거죠.”
“뭐? 저걸 먹는다고?”
니콜라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눈에는 요리만 보이고 다른 건 안 보이냐?”
“…?”
“주변을 조금 보라고!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저걸 먹는 사람이 있는지.”
“그래도 음식인데, 먹으라고 차린 것 아닐까요?”
“딱 봐도 저건 장식용이잖아? 먹으라고 차렸다면 저렇게 두진 않았겠지.”
맞는 말이긴 했다.
저 테이블은 손님들 손이 닿지 않는 무대 위에 세팅이 되어 있었으니까. 유리 진열장에 디스플레이된 음식 모형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저건 모형이 아니다.
모형이 아니면 먹을 수 있고, 한길은 맛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먹어보고 누가 뭐라고 하면 몰랐다고 하죠.”
“넌 왜 평소에는 얌전하다가 이럴 때만 막 나가냐?”
“니콜라는 평소에 대담하면서 왜 갑자기 소심해지는데요?”
“야, 됐고! 일단 한 바퀴 다 돌아보고 나서 다시 오자! 처음부터 저거에 손댔다가 쫓겨나면 어쩌려고 그래?”
“설마 쫓아내기까지 하겠어요?”
“아씨, 그냥 가자고!”
한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니콜라가 한길의 팔을 옭아매고 강제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
‘이건 그냥 뷔페 같네.’
두 번째 응접실에는 무대가 없었다.
그 대신, 취향에 맞는 요리를 골라 먹을 수 있는 뷔페가 세팅되어 있었다. 문제는,
“하나도 안 남았네.”
모든 접시가 텅텅 비어 있다는 것.
“뭐,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어쩔 수 없나?”
“나중에 다시 채워 넣겠죠?”
“그렇겠지?”
주위 사람들이 들고 있는 음식을 보니, 간단한 핑거푸드 위주의 메뉴였다.
‘하긴, 오늘은 디너 파티가 아니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식사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니다. 그래서 요리도 간단한 요깃거리가 되는 핑거푸드만 준비된 거고.
“여기도 나중에 다시 올까?”
니콜라는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한길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만요.”
오늘 중으로 베르사유 요리의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요리가 없어도 이 상차림에서 얻어갈 수 있는 단서가 있었다.
뷔페 테이블의 한 가운데에는 기다란 은쟁반이 있었고, 그 은쟁반 위에는 로마 신전처럼 생긴 하얀 조각상이 있었다.
‘이것도 비슷하네.’
설탕 반죽이나 아몬드 반죽으로 만든 새하얀 건축물 조각상이다. 200년 전, 영국의 햄프턴 궁전에서도 비슷한 장식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니콜라, 저건 뭐예요?”
“뭐가?”
“신전 앞에 알록달록한 거요.”
하얀 신전 앞에는 노란색, 핑크색, 연두색 가루로 이상한 문양이 그려 있었다. 양탄자에서 볼법한 특이한 문양이.
“정원이잖아? 건물이 있으면 정원이 있어야 하니까.”
“저게 정원이라고요?”
“그래, 파르테르잖아.”
“…. 아.”
파르테르(parterre)는 파리에서 유행하는 정원을 뜻했다. 도안에 따라 관목을 다듬어서 모양을 내는 정원. 현대의 미로 정원과 비슷하게 생긴 정원을 부르는 말이었다.
‘나름대로 업그레이드 된 건가?’
영국은 설탕 건물만 세웠었는데, 베르사유는 건물 앞에 화려한 색감의 정원까지 만들어줬으니까.
“저 정원은 뭐로 만든 거예요?”
“저거? 사블(sable)이라는 건데, 쉽게 말하면 설탕으로 만든 모래야. 설탕을 녹여서 색을 입히고, 다시 결정체로 굳힌 다음에 체에 내려서 모래처럼 만들거든. 초록색은 시금치로 물을 들인 건데.. 자, 잠깐! 야!”
니콜라가 갑자기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다. 설명하는 사이, 한길이 설탕 모래를 한 꼬집 집어서 입안에 넣었기 때문이다.
“별맛은 없네요.”
“야! 이걸 먹으면 어떻게 해?”
“설탕이라면서요?”
“그게 아니라! 딱 봐도 먹는 용도로 만든 게 아니잖아?”
니콜라는 펄쩍 뛰며 잔소리를 쏟아부었지만, 한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시금치 맛은 안 나네.’
맛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용도다. 하지만 이건 베르사유 요리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설탕 공예의 특징 아닐까. 현대에서도 설탕 공예는 맛보다 비주얼이 중요하니까.
‘다른 색 모래는 맛이 있으려나?’
노란색 모래를 향해 손을 내뻗는 순간,
휙!
니콜라가 엄청난 순발력을 발휘하며 공중에서 한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가자.”
그리고 한길은 그대로 연행되었다.
#
다음 응접실도 뷔페.
때마침 하인들이 새로운 요리를 가져와 세팅하는 중이었다.
“드디어 뭐 좀 먹을 수 있겠다, 안 그래?”
“그러게요. 음식 하나 먹기 정말 힘드네요.”
궁전에 입장한 지 어느덧 한 시간여가 지났지만, 눈으로 구경만 하고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요리가 세팅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길은 테이블 위 데코를 확인했다.
이번 컨셉은 꽃밭.
장미, 카네이션, 팬지 등의 꽃들이 색깔별로 준비되어 있었고, 화려한 꽃밭 한가운데에는 설탕으로 만든 원형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아직 겨울이라 이렇게 많은 꽃을, 그것도 종류별로 구해오는 건 힘들 텐데….
“니콜라, 이건 조화일까요?”
“아니, 이것도 설탕 장식이야.”
“이게요?”
“어, 파스티아주(pastillage)라고 부르는 건데, 반죽을 만들 때 조금 더… 야!”
니콜라가 손을 뻗었지만, 이미 한길이 꽃잎 하나를 뜯어서 입안에 넣은 후였다.
니콜라는 소리를 지르려다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서는 작게 속삭였다.
‘장식물 좀 그만 처먹어! 이거 하나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줄 알아?’
‘향이 특이하네요. 이건 무슨 향이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먹어보면 알죠.’
‘뭐?’
니콜라가 반응하기도 전에 한길은 꽃잎 하나를 더 뜯어서 내밀고 있었다.
‘아씨! 하지 말라고 했지!’
‘벌써 했는데요?’
‘이 미친 새끼. 너, 요리만 보면 눈 돌아가는 거 아냐?’
‘빨리 먹어요, 사람들 보기 전에.’
니콜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허겁지겁 꽃잎을 입안에 넣었다.
“오렌지 꽃 향이네. 오렌지 나무의 꽃이야.”
“시트러스 향보다는 꽃향기가 강하네요?”
“당연하지, 꽃이니까.”
“뭔가 향수 같기도 하고.”
“페이스트리에는 꽤 자주 쓰여. 요리에도 자주 쓰이고.”
스카피의 시대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스카피도 장미꽃이나 장미꽃을 우린 물을 자주 사용했으니까.
‘이것도 나름 재밌네.’
베르사유에는 과거의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과거와 똑같은 모습은 아니고, 조금씩 진화된 형태로. 틀린 그림 찾기처럼, 스카피의 시대와 달라진 부분을 찾아내는 게 나름 재미있었다.
“됐다!”
하인들이 세팅을 마치자마자, 니콜라는 안도하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여기 있는 건 마음껏 주워 먹어도 돼. 먹으라고 놔둔 거니까.”
한길은 기대를 가득 안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제야 드디어 베르사유의 요리를 맛보게 된거니까.
테이블 위에는 열댓 종류의 파이가 차려져 있었다. 평범하게 생긴 파이도 있는 반면, 신기하게 생긴 것도 있었다.
“이것도 파이예요?”
한길이 가리킨 것은 육각형 모양의 파이.
상당히 화려한 파이였는데, 파이보다는 밀가루로 만든 보석상자 같았다.
육각형 모양의 뚜껑에는 6개의 튤립이 세공되어 있었고, 모서리에는 로프 같은 장식이 있었으며, 상자의 측면은 꽈배기 문양이었으니까.
“이건 무슨 파이인데요?”
“아마 고기 파이일걸? 이런 견고한 크러스트는 대개 고기 파이거든. 내용물이 축축해서 이런 크러스트를 쓰는 거지.”
“크러스트도 먹나요?”
“당연하지. 그럼 안 먹고 버려?”
‘이건 다르네.’
이렇게 화려하진 않았지만, 영국에서도 유사한 고기 파이가 있었다. 코핀(coffin)이라고 불리는 파이였는데, 이름 그대로 밀가루 관 안에 고기를 넣어서 굽는 파이였다.
영국의 코핀은 크러스트를 먹지 않았다. 씹기 어려울 정도로 딱딱했으니까. 안에 담긴 고기 내용물만 먹고 버리거나, 간혹 재사용하기도 했다.
영국의 코핀 크러스트는 식용이 아니라 보관 용기 겸 오븐 용기였다. 하지만 베르사유의 코핀은, 크러스트를 먹을 수 있게 진화된 형태였다.
한길은 육각형 파이 한 조각을 들고 베어 물었다.
‘진짜 부서지네?’
견고하지만, 치아에 힘을 주면 뚝 하고 부러졌다. 쿠키와 비슷한 정도의 강도려나.
한길이 먹은 것은 소고기 파이.
종일 삶았는지, 흐드러지는 식감의 소고기가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거기에 와인 소스의 산미가 절묘하게 더해져서 입에 착 감겼다.
‘엄청 촉촉하네.’
씹을 때마다 육즙과 소스가 한가득 새어 나와 입안에 흥건하게 고였다. 그 육즙이 크러스트를 적시니, 쿠키를 수프에 찍어 먹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맛있네요?”
“왜 놀라는데?”
그야 한길은 고기 파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스카피의 시대에도 고기 파이는 있었지만, 현대인인 한길의 입맛에는 파이 안에 고기가 들어가는 게 영 어색했다.
그런데 지금의 고기 파이에는 그 어색함이 없었다.
‘왜?’
한입 더 먹은 후에야 한길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크러스트가 다르네요.”
일반적으로 파이 크러스트는 달거나 버터 향이 난다. 그런데 베르사유의 고기 파이 크러스트는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했다.
고기 전용 크러스트라고 해야 하나.
오히려 이 안에 과일을 담았다면 위화감을 느꼈을 거다.
“니콜라, 이게 무슨 크러스트인지 알아요?”
“글쎄? 고기 파이면 아마 라드를 쓰지 않았을까?”
라드(lard)라면 돼지 지방이다.
‘그런 건가.’
식용유를 두르고 구운 빈대떡과, 옛 방식대로 돼지기름을 두르고 구운 빈대떡은 맛이 다르다.
그런 차이였다.
디저트용 크러스트와 고기 파이용 크러스트의 차이는.
“이것도 나중에 한 번 만들어 보면 좋겠네요.”
“그러면 리프 라드를 구해와야 할걸?”
“리프 라드?”
“보통 고급 고기 파이는 리프 라드를 쓰거든. 돼지 신장 주변에 있는 지방인데 대망막이랑 비슷하게 생겼어.”
생소한 재료명에 한길의 눈이 빛났다.
대망막(caul)은 무티에르가 자주 사용하는 재료였다. 돼지의 위장 주위에 있는 지방인데, 그물처럼 생겼다.
기름기가 부족한 고기를 구울 때, 대망막으로 한 번 감싸고 구우면 고기가 한결 촉촉해진다. 게다가 베이컨 기름 같은 향이 은은하게 더해져 고소하기도 하고.
‘현대에서 구할 수 있으려나?’
대망막도, 리프 라드도. 현대에서 본 적은 없지만, 도축업자에게 연락하면 구할 수는 있을 거다. 그걸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려면 여러 절차가 있겠지만, 불가능은 아니다.
‘나중에 잊지 않고 최셰프한테 말해야겠네.’
한길은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파이를 종류별로 모두 맛보았다.
“니콜라, 파이마다 크러스트 맛이 다른 것 같지 않나요?”
“그럴 수도 있지. 돼지 지방을 쓰는 경우도 있고, 소 지방이나 오리 지방을 쓰는 경우도 있으니까.”
신기했다.
파이마다 맞춤형으로 크러스트를 만든다는 생각은 안 해봤으니까.
‘여기서도 얻어갈 게 생각보다 많겠는데?’
#
다음 방에는 디저트용 페이스트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디저트의 나라 프랑스답게, 다양한 페이스트리가 있었는데, 의외로 현대의 디저트와 생김새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렌지 껍질을 넣어서 구운 스콘.
마들렌 같은 폭신한 빵.
생크림이 가득 들어간 슈크림.
하나 같이 수준이 높았지만, 그중에서도 한길이 유독 마음에 들어 하는 메뉴가 있었다.
현대에서 ‘후렌치파이’라고 불리는 옛날 과자처럼 생긴 페이스트리. 크루아상처럼 겹겹이 층이 진 페이스트리빵 한가운데에 과일잼이 올려진 페이스트리였다.
”니콜라, 이 안에 들어간 필링(filling)도 페이스트리 요리사들이 만드는 걸까요?”
“그렇겠지?”
페이스트리도 맛있었지만, 그 안에 들어간 과일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맛이었다.
잘 구워진 사과.
오렌지 껍질이 쫀득하게 씹히는 오렌지 잼.
달달하면서도 쌉싸래한 뒷맛이 올라오는 브랜디에 절인 복숭아,
고운 질감의 살구 잼.
단순하게 과일 종류만 많은 게 아니라, 한 과일을 써도 그 안에서 여러 유형이 있었다.
예를 들면, 사과를 사용한 페이스트리가 무려 5종이 있었는데, 각기 맛이 달랐다. 사과 잼만 해도 버터처럼 매끄럽게 퍼지는 사과 잼. 시럽처럼 끈적이는 농도의 사과 잼. 사과를 블렌더에 갈아서 낸 것 같은 사과 잼….
덕분에 한길의 질문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니콜라, 이건 뭐예요?”
“컴포트(compote). 과일이랑 설탕을 넣고 살짝 삶아주거나 오븐에 넣고 구운 거.”
“이건요?”
“컨피츄어(confiture), 그 옆에는 마말라드 (marmalade).”
“어떻게 다른데요?”
“컨피츄어는 설탕을 같이 넣고 졸인 거고, 마말라드는 과일만 졸인 후에 설탕이랑 섞은 거.”
“이건요?”
“컨세르브(conserve). 마말라드를 다시 한번 졸여준 후에 설탕이랑 섞어.”
사용하는 재료는 사과랑 설탕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수많은 종류의 맛을 만들 수 있었다.
“설탕 넣는 순서만 달리한다고 맛이 이렇게 차이가 나요?”
“순서만 달리하는 건 아니고, 설탕도 다른 걸 쓰거든.”
여기도 리프 라드처럼 비밀 재료가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설탕이 캐러멜라이징 되는 단계가 총 13단계 있잖아? 제일 연한 게 1단계고, 완전 짙은 게 13단계고. 잘은 기억 안 나는데, 컨베르브는 9단계 설탕을 쓰고 마말라드는 11단계를 쓰고… 그런 식으로 다른 단계의 설탕을 써.”
설탕이 캐러멜라이징 되는 단계가 13개나 있다니.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한길에게 캐러멜라이징은 단 하나의 작업이었다. 설탕에 열을 가해서 갈색으로 갈변시키는 작업.
그런데 그 안에 13개의 세부 단계가 있었다. 그걸 모두 익히면, 훨씬 더 다양한 맛을 자아낼 수 있다.
‘이번 스테이지를 떠나기 전에 다 배워두고 가야겠네.’
처음 느꼈던, 베르사유 요리에 대한 실망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오히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익숙한 두근거림이다.
스카피로부터 재료의 다양성을 배울 때의 그 두근거림.
스카피는 맛이 미묘하게 다른 수많은 재료를 사용해서 다양성을 일궈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기술로 다양한 맛을 만들고 있었다.
말하자면, 스카피는 다양한 원재료를 사용했다. 팔레트 위에 수많은 물감을 준비하고, 그것을 모두 활용하여 입체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에 반해, 프랑스는 기술로 다양성을 추구했다. 물감 대신 붓질을 갈고 닦았고, 수많은 선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린다고 해야 하나.
앞으로 남은 기간, 베르사유에서 무엇을 배워야할지 선명하게 보여서 괜히 기분이 들떴다.
“그러면 빨리 다음 방으로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