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98)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98화(298/325)
298. 계승되는 의지
후계자.
별안간 등장한 단어에 한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페르난도는 그런 한길을 보며 피식 웃은 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인터뷰가 나간 후, 그야말로 난리가 났지. 말했다시피 당시 프랑스는 파인 다이닝을 독점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프랑스 제일의 요리사가, 그것도 요리계의 황제라고 불리는 이가, 자신의 왕관을 스페인 요리사에게 주겠다고 공개 선언한
거네.”
“···.”
“심지어 나는 프랑스 요리를 만드는 사람도 아니었지. 어디 그뿐일까. 정통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들이 툭하면 조롱하는 대상이었거든.”
페르난도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분명 들리기는 들리는데···
방금 전까지 선명했던 소리가 갑자기 먹먹해졌다.
“눈에 띄기 위해 특이한 요리를 만드는 허세 꾼, 요리의 기본도 모르는 돌팔이, 괴상한 실험을 하는 괴짜, 이단아··· 참으로 다채로운 수식어가 많았지. 그런데 요리계의 황제가 그런 이단아를 후계자로 지목한 거였네.”
“···.”
페르난도는 로부숑의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다. 심지어 요리 스타일도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페르난도는 로부숑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 후로는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가 없어졌지. 너도나도 더 불독에 몰려들었거든. 황제의 후계자인데, 호기심에라도 오고 싶지 않겠나?”
“···.”
“그리고 그 다음 해, 더 불독은 3 스타 레스토랑이 되었네.”
한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한기가, 척추를 관통하며 온몸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때, 로부숑이 조언을 해주더군. 앞으로는 유명세 때문에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창조를 할 시간이 없어질 거라고. 그건 싫었네. 나는 인기를 원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
“그래서 레스토랑 안에 있던 크리에이티브 부서를 빼내어 별도의 연구소를 설립했지.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그 후로는 한길이 익히 아는 팩트의 나열이었다.
페르난도는 이 유명세를 이용해 다양한 케이터링 프로젝트를 받아들였으며, 기업과의 콜라보레이션도 진행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수익으로 연구소를 운영했다.
연구소는 혁신을 넘어선, 혁명에 가까운 요리를 배출해냈다.
훈제 거품, 뜨거운 젤리, 사라지는 라비올리···.
하나같이 미식계를 도발하는 요리들이었다.
“내가 뭘 만들어도 먹어줄 손님이 있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되었지! 그땐 정말 재밌었는데 말이야, 크하하하!”
페르난도의 요리는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의 행보였다. 세상이 본 적 없는 새로운 조리법과 기술을, 대중에게 아낌없이 공개했으니까.
페르난도가 전달하고자 하는 매시지는 명확했다.
— 너희들도 해봐!
얼마 후, 다른 레스토랑들도 거품과 구체화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페르난도처럼 과격한 요리를 만드는 이는 많지 않았지만, 기존의 요리에 신기술을 접목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어졌다.
페르난도의 파급력은 요식업계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프랑스의 한 작곡가는 더 불독에서 맛본 35개의 메뉴에 영감을 얻어 교향곡을 작곡했다.
<페르난도에 보내는 오마주>라는 타이틀의 교향곡은, 파리의 유명 콘서트홀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세계 최고 권위 예술제인 <도큐멘타>는 더 불독을 전시에 포함했다. 그리고 축제 기간 동안, 매일 2명의 축제 참가자에게 더 불독의 식사권과 비행기표를 제공했다.
더 불독을 살아있는 예술의 현장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과거에 요리는 지극히 기술적인 영역이라고 여겨졌지만. 페르난도를 계기로 요리에도 ‘예술’, ‘창의력’과 같은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젊은 요리사들은 정통 요리 대신 창의적인 요리를 목표로 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프랑스 정통 요리는 낡은 개념이 되어버렸다.
더 불독은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어워드에서 1위를 5번이나 연달아 수상했다.
페르난도의 얼굴은 타임스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으며, 페르난도 본인은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렇게 페르난도는 전설이 되었다.
“이 모든 게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나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지. 그리고 그 첫 번째 눈덩이가 바로 로부숑의 후계자 선언이었고.”
“···.”
“후계자 타이틀은 나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었네. 두려움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과감하게 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지.”
페르난도는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아쉬움··· 모든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표정이었다.
“다시 아까의 얘기로 돌아가서, 후계자 선언을 들은 후, 나는 바로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지. 로부숑에게 감사 인사도 해야 했지만··· 중요한 질문이 있었거든.”
“···.”
“로부숑의 제자 중에는 재능있는 셰프들도 많았네. 당장 람지만 해도 로부숑의 제자 아닌가. 그런데 왜 나를 지목한 건지 궁금했지.”
“그 사람은··· 뭐라고 하던가요?”
“‘그들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요리사들이지만, 자네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람이다.’라고 했던가.”
페르난도가 갑자기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로부숑은 포스트 누벨 퀴진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었네. 그전에는 누벨 퀴진의 교황인 폴 보퀴즈가 있었고, 그전에는 요리의 기본 규칙과 규율을 정립한 에스코피에, 그전에는 클래식 요리의 법칙을 확립한 카렘···. 시대가 변할 때마다, 선두에 서서 새로운 트렌드를 열었던 요리사들이 있었지.”
페르난도의 목소리에는 깊은 울림이 담겨 있었다.
“신기하지 않나? 어떤 시대이든, 요리계의 거장이 존재했거든. 무슨 지침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시대가 변하는 순간에 귀신같이 나타나 미식의 지평선을 넓혀왔지. 그 수백 년, 수천 년의 노력이 모여서 지금에 이른 거고.”
언젠가 페르난도가 했던 한 말이 떠올랐다.
— 자네, 후계자의 의미를 모르는군.
‘진짜··· 아무것도 몰랐네.’
한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난도가 물려주고 싶은 것은 더 불독이나 사피엔스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진짜 주고 싶었던 것은···
몇천 년간 요리사들 사이에서 계승되어 온 왕관.
“다시 한번 말하겠네.”
페르난도의 엄숙한 목소리가, 이번에는 선명하게 귓가에 올렸다.
“한길, 내 후계자가 되어주겠나.”
#
‘하비에르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네.’
파코는 속으로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만약 이 장소에 하비에르가 있었다면, 한길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페르난도가 다른 이에게 왕관을 건네주는 모습은, 파코조차 보기 힘들었으니까.
심장이 아릴 정도였다.
‘왜 이러지?’
이 순간이 올 거라고,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페르난도가 직접 말해주었으니까.
— 나도 로부숑처럼 직접 후계자를 지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대체 언제 나타날까?
페르난도는 툭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 얘기를 하곤 했다.
— 과거에는 100년에 1명꼴이었지만, 요즘은 시대의 흐름이 빨라졌잖은가! 그래서 나도 로부숑과 직접 만난 거고!
— 자네를 이을 후계자라면 레드제피나 아카츠, 보투라도 있잖은가.
— 에이, 그들은 안 되지. 후계자는 훨씬 더 젊어야 하네!
— 왜 젊은 사람이 필요한데?
— 로부숑은 세계 2차 대전에 태어나서 전후 시대에 성장한 인물이었지. 그래서 격식과 사치보다 미니멀리즘에 집중했던 거겠지. 나는 스페인 민주화 시대의 산물 아닌가. 독제 정권에서 벗어나 그동안 억압된 자유가 거리로 터져 나온 시대를 대표하고 있지. 그다음은··· 인터넷 시대려나? 대체 무슨 요리가 나오려고 그러지?
페르난도와 함께 있다 보면, 종종 대화가 안 통하는 경우가 있었다. 단어와 문장은 알아듣겠는데, 이상하게 대화를 따라가기는 어려웠다.
— 후계자가 있다고 치자. 만나면 뭘 하려고 그러나?
— 뭘하긴? 같이 놀아야지! 크하하하!
페르난도는 확실히 괴짜였다.
하지만···
파코는 페르난도를 존경했다.
— 우리는 시대를 초월하는 업적을 남기는 중이지!
페르난도에게는 비전이 있었다.
파코를 비롯한 더 불독의 모든 직원은
페르난도의 비전을 진심으로 믿었고, 지금껏 사명감으로 달려왔다.
페르난도는 모두의 자부심이었다.
그런 페르난도가···
왜 스스로 왕관을 내려놓으려는 건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 더 불독을 다시 열어야겠네.
줄리의 죽음 후, 페르난도는 조급함을 느끼는 듯했다. 항상 입으로만 하던 후계자 찾기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으니까.
— 앞으로 3년이면 찾지 않겠나? 더 불독 정도면 욕심 있는 젊은 요리사들이 몰려올 테니까.
— 글쎄. 요즘 애들은 너무 약아서 사명이나 미식의 발전보다는 자기 이익을 따지던데···.
파코는 후계자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페르난도에 견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었으니까.
파코가 처음으로 한길을 의식한 건, 페르난도의 3문 3답 시간이었다.
— 도롭이라는 건데··· 바다에서 나는 미역이 아니라 산에서 나는 미역이죠. 비가 오는 날에만 갑자기 마법처럼 솟아나는 재료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재료를 입에 담는 동양인.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마다하지 않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요리에는 진심인가 보군.’
재료 창고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는, 한길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 했다. 자유 시간에 재료 공부를 하는 실습생은 드물었으니까.
일반적으로 젊은 요리사들은,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에 끌려다니기 마련이다.
말로는 재료의 중요성을 논하지만, 막상 실행할 때가 되면 미리 짜놓은 틀에 강제로 재료를 욱여넣는다.
그런데···
한길은 진지하게 각 재료의 특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파코는 자신의 평가를 또 한
번 수정해야 했다.
「이름: 행크 리
1지망: 구매 파트
2지망: 구매 파트」
녀석은 오랜만에 보는 또라이였다.
아무도 선호하지 않는 구매 파트를 지원하는 것으로 모자라, 다른 선택지로 눈도 돌리지 않다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목표 지점을 정하면 무조건 돌진하는 게, 어느 누군가와 상당히 닮아 있었으니까.
‘꽤 하는데?’
한길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평가는 수정되어 갔다.
녀석은 예리했다.
시장에 한 번 따라온 것만으로 더 불독의 재료 수급 원칙을 이해했으니까. 게다가 질문 하나하나가, 더 불독의 핵심을 꿰뚫었다.
남들은 지나치는 디테일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능력. 요리 얘기만 하면 눈동자에 스며드는 생동감. 새로운 재료를 볼 때마다 흥분하는 모습까지···.
‘역시 닮았네.’
파코가 잘 아는 인물과 유사했다.
물론, 다른 부분도 있었다.
녀석은 상당히 음흉했으니까.
— 뭘 가르쳐준 거야? 대체 뭘 했기에 하룻밤에 애가 전혀 달라지냐고!
하비에르가 새하얀 얼굴로 달려온 날이 생각났다.
녀석이 천연덕스럽게 클래식 요리를 전혀 모르는 무지한 인간을 연기하다가, 본성을 드러내면서 하비에르를 놀라게 한 것이었다.
상당히 비뚤어진 성격의 소유자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오늘도 분주하네.’
녀석은 참 바쁘기도 했다.
무슨 산업 스파이라도 된 양, 레스토랑 곳곳을 기웃거리며 비밀을 캐내고 다니기도 했고. 알레한드로에게 은밀하게 접근하는 모습도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페르난도와 줄리를 한 몸에 합쳐놓은 것 같군.’
요리에 대한 광기와, 미친 추진력, 그리고 다소 부족한 양심까지. 모두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아니야! ··· 아니겠지?’
닮았지만, 페르난도와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 후계자는 아니지만, 어쩌면 제법 귀여운 후배는 될지 모르겠다.
파코는 한길을 페르난도 앞으로 끌고 갔다.
두 사람을 같은 공간에 두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녀석에게 사피엔스 프로젝트를 처음 보여준 날.
그날은 아직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사피엔스 프로젝트는 지나치게 어렵다. 더 불독의 직원들에게도 암호 같은데, 외부인들에게는 외계어로 보일 터였다. 심지어 오류 때문에 주요 해설까지 누락되어 있었고.
그런데···
‘읽고 있어?’
화면을 훑고 있는 한길의 눈동자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이 위화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물을 보고 있지만, 저 사람의 눈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인다는 자각.
이건···.
— 창의력에도 공식이 있는 건가?
— 이것 때문이었군요. 10년 전에 은퇴를 선언한 이유. 요리를 떠난 게 아니라, 요리를 초월하는 프로젝트를 발견하신 거네요.
녀석은 단 5분 만에 암호를 해독하고 더 불독의 역사를 읽어내렸다.
— 더··· 더 말해주겠나.
그리고 페르난도는 녀석을 발견했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놓아주지 않았고.
— 내가 떠난 후, 바통을 이어갈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나?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적임자인 것 같네만.
마치 천문학적 금액의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당첨금이 천만 원이면 팔짝팔짝 뛰며 기뻐하겠지만, 그 금액이 1,000억이라면? 당첨 번호를 몇 번이나 반복해 확인해도, 믿기지 않을 터였다.
빤히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게 되었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하면서.
그 의심은, 한길의 중탕기 요리를 보는 순간 증발해 버렸다.
페르난도와 더 불독이 합심해서 3년에 걸쳐 풀었던 숙제를, 녀석은 단 1달 만에 해치웠으니까.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난도가 맞았다.
이놈은 괴물이었다.
어쩌면··· 페르난도보다도 더한 괴물일지도.
이 녀석이 새로운 시대를 열 거다.
대체 어떤 시대가 될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그 중심에는 분명 이 녀석이 있을 거다.
“한길, 내 후계자가 되어주겠나.”
페르난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존경하는 리더이자 절친한 친우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친구를 위해 기쁘지만서도···
상실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상하게 속이 울컥했고, 눈가에 눈물이 고여왔다.
정말로··· 페르난도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함께 달려온 30년은 이제 정말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놈이라면.
파코는 한길의 얼굴을 살피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녀석, 쫄았군.’
한길은 항상 예의 발랐지만, 묘하게 건방진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음흉함을 제쳐두고 봐도, 이상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던 녀석이었고.
그런 놈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까부터 입 한번 뻥긋하지 않고 경직된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거대한 운명에 맞닥뜨렸을 때, 인간이라면 그 누구든 주눅 들기 마련이니까.
‘그래, 응원해 줘야지.’
파코는 격려의 마음을 담아 한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한길, 질문에 답해야지.”
그제야 한길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파코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다음 순간, 믿기지 않은 말이 들려왔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