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89)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89화(289/325)
289. 훔쳐 가라고 부른 건데
“반칙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한길이 태연한 표정으로 되묻자, 페르난도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자네 혼자 움직이지 않았을 텐데?”
“···.”
“한 달 안에 이런 요리를 한 개 만든다? 자네가 천재라면 그것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페르난도의 시선이 작업대 위에 있는 빈 접시로 향했다. 접시는 총 4개.
“이건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지.”
‘역시 들켰네.’
한길이 만든 요리는 들어가는 시간 단위가 달랐다. 재능이나 노력을 떠나서, 혼자서 완성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페르난도 정도 되는 인물이 그걸 모를 리 없었고.
하지만 한길은 당황하는 대신, 작게 웃음을 흘렸다.
좋은 조짐이다.
페르난도는 지금 요리가 아닌, 절차를 문제 삼고 있었으니까.
꼬투리를 잡을 게 절차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바꿔 말하면, 이 요리는 다른 모든 면에서 합격점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것이 마지막 관문.
절차상의 문제만 넘기면, 내기는 한길의 승리로 끝난다.
“맞습니다. 중탕기의 효능을 확인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순순히 인정하는군.”
“사실이니까요.”
한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더없이 당당한 태도로 반문했다.
“그런데 그게 왜 반칙이죠?”
“···?”
“페르난도와 했던 내기는 한국의 식재료를 이용해서 고차원적인 창의 요리를 만들 것. 그 어디에도 저 혼자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그걸 명확하게 주지시키고 그다음은···
“이게 페르난도가 원하던 것 아니었나요?”
“내가?”
“페르난도가 왜 이런 내기를 제안했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거든요. 페르난도의 방식을 공부하고 그 안에서 해결법을 찾으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호오, 나에게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크리에이티브 파트의 과정을 분석했죠.”
페르난도는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언짢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실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페르난도가 찾는 메뉴는 노력만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보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만들 수 있죠. 미숙하지만 저도 같은 절차를 도입해서 시도해봤고, 그 결과 이런 요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
“전부 페르난도 덕분입니다. 페르난도가 미리 방법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저도 해내지 못했을 테니까요.”
“크하하하!”
페르난도가 돌연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저래서 숨을 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요란한 웃음을.
“전부 내 탓으로 돌리는군.”
“페르난도의 공으로 돌리는 거죠.”
“자네가 반칙했다면, 그 반칙을 알려준 사람은 나라는 건가?”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페르난도가 만든 체계적인 시스템에 감탄한 나머지, 그대로 모방했다고 한 거죠.”
“갈수록 능청스러워지는군.”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크하하하!”
이번에는 페르난도가 배를 부여잡고 허리를 아예 반으로 접으며 웃기 시작했다.
‘대단하네.’
이런 부분은 정말 감탄스러웠다.
페르난도는 항상 모든 순간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본인이 패배하는 순간조차 온몸으로 즐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오래 걸려.’
시계를 확인한 한길이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기의 결과는 어떻게 되죠?”
“하하하! 자네가 이겼네. 이건 뭐, 여지도 없이 나의 완패 아닌가.”
“그러면 약속대로···”
“더 불독의 가속화 지점? 알려주도록 하지. 단, 자네가 떠나기 전날 밤에.”
최종 결과를 들은 한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비록 시스템 창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때 느껴지는 익숙한 성취감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이겼어.’
더 불독은 가상 스테이지가 아니다.
한길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현실 속 스테이지. 그걸 방금 졸업한 것이다.
한길이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세계적인 셰프의 주방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발판삼아 3호점을 세계적인 레스토랑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 면에서 더 불독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곳에서 보낸 한 달여 동안 한길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배움을 얻었고, 3호점을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까지 만들 수 있었으니까.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는 돌아가도 된다.
자신이 진정 있어야 할 곳으로.
“그런데 한길, 언제 떠난다고 했지?”
페르난도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사흘 후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송별회도 해야 할 텐데, 준비하려면 시간이 빠듯하겠는걸?”
흥얼거리다시피 하는 목소리.
송별회를 논하는 것으로 보아 한길이 떠난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는데···.
‘또 무슨 꿍꿍이지?’
페르난도의 태도가 어딘가 수상했다.
그간 질척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산뜻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의심이 싹트는 순간,
“역시, 내 후계자는 자네밖에 없다니까?”
페르난도가 다시금 익숙한 주제를 입에 담았고, 한길은 얼굴을 굳혔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건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페르난도는 한길이 처음으로 만난 현실 스승. 고마운 사람이지만···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에 묶여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페르난도.”
“왜?”
“저는 페르난도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수만 번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는 처음 꺼내는 말이었다.
“뭐 잘못 먹었나?”
“진지하게 말하는 거니까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심각한 표정의 한길을 보고, 페르난도도 장난기를 거뒀다.
“저는 페르난도를 존경하지만, 더 불독의 후계자는 될 수 없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나?”
“저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요.”
“만약에 돌아갈 곳이 없다면?”
“네?”
“레스토랑 운영은 쉽지 않지. 자네의 앞길이 창창하면 좋겠지만, 실패할 가능성도 있지 않나. 그럴 경우,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마음의 안식처가 되지.”
설령 3호점이 실패한다 해도, 한길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터였다. 패배를 인정하고 더 불독으로 돌아올 일은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곳에 오지는 않을 겁니다.”
“왜지?”
“저는 제 길을 가야 하니까요.”
한길은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깍듯하게 예를 올렸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담은 정중한 인사였다.
“···.”
한참의 침묵 후, 페르난도가 한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자네, 후계자의 의미를 모르는 것 같네만.”
고개를 들어보니, 페르난도는 여느 때처럼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 그건 송별회에서 자세히 말하도록 하지. 그것보다, 지금은 중탕기 구경이나 시켜주게!”
#
작업실에 세팅된 중탕기는 총 5개였다.
최셰프가 추가로 보낸 중탕기가 얼마 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페르난도는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격양된 목소리로 질문하기 바빴다.
“콜리플라워와 셀러리도 있나? 소스가 묻지 않은, 중탕만 된 상태를 맛보고 싶은데.”
“물론입니다.”
중탕기 안에서 꺼낸 재료를 일일이 맛본 페르난도는 열띤 반응을 보였다.
“이게 한국의 맛인가! 나물도 그렇고,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게 이해가 안될 지경이군. 심해에 가라앉은 보물선을 발견한 기분인걸?”
“그렇게 봐주시니 기분은 좋네요.”
“이번 가을에 보물찾기하러 갈 테니 도롭 좀 구비해두고 기다리고 있게.”
“네?”
“오프 시즌에는 항상 재료 여행을 가거든. 평소에는 일본을 가지만, 올해는 한국행이 될 것 같단 말이지.”
한국에 놀러 오겠다는 말에 한길의 입가에 미소가 자리잡았다.
‘이건 스테이지랑 다르네.’
페르난도는 현실의 인물.
졸업한 후에도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페르난도와 함께 한국의 희귀 재료를 탐험하면 꽤 재밌을 것 같았다. 귀중한 경험이 될 테고.
“언제든 오시면 가이드가 되어드리죠.”
“그나저나, 중탕기로 만든 다른 재료는 없나? 실패작이어도 좋으니 맛보고 싶군.”
“물론 있습니다. 뭘 보여드릴까요?”
“치사하게 그러지 말고 싹 다 들고 와주게.”
한길은 냉장고를 열며 그동안 실험 삼아 만들었던 재료들을 하나씩 꺼냈다.
가장 먼저 꺼낸 건 검은 액체.
오랜 세월 숙성한 고급 발사믹 식초처럼 약간의 끈적함이 묻어있는 액체였다. 그 시럽을 한 스푼 맛본 페르난도는 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건··· 뭐지?”
“딸기 원액입니다.”
“딸기인 건 당연히 아는데··· 딸기 외에 뭐가 들어갔지?”
“아무것도 안 넣고 순수하게 딸기만으로 만들었어요.”
“설탕도 안 쓰고 딸기 향을 이렇게 끌어낼 수 있다고?”
원액은 설탕으로 희석되지 않은 순수한 딸기 향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을 다시 맛본 페르난도는 흥분상태에 돌입했다.
“미치겠군! 이거, 디저트 계에도 혁신의 바람이 불겠는걸?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
“글쎄요, 디저트는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요.”
“다른 과일도 실험해봤나? 살구는? 체리는?”
“아직 못 해봤습니다. 페르난도가 한번 해보시죠.”
그렇게 말하며 한길은 다음 재료를 내주었다. 이번에는 푸딩처럼 생긴 동그란 물체가 여럿.
“이건 뭔가?”
“치즈입니다. 이쪽은 우유만 사용한 생치즈, 빨간 건 비트즙을 넣은 비트 치즈입니다.”
치즈에 대한 반응 역시 뜨거웠다.
“신기한 질감이군.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터지는 게 재밌는걸?”
“페르난도의 구체화 기술을 써봤습니다.”
“아하! 이걸 만드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
“2시간 중탕하고 1시간 반 숙성을 시켰죠.”
“그것만 하면 되는가?”
“아뇨. 일단 알긴산염을 넣고 구체화를 한 후, 3시간 동안 급속 냉동을 시키고 미지근한 물에서 한번 해동을 한 후에 중탕해야지만 모양이 유지되더라고요.”
“복잡하군.”
이 복잡한 조리법은 한국에 있는 요리사들이 알아낸 것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대체 도우미를 몇 명이나 고용한 건가?”
“비밀입니다.”
“이왕 공개하는 거, 시원하게 다 공개하는 게 어떤가?”
“무슨 말씀이신지?”
“시스템을 가동했다면, 데이터도 있지 않겠나.”
페르난도가 팔꿈치로 한길을 쿡쿡 찌르면서 물어왔다. 한국에서 보낸 실험 자료를 보여달라는 뜻이었다.
“보셔도 모르실 텐데요.”
“그래도 보여줄 수는 있잖은가.”
페르난도는 궁금한 것은 잘 못 참는 성격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물러서지 않을 터.
한길은 헛웃음을 치며 유셰프가 보내준 파일을 보여주었다.
“읽을 수가 없군. 한글로만 적혀 있나?”
“그래서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런데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본 양식인걸?”
“불독피디아의 양식을 조금 빌려 썼습니다.”
“크하하하! 진짜 한 톨도 남김없이 깔끔하게 다 훔쳐 갔군.”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나. 훔쳐 가라고 부른 건데.”
“네?”
페르난도는 전혀 불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길, 자네도 불독피디아 아이디 하나 만들어줄까?”
“그래도 되나요?”
“이게 메뉴 개발할 때는 꽤 쓸모 있거든. 내 보물이지.”
불독피디아는 페르난도가 무려 26년을 투자해서 제작한 백과사전.
각 재료가 조리법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세세하게 기록한 자료로, 제작비용만 따지면 최소 십억은 들었을 거다.
“그런 보물을 마구 나눠줘도 되나요?”
“이상한 윤리의식이군. 훔쳐 가는 건 괜찮은데, 나눠주는 건 받을 수 없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화도 안 나는 건가?’
몰래 훔쳐 간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페르난도는 한길이 불독피디아를 몰래 열람한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친분이 있어서 용서해주는 게 아니라, 진짜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대체 왜?’
그런 한길의 마음을 읽은 걸까. 페르난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길, 내가 더 불독을 다시 오픈한 이유가 뭐였지?”
“네?”
“내 비서이니 알잖는가. 기자들이 이 질문을 할 때 내가 뭐라고 답하는지.”
‘더 불독을 다시 열게 된 이유’는 기자들의 단골 질문이었다. 서면 인터뷰 요청이 올 때마다 한길이 답변을 타이핑해주었기에 외우고 있었고.
— 저는 경쟁을 하기 위해 다시 나온 게 아닙니다. 앞으로 미식계를 이끌어갈 인재는 제가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셰프들이죠. 저는 그들을 위한 이정표가 되기 위해 다시 더 불독의 문을 연 겁니다. 더 불독은 배움의 장소가 될 겁니다.
그냥 언론용 답변인 줄 알았는데···
“훔쳐 가라고 대문을 열어놓고 도둑들을 초청했는데, 진짜 훔쳤다고 화를 낼 수는 없잖은가. 뭐, 그렇다고 이렇게 탈탈 털어갈 줄은 몰랐지만. 크하하하!”
더 불독의 모든 정보는 제한 없이 공개되었다. 그래서 실습생들도 활발하게 정보 거래를 하고 있었고.
‘역시 따라잡을 수가 없네.’
똑같이 앞을 본다고 해도, 거인과 인간의 시야는 다르다.
페르난도가 보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미식의 미래.
젊은 요리사들이 더 불독의 지식을 훔쳐서 미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명성, 인지도, 성공 등등. 세속에 묶이지 않고 오로지 미식의 미래만을 보고 있었다.
역시 역사에 남을 인물.
시대를 초월한 자였다.
놀라움에 잠시 빠져있던 그때, 페르난도가 고개를 돌리고 한길을 똑바로 바라봤다.
“한길, 자네가 귀국할 때 저건 다 어떻게 되는 건가?”
페르난도가 가리키는 것은 5대의 중탕기.
“다 들고 갈 건가?”
26년의 업적을 아무렇지 않게 나눠주던 호인의 눈에, 어느새 진한 탐욕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딘가 간절하기까지 한 그 눈빛을 보고
하마터면 ‘중탕기쯤이야 페르난도 다 가지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러면 안 되지.’
한길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당연히 갖고 가야죠. 제 것이니까요.”
함부로 나눠줘서는 안 된다.
아직 페르난도로부터 얻어가야 할 게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