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87)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87화(287/325)
287. 임시 공장
라엘라가 로그인한 사이트의 이름은 불독피디아. 사이트 이름으로 추측건대, 더 불독의 온라인 백과사전이다.
“이건 뭔데?”
“더 불독의 타이예(taller) 기록을 보관하는 곳이야.”
“타이예?”
“아, 타이예는 스페인어로 워크숍이라는 뜻인데··· 뭐, 페르난도가 바르셀로나에서 별도로 운영하는 작업실이야.”
일전에 알레한드로와 만날 때 그런 얘기를 듣긴 했다. 페르난도가 바르셀로나에서 요리 연구소 겸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타이예 일부는 지금 더 불독에도 와 있는데, 본 적 없어? 왜,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에 작업실이 하나 있잖아? 한 팀은 여기에 나와서 작업 중이거든.”
본 적 있다. 더 불독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상한 실험도구 같은 게 가득한 방을 발견했었으니까.
“어쨌든. 타이예에서는 재료가 각종 조리법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거든. 그리고 그 연구 결과를 이 웹사이트에 올려. 우리는 메뉴 개발을 할 때 가장 먼저 이걸 참고하고.”
불독피디아에서 ‘장미’를 검색해보니, 절로 의문이 해소되었다.
장미 꽃잎을 동결건조기에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식품 건조기에 넣으면, 수비드 기기에 넣으면, 굽거나 찌면 어떻게 되는지. 모든 정보가 사진과 함께 기록되어 있었으니까.
심지어 조리법별로 시간을 달리했을 때 나오는 결과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장미잎을 수비드 기기에서 2시간, 4시간, 6시간 조리했을 때 나타나는 변화에 대한 정보 같은 게.
[특이사항 항목]에는 장미잎을 찔 때는 1시간이 지나면 잎이 조직감을 잃는다거나, 100도에 가까운 열기에 노출되면 쓴맛이 올라온다 등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멜론과 함께 먹으면 맛이 상쇄된다는 사실도 여기에 적혀 있었고.‘이 작업을 다른 곳에 맡기는구나.’
처음에 요리 연구소 얘기를 들을 때는 단순하게 크리에이티브 파트와 동일한 업무를 하는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길의 상황에 비유하면, 중탕기 안에 각종 재료를 넣고 그 결과물을 확인하는 작업. 시간이 가장 많이 소요되는 그 과정을 외주로 돌린 셈이었다.
“타이예가 언제부터 운영되었지?”
“글쎄, 93년 아니면 95년?”
정말 말이 나오지 않았다.
페르난도는 무려 26년 이상을, 전 세계 모든 재료가 모든 조리법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니까.
더 불독은 빙하의 일각일 뿐이었다.
이 레스토랑은 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 더 불독을 지탱하는 훨씬 거대한 시스템이 있었기에, 이곳에서는 매일 창의 요리를 찍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역시 페르난도는 이 시대의 거장이었다.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이 망할 할배 같으니.’
페르난도가 이상할 정도로 한길과 내기에서 여유만만했던 이유 역시 알 수 있었다.
한 명의 개인이 움직여서는, 단기간 안에 고차원적인 창의 요리를 만들 수가 없다. 이런 거대한 시스템이 뒷받침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한 달 안에 혼자서 이 일을 해낸다?
불가능했다.
재능이나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고차원적 창의 요리는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품과 시간 단위가 전혀 달랐다.
‘뭐야, 이게.’
페르난도의 비결은 알아냈지만, 결국 한길 혼자서는 이 미션을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한 결과가 되었다.
한길에게는 타이예가 없었으니까.
“대단하지 않아?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다니, 역시 페르난도라고 해야 하나··· 실제로 크리에이티브 파트에 있다 보면,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확 와닿거든. 재료를 받자마자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아니까.”
“그러겠네.”
“하비에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진정한 창의성은 기계적인 노력에서 나온다’가 더 불독의 모토래. 뭔가 멋있지 않아?”
“그러네.”
“페르난도는 조금 더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예술가일 줄 알았는데, 그 누구보다 기본에 충실하더라니까? 야! 한길! 듣고 있어?”
한길이 계속 건성으로 답하자, 참다못한 라엘라가 결국 짜증을 냈다. 하지만 그녀의 신경질에도 한길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체념한 채 입을 열었다.
“이제 내 차례지? 사피엔스 프로젝트 관련해서 질문이 있는데···.”
“잠깐, 10분만 시간 좀 줄래? 생각을 조금 정리해야 해서.”
불가능하다고 해서 얌전히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시간은 아직 열흘이나 남아있었으니 말이다.
페르난도는 이 내기에서 이기면, 더 불독의 가속화 지점을 알려주겠다고 했었다. 더 불독에서 가장 중요한 성공비결을 직접 알려주겠다고.
한길은 이미 이곳의 시스템을 파악했고, 당장 훔칠 수 있는 요령이란 요령은 다 훔친 상황이었지만···.
그 페르난도다.
아직도 꿍쳐둔 비결이 수십 개 더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끝이 보이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그랬다가는 짜증이 나서 한동안은 잠도 못 잘 터였다.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 내기에 있어서만큼은.
— 셰프는 정석적인 방법이 안 되면 꼼수를 찾아서라도 하시잖아요.
언젠가 유셰프가 한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말대로. 페르난도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었다.
“야, 한길. 10분 다 됐어.”
“그래.”
“뭐야, 왜 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건데?”
라엘라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방금전까지 진지한 표정을 짓던 한길이 입꼬리를 올리며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심하셨네.’
페르난도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한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페르난도에게 더 불독과 타이예가 있다면, 한길에게는 <고르메 키친>이 있었다.
#
라엘라로부터 정보를 캐낸 대가로 기나긴 사피엔스 방법론 강의를 마친 후, 한길은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의 최셰프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 그러니까, 셰프 집에 중탕기를 세팅하고, 각종 재료를 넣어서 그 결과를 기록해달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페르난도가 시행착오 과정을 외주로 돌렸듯이, 한길은 그 과정을 한국에 맡길 생각이었다.
한국에는 인력도 있고, 중탕기가 배송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 이번에는 난이도가 낮네요. 중탕기는 몇 개를 구매할까요?
“100개요.”
— 방금 몇 개라고···?
“100개로 부탁드립니다.”
한길의 말에, 최셰프 옆에서 얌전히 듣기만 하던 유셰프가 돌연 끼어들었다.
— 셰프, 100개는 조금 너무 하지 않아요? 그건 못해요!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동시에는 절대! 무리에요!
“최셰프나 요리사들에게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세팅만 해주시고, 나머지는 알바를 구해주세요.”
— 알바?
“어차피 재료를 씻고 중탕기 안에 넣어서 버튼만 누르는 일입니다. 꺼낸 후에는 사진을 찍고 온도만 기록하면 돼요. 굳이 요리사를 필요로 하는 작업은 아니죠.”
중탕기는 사용이 쉬워서 약간의 지시가 있으면 일반인도 충분히 사용 가능했다. 이런 식으로, 한길은 한국에 임시 공장을 운영할 생각이었다.
— 그건 그렇지만···
“시급을 2배로 올려도 좋으니, 최대한 빨리, 정확하게 일할 사람으로 부탁드립니다. 이 비용은 제 사비로 지출하겠습니다.”
재료 하나를 중탕하는데 7시간.
24시간이면 최소 3번을 시도할 수 있다.
중탕기 100개를 돌리면, 하루에 300개의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셈이다.
한길은 페르난도처럼, 모든 재료의 모든 조리법을 알 필요는 없다. 가마솥 중탕기로만 제한하면, 1주일만으로도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을 터.
— 이쪽에서 그렇게 돌려봐야 뭐해요?
그런데 그 계획을 들은 유셰프는 여전히 인상을 풀지 않고 있었다.
— 어차피 셰프가 맛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한국으로 날아와서 맛보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유셰프에게 부탁하려고 합니다.”
— 네? 저요?
“네, 유셰프가 제 대리인이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대리인’이라는 말에 유셰프의 미간에 쭈글쭈글 박혀 있던 인상이 순식간에 활짝 펴졌다.
— 제가··· 대리인이요? 최선배님이 아니라 저요?
“네, 이건 유셰프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 제가, 그, 뭐를 해드리면 되는데요?
“저를 대신해서 중탕기 재료의 맛을 보고 기록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길은 유셰프의 미각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녀라면 맛에 대한 기록도 정확하게 해줄 터.
무엇보다···
두 사람은 미각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유셰프, 저와 블라인드 테이스팅한 걸 기억하십니까?”
— 물론이죠.
“그때 느꼈던 맛과 비교해서, 각 재료의 맛을 기록해주시면 됩니다.”
— ··· 아!!!
2호점이 운영되는 동안, 한길은 수시로 유셰프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진행했었다.
각자 안대를 끼고 시각을 차단한 상태로, 재료의 맛에만 집중하는 작업이다.
유셰프는 한길 만만찮게 예민한 미각을 갖고 있었고, 재료에 대한 기억력도 좋았다. 게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경험한 재료도 많았고.
이 일을 맡길 상대는 그녀밖에 없었다.
“방금 메일로 하나의 양식을 보내드렸습니다. 그걸 참고해서 결과를 작성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한길은 불독피디어에서 봤던 양식과 똑같은 양식을 작성해서 유셰프에게 보내두었다.
꽤 편리하고 보기 좋은 양식이었는데, 그대로 사용한다면 쓸데없는 시간 낭비 없이 필요한 정보만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페르난도의 양식을 훔친 셈이었지만, 죄책감은 없었다. 처음부터 불공정 내기를 진행한 건 페르난도 쪽이었으니까. 이 정도 편의는 봐줘야지.
100개의 중탕기를 7시간 간격으로 돌린다면, 하루에 300개의 데이터. 일주일이면 2,100개의 데이터다.
이 정도면 해볼 만했다.
열흘 안에 어떻게든···
—아, 셰프! 이걸 다음 미션으로 하면 어떨까요?
생각을 이어가던 도중, 유셰프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미션이요?”
— 왜, 요리사들 내부 경연대회 있잖아요.
그러고 보니. 한길은 유셰프에게 내부 경연대회를 진행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유셰프가 재료와 미션을 주면, 요리사들이 그에 맞게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서 선보이는 대회.
더 불독의 과정을 그대로 한국에서 시범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결과가 좋았다.
한길의 요리사들은 예상외로 뛰어난 요리를 만들어냈으니까.
다만 불만이 있다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사나흘이 소요된다는 점이었다.
이전에는 능력의 차이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더 불독의 타이예가 없으니, <고르메 키친>은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일일이 반복해야 했으니까.
한편, 유셰프는 본인의 아이디어가 상당히 마음에 드는 듯, 흥분한 목소리로 계속 떠들고 있었다.
— 요리사들한테 가마솥 중탕기를 활용한 메뉴를 미션으로 내면 어때요? 그러면 셰프도 참고할 무언가가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그것도 그렇네요. 최대한 겹치지 않게, 다양성 위주로 부탁드립니다.”
— 옛썰!
#
유셰프는 한길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토마토를 중탕기에서 4시간 돌렸을 때는 비프스테이크 토마토로 만들었던 발효 브루게스타 메뉴의 토마토 맛이 났고, 식감은 하얀 가지 오븐구이의 식감이었음.〕
유셰프의 맛 묘사는 생각 이상으로 구체적이었다.
덕분에 한길은 직접 맛보지 않아도, 중탕기에서 4시간 익힌 토마토의 맛과 식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데이터가, 매일 정확하게 300개나 도착했다.
내부 경연 대회의 성과도 좋았다.
유셰프는 요리사들에게 가마솥 중탕기를 활용한 메뉴를 만들라고 했고, 그 결과물에 대한 맛 묘사도 해주었다.
꽤 재밌는 요리가 많았고, 신기한 발견도 많았다. 예를 들면···
〔셀러리 껍질을 중탕기에 넣은 후 건조기에 건조하니까 바닐라 꼬투리와 똑같이 생겼음. 바닐라 꼬투리는 무진장 비싼 재료인데, 얼핏 보면 이 귀한 것을··· 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반전으로 셀러리 맛이 나서 재밌었음. 셀러리 맛은 떫은맛 하나 없고 식감은 예전에 3번째 완두콩 껍질 블라인드 테이스팅했을 때의 식감임.〕
이번에는 최셰프보다 유셰프에게 가는 업무 부담이 많아 걱정했는데, 유셰프는 여느 때보다 활기차 보였다.
— 셰프, 이거 완전 재밌는데요? 가마솥 중탕기 대박! 가만히 있다가 대~한민국! 하고 싶어진다니까요?
“그건 다행이네요. 유셰프한테 일이 너무 많이 가서 걱정했는데.”
— 이런 일이면 힘들지 않죠. 그리고 녀석들도 생각보다 잘해서 조금 놀랐고요. 뭐랄까··· 조금 나사 빠진 놈들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풀어놓는 상황에서 오히려 날아다니는 것 같다니까요?
다행히 요리사들도 이 경쟁을 즐기고 있었다. 어떤 분위기인지는, 단톡방만 봐도 알 수 있었고.
한길의 임시 공장은 예상보다 어마어마한 성과를 냈고, 덕분에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었다.
결국 일주일 후,
한길의 귀국을 사흘 앞둔 시점.
“페르난도.”
“왜?”
“저희가 했던 내기, 최종 평가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길은 페르난도에게 최종 평가를 부탁할 수 있게 되었다.
“벌써 마쳤다고?”
“네.”
“음, 그럼 내일 3시까지 준비하도록.”
“오이도.”
페르난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최종 평가를 위한 일정을 잡아주었다.
#
다음날 3시.
약속의 시간이다.
한길은 내기에 앞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정리했다.
‘절대 이겨야 해.’
이제는 정말로 더 불독을 떠날 때가 되었다.
이곳이 싫은 건 결코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페르난도는 정말 대단한 위인이었으니까.
아피키우스나 스카피와 닮은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게다가 퀘스트 속 천재들과 달리, 페르난도는 현대의 인물.
현대 과학의 시대에서 과거 천재들의 방식이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귀한 롤모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배움을 졸업하고, 자신의 레스토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배운 것을 직접 해보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했으니까.
“준비되었나?”
“네.”
“그러면 요리를 내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