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75)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75화(275/325)
275. 얼굴도장
주방을 빠져나온 한길은 곧장 팬트리로 향했다.
팬트리는 마른 재료를 보관하는 창고로, 지금 시간에는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팬트리 안에는 창문이 없다. 사람들 눈을 피해 행동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말이 된다.
한길이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준비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알레한드로를 무작정 찾아간다 해도, 상대해 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줄리의 지분을 물려받았다면 알레한드로는 더 불독의 공동 오너. 게다가 홀 매니저라는 직책까지 맡고 있었으니까. 일반 실습생이 편하게 다가가 말을 걸 대상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심지어 오프닝을 앞둔 가장 바쁜 시기에, 뜬금없이 실습생 한 명이 나타나서 시간을 잡아먹는다면? 한길이 그 입장이라 해도 달갑지 않을 거다.
그래서 적당한 용건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무사히 팬트리에 도착한 한길은, 아까 웨이트리스로부터 건네받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오늘 찾아올 손님들의 정보로, 각 손님당 2-3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이 양식에 맞춰 인쇄되어 있었다.
찌익!
한길은 서류 더미 중 한 장을 찢은 후, 찢어낸 종이를 여러 번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조금 불안한데?’
만에 하나 움직이다 주머니 속 내용물이 떨어지면 곤란해진다. 잠시 고민한 한길은, 결국 종이를 길쭉하게 접어서 신발 안에 넣어 깔창처럼 깔았다.
이 정도면 준비 완료.
한길은 서류 더미를 들고 레스토랑 홀로 향했다. 알레한드로를 만나기 위해.
#
“루이스! 여기 유리잔 손잡이에 물방울 자국이 있는데?”
“죄송합니다! 바로 다시 닦겠습니다!”
“여기 있는 잔들 전부 다 다시 닦아. 이번에는 손잡이까지 제대로 확인하면서.”
“오이도!”
예상대로 홀은 분주했다. 홀 매니저인 알레한드로는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꼼꼼하게 최종점검을 하고 있었고.
한길은 잠시 복도에서 대기하다가, 알레한드로가 홀 한쪽 구석에 있는 스탠딩 데스크로 향할 때가 되어서야 움직였다.
“실례합니다.”
한길의 목소리에 알레한드로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처음에는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한길을 알아본 후로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순식간에 펴졌다.
“아, 페르난도의 비서역을 맡으신 분이시군요. 무슨 일이시죠?”
“방금 이걸 받았는데 누락 된 부분이 있어 확인차 왔습니다.”
“누락이요? 그럴 리가 없는데…”
서류 뭉치를 확인한 알레한드로는, 사라진 부분을 발견하고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그러네요.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머리를 긁적인 것도 잠시. 알레한드로는 이내 고개를 털고 한길을 향해 미소지었다.
“실수가 있었군요. 바로 다시 인쇄해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어떻게 실수가 나왔는지 곱씹기보다는, 할 일을 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
알레한드로는 누락된 정보를 다시 출력한 후, 서류 더미를 처음부터 끝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살펴본 후에야 한길에게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문제없을 겁니다. 덕분에 큰 실수를 막았네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건 아니죠. 보통 이런 걸 받으면 대충 훑어보기 마련인데, 꼼꼼하게 살펴봐 주신 덕분에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알레한드로에게 있어서 이 레스토랑은 아버지의 유산. 그런 레스토랑이 10년 만에 다시 오픈하는 날인데… 하마터면 첫날부터 실수가 나올 뻔한 것을 한길이 막아준 셈이었다.
“오늘은 저에게 정말 중요한 날이거든요. 무슨 일이 있어도 완벽해야 하는 날인데.. 정말 고맙습니다.”
알레한드로는 눈꼬리를 내리며 다소 슬픈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길에게도 익숙한 표정이었다.
‘돌아가신 지 5년 정도 되었다고 했던가?’
부모의 죽음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잊기 힘들지만. 알레한드로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상처 위에 딱지조차 앉지 않은 상태였다.
줄리의 얘기는 섣불리 꺼내지 않는 편이 좋아 보였다. 한길 역시 저 시기에는 누군가 ‘어머니’라는 단어만 꺼내도 경계했었으니까.
‘오늘은 이쯤이 좋겠네.’
어차피 오늘의 목표는 얼굴도장을 찍어두는 것이었다. 한길 역시 페르난도의 인터뷰가 끝나기 전에 돌아가야 했고. 이 정도면 하루의 성과로 나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 알레한드로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안 했네요. 저는 홀 매니저인 알레한드로 솔리에르입니다.”
“이한길입니다.”
이 정도면 얼굴도장은 확실히 찍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인터뷰가 예상보다 길어진 덕분에 페르난도는 한길의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인터뷰를 마친 페르난도는 한길에게 다가와 타이머처럼 생긴 네모난 기기를 내밀었다.
“습도계네. 이걸 들고 홀이랑 테라스의 습도를 재고 오도록. 낮부터 날씨가 흐려서 신경이 쓰이는군.”
“오이도.”
한길이 시키는 대로 습도를 재고 돌아오자, 수치를 확인한 페르난도가 인상을 썼다. 그리고 큰소리로 한 사람을 호령했다.
“안토니오!”
“오이도!”
안토니오는 한길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만났던 상임 직원으로, 밑 작업과 실습생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습도가 높다.”
“오이도.”
그 한 마디로 안토니오는 페르난도의 뜻을 알아차렸다. 곧이어 실습생을 향해 외치는 안토니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빌, 동결건조 재료는 모두 프티 푸르 룸에 갖다넣도록.”
“오이도!”
프티 푸르 룸은 디저트용 냉장고로, 습도와 온도에 민감한 재료를 보관하는 데 사용된다.
“한길. 앞으로 매일, 오픈 전에 습도를 확인하고 나에게 알려주도록.”
“오이도.”
답을 하면서도 한길은 내심 놀랐다.
동결건조된 재료는 습도에 취약하다. 습도 40%를 넘어서면, 스펀지처럼 주변의 습기를 흡수해서 눅눅해진다.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주방에서 조리를 마치고 손님의 입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 짧은 시간 안에 눅눅해질 정도로 변하지는 않는다. 변화가 있어도 미미한 정도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습도가 높다는 이유로 동결건조 재료가 들어간 요리를 메뉴에서 제외했다.
‘단 1%의 타협도 할 수 없다는 건가?’
일류 셰프는 날씨 핑계를 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한길.”
“오이도.”
“지금부터 메뉴를 부를 테니 손님들의 알레르기 유무와 과거 메뉴 이력과 대조해보도록. 한 번이라도 이 메뉴를 먹었던 적이 있으면 알려주고.”
“오이도.”
“김 라비올리, 모조 땅콩, 올리브오일 칩, 카레 치킨, 아네모네와 거북손, 가스파초, 상하이 랍스터….”
페르난도는 무려 50개에 달하는 메뉴를 불렀고, 한길은 시키는 대로 확인작업을 진행했다.
‘대단하네.’
새삼 눈앞의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알레르기 확인은 여느 레스토랑에서도 하는 일이지만… 페르난도는 더 나아가 손님이 해당 메뉴를 먹은 적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 이유는 한길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손님이 이미 먹은 메뉴를 내지 않기 위해서.
이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은, 두 번 다시 같은 요리를 맛볼 수 없다. 단 한 번 맛본 요리를 기억 속에 각인한 채로 평생 살아가야 한다.
그건…
요리사의 입장에서는 꽤 설레는 일이었다.
‘이걸 하려면 100% 예약제를 해야겠네.’
더 불독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은 예약을 해야지만 입장 가능한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인지도가 부족한 한길이 이런 시스템을 도입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적어도 3호점에는…
“한길, 다 됐나?”
“오이도.”
한길은 방금 떠올린 아이디어를 끄적인 후, 공책을 닫았다.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시간 됐습니다.”
안토리오의 목소리에 벽면 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이 7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더 불독의 오픈 시간이다.
“모두 앞치마를 제대로 가다듬도록.”
지시에 따라 모든 요리사가 목에 걸치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 고이 접어서 허리에 묶었다. 새하얀 조리복 상의가 보이도록.
페르난도는 테이블 위에 놓아둔 작은 병을 들고 그 내용물을 마셨다. 그리고 잠시 후, 묵직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러면 쇼를 시작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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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정확히 7시 반부터 입장했다. 그들은 자리에 안내되기 전, 주방에 들러 페르난도와 인사를 나누었다.
“페르난도, 팬입니다! 돌아오셔서 정말 기뻐요!”
“악수 한번 해도 될까요?”
“사진도…!”
어제 영화 속에서 보았던 페르난도의 인기는 과장이 아니었다. 들어오는 손님마다 악수와 사인, 사진 요청은 기본이었으니까.
다른 점이 있다면, 손님들이 경외심을 갖고 페르난도를 대하고 있다는 점. 연예인을 만나는 것보다는, 마치 교황을 만나는 듯한 태도였다.
“크루시페라 셋.”
“… 오이도!”
“파르미지아노 마카롱 셋.”
“오, 오이도!”
손님이 떠나자마자 페르난도는 주문을 외쳤고, 잔뜩 긴장한 실습생들은 겨우 답했다.
실습생들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빳빳했다. 그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고.
‘하긴,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주방을 찍고 있었는데, 카메라를 의식한 탓에 굳어버린 것이었다. 그에 반해, 페르난도는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시작이 어떤 것 같나요?”
감독의 질문에 페르난도가 턱을 괴며 답했다.
“아직 삐거덕거리는군요. 어쩔 수 없죠, 10년 만의 오프닝이니까요. 앞으로 1주일 후면, 잘 기름칠한 기계와도 같이 부드러운 소리가 날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기가 무섭게 다음 손님이 들어왔다.
“페르난도!!”
이번 손님은 조금 달랐다. 페르난도를 보자마자 양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악수 대신 가벼운 포옹을 했으니까.
“호세! 오랜만이네, 이 친구.”
“하하하,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감독이 흥분을 간신히 가라앉힌 목소리로 손님에게 질문했다.
“스페인 왕립 미식 아카데미의 이사장, 호세 헤르난데즈 맞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더 불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인데, 혹시 인터뷰 가능할까요?”
“식사 후에요. 식사 전에 몰입이 깨지는 건 원치 않거든요.”
아무래도 유명인인 모양.
페르난도는 그런 유명인과 한참 동안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대화가 마무리될 때 즈음,
“잊을 뻔했군. 호세, 인사하게. 이쪽은 내 비서, 이한길. 한길, 이쪽은 들었겠지만, 스페인 왕립 미식 아카데미의 호세.”
“오호! 이 친군가?”
“그렇지. 어떤가?”
“딱 봐도 똘똘해 보이는군. 앞으로 잘 부탁하네.”
손님은 한길과 악수를 한 후, 한 손으로 어깨까지 두드린 후에 떠났다.
유명인사의 방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요리 서바이벌 프로에 심사위원으로 등장한 셰프, 영국 주간지에 칼럼을 개재하는 저명한 평론가, 미국 요리 채널의 사장, 요리책을 낼 정도로 미식에 관심이 많은 배우 등등.
한길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잔뜩 흥분한 카메라 감독과 입을 떡 벌리며 쳐다보는 실습생들을 보아하니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인사하게. 이쪽은 내 비서, 이한길.”
“오호! 이 친구가!”
페르난도는 유명인이 등장할 때마다 한길을 그들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얘기는 많이 들었네. 상당히 뛰어난 친구라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언젠가 조금 한가할 때 같이 얘기라도 나눠보면 좋을 것 같군.”
“언제든 환영입니다.”
뉘앙스로 보건대, 페르난도가 이들에게 한길에 대한 얘기를 한 모양.
복잡한 심경이었다.
미식계의 유명인사를 만나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무슨 꿍꿍이지?’
페르난도가 모두에게 한길의 얘기를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한길이 자신의 후계자라는 소문을 퍼트리고 기정사실로 만들려고 한다…고 하면 과대망상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한길만이 아닌 듯했다. 종일 한길을 무시하던 감독이, 느닷없이 페르난도에게 질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옆에 있는 이분은 누구시죠?”
페르난도는 갑자기 한길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서는,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이 친구요? 이 친구는 우리의, 더 불독의 미래죠.”
감독은 먹이를 찾은 사냥견처럼 눈을 빛냈다.
“오호! 요즘 페르난도와 더 불독 재단에 대한 소문이 많던데…. 혹시…?”
“노 코맨트입니다.”
‘확실하네.’
한길은 속으로 한숨을 삼킨 후, 자연스레 페르난도를 떨어트리고 감독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페르난도는 모든 젊은 요리사들이 이 업계를 이끌어갈 미래라고 말씀하시는 거니까요.”
“그런가요?”
“네. 저처럼 한 달 후에 떠나는 단기 실습생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계시죠.”
“아… 단기 실습생이군요.”
단기 실습생이라는 말에 감독의 눈에서 흥미가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카메라를 이끌고 주방의 아일랜드로 향했다.
“순발력이 좋군.”
돌아보니, 페르난도가 왜인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치적인 실력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이상한 장난 치지 마시고, 서비스에 집중하시죠.”
“하하하! 그것도 맞는 소리지. 그런데 자네…”
“네?”
“감독 앞에서는 빼면서, 정작 내 친구들한테 인사는 잘하던데?”
그야 이런 유명인사들과 얼굴도장을 찍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
물론,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립니다.”
“예를 갖추기 위해 그런 거다?”
“물론입니다.”
“크하하하!”
페르난도는 특유의 괴상한 웃음을 터트린 후,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만만치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