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70)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70화(270/325)
270. 수상한 내기
페르난도의 눈은, 세뱃돈을 받는 어린아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독수리를 연상하는 부리부리한 이목구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드디어 도롭을 보는 건가?”
“도롭은 없습니다.”
“왜지?”
“신선식품은 국제 택배로 보낼 수 없다고 해서요. 그 대신, 전에 말씀드린 나물은 있죠. 말린 나물뿐이지만요.”
“아쉽군.”
그건 한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상자를 여는 순간 아쉬움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애썼네.’
곤드레, 취나물, 고사리 등의 익숙한 나물은 물론. 산뽕잎, 부지깽이나물, 눈개승마 같은 비교적 생소한 나물까지.
지금 당장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나물이라는 나물은 전부 보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건 뭔가?”
“곰취라고 불리는 봄나물입니다.”
“곰취?”
“곰 발바닥 같이 생겨서 그렇게 불린다는 설도 있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물이라서 그렇게 불린다는 설도 있죠. 향이 참 독특한데, 춘곤증에 시달릴 때 입맛을 돋우기 좋습니다.”
페르난도는 나물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질문했고, 한길은 미리 암기해둔 각종 상식을 동원하여 그의 호기심을 충족 시켜 주었다.
나물 종류가 워낙 많아 질의응답에만 한참이 걸렸지만, 페르난도의 흥미는 사그라질 기색이 없었다.
“한국은 채소가 정말 다양하군.”
“채소가 아니라 나물이죠.”
“무슨 차이가 있지?”
“채소는 식용을 위해 수확하는 거고, 나물은 야생에서 채집하는 겁니다.”
“이게 전부 야생에서 채집한 건가!”
페르난도를 가장 흥분케 하는 키워드는 ‘야생’과 ‘채집’이었다.
‘그렇게 표현하니까 다르긴 하네.’
한길이 보기에도 ‘한국식 채소’보다는 ‘한국의 노지에서 수확한 야생 허브’라고 정의하는 편이 왠지 흥미가 돋았다.
이런 식의 포장은 중요하다.
그래서 퐁파두르 역시 살롱 요리에 여러 의미를 부여했던 거고.
페르난도는 갑자기 뒤를 휙 돌아보더니, 병사를 호령하는 장군과도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하비에르! 파코! 한국 나물을 생물로 구할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오이도.”
“오이도.”
몇 걸음 뒤에서 얼빠진 얼굴로 서 있던 하비에르와 파코가 간신히 답했다. 이윽고 창백한 얼굴의 하비에르가 한길에게로 다가왔다.
“행크, 내일까지 나물의 이름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서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한길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지만, 바로 옆에 서 있는 페르난도는 얼굴을 구겼다.
“취향 한번 괴상하군. 좋은 이름 놔두고, 왜 하필 행크라는 이름을 쓰는 거지?”
한길도 이 이름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인권을 주장할 분위기가 아니라 굳이 따지지 않았을 뿐이지.
“글쎄요. 부르기 쉬워서 그러는 것 아닐까요?”
“자네가 직접 만든 이름이 아니었나?”
“아닙니다.”
“그렇군.”
페르난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하비에르, 파코! 앞으로 한길의 이름은 제대로 부르도록. 다른 상임 직원들에게도 전달하고.”
“오이도.”
“오이도.”
이름을 되찾은 건 다행이지만…
‘갑자기 왜 이래?’
페르난도의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 역시 오늘이 되어서야 한길의 이름을 물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한길을 무시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굳이 이름을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또 멋대로 이름을 줄인 실습생이 있나?”
조금 곤란한 질문이 이어졌다.
이럴 때는…
적당히 말을 돌리는 게 좋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도 있으니까요. 그것보다, 나물은 몇 종류 준비해 드릴까요?”
“이대로 먹는 것 아닌가?”
“말린 나물이라 물에 불려준 후에 사용해야 합니다. 조금 질긴 종류는 삶아야 하고요.”
“가능하다면 전부 다 맛보고 싶군.”
“오이도.”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
마지막 질문을 한 이는, 페르난도가 아닌 하비에르였다.
“한 시간이면 될 겁니다. 줄기가 많은 나물은 더 오래 불려야 하니, 내일 보여드리는 게 좋을 것 같고요.”
“그러면 한 시간 후에 다시 와서 시식하도록 하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하비에르의 모습은, 유명인을 경호하는 보디가드와도 비슷했다.
‘역시 이렇게 나오네.’
이러면 곤란하다. 한길이 수고스럽게 나물을 구해온 건, 페르난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그와 연을 맺어두기 위해서도 아니었으니까.
한길은 전설이라고 불리는 셰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당장 맛보는 재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방면으로 대화를 나누고… 그 대화를 통해 더 불독의 성공 비결을 알아내서 앞으로 열릴 3호점에 적용하고 싶었다.
물론, 한길은 상임 직원들이 이렇게 행동할 것을 예상했다. 그에 대한 대책도 마련해두었고.
하지만 입을 채 열기도 전에, 바로 옆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네,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지.”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페르난도였다.
페르난도의 매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눈매가 한길에 고정해 있었다. 어딘가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지금 나한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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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는 평소에 말이 거의 없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시간이 아깝다는 태도였으니까.
그런데 단둘이 대화를 나눠보니, 의외로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
“창의력 방정식이라니, 나쁘지 않은 표현이었네. 내가 만든 이름은 사피엔스(Sapiens) 방법론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창의력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도구인데, 여러 분야가 겹치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고용하고 있지. 당장 여기에 상주하는 직원들만 해도 철학자, 심리학자, 지정학자, 건축가…”
페르난도는 한길이 질문할 틈조차 주지 않은 채 사피엔스 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뭔가 어렵네.’
솔직히 따라가기 벅찼다. 페르난도의 창의력 공식은, 단순 방정식이 아니었으니까.
굳이 말하면 미분 방정식에 가까우려나. 그 정체를 알아볼 수는 있지만, 직접 문제를 푸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이게 우리 효자 프로젝트지. 얼마 전에 구글에서도 이 주제로 강의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더군. 이걸로 창의력 컨설팅 서비스도 진행 중이지.”
“창의력 컨설팅이요?”
“고객 명단을 보면 자네도 꽤 놀랄걸? 돔페리뇽이나 HP, 카이사뱅크 같은 기업도 있으니까.”
“왜…”
“기업이 R&D에 투자하는 돈이 얼마인지 아나? 그런 거금을 투자하는데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다면? 사피엔스 방법론을 이용하면, 주요 변곡점을 찾아서 그들이 집중해야 하는 분야를 짚어줄 수 있지. 이는 곧 투자의 실패를 줄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언젠가 지나가면서 품었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문을 닫은 레스토랑이 어떻게 10년 동안 상임 직원들을 고용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비싼 장비를 마련할 수 있었는지…
더 불독의 주 고객은 일반 손님이 아니었다. 전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기업들이었지.
‘대단하네.’
페르난도는 요리에서만 최고정점에 오른 이가 아니었다. 사업수완도 상당히 좋았다.
“요리사가 IT 기업의 변곡점을 읽을 수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요리를 만들 때 필요한 창의력과 새로운 제품을 만들 때 필요한 창의력이 유사하다는 거네요. 디테일은 다를지 몰라도, 같은 과정과 단계를 거치는 거고요.”
“그런 셈이지. 제품뿐 아니라 금융기업의 투자, 심지어 스포츠에도 적용되고. 그라나다 CF의 코치가 사피엔스 방법론을 배워갔다면 믿겠나?”
“놀랍네요.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요.”
“당연하지, 내가 가장 처음 했으니까. 어떤가?”
“네?”
“인류의 창의력 과정을 맵핑하는 일인 만큼, 절대 한 사람이 완성할 수 없네. 나 같이 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내가 떠난 후, 바통을 이어갈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나?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적임자인 것 같네만.”
한길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안 그래도 페르난도의 지나친 호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지나치게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데에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고.
‘후계자를 찾는다고 했던가?’
아침에 실습생들에게서 들은 소문도 신경 쓰이던 참이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뜬금없는 타이밍에, 이렇게 돌직구로 말을 꺼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저 황당했다.
“저와 이제 막 만난 사이 아닙니까?”
“스타주를 들인 지는 이미 일주일이 지났지.”
“제 이름을 알게 된 건 한 시간 정도 되었고요.”
“이름은 중요치 않네. 자네가 적임자인 건 확실하니까.”
말이 안 통한다. 같은 언어로 대화하는데도 소통이 안 되는 듯한 묘한 느낌.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느낌을…
“걱정하지 말게. 전 세계 내로라하는 기업의 변곡점을 찾아내는데 몇억, 아니 몇십억씩 받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런 내가,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겠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어떤가? 받아들이겠나?”
“지금 당장 답을 해야 하나요?”
“고민할 필요가 있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다만, 정해진 답을 입 밖으로 꺼내기 곤란할 뿐이지.
‘기분 상하겠지?’
후계자 제의를 거절한다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을 거다. 그러면 한길을 멀리할 테고, 이곳에 온 가장 중요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일류 레스토랑의 비결을 알아내겠다는 목적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도 없는 후계자 오퍼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미뤄두었다가 나중에 거절할까?’
잠시 그런 생각도 했지만, 페르난도의 매서운 눈을 본 후로는 생각을 고쳤다. 이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여지를 주지 않는 게 좋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는 한 달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있고, 제가 책임져야 할 레스토랑 식구들도 있으니까요.”
“지금 무슨!”
비명에 가까운 외침은 하비에르의 것이었다. 하지만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린 하비에르와 달리, 페르난도는 웃고 있었다.
아마도 웃고 있는 것 같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딘가 꺼림칙한 웃음이었다.
“오너셰프였군. 좋은 자세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쳐내는 남자는 신뢰할 수 없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임감은 중요하네. 그래야 사람들이 따르니까. 따라오는 사람이 없으면, 리더가 아니라 혼자 달리는 미친놈이지.”
“명심하겠습니다.”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다. 분명 알아들은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저건 거절당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으니까.
“리더의 책임감에는 두 종류가 있지. 하나는 사람들이 잘 따라오나, 뒤를 돌아보며 확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따라오는 자들을 이끌 수 있게, 한발 앞서 달리는 것이지.”
“그렇네요.”
“지금 당장은 달리는 게 쉬워 보여도, 언젠가는 한계점이 올 걸세. 매 순간, 꾸준히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충고 감사합니다.”
“창의력에도 단계가 있지. 일반인들도 발휘하는 창의력이 있고, 특출난 사람들만이 발휘하는 창의력이 있고, 손에 꼽는 몇 명만이 구현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창의력이 있지.”
아니나 다를까.
페르난도는 포기를 몰랐다.
“미식 업계도 마찬가지.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은 많고, 그 레스토랑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창의적인 메뉴를 개발하고 있지만, 대개가 특출난 정도에 머무르고 있어.”
“….”
“반면, 전 세계가 열광하는 고차원적인 창의성을 보여주는 셰프들도 있지. 레드제피, 보투라, 아카츠… 선구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
“이곳에서 스타주 생활을 했군요.”
“그렇지. 수많은 스타주 중에서도, 더 불독의 정신을 계승한 이들이었네. 궁금하지 않나? 대체 그들이 무엇을 보았기에 그 단계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당연히 궁금했다.
자칫하면 ‘무엇이든 할 테니까 알려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하지만 한길은 입을 여는 대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통증 덕분에 간신히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안 궁금한가?”
“궁금하다고 하면 알려주실 겁니까?”
“물론이지.”
페르난도가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었다.
그제야 한길은 왜 페르난도의 웃음이 소름 끼치는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부리부리한 눈은 그대로다.
페르난도는 꺼림칙한 웃음을 유지한 채로,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펼쳤다.
“여기서 5년만 지낸다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알려주도록 하지.”
“…”
“어떤가?”
“막무가내이시군요.”
“그런 소리를 조금 듣긴 하지. 상임 직원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불도저거든.”
이제는 자신이 느끼는 거부감의 정체도 알 것 같았다.
‘닮았어.’
페르난도는 묘하게 스카피와 닮아 있었다. 스카피처럼 경박한 구석은 없었지만, 주위 사람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는 점에서.
‘겉모습만 보면 오히려 아피키우스 쪽인데…’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피키우스 역시 이와 비슷한 성향이 있었다.
빠른 결정을 내렸고, 어마어마한 추진력을 보여주어 한길을 놀라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만 사람이 진중하고 점잖은 성격이라 다르게 와닿았을 뿐이지.
‘천재는 다 똑같은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역사를 뒤바꿀 인물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령 세상이 자신을 막는다고 해도, 원하는 것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원동력 자체가 달랐다.
사람들은 자석에 끌리듯이, 그 힘에 매혹당해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한길은 역시 그런 천재들을 존경했지만···.
동시에, 불편하기도 했다.
본능적인 저항감이라고 해야 하나.
“어떤가? 내가 자네에게 세계 제일의 셰프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준다고 한다면?”
질문을 다시 들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남들이 마련해놓은 지름길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욕심이 없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패기까지 있어. 역시 그래야지.”
“사람 말을 전혀 안 들으시네요.”
“그런 소리도 자주 듣지.”
페르난도는 특유의 힘찬 몸놀림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파코! 하비에르! 오늘부로 한길은 내 전속 비서로 삼겠네. 자네들 부서에 필요한 인력은 메사 센트랄 실습생 중에서 다시 뽑도록. 그곳에도 인재가 없으면 대기자 명단에서 새로 실습생들을 불러와도 되고.”
“오이도.”
“오이도.”
지시를 마친 페르난도가 다시 한길을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자네는 내 비서네. 싫은가?”
“그렇진 않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말을 안 듣는다고 감금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잠시의 침묵 후, 페르난도가 말을 이어갔다.
“나와 내기하지 않겠나?”
“뜬금없군요.”
“자네가 이기면 더 불독의 가속화 지점들을 숨김없이 알려주도록 하지. 5년 동안 묶여 있어야 한다는 조건 없이, 자네가 떠나기 전날에 모든 질문에 답해주겠네.”
“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시 소름 끼치는 웃음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아야지.”
“거절합니다.”
“농담을 모르는 친구군.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람을 강제로 감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떠난다는데 내가 어찌 강제로 붙들고 있겠나.”
‘감금’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는 게 영 신경 쓰였다. 물론, 감금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감금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지만… 저 빈도수가 문제다.
“어떤가? 생각 있나?”
“내용도 모르는 내기에 응할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별건 아니야. 지금 여기 이 상자에 있는 재료로, 내가 인정하는 창의적인 메뉴를 만들면 되지. 성공한다면 더 불독이 더 불독이 된 이유, 페르난도가 페르난도가 된 이유를 알려주도록 하지.”
“거절합니다.”
“왜?”
“저는 방 안에 틀어박혀 레시피를 만들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닙니다. 그건 한국에 돌아가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한길은 더 불독이 돌아가는 과정과 그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온 것이다. 홀로 독방에서 요리만 하는 건, 이곳에 온 의도에 어긋난다.
“영업 전에는 그렇다는 말이고. 영업시간 중에는 내 비서이니만큼, 내 옆에서 필요한 것을 챙겨주어야겠지. 지휘자의 옆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네.”
순간 뒷목이 서늘해졌다. 아무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페르난도는 한길이 무엇을 원하는지 꿰뚫고 있었으니까.
“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네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못 듣는 거지. 어떤가? 자네에게 손해가 없는 내기인데.”
“그래서 더욱 수상한 겁니다. 이 내기에 응해서 당신이 얻는 건 뭐죠?”
페르난도는 다시금 활짝 웃었고, 한길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나는 자네 같은 부류를 잘 알고 있지. 손에 무언가를 넣을 뻔했는데 놓쳤다?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을걸?”
인정하기 싫지만, 맞는 소리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불독의 비결을 알아내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용납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되면 3년이 되었든, 5년이 되었든, 제 발로 돌아오게 되어 있지. 나는 기다리면 그만인 거고.”
“진짜 대단한 분이시네요.”
“자네도 마찬가지. 어떤가? 내기에 응할 텐가?”
페르난도는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절대 실패한 적 없는 자의 얼굴을.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해보니, 알 수 있었다. 페르난도의 명성에는 거짓이나 과장이 하나도 없었음을.
그는 이 업계의, 이 시대의 거인이었다. 그에 비하면 한길은 하찮은 일개 셰프였고.
이기면 원하는 걸 얻게 된다. 설령 진다고 해도 레스토랑에는 피해가 없다. 한길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심적 고통만이 있을 뿐.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이상하게 주눅은 들지 않았다.
한길 역시 지금까지 내기라면 져본 적은 없었으니까.
한길은 조용히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