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85)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85화(285/325)
285. 이겼네
“왜 이리 빨리 왔나?”
파코는 한길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빨리 오면 안 되나요?”
“문자 보낸 지 2분도 안 지났는데? 뛰어온 건가?”
달려오긴 했다. 그래서 숨이 조금 차기도 했고.
한길은 파코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서는, 작업 테이블 위에 있는 상자로 다가갔다. 발신인 정보를 확인해 보니, 한국에서 최셰프가 보낸 택배였다.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자를 안고 떠날 준비를 하자, 파코가 한길을 가로막았다.
“와~ 이거 정 없는 인간이네. 그동안 나한테서 뜯어간 게 있는데, 이대로 먹튀 하시겠다?”
“제걸 들고 가는데 먹튀인가요?”
“나도 좀 보여주면 어디 덧나냐고.”
‘페르난도가 기다릴 텐데···’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눈앞의 파코를 보니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페르난도의 밈이 유행한 이후로, 파코의 음주가 평소보다 과해졌다. 지금도 술 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있었고.
파코만이 아니다.
페르난도의 신봉자인 하비에르는, 아예 걸어 다니는 시체였다.
실습생들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만에 하나, 페르난도의 명성에 흠집이 가면 더 불독에서의 실습생 경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막상 본인은 즐기고 있는데···.’
포토샵을 쓸 수 있냐고 묻던 페르난도를 떠올리니, ‘까짓것 더 기다리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페르난도보다, 우울해하는 파코에게 한순간의 즐거움이라도 선사하는 게 더 의미 있을 거다. 파코에게는 그동안 신세도 많이 졌으니까.
“보고 싶으세요?”
“당연하지. 당장 까봐.”
상자를 개봉하니, 얼마 안 있어 파코의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이건 뭔가?”
“조청이라는 겁니다. 엿기름을 농축시켰다고 보면 됩니다.”
“호오··· 이건?”
“고비 나물입니다. 울릉도라는 한국의 섬에서 나는 고사리나물인데, 소고기보다도 비싸죠.”
파코는 신이 난 얼굴로 한국에서 온 재료 하나하나를 살피며 질문했고, 한길은 할 수 있는 선에서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다.
식재료를 모두 걷어내자, 상자 안에 있던 또 다른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뭔가?”
“비밀병기요.”
이것은 최셰프가 가마솥 대신이라며 보내준 비밀병기였다. 한길이 앞으로 개발할 요리의 핵심에 있는 물건이기도 했고.
한길은 급한 손길로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후, 상자의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파코의 말대로. 다소 특이하게 생긴 기기였다.
도자기 솥과 찜통으로 구성된 본체.
뚜껑은 압력밥솥 뚜껑과도 유사했다.
“한국식 밥솥인가?”
“아뇨. 중탕기라는 겁니다.”
“이게 중탕기라고?”
중탕은 끓는 물 안에 그릇을 넣고 간접 열로 재료를 익히는 조리법이다.
예를 들면, 초콜릿을 녹일 때는 중탕을 한다. 직접적인 열을 가하면 초콜릿이 타기 때문에, 끓는 물 안에 스테인 볼을 넣고, 볼이 달궈지면 그 안에 초콜릿을 넣어서 간접 열로 녹여낸다.
크렘 브륄레나 커스터드 같은 섬세한 요리도 중탕 과정을 사용한다. 커다란 오븐 용기에 끓는 물을 채우고, 뜨거운 욕조 안에 그릇을 넣고 익히는 방식이다.
서양에서는 이런 조리 방식을 뱅 마리(bain marie) 혹은 더블 보일러(double boiler)라고 불렀다.
“뱅 마리인가?”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이건 한국의 가마솥 중탕기법을 적용해서 만든 기기거든요.”
“가마솥은 또 뭔데?”
“무쇠로 만든 한국의 전통 조리도구요.”
“그걸 쓰면 조금 다른가?”
“다르죠.”
한국의 가마솥 중탕기법은, 서양의 중탕과는 다르다. 기존의 중탕에 두 단계를 더 추가하니까.
첫 번째는 압력.
가마솥 뚜껑은 무쇠로 만들어져 있어 매우 무겁고, 그 무게가 수증기의 탈출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마솥 안은 내부 압력이 높고, 압력이 높으면 내부 온도도 높아져서 재료가 더 빨리 익는다.
두 번째는 대류 현상이다.
가마솥 안에 있는 공기는 계속 순환한다. 따뜻한 공기가 위로 떠 오르고, 차가운 공기가 아래로 가라앉는데. 아래로 가라앉은 차가운 공기가 데워지면서 다시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런 대류 현상 때문에 가마솥으로 만든 쌀밥은 밥알이 누워있지 않고 세로로 서게 되는 거다.
최셰프가 보낸 중탕기는 한국에서 개발한 가마솥 중탕기. 가마솥의 원리를 현대 기술로 구현해낸 기기였다. 즉, 기존의 중탕기에 압력을 더하고 대류 현상까지 유도한다. 게다가 시간까지 단축하고 있었다.
이 모든 설명을 들은 파코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전통 조리도구가 그런 것까지 한다고? 엄청난데? 맛은 많이 다른가?”
“보통 쌀밥과 가마솥 쌀밥은 맛이 다르죠.”
“쌀이 아니라 다른 재료를 넣으면?”
“몰라요.”
“어?”
“그건 이제부터 알아보려고요.”
가마솥 중탕기는 한길 역시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했다. 레스토랑을 운영한 이래 다양한 조리기기를 구입했지만, 대개가 양식 기기였으니까.
이 안에 돼지고기를 넣는다면? 아스파라거스를 넣는다면? 어떤 식으로 맛이 달라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두근.
그래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소복이 쌓인 눈에 첫 발자국을 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빨리 가서 실험을···.
“진짜 닮았다니까?”
파코의 말에 한길이 갑작스레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네 얼굴. 페르난도가 새로운 장난감을 찾았을 때랑 똑같은걸?”
솔직히 뜨끔하기는 했다.
지금 당장 달려가서 이 중탕기 안에 각종 재료를 집어넣고 그 결과물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분명···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와도 같은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태도는, 페르난도의 전매특허였고.
하지만 다음 순간, 한길은 작업실에서 밈을 검색하며 낄낄대는 페르난도를 떠올리며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전혀 안 닮았습니다.”
#
그로부터 며칠.
한길은 실험 삼매경에 빠졌다.
가장 먼저 중탕기에 넣은 재료는 콜리플라워였다.
콜리플라워는 자체적인 향은 강하지 않지만, 조리 방법에 따라서 맛이 많이 변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때마침 파코가 시식 후에 남은 콜리플라워를 많이 갖다주기도 했고.
도자기 내솥 안에 물을 채워 넣고, 찜통 안에 콜리플라워를 넣은 후 압력을 가하고 7시간 동안 조리했다. 그 결과,
“···!”
콜리플라워가 까맣게 변했다. 마늘로 흑마늘을 만들듯이, 콜리플라워로 흑콜리플라워를 만든 거다.
맛은 ‘원래 콜리플라워가 이런 맛이었나?’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맛이었다.
‘진짜 이걸 언어로 설명하기는 힘드네···.’
쌀밥도, 평소에는 별다른 맛이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끔 밥이 유난히 맛있는 식당에 가면 ‘쌀밥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있다.
딱 그런 맛이었다.
이상하게 여운이 남고, ‘콜리플라워가 원래 이렇게 맛있었나?’ 하게 되는 맛.
처음 접하는 새로운 맛이 아니라, 익숙한 맛이 생소하게 느껴지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맛이었다.
‘원액도 나오는구나.’
찜통 아래에는, 장시간 수증기로 익히는 동안 콜리플라워에서 나온 원액이 고여있었다.
마치 한약을 달인 것처럼 짙은 갈색의 원액이었는데, 그 안에서 깊은 감칠맛이 느껴졌다. 정성스레 재료를 달인 맛이었다.
찌거나 굽거나 삶는 게 아니라, 시간을 들여서 정성스레 우려낸 맛.
‘이걸로 소스를 만들어도 좋겠는데?’
이 원액을 사용해서 소스를 만들면, 훨씬 더 진하고 순수한 콜리플라워 향을 첨가할 수 있을 터였다.
가마솥 중탕기에서 나온 원액은, 라엘라가 만든 원액보다도 더 그윽한 풍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풍미 보존에 있어서, 수비드 기기와 원심분리기를 앞서는 것이었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질감도 신기해!’
오랜 조리 시간에도 불구하고, 콜리플라워는 그 형태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푼으로 압력을 주면, 크림처럼 뭉개졌다.
형체가 있는 크림이라고 해야 하나···. 마치 크림을 얼린 것처럼, 부드러움과 견고함을 동시에 간직하는 특이한 질감이었다.
‘이 정도면 프라이팬에 조리해도 견디겠는데? 오븐에 구워도 될 것 같고.’
조금 더 실험해봐야 알겠지만, 잘만 하면··· 겉은 바삭하고 내부는 크림 같은 특이한 식감의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거다.
이제까지 미식계에서 나오지 않은 식감과 맛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단해!’
이것은··· 신세계였다.
한길은 홀린 듯이, 닥치는 대로 모든 재료를 중탕기 안에 넣어보았다.
마늘을 넣으니, 마늘 모양의 크림이 만들어졌다. 마늘의 풍미는 가득한데 매운맛은 없고, 불맛이 없는데 마늘의 고소함은 가득했다.
수많은 마늘을 먹어봤지만, 이런 마늘은 처음이었다.
호기심에 화이트 초콜릿을 넣어보니, 다크 초콜릿처럼 새까맣게 변했다. 크림처럼 뭉개지면서도 캐러멜처럼 끈적이는, 독특한 캐러멜라이징으로 미각을 간질였다.
소고기를 넣어보니, 수비드 조리를 한 것과 비슷한 부드러운 질감이 나왔다. 하지만 육즙과 풍미가 더 도드라졌다.
“우와!”
절로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게 되었다.
가마솥 중탕기는 한국에서 가정용으로도 많이 판매되고, 일반인들도 사용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홍삼을 달이는 등, 기존의 요리에만 이 기기를 적용했다.
사용자 평을 검색해 보면, ‘편리해요!’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정도의 평만 있었고.
전통 조리법으로 전통 요리를 만들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데··· 전통 요리로부터 분리하니, 가마솥 중탕기는 정말 엄청난 물건이었다.
수비드에 버금가는 부드러운 식감과 촉촉함을 자랑했고, 약재를 달이듯 응축된 원액을 얻을 수 있었으며, 견고한 크림 같은 독특한 질감을 가능케 했으니까.
게다가, 재료의 겉에만 마이야르 반응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깊은 내부까지 마이야르 반응을 일으켰다.
그건 가마솥 중탕기에서 나온 마늘과 초콜릿의 단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부가 고르게 갈변했으니까.
“정말 대단하네.”
예로부터 한식은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있고 정성이 담긴 요리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지금만큼 그 사실이 크게 와닿은 적은 없었다.
가마솥 중탕법은 정말 대단한 조리법이었다. 현대 과학으로 보니, 그 대단함이 더 객관적으로 와닿았고.
이 조리법이 미식계에 알려진다면?
다른 사람의 객관적인 반응도 보고 싶어서 파코를 몰래 초청해 가마솥 중탕기에서 나온 마늘과 콜리플라워를 시식하게 했는데, 반응은 뜨거웠다.
“이, 이게 뭐야?”
“전에 보여드린 중탕기로 만든 거예요.”
“야···
너··· 너···!”
파코는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한길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예전에도 한번, 저런 이상한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다. 페르난도와 함께 사피엔스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를 나눴을 때였나···.
“진짜··· 한 달 만에 이걸 해냈다고?”
“어떤 것 같으세요?”
“어떠고 자시고. 야! 이건 미식계를 바꿀 대발견이라고!”
“그런가요?”
“모르겠냐? 이건 페르난도의 거품만큼이나! 아니, 수비드 만큼이나 엄청난 대발견이라고!”
파코의 목소리에는 경탄과 공포가 뒤섞여있는 듯했다. 심지어 몸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어떻게··· 이런···.”
“운이 좋았습니다.”
“이게 과연 운일까?”
파코는 이상할 정도로 멍한 눈빛으로 한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페르난도의 ‘거품’도 기존에 있는 사이펀을 ‘운 좋게’ 발견한 것이었지. 그런데 그게 과연 운이었을까?”
페르난도는 닥치는 대로 이 세상 모든 조리도구와 재료를 탐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발견한 조리법들은 운이 아니라··· 그 과정을 밟다 보면 당연히 얻게 되는 결과물에 가까웠다.
한길의 발견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발견한 건 운이 좋았지만··· 한길이 적용한 사고방식을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꼭 발견할 방법이었다. 빠르냐 느리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러네요, 완전 운은 아니네요.”
“넌 괴물이야.”
“그건 칭찬인가요?”
“그걸 굳이 말로 들어야겠냐?”
“이왕이면 말로 해주면 좋죠.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너··· 갈수록 능글맞아지는 거 아냐?”
한길은 조용히 웃음을 흘리며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서, 페르난도가 이걸 보면 뭐라고 할 것 같아요?”
“그것도 굳이 말로 들어야겠냐?”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페르난도와 수십 년간 함께한 파코의 반응이 저렇다면, 페르난도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일 터.
‘이겼네.’
이 정도면, 페르난도와의 내기는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남은 것은 이 기기를 사용해서 메뉴를 개발하는 것뿐.
가장 어려운 숙제는 마쳤고, 나머지는 시간만 들이면 된다. 하지만,
‘그게 문제네.’
아직 남아있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