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90)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90화(290/325)
290. 거래하시면 됩니다
‘그냥 줄 수는 없지.’
한길은 3호점 오픈을 앞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무려 5주나 자리를 비우고 이곳에 왔다.
거기에 페르난도와의 내기에 들인 시간과 노력, 한국에서 운영했던 임시 공장 비용까지 고려하면···
보상은 확실히 챙겨야 했다.
그래야 수지가 맞으니까.
이번에는 시스템이 자동으로 챙겨주지 않으니, 스스로 챙길 수밖에.
한길이 원하는 보상은 총 세 개.
그리고 중탕기는 보상을 챙기기 위한 협상카드였다.
‘이걸 참을 수 있을 리 없지.’
페르난도는 늘 새로움에 굶주려 있었다.
새로운 재료, 새로운 조리법,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 1년에 몇억을 쏟아부을 정도로.
그런 욕심쟁이 앞에, 한길은 전에 본 적 없는 중탕기를 선보인 거다. 그 기능까지 쇼케이스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협상 카드는 없다.
“이걸 다 들고 간다고? 무거울 것 같은데?”
“제가 이래 봬도 힘이 꽤 좋습니다.”
“가방에 안 들어갈 것 같은데.”
“들고 온 짐이 거의 없어서 괜찮습니다.”
“한국에도 이미 많이 갖고 있지 않은가.”
“5개 정도는 추가해도 괜찮습니다.”
페르난도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중탕기를 보고 있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와도 같은 모습으로.
“갖고 싶으세요?”
“있어서 나쁠 것 없지.”
“그러면 저랑 거래하시죠.”
“거래?”
“공짜로 드릴 수는 없잖아요. 이거, 꽤 비싼데.”
“배은망덕한 놈.”
페르난도가 잔뜩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필요 없네. 꼭 자네를 통해서만 구해야 하는 건 아니잖은가.”
“그건 그렇죠.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국제 택배로 보내줄 겁니다.”
“당장 오늘 주문해야겠네.”
“하지만 그 경우, 기다려야 하죠.”
“···.”
“저야 지인을 통해 특급배송으로 받았지만, 정식 절차를 밟으면 최소 2주는 걸리지 않을까요?”
“···.”
“저와 거래를 하면, 지금 당장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페르난도는 성격이 급했다.
그건 이곳의 메뉴 개발 과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아침에 시식한 재료로 그날 저녁에 신메뉴를 만들라고 요구하고 있었으니까.
2주의 기다림은 고문이나 다름없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페르난도가 갈등 끝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 악마 같은 놈. 그래, 얼마를 주면 되나?”
“2주의 즐거움은 돈으로 환산되는 게 아니죠.”
“그러면 뭐로 환산되지?”
투덜대는 페르난도를 향해, 한길이 웃으며 첫 번째 보상을 요구했다.
“알레한드로를 주세요.”
#
“알레한드로?”
페르난도가 두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좀처럼 보기 힘든 무방비한 얼굴이었다.
“자네, 언제부터 알레한드로랑 그리 친했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알레한드로를 달라는 건··· 한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건가?”
“제안할 생각입니다.”
“아직 안 했고?”
“네. 이건 페르난도의 허가를 받은 후에 움직이는 게 예의니까요.”
알레한드로를 데려가는 건 더 불독의 비결을 훔쳐 가는 것과는 다르다.
알레한드로는 단 한 명뿐이니까.
아무리 탐나는 인재라도, 페르난도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데려갈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그래서 페르난도의 허가를 받고 싶었다.
다소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흐음, 한국이라···.”
페르난도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알레한드로는 단순한 직원이 아니다.
페르난도가 평생 의지해온 절친한 파트너의 아들. 그래서 생각이 많은 모양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페르난도가 다시 눈을 떴다.
“그렇게 데려가고 싶다면 데려가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알레한드로가 떠나도 더 불독에 피해는 없나요?”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아니, 진지하게 묻는 겁니다. 적당히 무리가 가는 선이면 모를까, 피해가 극심한 정도면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라서요.”
“피해는 없네.”
첫 번째 보상을 무사히 얻었다고 기뻐하려는 찰나, 페르난도가 말을 이어갔다.
“알레한드로 본인을 위해서도 떠나는 게 낫지. 그놈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놈이었으니까.”
“그 말은··· 알레한드로가 들으면 상처가 될 것 같군요.”
알레한드로는 아버지인 줄리를 뛰어넘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줄리의 파트너가 저런 말을 하면···.
“아, 오해는 하지 말게. 무능하다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반대라서 문제지.”
“유능해서 문제라고요?”
“그렇잖은가. 곳간을 열어두고 전 세계 도둑들을 초청했는데, 이런 곳에 유능한 관리인이 있으면 자괴감만 느끼게 되지. 좋은 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 해도 본인이 한사코 싫다고 하니 강제로 쫓아낼 수도 없고, 나 원 참.”
알레한드로가 그런 말을 하긴 했다. 페르난도가 다른 셰프를 소개해주겠다 했다고.
아무래도 훨씬 더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모양이다.
“자네가 데려가 주면 나야 좋지, 안 그래도 줄리를 볼 면목이 없었거든. 이곳은 젊은이가 있을 곳이 아닌데.”
“그런 것 치고는 젊은 실습생들도 많이 부르시잖아요.”
“그 친구들은 체험객이지, 직원이 아니잖은가.”
“체험객?”
한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페르난도가 설명을 이어갔다.
“이곳은 일종의 박물관이지. 과거를 알아야 미래를 만들 수 있으니까 배우러 오는 곳이고.”
“하지만 레스토랑은 그대로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지금의 더 불독은 레스토랑이 아닐세. 그 시절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체험형 전시지.”
그러고 보니 페르난도가 인터뷰마다 한 말이 있었다. 새로 오픈하는 더 불독은 레스토랑이 아니라 창의력 센터라고.
그 의미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타임캡슐 같은 거군요.”
이 레스토랑은 2011년의 더 불독을 타임캡슐에 가둬둔 공간이었다.
손님들은 이곳에서 더 불독의 요리를 경험했다. 눈으로만 감상하는 게 아니라 직접 냄새를 맡고, 만져보고, 맛볼 수 있었다.
한편, 요리사들은 이곳에서 직업 체험을 했다. 전성기 더 불독의 방식을 그대로 배울 수 있었으니까.
“더 불독은 2011년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할 걸세. 이 이상 진화할 일은 없지. 그런데 알레한드로는 자꾸 이 레스토랑을 2021년으로 끌어내려 한단 말이야. 박물관에 진열된 클래식카가 아직 돌아간다고, 그대로 거리로 끌고 나가는 셈이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뭐가?”
“왜 더 불독을 한물간 클래식카 취급하는지 이해가 안 되어서요.”
더 불독은 여전히 창의적이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그런 레스토랑을 퇴물 취급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더 불독은 2021년에는 어울리지 않아. 솔직히, 따라가기 벅차거든.”
페르난도가 쓴웃음을 지으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시대가 너무 빨리 변하고 있어. 지금의 10년은 30년 전의 10년과 흘러가는 속도가 전혀 다르지. 내 나이 올해 예순이지만, 마치 팔순이라도 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예순이나 팔순이나 비슷한 거 아니냐···는 말은 왠지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기술은 어떻게든 따라 한다 해도, 감성은 그럴 수 없네. 내 요리는 6감을 자극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나는 요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
“스마트폰을 쓰고, SNS도 배워서 검색할 수 있지만··· 젊은 친구들이 왜 자기 삶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건지는 이해하지 못해. 내가 모르는 문화와 생각이 퍼져나가는 게 보이거든.”
유난히 씁쓸한 표정.
그 모습을 보며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설마···.’
한동안 페르난도는 포토샵 사용자를 찾아다녔고, 그로부터 얼마 후, 한길은 우연히 하나의 짤을 발견했다.
[노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토끼를 잡으러 갔을 뿐]이라는 문구가 달린 짤. 익명으로 올라왔지만, 그 출처는 짐작이 갔다.“페르난도.”
“왜?”
“혹시 밈이 실패했다고 주눅 든 건가요?”
“봤나?”
“제대로 이슈화하고 싶었다면 페르난도의 이름을 걸고 냈어야죠. 익명이니까 묻힌 것 아닙니까.”
“그래서는 의미가 없지.”
페르난도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답지 않게 침울한 표정이 왠지 신경 쓰였다.
“한길··· 나도 나름 재밌는 사람 아닌가?”
“네?”
“나는 내가 유머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맞는 말이었다.
페르난도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즐거움’이었으니까. 그는 매 순간을 즐기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농담을 하면 아무도 웃어주지 않아.”
“···.”
“내 입에서 나오는 농담에는 아무도 웃지 않는데, 통역사가 내 농담을 통역해주면 그제야 웃어.”
엉뚱한 소리를 하는 페르난도를 보며, 한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한순간 진지하게 페르난도의 걱정을 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으니까.
“왜 안 웃는다고 생각하나?”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 모릅니다.”
한길은 진실을 삼켰다.
‘어쩔 수 없잖아.’
페르난도는 얼굴이 무서웠다.
부리부리한 눈매도 그렇지만, 사람 자체가 내뿜는 기운도 범상치 않았다. 심지어 웃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지금이야 익숙해졌지만, 처음 봤을 때는 한길 역시 흠칫했었던 기억이 있다.
“요리가 엔터테인먼트인 시대에, 나는 사람을 웃길 수 없는 요리사인 게지.”
“진짜로 그게 고민인가요?”
“아쉬운 부분이지. 나한테는 대학 강의 섭외만 들어오고, 리얼리티 쇼 섭외는 안 들어오거든. 다들 내가 심각할 거라는 생각만 하는 거지.”
“그야 페르난도잖아요. 명성이 있으니까 처음부터 거절당할 거로 생각한 거겠죠. 헛소리 하지 마시고, 일단 알레한드로는 제가 데려갑니다?”
“··· 그러도록.”
“중탕기는 세척한 후에 원하시는 곳에 놔두겠습니다. 어디에 둘까요?”
‘중탕기’라는 말에 페르난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환한 얼굴로 돌아왔다.
“매뉴얼은 안 버렸겠지? 혹시 매뉴얼도 한국어인가?”
“영어로도 나와 있었습니다. 스페인어까지는 모르겠네요.”
“그러면 일단 3개는 타이예 팀에 두고, 2개는 크리에이티브 사무실에 놔둬 주게.”
타이예 팀은 조리법을 연구하는 실험실. 크리에이티브 파트는 신메뉴를 연구하는 부서였다.
당장 실험과 메뉴 개발을 동시에 진행하고 싶어 하는 게, 역시 성격 급한 페르난도다웠다.
‘괜히 미안해지네.’
콧노래까지 부르는 페르난도를 보니 말을 꺼내기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
“타이예와 크리에이티브 파트, 둘 중 하나만 선택하셔야죠.”
“무슨 소리인가?”
“중탕기는 하나뿐인데, 두 곳에 동시에 둘 수는 없잖습니까.”
“하지만 방금 알레한드로를···”
“알레한드로가 4명 더 있으신가요? 그러면 나머지 4개도 드리죠.”
페르난도가 한길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 치사한 놈!”
“중탕기를 더 원하시면, 또 거래하시면 됩니다.”
한길이 원하는 보상은 3개였다.
보상 하나에 중탕기 하나.
그리고 여분의 중탕기 2개는 필요할 때마다 ‘소원권’으로 쓰기로 했다.
“거래를 원하지 않으시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습니다. 이건 타이예에 둘까요, 크리에이티브에 둘까요?”
“한 개··· 더 받으려면 뭘 줘야 하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페르난도를 향해, 한길이 생긋 웃으며 두 번째 보상을 요구했다.
“홀 서비스를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홀?”
“더 불독에서 제가 유일하게 경험하지 못한 구역이니까요.”
레스토랑을 연극으로 비유한다면, 주방은 백스테이지. 홀은 본 무대였다.
한길은 관객석에서 무대를 보고 싶었다. 슬아도 업그레이드해야 하니까.
페르난도의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맘대로 해라, 이 도둑놈아.”
“거래 감사합니다, 고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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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는 약속을 지켰다. 한길을 데리고 바로 알레한드로에게로 갔으니까.
“한길이 떠나기 전에 홀을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더군. 오늘 저녁 서비스에는 한길에게 홀 업무를 맡기도록.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접시나 나르게 해주게.”
“한길이··· 떠나요?”
눈을 휘둥그레 뜬 알레한드로는, 한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어, 내 레스토랑이 있으니까.”
“언제 다시 오는데? 정리하고 오는 거야?”
알레한드로는 상당히 당황한듯했다.
자신은 줄리의 후계자, 한길은 페르난도의 후계자. 둘이 함께 더 불독을 이어갈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아···.’
원래는 업무가 끝난 후에,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줄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스카우트 제의도 하고.
안 그래도 알레한드로는 이곳에 미련이 많은데··· 손님이 들이닥치기 직전, 심리적으로 쫓기는 상태에서 제안을 해봤자 거절만 당할 게 뻔하다.
“자세한 건 업무 마감하고 나서 설명해줄게. 지금은 서비스 준비를 해야 하니까.”
“어? 그래···.”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려는데, 등 뒤에서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알레한드로. 한길이 자네를 데리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데 어찌할 텐가?”
“네?”
“너를 고용하고 싶다더군. 참고로, 나는 가도 된다고 말했네.”
한길이 놀라서 고개를 휙 돌리자, 페르난도가 뒤틀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의적이다.
일부러 한길을 골탕 먹이기 위해, 최악의 타이밍에 말을 꺼낸 거다.
한편, 알레한드로는 매우 난감한 듯 보였다.
“진짜야, 한길?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아직 이곳에···.”
“페르난도 얘기는 신경 쓰지 마, 오해하고 있는 거니까. 나중에 업무 끝나고 제대로 얘기하자.”
“미안, 나는 여기를 떠날 수 없어서···.”
알레한드로는 이미 거절 의사를 내비치고 있었다.
한번 거절을 하면, 두 번 거절하기 쉬워진다. 그래서 조심스레 접근하려 한 거였는데···.
‘쓸데없는 짓을.’
한길은 원망 가득한 눈길로 페르난도를 째려보았지만,
“이 세상에는 인과응보라는 게 있지.”
페르난도는 아무렇지 않게 흥얼거리며 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