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95)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95화(295/325)
295. 마지막 밤
더 불독에서의 마지막 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한길은 페르난도의 작업실로 향하는 대신, 레스토랑 홀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알레한드로와 중요한 얘기를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한길!”
한길을 발견한 알레한드로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너, 이거 봤어?”
“뭘?”
“새로 업데이트된 2인조 영상.”
“또 올라왔어?”
“어, 후속 영상을 만들었더라고. 꼭 한번 봐봐! 진짜 웃기거든! 크큭.”
알레한드로는 키득키득하면서 자신의 핸드폰을 한길에게로 내밀었다.
영상의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저녁 식사]. 화면 속에는 페르난도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 저번 주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조만간 나올 겁니다···
우리는 새끼 토끼만 쓰니까.
한길은 화면을 힐끔거리기만 하고 핸드폰을 다시 알레한드로에게로 건네주었다.
“나중에 볼게.”
“그래? 꼭 봐봐! 라이브 영상을 짧게 편집해서 올린 건데 진짜 꿀잼이더라.”
“재밌다고? 그 라이브가?”
“편집의 힘이 놀랍더라고. 자막이랑 효과음 치니까 이게 또 웃기더라? 그리고 오히려 그 특유의 불편함을 살려서 더 웃겨.”
“···는 몇이야?”
“어?”
“조회수.”
“글쎄··· 어? 벌써 8천이 넘네? 하긴, 나도 벌써 3번이나 돌려봤으니까.”
그 끔찍한 영상을 유머로 승화시키다니.
아무래도 2인조는 한길의 예상보다 재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 그리고 얘네들, 내일 파리로 간대. 너한테 받은 시계의 진위 여부를 직접 확인해본다면서.”
“뭐?”
“브랜드 본사에 가서 물어볼 거라던데?”
갑자기 돌이라도 삼킨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영상 속 한길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있다. 심지어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으니 한길을 알아볼 사람은 없을 거로 생각되지만···
그래도 이대로 주목을 받으면···.
“어차피 들킬 거면 그냥 자수하는 게 어때?”
“어?”
알레한드로의 말에 한길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 느낌상 이 영상, 묻히지는 않을 것 같거든. 그렇게 불안 속에 떨며 사느니, 차라리 자진해서 매를 맞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런가.”
어쩌면 정말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하아···.”
한길은 기나긴 한숨과 함께 자신의 근심을 잠시 내려놓고, 알레한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할 말이 있는데.”
“무슨 말? 그리고 그건 또 뭔데?”
알레한드로가 고갯짓으로 한길이 가져온 프린트물을 가리켰다.
“제안서.”
“제안서?”
“내가 앞으로 열 3호점의 기획안 같은 거야. 한번 읽어보라고.”
한길은 내일 아침,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 전에 얻어가야 할 것은 두 개뿐.
하나는 페르난도로부터 들어야 하는 비결이었고, 남은 하나는 알레한드로였다.
오늘은 알레한드로에게 정식으로 스카우트 제안을 하기 위해 일찍 나온 참이었다. 페르난도가 방해 공작을 펼친 이후로, 여러모로 타이밍이 맞지 않아 아직도 정식 제안을 하지 못했으니까.
한길은 난감해하는 알레한드로를 보며,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단 한 번만 읽어봐 줘.”
“하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앞으로 1년 동안···.”
“거절해도 괜찮아. 하지만 어차피 거절당할 거라면, 제대로 제안이라도 한 후에 거절당하고 싶어서.”
알레한드로는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제안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 어떤 꼼수도 없이, 솔직하게 작성한 제안서였다. 3호점의 방향성과 앞으로의 계획만 적혀 있었으니까.
다소 무미건조한 내용이었지만, 그것을 읽어내려가는 알레한드로의 동공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 정면돌파가 답인가?’
알레한드로는 본인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어했고, 꽤 파격적인 아이디어가 담긴 기획을 여러 번 제출했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그 기획에 관심이 없었다.
분명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한길의 제안서는 그 갈증을 공략한 것이었고.
제안서를 다 읽은 알레한드로가 고개를 들자, 한길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페르난도의 후계자가 될 생각은 없어. 더 불독을 이어가고 싶은 게 아니라 뛰어넘고 싶거든. 페르난도와 제대로 승부를 보려면,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해. 그래서 떠나는 거고.”
“···.”
안레한드로가 해야 할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줄리를 뛰어넘으려면, 줄리의 그림자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알레한드로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방법은, 더 불독에 남아서 제2의 전성기를 불러오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었지.
알레한드로의 눈에는 갈등이 가득했지만, 한길은 지금 당장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1달이야.”
“?”
“앞으로 1달간 준비 기간을 거친 후에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야. 그 전에 네가 합류하면 좋을 것 같아서.”
“···.”
“여기 남아있겠다고 하면, 네 생각을 존중해줄게. 하지만···.”
문득, 어제 만난 더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어서도 새로운 도전에 나선 더카스는, 진심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페르난도 역시 날마다 즐기고 있었고.
한길은 알레한드로를 똑바로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같이 가면 재밌을 거야.”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앞으로 열릴 3호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들뜬 기분이 들었으니까.
“여기보다 훨씬 더 재밌을 거야.”
#
“한길! 일찍 왔군!”
작업실에 도착하니, 오늘은 페르난도가 일찍 출근해 있었다. 콧노래까지 부르는 걸 보니, 기분이 상당히 좋은 모양이었고.
“한길, 이걸 봤는가?”
페르난도가 내민 핸드폰.
그 속에는 익숙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 저번 주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조만간 나올 겁니다···
우리는 새끼 토끼만 쓰니까.
아무래도 페르난도도 2인조의 채널을 구독하는 모양이었다.
“안 봤습니다.”
“그러면 쓰나, 봐야지.”
“할 일이 많아서요.”
페르난도를 가볍게 무시하며 노트북을 펼치자, 등 뒤에서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길, 명령이네. 이 영상을 모니터링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게.”
사심이 듬뿍 담긴 지시에 황당해서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페르난도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는 오늘까지 내 비서 아닌가. 이 영상을 반복해서 보고 연령대별로 어떻게 반응할지, 어떤 점에서 젊은이들에게 어필이 될지, 나의 기존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줄지, 그리고 더 불독에 미치는 영향까지. 정리해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진심입니까?”
“나의 이미지 관리를 위한 모니터링은 업무 사항에 포함되어 있을 텐데?”
절로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라는 표현이 생각났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길은 오늘까지 이곳의 스타주로 근무해야 했으니까.
결국, 한길은 새로 올라온 영상을 틀어서 감상했다.
‘약속은 지켰네.’
2인조는 한길이 등장하는 부분은 확실하게 모자이크 처리를 해주었다. 모자이크가 얼마나 진한지, 한길이 동양인이라는 사실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영상 속 페르난도는 상당한 괴짜였다. 호감이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캐릭터성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게다가 호러 영화의 배경음을 곁들인 페르난도의 ‘토끼 뇌 탕’ 발언은 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대충 그런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해주자, 페르난도가 입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
“역시 자네가 일은 잘해?”
“마음에 드시니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오늘도 점심 일정이 있으니 한 시간 후에 나와 함께 나가도록 하지.”
다시금 외출 명령이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걱정보다 기대감이 앞섰다. 오늘도 왠지 특별한 손님이 찾아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
한길의 예감은 적중했다.
생각했던 이상으로 특별한 손님이었지만 말이다.
“페르난도!”
“람지!”
“오랜만이군.”
“그러게, 하하.”
이번 손님은 한길도 얼굴을 익히 아는 셰프였다. 전 세계적으로 얼굴이 가장 잘 알려진 셰프 중 한 명이었으니까.
“아, 이 친구가 그 친구인가 보지?”
“그렇다네. 이름은 이한길. 인사해. 이쪽은 고르댕 람지.”
‘이 사람과도 아는 사이였나?’
한길이 다소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인사롤 하고 고개를 돌리자, 페르난도가 씨익 웃으며 설명했다.
“람지는 더 불독의 초창기부터 찾아온 단골이지.”
“단골보다는 팬이지. 처음 온 순간부터 홀딱 반했으니까. 그게 벌써 20년 전인가? 하하, 세월 참 빠르군.”
람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한길을 바라봤다.
“2000년에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처음으로 더 불독에 왔었거든.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캐비어, 굴, 푸아그라, 트러플이 나오지 않은 게 처음이라 충격이었지. 그런 재료를 쓰지 않았는데도 완벽한 디너라 더더욱 소름이 돋았고.”
“그때 연구소도 구경했었더랬지?”
“그것도 충격이었지. ‘나는 아직 셰프가 아니라 요리사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이래서 로부숑이 그런 말을 했구나, 하고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고.”
“로부숑?”
“자네는 아직 젊어서 로부숑을 모르려나?”
한길이 고개를 가로젓자, 람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이 진짜 많이 변하긴 했네, 로부숑을 모르다니!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로부숑은 생전에 ‘미슐랭의 대부’로 불리던 분이지. 별을 무려 32개나 보유하고 있었거든.”
현존하는 셰프 중에 가장 많은 별을 보유한 이는 어제 만난 알랭 더카스였다.
더카스의 미슐랭 별 기록은 총 21개.
로뷰숑의 32는 그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였다.
“‘세기의 셰프’라고도 불리던 분이었지. 나도 한때 파리에서 그분 레스토랑에서 일하기도 했고.”
“그렇군요.”
“그리고 로부숑은 페르난도의 멘토이기도 했지.”
“네?”
생각보다 탑 셰프들의 세상은 좁았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엮여 있었으니까.
생소한 세상에 발을 디딘 기분이었다.
“람지, 자네는 로부숑과 사이가 안 좋지 않았나.”
“하하, 화해했지. 돌아가시지 건에 그분이 웃으면서 말씀하시던걸? 인간을 향해 접시를 던진 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나처럼 건방진 요리사는 본 적이 없었다고도 했었지.”
“그게 화해한 건가?”
“같이 웃으면서 사진도 찍고 대화도 나누면 화해한 거지. 사실, 같이 일만 하는 게 아니면 괜찮아. 내 성격도 내 성격이지만, 로부숑도 결코 만만치 않았거든. 살면서 그렇게 까탈스러운 인간은 본 적이 없어. 나랑은 비교도 안 돼.”
두 사람은 한동안 세상을 떠난 멘토에 대한 추억을 주고받았고, 한길은 얌전히 경청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는데, 오늘의 페르난도는 어제보다 성급했다.
“···글쎄, 내가 후보들에게 내주는 미션은 자네도 알잖는가.”
“알지, 알지.”
“이 녀석이 그걸 단 한 달 만에 해냈다니까! 게다가 중탕기라는 걸 보여주는데···.”
어제의 반복이었다.
페르난도는 바로 팔불출 자랑을 시작했고 가마솥 중탕기 얘기를 꺼냈으며, 그 얘기를 들은 람지는 참지 못하고 작업실로 데려 가달라고 했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한길이 중탕기를 활용한 메뉴를 미리 만들어놓았다는 점이었다.
중탕한 관자를 다시 한번 오븐에 건조해서 가쓰오부시처럼 잘게 찢어내고, 관자 원액을 수프로 곁들인 요리였다.
관자 특유의 도톰하고 쫄깃한 식감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 대신에 감칠맛과 담백함을 몇배로 증폭시킨 요리였다.
아직 미완성 메뉴라 람지가 시식할 때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었지만,
“흠잡을 데가 없군.”
독설은 나오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람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길이라고 했나? 이번에 내가 라스베가스에 새로 오픈하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자네···. 아니, 이건 상도덕에 어긋나나?”
“당연하지. 내가 이미 침 발라놓지 않았나.”
“부럽군. 어디서 이런 원석을 주워가지고는···.”
“알아서 제 발로 굴러들어왔지.”
“쳇, 복도 많군. 그나저나, 이 중탕기라는 물건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지?”
한길은 어제 더카스에게 그러했듯이, 중탕기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구매할 수 있는 사이트를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역시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람지가 솔깃해할 만한 제안을 했다.
“더 빨리 사용해보고 싶으시다면, 제가 내일 귀국하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호오, 그래? 그래 주면 참 고맙겠군!”
람지는 생각보다 흔쾌히 자신의 번호를 주었다.
그렇게 한길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셰프의 개인 연락처를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조만간 제 3호점이 열릴 예정입니다. 그때 초청장을 하나 보내드려도 될까요?”
“하하, 한국까지 갈 시간적 여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시간만 된다면 꼭 가보겠네. 페르난도의 후계자 요리라니, 이건 꼭 먹어봐야 하니까.”
문장 중간에 다소 거슬리는 단어가 들렸지만, 지금은 그런 세세한 것에 트집을 잡을 기분이 아니었다.
어제 만난 더카스가 더 많은 미슐랭 별을 보유하고 있다 해도, 국내 인지도를 따지면 람지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만약 3호점의 오프닝에 람지가 온다면··· 그보다 확실한 홍보 효과는 없다.
‘최셰프가 뭐라고 하려나?’
람지만 오면, 3호점이 실패하는 일은 없을 거다.
최셰프가 가장 걱정하는 초반의 위기를 무사히 넘길 원동력이 될 터였고.
그날 저녁, 람지는 셰프 테이블에서 식사를 마쳤고, 비행기 시간이 촉박하다며 서둘러 돌아갔다.
그리고 서비스를 마친 후,
“한길, 우리끼리 조촐한 송별회를 해볼까?”
페르난도가 어딘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더 불독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드디어 최종 보상을 얻게 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