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41)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41화(241/325)
241. 진도를 빼는 비법
퐁파두르에게 후작위가 내려진 다음 날,
조금 특이한 손님 둘이 그녀를 찾아왔다.
“앞으로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실 것 같아 왔습니다.”
“전하께서 긴히 부탁하셔서요.”
친절한 웃음을 짓는 남자는 곤토 후작(Marquis de Gontaut). 조금 엄격해 보이는 쪽은 베르니 신부(Abbe de Bernis)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루이 15세가 보낸 이들이었다.
“준비라면, 어떤 준비를 말씀하시는지요?”
“입궁식을 위한 준비입니다.”
입궁식.
그 단어에 퐁파두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그녀가 베르사유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베르사유에 입궁하는 이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 왕세자 저하께 인사를 올려야 합니다. 1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수 하나 없이 행동해야 하죠.”
“네, 물론이죠.”
“베르사유에 들어간 후에도, 항상 1만 쌍의 눈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셔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베르니 신부의 눈매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당신은 교육이 너무 덜 되었습니다.”
“네?”
퐁파두르는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귀족이나 다름없는 교육을 받아왔다. 심지어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고, 살롱을 운영하는 입장이다 보니 학계에서 대두되는 주요한 이슈들도 꿰뚫고 있었다.
교육이 덜 되었다는 말은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발끈하는 마음을 다스리며 입가에 차분한 미소를 그렸다.
“저도 어느 정도 교육은 받았답니다.”
“베르사유에 필요한 교육은 그런 게 아닙니다.”
베르니 신부가 쏘아붙이듯이 말하자, 곤토 후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러니까 신부님 말씀은… 베르사유 사람들은 베르사유를 ‘하나의 나라 (ce pays-ci)’라고 부릅니다. 걷는 법, 앉는 법, 예법, 심지어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죠. 타국에 간다는 생각으로, 전부 새로 배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걷는 법도 다르다고요?”
“네. 퐁파두르 후작은 너무 걷는 티가 납니다. 보폭을 조금 더 작게 하셔야 합니다. 드레스 밑에 바퀴가 달려있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여야 하죠.”
“….”
“앞으로 저희 둘이 베르사유에 필요한 예법을 가르쳐드릴 겁니다. 그리고 준비가 완료되면, 입궁식 날짜를 잡을 겁니다.”
준비가 완료되면 입궁한다.
그 말은, 준비가 되지 않으면 입궁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갈 뻔했지만, 퐁파두르는 의식적으로 이마에 힘을 주며 미소를 머금었다.
“저 때문에 두 분이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죠.”
“그런데, 일반적으로 베르사유의 예법을 익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까요?”
“빠른 경우는 최소 5년, 하지만 평생을 가도 익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죠.”
몇 년이나 기다릴 수는 없다.
지금 파리에 있는 모든 여인이, 루이의 옆자리를 노리고 있으니까. 시간이 길어지면, 모처럼 잡은 기회를 놓치고 만다.
퐁파두르는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저는 한 달 안에 해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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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과외 선생이 생긴 후로, 퐁파두르는 요리사들에게 한 시간마다 간식과 차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평소에 간식을 전혀 먹지 않았다. 즉, 간식은 휴식을 취하기 위한 핑계였다.
주방에 찾아온 하녀가 트레이 위에 세팅된 페이스트리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이건 너무 예쁜 디저트네요!”
“그래? 이번에는 내가 실력 좀 발휘해 봤지!”
“그런데 원래 페이스트리는 잘 안 만들잖아요? 무슨 심경의 변화에요?”
“우리 마르셀이 갑자기 디저트 쪽에 관심을 보여서 말이지. 하루에도 다섯 종류의 잼을 만드는데, 그걸 다 처리하려면 어쩔 수 없거든.”
니콜라가 하녀와 수다를 떠는 동안, 한길이 트레이 앞으로 다가갔다.
“오늘도 제가 갖고 갈까요?”
“하지만 제 일인데….”
“이번에도 디저트가 많이 남아서요. 에스텔이 한번 맛보고 시식 평을 남겨주는 게, 저한테는 더 도움이 되거든요.”
“정말 그래도 될까요?”
“네, 전 그쪽이 더 좋습니다.”
“역시 마르셀은 천사예요!”
“에스텔, 속지 말라고! 저 새끼 겉으로만 저러고 본성은…”
한길이 고개를 돌리자, 니콜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 편하게 드시면서 쉬고 계세요.”
한길은 하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준 후, 트레이를 들고 서재로 향했다.
똑똑!
“실례합니다.”
한길이 서재 문을 노크한 후 입장하자, 성직자 옷을 입은 신부가 눈살을 찌푸리며 퐁파두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저 하인의 행동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시겠습니까?”
“하인이 아니라 제 요리사에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흠… 글쎄요? 목소리가 너무 높았나요?”
베르니 신부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자, 곤토 후작이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저 요리사는 손가락 관절을 이용해서 노크했죠. 베르사유에서는 그렇게 소리를 내어 문을 두드리는 것을 엄청난 실례로 여깁니다. 제대로 예를 갖추려면, 손톱으로 문을 긁어야죠. 더불어, 손톱을 다듬을 때는 문 열기 전용으로 손톱 하나를 길게 기르시길 바랍니다.”
“네, 물론이죠.”
퐁파두르는 차분한 미소를 지은 후, 한길에게 다가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두 분도 힘드실 텐데, 목 좀 축이시고 계속하세요.”
“그건 나중입니다. 이번에는 상황 예시를 드려 보죠. 국왕 전하의 생신이라고 가정해봅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흠, 글쎄요? 우선 선물을 준비해 드려야겠죠?”
“틀렸습니다.”
“네?”
“베르사유에서는 선물을 평민들처럼 ‘카도(cadeau)’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프레젠트(present)’라고 부르죠.”
‘또 시작이네.’
한길은 신경질을 부리는 베르니 신부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동안 한길은 퐁파두르의 간식을 운반하면서 그녀의 예절 레슨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대개 베르니 신부가 채찍을 휘두르면, 곤토 후작은 당근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곤토 후작이 점잖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 휴식을 취해도 좋을 것 같군요. 날씨가 좋으니 정원 구경을 하고 싶은데, 다녀와도 좋겠습니까?”
“물론이죠.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주세요.”
“‘내 집’의 발음이 들렸습니다. 베르사유에서는 ‘셰 모아(chez moi)가 아니라 ’셰브 모아(chev moi)‘라고 해야 합니다.”
“자, 교육은 나중으로 하고 산책 한번 다녀오시죠, 신부님.”
곤토 후작은 마지막까지 잔소리하는 베르니 신부를 끌고 퇴장했다. 그러자,
“하아…”
퐁파두르가 들릴 듯 말 듯 한 한숨을 작게 내쉬며 의자 안에 허물어졌다.
“힘들어 보이시네요.”
“아니, 그렇진 않아요.”
‘아니긴.’
한길이 어깨너머 본 것만 해도, 베르사유의 예절 교육은 말도 안 되게 난도가 높았다.
베르사유는 언어부터가 달랐다. 마치 현대의 신조어처럼, 그들만이 사용하는 표현이 있었고, 그걸 자연스럽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야만인 취급한다고 했다.
그 외에도 이해할 수 없는 룰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한 예로, 각자의 신분에 따라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정해져 있었다. 왕족은 팔걸이가 있는 의자를 사용했고, 공작은 팔걸이가 없는 스툴을 사용했으며, 작위가 없는 사람들은 서 있어야 했다.
하지만 국왕이 자리에 없는 경우에는 작위가 없는 사람들도 의자에 앉을 수 있었고, 그럴 때 앉을 수 있는 의자의 종류가 또 달랐다.
인사법도 마찬가지.
고개를 숙여야 하는 상대가 있는가 하면, 무릎만 굽혀야 하는 상대, 어깨만 움직이는 상대도 있었다.
인사를 제대로 하려면, 상대의 출신과 가문을 알아야 했다. 몇백 년간 대를 이어온 대검귀족과, 최근 100년 이내에 귀족이 된 법복귀족을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었으니까.
즉, 베르사유를 드나드는 1만여 명의 귀족에 대한 인적사항도 외워야 한다는 걸 뜻했다.
한길이었다면, 당장 때려치웠을 거다.
“대단하시네요.”
“뭐가요?”
“그만두지 않고 계속 이걸 배우시는 게요.”
한길의 말에 퐁파두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나 위로해 주는 거 맞죠? 내가 그렇게 위태로워 보였나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항상 보여주던 여유롭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 대신, 근심이 엿보였으니까.
“그냥 조금 의외여서 한 말이었어요. 퐁파두르 후작은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다만, 저는 숨기는 데 능숙할 뿐이죠. 이제는 그것도 잘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먼산을 바라보았다.
“… 마르셀은 모를 거예요.”
“뭐를요?”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요. 마르셀은 천재잖아요?”
어딘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였다.
“저는 제가 천재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천재는 아니고 요리에 한해서요. 어떤 미션을 주어도 후다닥 해내잖아요? 그것도 남들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후다닥 해내는 건 아닌데요.”
“어땠든, 무엇이든지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해낸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백조 같은 존재예요. 겉으로 보기에는 우아하게 헤엄치는 것 같지만, 수면 밑으로는 필사적으로 발길질하고 있거든요.”
‘진짜 힘든가 보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도 술술 하는 걸 보니까. 어쩌면 슬슬 한계에 도달한 걸지도 모르겠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베르니 신부가 읊어대는 이상한 룰을 듣다 보면 한길 역시 정신병이 걸릴 것 같았으니까.
심지어 베르니의 태도는 시어머니와도 같았다. 하루에 5시간씩, 시어머니로부터 예절 교육을 받으면서, 그 앞에서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건 정신적으로도 힘들 터.
위로의 말을 해주려고 적당한 단어를 찾고 있던 그때, 퐁파두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입궁식에… 사람이 많겠죠?”
“그렇겠죠?”
“가면무도회보다 많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음, 하지만 가면무도회랑은 다르겠네요. 이번에는 시선을 분산시킬 요소 전혀 없이, 모든 사람이 저만 보고 있을 테니까요.”
그녀의 눈은 한길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창밖의 풍경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입궁식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퐁파두르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을.
평소에 너무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어 잊고 있었지만, 그녀의 나이는 올해로 겨우 스물다섯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실수 하나라도 하면, 다들 참 즐거워할 거예요, 안 그래요? 그리고 그 실수는 평생에 걸쳐 저를 따라다니는 오점이 되겠죠.”
“….”
“내가 마르셀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잊어주세요.”
퐁파두르는 다시 웃음 가면을 쓰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안쓰러워서, 무엇이든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해주고 싶어졌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번 요리를 낼 때마다 같은 심정이니까요.”
“네?”
“모든 요리사가 그럴 겁니다. 손님들은, 자신의 앞에 있는 단 한 접시로 그 요리사의 가치를 평가하니까요.”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러네요.”
“단 한 번의 실수로 저는 형편없는 요리사로 기억되겠죠. 아무리 평소에 실력을 갈고닦아도,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접시 하나하나로 평가를 받고,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극한의 긴장 상태에서, 매일 수백 접시를 요리해야 하는 거고요.”
지금까지 요리하면서, 단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접시를 낸 적이 없었다. 손님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고, 그 입가에 미소가 그려질 때까지 긴장의 끈을 풀 수도 없었고.
“아까 저는 천재라고 말씀하셨는데, 틀렸습니다. 저도 필사적으로 발길질을 하고 있으니까요.”
“마르셀이요?”
“아마 모든 천재가 그러지 않을까 해요.”
한길은 지금까지 자신이 만난 수많은 천재를 떠올려봤다.
아피키우스는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귀족처럼 보였지만, 매일 점심시간에 요리사들에게 요리 경쟁을 시키고 그것을 일일이 맛보았다.
로마 제국 전역에서 나는 귀한 재료를 알아보았고, 가끔 재료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출동하기도 했다. 좋은 새우를 확인하기 위해 배를 타고 아프리카까지 갔다는 일화도 기억난다.
스카피는 평소에 병적일 정도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기록했다.
특정 지역에서만 나는 재료, 특정 국가의 사람들이 먹는 음식, 조리법 등을 일일이 기록했고. 그걸 밤마다 다시 정리하면서 자신만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미켈란젤로 역시.
한길이 그를 만났을 때는 이미 유럽 최고의 예술가로 명성을 떨쳤을 때였지만, 그는 그 명성에 기대어 편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예순이 넘는 나이에도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밤을 새우면서 초콜릿 조각상과 얼음 조각상을 만들었으니까.
‘그 외에도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나열을 하다 보니, 뭔가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한길이 지금까지 만난 천재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노력한다는 것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뭐지?’
조금만 더 생각하면 잡힐 것 같았지만,
“마르셀?”
“아, 네.”
“갑자기 말을 하다가 멈춰서요.”
지금 당장은 절박한 눈빛을 한 퐁파두르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세한 것에 집착하지 마세요.”
“네?”
“아니, 세세한 것에도 집착하긴 해야지만, 그게 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흔히,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고 하잖아요.”
“그러다가 나무를 놓치면 큰일인걸요.”
“그게 아니에요. 여기가 숲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나무를 봐야 합니다.”
“음, 뭔가 어려운 말이네요.”
확실히.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이걸 설명하려니 어려운 감이 있었다. 조금 풀어서 말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퐁파두르 후작의 목표는 뭐죠?”
“베르사유에 가는 거죠.”
“왜요?”
“국왕 전하를 사랑하니까?”
“저한테 거짓말은 하지 마시죠.”
한길의 단호한 말에 퐁파두르가 순간 움찔거렸다. 그리고 곧 억울함을 호소하는 눈빛을 했다.
“진짠데….”
“당신은 전남편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이라도 돌아오라는 편지를 무시하고 있고요.”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걸요? 국왕 전하만 아니었다면, 아마 계속 사랑했을 테고요.”
“그게 진짜 사랑인가요?”
한길의 말에 퐁파두르가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남편과 저는 계약 관계나 다름이 없는걸요. 남편은 처음에 저랑 결혼하는 걸 꺼렸어요. 삼촌이 남편을 상속자로 만들어준다고 약속한 후에도 머뭇거렸고, 결국 삼촌이 다른 사촌들을 모두 상속자 명단에서 제외한 후에야 저를 받아주었는걸요.”
“… 그렇군요.”
“그렇게 계산적인 관계에서 시작되었지만, 저는 제 나름대로 남편을 잘 챙겨주었어요, 지금도 그이가 평생, 힘든 일 없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이것도 사랑의 한 종류 아닐까요?”
따지고들 생각은 없었다. 이 시대의 연애관도, 결혼관도 현대와 다를 테니까. 그리고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그런 입에 발린 소리 말고 진짜 목표를 말한 겁니다. 퐁파두르 후작에게 숲이 될만한 목표요.”
“음… 조금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것 정도?”
한길이 ‘또 무슨 소리 하냐’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해명하듯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제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저는 집안에만 있었거든요. 부모님이랑 남동생, 그리고 저. 딱 4명뿐인 세상이었어요. 밖에 나갈 일도 거의 없었으니까 정말 그게 제 세상의 전부였거든요. 그러다가 6살이 되던 해에 교육을 받기 위해 수녀원에 갔는데, 세상에, 사람이 서른 명이 넘게 있는 거예요!”
이 시대에는 아이들을 교육 하기 위해 인근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보낸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한길은 그걸 기숙학교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와, 세상은 정말 넓구나!’라고 생각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사람이 서른 명이 넘게 있다니!”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9살이 되던 해에 투르네엠 삼촌이 불러서 삼촌의 저택으로 오게 되었거든요. 그 후로 음악 선생님도 붙여주시고, 연기 선생님도 붙여주시고, 식물학도, 수학도, 역사도, 문학도. 원하면 무엇이든 선생님을 붙여주시는데, 이것도 신기한 거예요!”
“뭐가요?”
“세상은 제 생각보다 훨씬 넓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하던 사람들이 쓴 생각과 글을 제가 읽다니, 놀랍지 않아요?”
조금 놀랍긴 했다.
한길은 교과서로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결혼한 후에는 살롱에도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도 또 신기한 거예요! 제가 한 말을 듣고, 사람들이 움직여주거든요. 제가 볼테르의 시를 읽고 평을 하면, 그걸 듣고 고칠 때도 있고요. 제가 말한 대로요! 신기하지 않아요? 볼테르의 글은 앞으로 몇백 년 후에도 살아남을 테고, 제가 죽은 후에는 조금이나마 제 흔적이 남아있는 글을 누군가가 읽고 있는 거잖아요?”
그녀는 마치 소풍을 나온 어린아이처럼,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얘기가 조금 새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다시, 퐁파두르 후작의 목표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 내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그 말을 내뱉자마자 퐁파두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 이건 절대 비밀이에요!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왜요! 알죠, 마르셀?”
그리고 한길은 아까 자신이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이거구나.’
전혀 다른 분야이긴 했지만, 퐁파두르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었다.
프랑스에는 수많은 정부가 있었지만,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의 아이콘으로 아직도 이름이 거론되는 정부는 그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점에서 한길이 만나온 다른 천재들과 닮아 있었다.
― 내 이름에 걸맞은 만찬이 되어야지
― 나는 역사에 내 이름을 남길 거니까
― 내 명성에 흠집을 낼 수는 없지.
그들 모두, 당장 눈앞의 현실만 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질 흔적.
시공간을 초월하는 업적을 남기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나도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고 있었던 걸까?’
한길은 당장 만드는 접시에 집중하면서. 마음 한쪽으로는 언젠가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껏 만나온 인물들에 비교하면 나무에 불과했다. 아니, 나무는 아니고 정원정도 되려나.
”음, 이걸로는 부족할까요?“
스스로 한 말이 쑥스러웠는지, 퐁파두르는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아니, 충분합니다. 고마워요.“
”뭐가요?“
”그냥 조금 개운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마르셀이 왜 개운해요? 지금, 나 도와주려는 것 아니었어요?“
꽤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이걸 구체화하려면 아직 조금 더 묵혀둬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고마우니 저도 성심성의껏 도와드리죠.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단기간에 성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요?“
한길의 말에 퐁파두르가 눈을 반짝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길이 지금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을 타파할 방법이 보였으니까.
베르사유의 예절은 임의로 만든 수백, 수천 개의 규율이었다. 퐁파두르는 그것의 의미를 일일이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고, 그래서 진도가 느린 거다.
하지만 이건 이해할 필요가 없다.
무조건 외워야 한다.
무턱대고 외워야 한다.
그리고 한길은, 무턱대고 외우기에 특화된 한 나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였다.
”네, 보장해 드리죠. 하지만 그 대신, 제가 시키는 대로 꼭 하셔야 합니다.“
”물론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