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56)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56화(256/325)
256.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일류 요리사의 방식을 가르쳐주겠다.
절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말이었다.
한길은 반짝이는 눈으로 무티에르를 우러러보았다.
“일단은 퐁(fond)부터 만들도록 하지.”
“네, 마스터!”
무티에르의 요리는 퐁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주방에 새로 들어온 견습생에게도 퐁부터 가르치는 거고.
한길과 무티에르는 우선 미션 바구니 안의 재료를 모두 꺼내 주방의 작업대 위에 진열했다.
“흐음….”
시작부터 무티에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일반적으로 무티에르가 사용하는 퐁은 육수다. 소고기, 송아지 고기, 닭고기 등의 육류를 한번 시어링한 후, 각종 허브와 채소, 물을 넣고 삶아서 졸여낸다.
하지만 퐁파두르는 이번 살롱의 주제가 ‘천한 재료의 변신’이라고 했다.
육류는 쓸 수 없다.
해산물도 쓸 수 없다.
둘 다 이곳에서는 귀한 재료인 데다가, 애당초 미션 바구니에 들어 있는 재료가 아니었으니까.
“뼈를 쓰는 것도 반칙일까요?”
“질문해야 한다면, 문제의 여지가 있는 거겠지.”
“그건 그렇네요.”
평소라면 시장에 가서 부족한 재료를 사 오면 그만이지만, 지금은 그것도 할 수 없다. 첫 번째 단계부터 난관에 부딪힌 셈이다.
턱을 괴며 생각에 잠긴 무티에르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양파만 사용하도록 하지.”
“네, 마스터.”
“일단은 맛부터 확인하고.”
“네, 준비하겠습니다.”
한길은 재료 중 양파만을 골라내어 먹기 좋은 크기로 손질했다.
바구니 안에는 세 종류의 양파가 있었다.
노란 껍질의 양파, 납작하게 눌러놓은 모양의 양파, 그리고 적양파.
신경을 집중해서 먹어보니, 종류별로 맛의 차이가 있었다.
노란 껍질의 양파는 알싸한 향이 거의 없고 양파 특유의 오묘한 향이 가장 도드라졌다. 적양파는 눈물이 날 정도로 매웠지만, 단맛도 가장 강했다. 납작한 양파는 전혀 맵지 않고 부드러운 단맛이었다.
“노란 양파는 땀만 흘려주도록.”
“네, 마스터.”
한길은 양파를 잘게 다진 후, 팬에 버터를 두르고 저온에서 조리했다.
‘땀을 흘리게 한다(sweat).’
이는 캐러멜라이징을 하지 않고 수분만 제거하라는 의미다.
절대 양파가 갈색으로 변하면 안 된다.
갈색은 캐러멜라이징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니까.
완성된 양파는 투명한 기운이 감도는 흰색.
그 모습을 확인한 무티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지시를 내렸다.
“이건 캐러멜라이징하도록.”
“네, 마스터.”
이번에는 납작하게 눌린 모양의 양파를 다듬고 팬에 버터를 두른 후, 조금 더 오래 조리했다.
양파를 볶는 것과는 다르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약한 불. 이렇게 해서 정말 익는 걸까 의문이 들 정도의 저온에서, 참을성을 갖고 양파를 저어준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 양파의 색이 서서히 변한다.
약 40분 후.
그을린 자국 하나 없는 갈색의 양파가 완성되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무티에르가 다음 지시를 내렸다.
“적양파는 태우듯이 익히도록. 리크와 샬럿도 함께.”
“네, 마스터.”
태우듯이 익히라(char)는 건, 태우라는 뜻이 아니다. 강한 불에서, 맛깔난 그을림이 생기도록 불맛을 입히면서 구우라는 거다.
마지막 양파의 조리를 마치자,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냄비에 넣어서 기본 부용을 만들도록.”
“디글레이징은 무엇으로 할까요?”
“조리대에 꺼내놓았네.”
“네, 마스터.”
한길은 세 가지 방식으로 조리된 양파를 냄비에 넣고 약한 불에서 달달 볶아주었다.
그리고 냄비 바닥에 갈색 그을음이 생길 즈음, 무티에르가 준비한 화이트와인을 부어주고 주걱으로 바닥에 붙어 있는 갈색 풍미 덩어리를 모두 긁어냈다.
와인이 절반으로 졸아들 때까지 기다리던 그때, 무티에르가 차분한 음성으로 질문했다.
“왜 양파의 조리법을 달리한 지 알겠나?”
“네.”
“왜지?”
“양파도 한 가지 맛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무티에르는 세 종류의 양파가 가진 각기 다른 개성을 살려주고 있었다. 수분만 제거해서 양파 특유의 향만 남기고, 캐러멜라이징으로 단맛을 강조하고, 센 불로 구워서 불향을 입혀주면서.
그렇게 추가 설명을 덧붙이자, 무티에르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한길을 쳐다보았다.
“믿기지 않는군.”
“뭐가요?”
“그동안 수많은 견습생을 겪어봤지만, 하나를 알려주면 백을 알아내는 견습생은 자네가 처음이네. 무서운 재능이야.”
“과찬이십니다.”
“궁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길드의 마스터십을 받도록 도와주도록 하지. 이런 경우에는 예외도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아닙니다. 아직 갈 길이 먼 걸요.”
“조만간 도착할 것 같네만.”
무티에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길에게 스푼을 내밀었다.
“한번 맛보고 부족한 게 무엇인지 말해보게.”
“네, 마스터.”
진한 갈색을 띠는 퐁은 제법 맛있었다.
양파의 풍미가 녹아있고, 캐러멜라이징의 매혹적인 단맛, 강렬한 불맛, 와인의 은은한 산미까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으니까.
뛰어난 맛이다.
하지만…
혓바닥의 표면만 적시고 있었다.
“무게감이 부족하네요.”
육류가 주는 푸짐함과 든든함, 묵직함이 없었다.
“병아리콩을 불러두었네. 그걸 넣도록.”
“네, 마스터.”
고기 대신 병아리콩을 넣고 넉넉한 양의 물을 부어주면, 이제는 맛이 충분히 우러나도록 끓여줄 차례.
“4시간가량 끓이도록 하지. 20분 간격으로 손을 보게. 불 조절에 신경 쓰고.”
“네, 마스터.”
퐁을 만들 때는 물이 보글보글 끓어올라서는 안 된다. 그렇게 거친 방식은, 방망이로 재료를 마구 두드리며 맛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과격하게 닦달하면 재료는 마지못해 맛을 내어준다. 하지만 제대로 토라져서 불순물도 거침없이 뱉어낸다.
재료는 소중히 다뤄야 한다.
스스로 알아서 좋은 맛만 양보하도록.
인내심을 갖고 살살 달래가면서 조심스럽게 끓였지만, 시간이 지나니 거품이 생기기 시작했다.
열기 때문에 빠져나온 불순물이 표면에 떠오른 것. 그걸 일일이 걷어내야 잡맛이 없다.
한길은 4시간 동안 냄비의 옆을 지키며 수시로 거품을 걷어내 주었다. 불이 너무 약하지도, 너무 강하지도 않게 조절하면서.
하지만 무티에르는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부족하군. 무엇이 필요한지 알겠나?”
양파의 풍미와 콩의 든든함은 충분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감칠맛이 있으면 좋겠네요.”
“그래, 깊이가 더 필요하지.”
“깊이를 줄 재료가 있을까요?”
이곳에는 다시마가 없다.
버섯이 있으면 좋겠지만, 10점짜리 버섯은 다음다음 주에나 나온다고 했다.
무엇을 쓰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그때, 무티에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콤테(Compté) 치즈의 껍질이지.”
치즈도 감칠맛을 더해준다.
치즈를 그대로 사용하면 녹아내린 치즈가 채수에 섞여 지저분해지겠지만, 치즈 껍질은 다르다.
“이걸 넣고 30분만 더 끓이게. 너무 오래 끓이면 치즈 향이 과해지니 시간을 넘기지 않게 주의하고.”
“네, 마스터.”
치즈의 감칠맛이 더해진 후에야 채수는 완벽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양파의 달면서도 복잡한 풍미, 콩의 무게, 치즈의 감칠맛. 다양한 맛이 감지되었지만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었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따스함이 있었다.
채수를 맛본 무티에르는 시험하는 듯한 눈으로 한길을 바라보았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체에 내리겠습니다.”
무티에르의 모든 요리는 마무리 단계에서 체에 내렸다. 불순물을 모두 걷어내고, 최대한 정갈하면서도 순도 높은 맛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수를 다섯 번이나 체에 내렸는데도 원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탁하네.’
난잡하게 떠다니는 덩어리들은 제거했지만, 액체가 진흙탕처럼 탁했다. 아마 병아리콩의 단백질 성분 때문일 거다. 그뿐 아니라 버터에서 나온 기름기가 둥둥 떠다니기도 했고.
그 모습을 확인한 무티에르가 다음 지시를 내렸다.
“콩소메로 부탁하네. 계란 흰자, 리크, 파슬리를 사용하도록.”
“네, 마스터.”
체에 내리는 작업이 물리적으로 불순물을 걸러내는 과정이라면, 콩소메(consommé)는 화학적으로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한길은 계란 흰자에 다진 리크와 파슬리를 넣고 잘 섞어주었다. 그리고 마치 전을 부치듯이, 계란 반죽을 만들었다.
새로운 냄비의 밑바닥에 계란 흰자 반죽을 넣고, 그 위에 채수를 붓는다. 그리고 주걱으로 살살 저어가며 끓여주면, 맥주 거품 같은 진한 거품이 풍성하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것을 뗏목(raft)이라고 부른다.
계란 흰자로 만든 뗏목은, 채수 안에 녹아든 잡다한 단백질과 지방을 전부 빨아들이고 응고시킨다.
뗏목이 마르지 않게 수시로 적셔가며 한 시간을 더 끓여주고. 완성된 채수를 다시 체에 내리자,
‘…!’
숨이 멎을 정도로 맑고 아름다운 액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유리처럼 투명한 갈색 액체.
그 청아한 자태는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걸 기본 퐁으로 쓰도록 하지.”
“네, 마스터.”
“이것이 왜 일류 요리인지, 알겠나?”
“알 것 같습니다.”
무티에르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는 내내, 한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아니, 물감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삼류 요리사는 고기가 없으니까, 뼈가 없으니까, 양파밖에 없으니까 좋은 퐁은 만들 수 없다고 단언할 거다.
한 가지 색의 물감만 던져주면서 어떻게 멋진 그림을 그리냐고 투덜거릴 터였다.
하지만 일류 요리사는 한 가지 색의 물감만으로도 명화를 그릴 수 있다. 무티에르가 양파만으로 세 가지 색채를 만들어 음영을 주었듯이.
전원 요리는 재료의 선택권을 자연에 맡긴다. 제아무리 좋은 재료여도, 원하는 물감이 없을 확률이 높다. 매우 고운 색감의 물감은 있지만, 다양성은 부족하다.
하지만 일류 요리사는 제한된 재료로도 명화를 그려낼 수 있었다. 오로지 경지에 오른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퐁은 완료되었으니 다음 재료로 넘어가지.”
“네!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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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티에르가 다음으로 집어 든 재료는 하얀 아스파라거스였다. 평소에 먹는 녹색 아스파라거스와 달리, 색깔도 하얗고 굵기도 두어 배는 더 굵다.
정원사의 말에 의하면, 종이 다른 건 아니었다. 똑같은 아스파라거스 위에 흙과 천을 덮어 햇빛을 차단하면, 엽록소가 생기지 않아 하얀색이 된다.
맛도 물론 다르다,
풀 향이 전혀 없는, 훨씬 섬세한 맛이다.
“이 아스파라거스를 조리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알겠나?”
“두께가 문제네요.”
두께도 두께지만, 섬유질도 더 많았다.
일반 아스파라거스는 살짝 데치거나 구워주면, 아삭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하얀 아스파라거스는 겉과 속을 확실히 익히지 못하면 질겨서 씹지도 못할 터였다.
‘까다롭네.’
안 그래도 아스파라거스는 조리하기 까다로운 재료다. 기둥은 단단한 데에 비해, 가장 상단에 있는 끝부분은 연하기 때문이다.
기둥을 완전히 익히면, 끝부분은 조직감을 잃고 흐물거릴 터였다.
“브레이즈를 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퐁이 한 종류밖에 없으니 벌써 소모하기에는 아깝군.”
무티에르도 아직은 고민 중.
그때, 한길에게 번뜩하고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제가 조금 독특한 조리법을 알고 있는데, 한번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지?”
“아스파라거스를 세워서 조리하는 겁니다.”
“세워서?”
아스파라거스를 세로로 세운 후, 기둥만 물에 잠기게 삶는 방법이다. 그러면 물에 직접 잠긴 기둥은 빨리 익고, 위에 있는 끝부분은 수증기만으로 익혀서 조직감을 간직하게 된다.
설명을 들은 무티에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런 방법은 어디서 알아냈지?”
“책에서 읽었습니다.”
“어떤 책이지?”
“아피키우스라는 사람이 쓴 고대 로마 조리서의 번역본이었습니다.”
“호오, 신기하군.”
이 방식은 실제로 아피키우스가 개발한 조리법이었다. 발상을 조금만 달리해서 아스파라거스의 까다로움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한길도 꽤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물은 쓸 수 없네.”
“네, 알고 있습니다.”
물은 풍미를 흐리게 하니까.
무티에르의 주방에서는 퐁 이외에 물을 쓰지 않았다.
“버터를 준비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한길의 말에 무티에르가 다시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길이 새로운 냄비를 꺼내 들자, 그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아스파라거스를 세로로 익히려면,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일반 버터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타버릴 테고.
특별한 버터가 필요하다.
한길은 냄비에 적당한 크기로 썰어낸 버터를 넣고 약불에 올렸다.
저어주지도 않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자연스럽게 녹기를 기다릴 뿐.
버터는 녹으면 유고형분과 지방으로 분리된다. 버터가 빨리 타는 이유는, 이 유고형분이 빨리 타기 때문이다.
버터를 녹이고 체에 걸러내면, 쉽게 타는 유고형분을 제거하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버터기름만이 남게 된다.
이것이 정제 버터(clarified butter)다.
정제 버터는 발연점이 더 높아 장시간 조리에 더 적합하다.
한길이 버터를 준비하는 동안, 무티에르는 아스파라거스를 다듬고 한 뭉치로 묶어두었다. 원시 움막과 제법 유사한 모양으로.
이제부터는 냄비 안에 버터기름과 아스파라거스 움막을 넣고 약불에서 천천히 익힌다.
“수시로 버터를 끼얹어주게.”
“네, 마스터.”
버터는 물처럼 수증기가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아스파라거스의 끝부분을 수증기로 익히는 게 불가능하다.
손수 버터 목욕을 시켜주는 수밖에.
한길은 냄비 옆에 서서 국자로 바닥에 고인 버터를 아스파라거스 위에 끼얹어주었다.
처음에는 수시로 끼얹다가, 익는 정도를 봐가며 20분 간격으로 버터 목욕을 시켜주었다.
아스파라거스가 전부 익는 데에는 총 90분이 걸렸지만, 시간과 수고를 들인 보람이 있었다.
“좋군.”
“… 엄청나네요.”
하얀 아스파라거스는 흙내음이 없었다. 그 대신 단맛과 크리미함이 있었다. 온화한 아스파라거스 향이 버터와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미각을 촉촉하게 적셨다.
무티에르가 만든 소렐 소스와의 궁합은 황홀할 지경이었다. 소렐의 산뜻한 산미는 버터와 아스파라거스를 포근하게 품어주었으니까.
오랜 시간과 노동이 전혀 아깝지 않은 맛이었다.
“앞으로 네 개 남았네요.”
“그렇군.”
이번 살롱에는 총 10개의 요리가 나간다.
그중 5개는 감자 요리, 나머지 5개는 베르사유 작물을 활용한 요리다.
“다음은 무엇을 만들어보고 싶나?”
재료를 살피는 무티에르는, 유난히 활기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마스터.”
“그런가?”
무티에르가 순간 흠칫하더니, 향수에 젖은 눈으로 읊조리듯이 말했다.
“이 나이가 되면 어느새 자신만의 스타일이 정착하게 되지.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해도, 좀처럼 벗어나기가 힘드네. 그런데… 오랜만에 초심으로 돌아간 기분이군.”
“그런가요?”
“자네도 내 나이가 되면 알 걸세.”
무티에르는 쓴웃음을 짓더니, 잠시의 침묵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네는, 부모님이 살아계시는가?”
“어머니는 일찍이 여의었습니다. 아버지는… 잘 모르겠네요.”
“모른다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천애 고아로구먼.”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혹시… 양자로 들어갈 생각은 한 적이 있나?”
“네?”
갑작스러운 말에 한길이 눈을 크게 뜨자, 무티에르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크흠, 아닐세. 모든 것은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지. 일단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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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한길은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계시나요?”
“날짜?”
“마르셀이야 그렇다 치고 마스터까지!”
니콜라의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내일이 살롱 아닙니까! 오늘 중으로는 시식하고 컨펌을 받으셔야죠.”
그제야 한길과 무티에르는 서둘러 모든 메뉴를 준비하고 퐁파두르에게 선보였다.
모든 요리를 맛본 퐁파두르는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네요.”
“그뿐인가요?”
“원래 완벽하면 할 말이 없어요.”
베르사유의 10점짜리 재료.
일류 요리사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리 기술.
한길의 플레이팅까지.
트집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요리들이었다.
“수고 많으셨어요. 이대로 가죠.”
“네, 준비하겠습니다.”
“마르셀은 잠시만 남아줄래요?”
“왜요?”
“손님들 앞에서 요리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하니까요. 외워야 할 정보도 많을 테고.”
“그러면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니콜라와 무티에르가 퇴장하자, 퐁파두르는 책상에서 무언가를 들고 와서 한길에게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한번 열어봐요.”
그녀가 건네준 것은 종이였다.
편지인가 싶어서 펼쳐보니, 상단에 ‘Passeport’라고 적혀 있었다.
여권이다.
“타국에 가서 관리들이나 귀족에게 보여주면 여러 가지 대우를 받을 수 있대요. 원래는 귀족들에게만 주는 거지만, 힘 좀 써봤죠.”
설명만 들어보면, 여권보다는 신분 높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소개장에 가까웠다.
이것을 건네준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전, 퐁파두르는 한길에게 살롱을 성공리에 마치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었다. 한길은 이탈리아에 가고 싶다고 말했었고.
퐁파두르의 남동생인 모리니 후작이 이탈리아로 유학 갈 예정인데, 그 일행과 함께 가서 이탈리아의 요리를 보고 싶다고 했었다.
이런 요청을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마르셀의 몸을 남기기 싫어서.
이번 스테이지는 정규 스테이지가 아니다.
재진입이 가능할지 어떨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만약 한길이 돌아올 수 없다면…
마르셀의 빈 껍데기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한길이 아예 떠난다면, 요리는 니콜라와 무티에르가 알아서 맡을 거다. 퐁파두르도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갈 테고.
하지만 한길의 빈 껍데기가 남아 있다면, 그쪽에 의존할 위험성이 있었다. 그건 알지만…
“조금 이르지 않나요?”
“왜요?”
“소원은 살롱을 성공리에 마친 후에 들어준다고 하셨잖아요. 아직 살롱을 열지도 않았는데…”
“실패할 리 없으니까요.”
퐁파두르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상큼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탈리아에 가면 맛있는 거 많이 배워와야 해요!”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떠나기도 전에 여권부터 내밀고 계시는데요.”
“편하게 여행하라고 그런 거죠.”
“말릴 생각도 안 하시고.”
한길이 처음 말을 꺼냈을 때, 퐁파두르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참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말했었다. 서운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나름 많이 챙겨줬는데.’
그동안 스테이지에서 함께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한길은 그녀에게 유독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업무에 관련된 일에만 관여했지만. 퐁파두르에게는 예절 교육 과외 선생님과 이미지 관리 매니저까지 해주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너무나도 담백하게 이별을 고했다. 작정하고 서둘러 여권까지 준비하는 걸 보니, 떠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한길의 표정을 읽었는지, 퐁파두르가 못 말린다는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남아있어 달라고 부탁해도 듣지 않을 거잖아요? 마르셀 고집이 어디 보통 고집인가?”
“… 그건 그렇죠.”
“전 살면서 몇 가지 철칙이 있어요. 하나는 내 사람은 내가 먼저 챙기자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당한 대로 돌려주자는 거죠.”
“….”
“왜요?”
“저한테 대체 뭘 당했다는 겁니까.”
한길이 살짝 발끈하자, 퐁파두르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당한 대로 돌려주라는 건, 반대로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거예요.”
“… 그렇군요.”
갑자기 퐁파두르가 고개를 푹 숙이며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르셀에게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저도 마르셀을 위해 살아줄 수 없으니까.”
얼굴이 반쯤 가려져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입가에 진 우물이 왠지 서글퍼 보였다.
‘나름 배려한 건가?’
한길이 거절할 것을 알고, 곤란한 부탁은 애초에 안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저도 홀로서기를 해야죠.”
고개를 다시든 퐁파두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사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잔소리꾼이 사라지니 기쁜 마음도 조금은 있고요. 시어머니까지는 아니지만, 마르셀은 제 실제 남동생보다도 잔소리가 심하니까요.”
“그것참 죄송하게 되었네요.”
“농담이에요. 알죠?”
퐁파두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노을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 마지막까지, 잘 부탁해요.”
그렇게.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이번 스테이지의 마지막 퀘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