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299)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299화(299/325)
299. 조건
“한길, 내 후계자가 되어주겠나.”
페르난도의 말에, 온몸에 무수히 많은 얼음 바늘이 박히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이건 분명··· 전율이다.
아피키우스, 스카피, 그리고 페르난도까지···.
한길은 새로운 시대를 연 거장들의 바로 옆에서 수행을 해왔다.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동경했으며, 언젠가는 자신도 저 자리에 서고 싶다고 항상 바라왔다.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심장이 터질 듯이 박동했고, 갑작스런 어지럼증이 덮쳐왔다. 생각이 야생마처럼 거칠게 질주하기 시작했지만,
‘침착해.’
한길은 억지로 고삐를 잡아당겼다.
거대한 무언가에 휩쓸리는 기분.
그 생소한 기분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여기까지 와서 충동에 휩싸여 결정을 내린다면,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테니까.
‘거절할 이유는 없어.’
냉정하게 보면,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페르난도가 지금 건네주는 것은 치트키에 가까웠으니까.
이 치트키 덕분에 더 불독은 몇몇 미식가들만 아는 스페인 변방의 맛집에서 세계 1위 레스토랑으로 우뚝 올라설 수 있었다. 페르난도가 생소한 요리를 과감하게 추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치트키 덕분이었고.
하지만 분명 단점도 있을 거다. 보상이 클수록 그에 따르는 위험도 크기 마련이니까.
더욱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나는 왜 페르난도의 후계자 자리를 거절하려 했었지?’
한길은 혼탁한 정신 속 어딘가에 묻혀있는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냈다.
한길이 후계자를 거부했던 이유는 크게 3가지였다.
하나, 한길은 더 불독을 이어나갈 생각이 없었다. 자기 레스토랑을 버리고 남의 레스토랑을 맡으라는 제안 자체가 터무니없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한길의 오해였을 뿐.
페르난도가 지금 건네주는 후계자 왕관은 한국에서, 한길이 이끄는 고르메 키친에서도 이어받을 수 있다.
둘, 한길은 페르난도의 요리 스타일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페르난도에게서 배운 점도 많지만, 한길은 필요한 것만 취할 생각이었다. 한 예로, 마술 트릭을 보는 듯한 페르난도 특유의 분위기는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는 없어.’
페르난도 역시 로부숑과 전혀 다른 스타일로 그 타이틀을 계승했으니까.
그렇다면 마지막은···
한길은 ‘제2의 페르난도’로 알려질 생각이 없었다.
페르난도 본인이 원하건 원치 않건, 그는 ‘분자요리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한길은 자신의 요리가 분자요리로 분류되는 걸 원치 않았다. 페르난도와의 유사성을 기준으로 평가받는 것 역시 사양이다.
하지만 이건 간단한 절차로 예방할 수 있다.
소소한 문제가 하나 더 있긴 했지만···
이 역시 해결책은 간단했다.
‘조건은 두 개뿐인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머리가 맑아졌다.
다시금 선명해진 청각이 파코의 목소리를 포착했다.
“한길, 질문에 답해야지.”
파코는 한길을 향해 따사로운 미소를 내리쬐고 있었다. 한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페르난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후, 본론을 꺼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
조금 전까지 근엄함을 유지하던 페르난도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다음 순간, 파코의 솥뚜껑 같은 손이 한길의 어깨를 잡으며 과격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무, 무슨 생각이냐, 이놈아! 이,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그런데 조건? 조, 조건?”
한길은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파코의 손을 걷어냈다.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해서 타협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별 건 아닙니다. 후계자 선언을 할 거라면, 방금 페르난도가 말한 전체적인 맥락을 함께 전달해야 한다는 거니까요.”
“맥락?”
“더 불독이나 페르난도 개인의 후계자가 아닌, 앞으로 미식계를 이끌고 갈 후계자라는 걸 명확히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페르난도의 얼굴에서 당황이 걷혔다. 그에 용기를 얻어 한길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왕이면 분자 요리와는 전혀 상관없고, 페르난도와 저의 차별점 위주로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그림자는 필요 없다는 건가?”
“그림자는 원래 본인에게 붙어있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이거, 소개 문구도 써주겠다고 말할 기세군.”
“허락해주신다면 나중에 참고하실 포인트를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푸핫! 파코, 이놈 봤나!!! 진짜 지독한 놈이라니까? 크크크크!”
페르난도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두 번째 조건은···”
“뭐야, 또 있는가?”
“이것도 별 건 아닙니다. 제 요리를 직접 맛보신 후에 최종 결정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페르난도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자네 요리라면 이미 맛보지 않았나?”
“제 개인 요리가 아니라 앞으로 열릴 3호점의 요리를 맛보셔야죠. 제 레스토랑을 방문하지도 않고 후계자라고 말하면, 공정성이 없어 보이니까요.”
잠깐 턱을 괴던 페르난도가, 얼마 가지 않아 피식 웃었다.
“자네가 잘도 공정성 때문에 그러겠다.”
“공정성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홍보 효과와 타이밍까지 노리는 것 보소. 발표 장소와 시기까지 정하고 싶은 것 아닌가.”
역시 페르난도는 만만치 않았다.
그의 말대로, 한길은 후계자 선언 시기를 늦추고 싶었다 .
3호점 오픈까지 남은 기간은 약 3달.
제아무리 흥미로운 뉴스라 해도, 3달이면 잊히기 마련이다.
후계자 선언은 오프닝 직후가 좋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바로 예약하고 찾아올 수 있는 시기여야, 방문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더 큰 소문으로 확산할 테니까.
미리 터트리면 김빠진 탄산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내가 자네 말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 2가지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마지막 남은 중탕기를 드리겠습니다.”
“중탕기는 이미 4개나 있는걸?”
“그리고 서비스로 이것도 넣어드리죠.”
한길은 폰을 꺼낸 후,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새로 도착한 메일에 첨부된 파일을 열고, 화면을 페르난도 쪽으로 내밀었다.
한국의 임시 공장에서 보낸 데이터를 영문으로 번역한 파일이었다. 한길의 마지막 협상카드이기도 했고.
“아직 번역본의 일부밖에 오지 않았지만, 번역이 완료되는 대로 전부 보내드리겠습니다.”
“이걸 나한테 줘도 되는가? 아까울 텐데?”
“제가 이걸 아까워했다면, 페르난도가 후계자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겠죠.”
페르난도의 눈꼬리가 내려가며 자상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잘 배웠군.”
“잘 가르쳐 주셨으니까요.”
페르난도는 기술을 독점하지 않았다.
큰 비용을 들여서 애써 발굴한 기술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기술을 독점하며 우위를 차지하는 건 소인배나 하는 짓이다. 앞서 나갈 자신이 없기에, 나 혼자 가진 기술에 집착하는 거다.
그에 반해 페르난도는··· 모두에게 동등한 무기를 쥐어주었다. 같은 시작점에서 출발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신이, 지금의 페르난도를 만들어낸 거다.
사업가들이 봤을 때는 멍청한 짓일지 몰라도, 요리사를 이끄는 리더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했다.
앞으로는 한길이 해야 할 일이었다.
중탕기는 그 시작이었고.
“조건을 받아들이지.”
“감사합니다.”
페르난도는 아쉬운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이래 봬도 오늘을 꽤 기대했는데, 몇 달이나 더 기다려야겠군. 그나저나, 알레한드로! 자네는 어떨 텐가?”
오늘 내내 넋을 놓고 있던 알레한드로의 얼굴에는 혼란만이 가득했다. 페르난도는 그런 알레한드로의 어깨 위에 한 손을 올렸다.
“후계자의 진정한 의미는 줄리가 말해주지 않았겠지. 이건 내가 내려야 하는 결정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그렇습니다.”
“얘기를 들었으니 알겠지? 더 불독의 정신과 영혼은 여기 이 싸가지 없는 놈이 강탈해갔네. 이곳은 빈껍데기만 남아있지.”
“···.”
“자네가 이루고 싶은 걸 이루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굳이 말로 안 해도 알겠지?”
알레한드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페르난도는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생일선물이네. 자네 생일은 12월이지만, 미리 받아두게.”
알레한드로는 봉투의 내용물을 꺼내 본 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행기표였다.
몰래 눈알만 굴려 그것을 확인한 한길은 조용히 헛웃음을 쳤다.
‘뭐야, 이런 거였나?’
알레한드로를 섭외할 때마다 페르난도가 벌였던 방해 공작은 역시 심술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알레한드로를 억지로 보낼 생각이었으니까.
“자네 후임자는 바로 찾아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떠날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주고.”
“네, 조율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로써 알레한드로까지 손에 얻었다.
한길 자신의 성장, 3호점의 미래 계획, 알레한드로, 그리고 미식계의 후계자 타이틀까지···.
이 소식을 들으면 최셰프와 유셰프가 어떻게 반응할지, 다른 녀석들은 얼마나 날뛸지···.
“한길, 뭘 또 그리 음흉하게 웃고 있나?”
우렁찬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파코가 와인병이 가득 담긴 나무 상자를 안고 있었다.
“그건 또 어디서 챙겨오신 겁니까?”
“오늘 송별회라니까 특별히 준비했지. 자, 숙제 마쳤으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달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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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와 파코는 무서운 기세로 와인병을 비웠다. 입을 벌리기만 하면 빨려 들어가는 와인을 보고, ‘술고래’라는 표현의 유래를 깨달을 정도였다.
“한길! 그런데 내가 커다란 문제를 하나 발견했지 않겠는가!”
페르난도가 벌건 얼굴로 딸꾹질을 하며 한길에게 어깨동무를 걸쳤다.
“무슨 문제요?”
“나,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후계자 얘기를 했는데? 자네가 말하는 타이밍 조건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알랭 더카스나 고르댕 람지도 다 아는 눈치였으니까.
“몇명한테 말씀하셨습니까?”
“그걸 어떻게 다 일일이 세나?”
“제 이름을 말한 건 아니겠죠?”
“아, 그건 두명밖에 없지.”
“그러면 상관없습니다. 정식으로 선언한 건 아니니까요.”
공식 발표가 아닌 추측성 루머는 나쁠 게 없다. 탄산이 들어 있는 캔을 열심히 흔드는 것이니까.
미리 뚜껑만 열지 않으면, 흔들수록 폭발력은 강해진다.
“크크크! 하여간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남다르다니까? 나 때는 로부숑한테 ‘왜 나냐?’는 질문하는 것만으로도 당돌하다고 여겨졌는데!”
“페르난도, 자네도 로부숑 답이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할 생각이었잖아?”
“에이, 설마!”
“혹시 모르니까 줄리한테 반박 기자회견 준비하라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랬나?”
파코가 페르난도의 주의를 끄는 동안, 한길은 슬그머니 알레한드로 옆으로 다가갔다.
알레한드로와는 나눠야 할 얘기가 많다.
나중에 전화로도 할 수 있겠지만, 이왕이면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는 게 좋고.
“한국에는 언제쯤 올 수 있어?”
“글쎄, 후임을 찾고 인수인계도 해야 하니까··· 2주에서 1달 정도 걸리지 않을까?”
“아, 근무 조건이랑 희망 연봉도 알려줘. 한국에 와서 지낼 집은 이쪽에서 알아봐 줄게. 비자 절차는 이미 알아보고 있고.”
“빠르네?”
“와줄 거라 믿고 있었거든. 그리고 3호점의 방향성에 대한 얘기도 조금 하고 싶은데···.”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하려던 찰나, 어깨에 육중한 무게가 느껴졌다.
“두 사람! 술맛 떨어지게! 이런 자리에서는 일 얘기 하는 거 아냐!”
파코가 그 엄청난 체중으로 알레한드로와 한길을 짓누르고 있었다. 한편, 페르난도는 한길의 오른팔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대선배와의 술자리 아닌가! 삶의 지혜를 얻어갈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그러게! 심지어 페르난도는 세계 제일의 요리 천재 아닌가!! 어여 질문을 해보게!!! 진짜, 우리 인생을 엮으면 책 50권은 나온다니까!!!”
한길은 조용히 알레한드로와 시선을 교환했다.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이 노친네들을 재워놓고 얘기하자.’
아무래도 체력 면에서는 한길과 알레한드로가 유리했다···고 생각했지만,
“푸하하하! 페르난도! 아직 더 마실 수 있지? 우리 모처럼 아침까지 달리자고!”
“나는 자체 해독기능이 있는 걸 알잖는가! 이 좋은 시간을 수면에 빼앗길 수 있나!”
파코와 페르난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정정해졌다.
심지어 각자 한길과 알레한드로를 한쪽에 끼면서 놓아줄 생각조차 않았다. 일부러 두 사람을 찢어놓으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그냥 집에 간다고 할까?’
이만 귀가하겠다 하고 뒤에서 알레한드로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인데, 페르난도에게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딱 한두 시간만 시간을 주면 되는데.’
잠시 저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방해꾼만 있으면 된다. 결국, 한길은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서 몰래 지원군을 요청했다.
전화를 걸기에는 다소 늦은 시간이지만, 페르난도와의 뒤풀이 때문이라고 하면 상대는 환영할 터였다.
“라엘라?”
— 한길, 너 오늘 안 들어와?
“페르난도랑 송별회 중이라서 아마 새벽에 들어갈 듯 해. 너도 올래? 이왕이면 크리스토프나 매튜도 끌고 오고.”
— 뭐? 왜 갑자기?
그런데 예상외로 라엘라가 즉답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이럴 사람이 아닌데···.
“싫어?”
— 아니, 그게 아니라··· 애들이 너 마지막 날이라고 서프라이즈 파티 준비해두고 있었거든. 네가 늦으져서 벌써 반은 자러 들어갔지만.
“서프라이즈 파티?”
전혀 예상 못 했던 일이다.
솔직히 라엘라와 크리스토프, 매튜를 빼면 친분이 있는 실습생도 없었고.
짐작이 가는 건···
“설마, 요리 차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 다 알면서 왜 그래? 물주님을 위한 송별회란다.
마지막 날까지 용돈을 벌고 싶어 하는 실습생들이 꽤 있는 모양이었다.
“깨어있는 건 몇 명이야?”
— 지금은 9명.
그 정도 인원이면 나쁘지 않다.
요리까지 있다면, 페르난도의 주의를 더 쉽게 잡아끌 수 있을 테고.
“지금 당장 갈게. 요리는 15분 내로 먹을 수 있게 준비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