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96)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96화(296/325)
296. 송별회
송별회는 페르난도의 예고대로 조촐했다.
장소는 페르난도의 작업실.
참석 인원은 단 넷.
한길, 페르난도, 알레한드로, 그리고 파코였다.
“페르난도! 한잔 받게!”
“파코와의 술자리도 오랜만인걸? 이러고 있으니 꼭 20대로 돌아간 것 같군!”
“무슨 소리! 나는 단 한 번도 20대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내 배가 나를 대신해서 나이를 먹어주고 있거든!”
파코가 자신의 산타클로스 배를 통통 두드리자, 페르난도가 눈매를 좁혔다.
“그러게, 까보면 나이테도 나올 것 같은데?”
“페르난도!!! 몇 번이나 말했나! 그 얼굴로 사이코패스 농담은 하지 말라고!”
“이것도 무섭나?”
“방금 내 배를 갈라보겠다고 한 거잖아?”
“크하하! 설마 진짜 갈라볼까.”
“자네 눈빛과 그 ‘설마’의 조화가 무서운 거라고.”
친근하게 농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오가는 대화에서 30여 년을 함께한 전우애가 느껴졌다.
어쩌면 업무 중에 파코가 보여준 지나친 깍듯함은, 페르난도의 권위를 존중해주기 위한 의식적인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원 없이 와인을 마시는 것도 20년 만이군!”
껄껄 웃는 페르난도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푹 익어 있었다. 고작 와인 3잔에 저런 변화가 온 걸 보니 주량은 세지 않은 모양.
한편, 알레한드로는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했다.
아마 한길의 제안을 검토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한 게 아닐까···.
“알레한드로!”
페르난도가 그런 알레한드로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걸쳤다.
“자네, 설마 저 녀석을 따라가는 건 아니겠지?”
“네?”
“이 난감해하는 반응! 또 한 번 거절했나 보군.”
“그, 그게···.”
“크하하하! 잘했네! 저 녀석은 당해도 싸지. 세상만사가 지 원하는 대로 굴러가는 줄 안다니까? 건방진 녀석!”
고개를 돌린 페르난도가 안면 근육을 마구 씰룩였다.
“세상 참 만만치 않아, 안 그런가?”
“그러게요.”
약 올리려고 작정한 표정이었지만, 한길은 그 어설픈 도발을 대충 흘려 넘기고 페르난도의 걸음걸이에 집중했다.
‘곤란한데?’
걸음걸이가 심하게 비틀거린다. 저러다 갑자기 쓰러져 잠든다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듣지 못할 터였다.
“페르난도, 약속 지키셔야죠.”
“누가 들으면 빚쟁이인 줄 알겠어?”
“싫으면 빚을 지지 말았어야죠. 오늘 밤에 얘기해주겠다고 한 건 제가 아니라 페르난도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할 필요는 없지. 밤은 길다고!”
순순히 털어놓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이러면 도움의 손길을 줄 수밖에.
“지금 얘기해 주시면 중탕기 한 개 더 드리겠습니다.”
중탕기 2개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남겨둔 것이었다. 왠지 페르난도가 뺀질거리며 약속을 미룰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하여간, 네 녀석은 인성이 덜 됐어, 인성이. 고놈 스승 얼굴 좀 보고 싶구먼!”
“거울 갖다 드릴까요?”
“수작질로 모든 걸 다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코다친다고!”
전에도 느꼈지만 중탕기의 약효가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둔 참이었다.
“관자 조리법도 서비스로 넣어 드리죠.”
“···.”
페르난도는 입을 뻐끔거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알고 싶을 거다.
한길이 람지 앞에 관자 요리를 선보일 당시, 수많은 질문을 던졌으니까.
당시 질문에 답해주지 않았던 게 신의 한 수였다. 덕분에 협상 카드가 한 장 늘었다.
“후우··· 알겠네. 말하면 되잖은가, 말하면.”
“무슨 말?”
파코가 미어캣처럼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한길과 페르난도를 번갈아 보았다.
“왜, 내기에서 지면 더 불독의 가속화 지점을 알려주기로 했잖은가.”
“아~ 그 얘기?”
“내 입으로 말하고 싶으니 자네는 아무 말 말게.”
“그래도 추임새 정도는 넣어도 되겠지?”
“없으면 섭하지. 파코의 추임새가 더해지면 이야기의 박력이 다르니까!”
“하하하! 그러면 어디 실력을 발휘해서···.”
“관자.”
한길의 한 마디에 대화가 허공에서 뚝 끊겼다.
“쳇, 알았네. 하여간, 인간미 없는 녀석.”
페르난도는 구시렁거렸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더 불독은 여느 레스토랑과 궤를 달리했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한길의 심장이 절로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으니까.
“행운이네.”
“?”
“운이 좋았지.”
“···.”
아무 말 없이 눈만 크게 끔뻑이는 한길을 보고, 페르난도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파코, 방금 이 녀석 얼굴 봤나!!!”
“푸하하하! 더 해, 더 해봐!”
“여기서 더하면 한 대 칠 것 같은데?”
“그 한계점을 알아보기 위해 하는 거지! 난 페르난도의 용기를 믿는다고!!”
두 사람은 있는 대로 몸을 비틀며 폭소했다. 백발이 성성하지만, 누가 보나 초등학생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 서비스는 없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에이, 줬다 뺏는 게 어딨나.”
“타임딜이거든요. 앞으로 10초 내에 말하지 않으면 자동 회수됩니다.”
“쳇, 하여간 치사한 자식 같으니.”
페르난도는 입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렸지만, 이내 장난기를 거두고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실력도 중요하지만, 실력만으로 이 자리에 올라올 수는 없거든. 행운도 필수지.”
그리고 드디어 페르난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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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 우선, 내가 요리사가 된 계기부터 말해주도록 하겠네.”
페르난도는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지만, 한길은 갑자기 목이 꽉꽉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별로 안 궁금한데.’
마치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인류가 불을 발견한 순간부터 시작하는 느낌이다. 그 부분은 필요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하려 했지만,
“나의 젊은 시절, 궁금하지 않나?”
관심을 갈구하는 눈빛을 보니, 차마 본심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 잠시만 놀아주자.’
어차피 내일부터 한동안 페르난도를 볼 일은 없다. 10분 정도 맞장구쳐주는 것쯤이야.
“네, 궁금합니다.”
“크하하! 그렇지? 나는 원래 요리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내가 요리사가 된 건 순전한 우연의 일치지.”
“그건 의외네요.”
“원래는 학교에서 경영학 공부를 했었지. 그런데 18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모든 게 따분해지더군. 그래서 학교를 때려치우고 이비자에 가자고 결심했지.”
“이비자?”
생소한 명칭에 한길이 고개를 기울이자, 파코의 우렁찬 음성이 뒤따랐다.
“한길, 이비자를 모르나? 뜨거운 태양! 푸른 바다! 젊음이 활개 치는, 광란의 파티가 열리는 섬! 스페인의 천국이지!”
“그렇지! 하나뿐인 청춘, 화끈하게 불태워야지 않겠나! 18세의 젊음을 기리기에 가장 완벽한 장소 아닌가!”
젊은 시절의 페르난도는, 지금과 달리 유흥에 관심이 많았다···라는 tmi를 하나 얻게 되었다.
한길의 미래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였다.
“이비자에서 요리를 배우셨군요.”
“아니, 아니! 그렇게 서두르지 말고 끝까지 들어보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으니까!”
은밀하게 전개 속도를 높여보려 했지만, 그 시도는 빨리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왠지··· 페르난도의 인생사를 다 듣고 난 후에야 본론에 도달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이비자에 가려면 돈이 필요하잖은가. 그래서 계획을 세운 그 날, 바로 일자리를 알아봤지. 그런데 하필이면 구인을 하는 곳이 한 군데밖에 없더군. 어딘지 알아맞힐 수 있겠나?”
“식당이요.”
“틀렸네, 호텔이었지.”
“호텔?”
“···에 위치한 레스토랑의 설거지 담당. 그렇게 나는 요리사가 되었네.”
“그게 끝인가요?”
“그렇다네. 만약 그날 배달부 자리가 나왔다면, 내가 요리할 일도 없었을 테지. 인생이라는 게 참 재밌지 않나? 크하하하!”
아무런 교훈도 없는 이야기.
대체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싶었던 걸까.
한길의 불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었다. 페르난도가 서둘러 해명하듯이 말을 이어갔으니까.
“이상한 일이지? 숨 막히게 덥고, 통풍도 안 되고, 일은 고되고, 욕설이 난무하는 곳인데··· 주방에 들어서는 순간, 이비자 따위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더라고. 따분함으로 죽어가던 와중에 전기 충격을 받고 되살아난 기분이었지. 이게 바로 운명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부분적으로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한길 역시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요리의 길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페르난도와 마찬가지로, 한길은 요리를 업으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학창 시절에는 자신이 평범한 인생을 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평범하게 학교를 졸업하고, 평범하게 대학에 진학하고, 평범하게 취직할 거라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집안이 빨간딱지로 도배되고, 단칸방 보증금조차 마련하지 못해 고시원을 전전하는 형편이 되면서 한길의 인생은 경로를 이탈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한길은 바로 일자리를 구할 생각이었지만,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했다.
—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말고 공부에 집중해. 네가 좋은 대학에 가고 번듯한 직장을 구하는 게 효도야.
학창 시절 한길은 우등생으로 통했고, 명문대에 합격할 정도로 명석하기도 했다. 도무지 입학비를 낼 형편이 아니라 입학이 취소되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인생만큼은 본래의 경로로 돌려놓겠다고 굳게 다짐하신 듯했다.
— 어차피 남들 다 가는 군대, 조금 앞당겨서 간다고 생각해. 그동안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아들이 군대에 있는 동안 학비를 벌겠다고 애쓰던 어머니는, 과로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평생 손에 물 한번 안 묻히고 사시던 분이 그렇게 무리를 했으니···.
제대한 후, 한길은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기로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학비를 모으기 위해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하던 도중, 우연히 주방 보조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자신의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게 될 줄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 요리는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재료가 프라이팬에 닿을 때 나는 소리.
공기 중으로 퍼지는 향.
그 모든 것이 한길의 감각을 일깨웠다.
조금만 불 조절을 잘못해도, 조금만 손놀림을 게을리해도, 나오는 결과물이 전혀 달랐다. 하지만 연습을 거듭하면 할수록, 실력은 확실히 늘었다.
기술을 갈고 닦을 때마다 느껴지던 감정.
그것은··· 희열이었다.
결국, 한길은 주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입시 공부 대신 요리 공부를 했으며, 학비를 위해 저축한 돈으로 식당을 차렸다. 어머니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그 열악한 환경을 보고 이게 내 천직이라고 생각하다니! 미치지 않았나?”
“이해합니다. 저도 비슷했으니까요.”
한길은 나지막한 목소리에 조심스레 본심을 담았다. 그런데,
“에이, 그건 아니지!”
“뭔 소리를!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페르난도와 파코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으니까.
“네놈이 경험한 거랑은 전혀 달라! 80년대라고? 우리 때는 말이야, 지금처럼 주방이 통풍이 잘되는 것도 아니었어!”
“제일 끔찍한 건 육수 담당이었지. 막내 때는
사람 크기의 냄비를 지키면서 거품을 일일이 걷어내는데, 정말 지옥이었거든! 팔팔 끓는 거대한 냄비 5개를 지키다 보면 한 시간만 지나도 땀이 얼마나 나던지! 화장실에 가서 옷을 쥐어짜면 물이 주르륵 흘러나올 정도였지.”
“진짜, 요즘 주방은 육수를 많이 안 쓰잖아? 젊은 요리사들은 모를 거야. 그만한 크기의 냄비가
하루종일 돌아가면 주방 온도가 얼마나 더 올라가는지.”
“확실히, 우리 때와 비교하면 요즘 주방은 호텔이지.”
“우리 때는 완전 중세 시대 아니었나!”
두 사람은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고 있었다.
중세 유럽과 고대 로마의 주방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 앞에서, 80년대 주방 환경의 열악함을 논하는 게 조금 가소로웠지만.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이 속도로는 동틀 때까지도 못 듣겠네.’
이야기가 중구난방이다.
쓸데없는 부분은 뛰어넘기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야 한다.
“힘드셨겠네요. 그래서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
“어디 그뿐인가? 조금만 굼뜨면 온갖 욕을 다 처 듣지 않았나! 주먹이 날아오는 경우도 흔했고! 술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환경이었지.”
“크크, 그러게. 요즘은 진짜 신사적으로 변한 게지. 그때는 정말!”
“이러면 관자 서비스는 없는···.”
“소스 이름 안 외우는 게 어딘가! 요즘은 소스도 그냥 재료 이름 따라서 붙이잖아? 크랜베리 소스, 아몬드 소스, 버터 소스··· 우리 때는 무슨 배우 이름 따오고, 도시 이름 따오고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지. 그걸 몇십 개나 암기할 머리가 있었으면 공부를 하지, 왜 주방 일을 해?”
대화를 끊기 위해 몇 번의 시도를 해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라떼는 말이야’ 릴레이는 끊기 쉬운 게 아니다. 백발의 남성 두 명이 참가자고, 술기운까지 더해졌다면 더더욱.
주변 소리가 아예 안 들리는 건 아닐 거다. 페르난도와 파코 사이에는 분명 대화가 오가고 있었으니까.
선택적 난청.
듣고 싶지 않은 주제만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지길 바란다면, 한길 역시 ‘라떼는 말이야’ 틀에 맞춰 문장을 수정해야 했다.
‘본론은 아마··· 더 불독의 초창기.’
일전에 알레한드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보면, 더 불독의 위기는 초창기. 페르난도가 헤드 셰프가 된 후, 손님들 발길이 뚝 끊겼던 시기다.
그동안 스테이지를 겪어오며 깨달은 진실이 있다. 모든 기회는 위기 속에 있다.
이야기를 그 시점으로 돌리면, 분명 원하는 정보가 나올 거다.
한길은 단체 줄넘기에 뒤늦게 뛰어드는 참가자처럼, 날뛰는 대화를 유심히 살피며 끼어들 타이밍을 기다렸다.
“요즘에도 주방이 너무 권위적이라고 스트레스 받는 젊은 친구들이 있더군!”
“웃긴 말이지! 지금은 역대급으로 자유로운 시대 아닌가! 각자의 개성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인정해주는 것만 해도 어딘데! 우리 때는···”
지금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프랑스 요리만 인정해줬다면서요?”
“···.”
“···.”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한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길의 문장을 똑똑히 들었다는 증거.
곧이어 원하던 반응이 나왔다.
“그렇지. 그때는 프랑스 요리가 아니면 파인 다이닝 취급도 하지 않았거든.”
“페르난도도 완전 미친놈 취급받지 않았나! 진짜 까딱 잘못하면 영영 문을 닫을 뻔했지. 솔직히 운이 좋았던 거지, 그때 만약···.”
“쉿! 파코, 그 얘기는 내 입으로 하기로 했잖은가.”
“아, 그랬지. 참.”
이제부터가 본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