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307)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307화(307/325)
307. 안 하는 것, 못 하는 것
몇 군데 더 농장에 들렀다가 숙소에 도착하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지이익—
방에 들어선 노셰프는 바로 짐가방을 풀었고.
그 안에서 나온 물건들을 본 한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뭐야?”
“이 형님이, 오늘을 위해서 진짜 아끼는 컬렉션을 들고 왔다는 거 아니냐!”
플라스틱처럼 생긴 하얀 병에는 빨간 라벨이 붙어있었고, 그 위에는 한자로 무언가 가득 적혀있었다.
처음 보는 병이지만··· 지금껏 노셰프와의 출장을 생각해보면, 저 병의 정체는 하나밖에 없다.
“또 술이야?”
“그냥 술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이게 그 유명한 마오타이주니까. 너랑 양주는 먹어봤지만, 백주는 안 먹어봤잖아?”
마오타이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다.
귀주모태라고도 불리는 고급 고량주로, 중국의 3대 명주로 여겨진다.
국빈 만찬에서 대접하는 술로, 특이하게 술에서 간장 맛이 난다는 말을 듣고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가격이 만만치 않은 거로 아는데···
노셰프의 가방에서 똑같이 생긴 술병이 무려 8개나 나왔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노셰프는 전용 잔까지 챙겨왔다. 미니어처 와인잔처럼 생긴 특이한 잔을.
“그걸 다 마신다고?”
“에이, 설마. 중국에서는 8이 행운의 숫자라고 하니까 혹시 몰라 가져온 거지.”
“···.”
“걱정 마, 여긴 공기가 좋으니까 취하지도 않아.”
“···.”
“그리고 공기가 좋으면 술맛도 더 좋아지거든!”
“진짤까?”
“뭐가?”
“진짜 공기 청정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나 해서.”
그러고 보니, 산에서 먹는 밥은 유난히 맛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것도 실험해보면 재밌을 것 같았다.
똑같은 요리를 일반 홀에서 먹어보고 먼지가 전혀 없는 청정실에서 먹어본다면, 진짜로 맛이 달라질까? 어쩌면 먼지의 유무보다는 피톤치드가 맛에 영향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청정실에 피톤치드를 더해서 맛 비교를···
짜악—
등에 느껴지는 통증에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셰프가 열을 내고 있었다.
“또 일 생각이냐? 명주를 앞에 두고 예의가 없네, 이 새끼! 가서 안주나 만들어와!”
“이래서 장 봐오자고 한 거야?”
“이 형님이 다 생각이 있다니까! 어차피 여기는 신호도 잘 안 터지잖아? 신선놀음한다 생각하고 지금에 집중해!”
한길이 간단한 버섯볶음을 만드는 사이, 노셰프는 날쌘 몸놀림으로 술상을 차렸다.
“음, 좋아. 이거지!”
한 잔을 먼저 시음한 노셰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길에게도 술잔을 내밀었다.
“마셔봐! 중국 3대, 아니, 세계 3대 명주라고 불리는 술이니까!”
술맛은 좋았다.
한길의 입맛에 간장 맛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왜 그런 말을 듣는지는 알 것 같았다.
‘술에 풍미가 있네.’
곡물 향과 훈제 향, 과일 향 같은 다양한 맛이 느껴졌는데, 그 위에 치즈에서나 날법한 감칠맛까지 감지되었다. 그 와중에 청량감이 느껴지는 것도 신기했고.
도수가 높은지 입안이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렸지만, 의외로 목 넘김은 부드러웠다. 입안에 남은 잔향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요리와의 궁합이 기가 막혔다.
요리에 술을 곁들이는 게 아니라, 술이 소스가 되는 듯한 신기한···.
‘아, 이럴 때가 아니지.’
한길은 고개를 흔들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술을 마시기 위해 이곳에 온 건 아니었으니까.
오늘, 숙소에 도착하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형, 나 상담할 게 조금 있는데···.”
“또 일 얘기냐?”
“일은 아니고, 오늘 너튜브 영상 편집본이 나왔거든.”
노셰프는 방송 경력만 10년이 넘는다.
조언을 구하려면 이보다 더 적합한 상대는 없다.
한길은 오늘 제작진에게서 들은 얘기를 요약해서 알려준 후, 질문했다.
“형이 보기에도 내 캐릭터, 재미없어?”
“니가 그런 것도 신경 썼냐?”
“신경 쓰는 것보다는 궁금해서. 자연스럽게 촬영에 임해봤는데 반응이 안 좋았거든. 인간미가 없다는 말도 듣고.”
“우와, 말 세게 하네?”
노셰프는 언제 채워졌는지 모를 잔을 입안에 털어 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길의 잔도 마르지 않고 있었고.
“걱정 마, 너도 인간미는 있으니까. 그냥 벽 치는 느낌이 있어서 그리 표현한 거겠지.”
“벽을 친다고?”
“너, 나한테도 말 놓을 때 까지 1년이 넘게 걸렸잖아?”
“그랬나?”
“그것도 그렇고. 너, 나 돌싱인 건 알았냐?”
조금 뜬금없는 고백에 한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알아야 해?”
“너 빼고 나머지 녀석들은 다 알고 있을걸?”
“···.”
“사람이라는 게, 만날 때 일 얘기만 하지는 않잖아? 그런데 너는 개인적인 얘기를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있거든.”
“공과 사를 섞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얌마! ‘공’과 ‘사’면 나는 ‘사’ 아니냐? 너랑 같이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었으니까.
노셰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게 영상에도 드러나는 거지. 니가 먼저 거리를 두니까, 다른 사람도 다가가기 어려운 거고. 다가가도 불편해하는 게 보이니까 이쪽도 불편한 거고.”
“그 정도야?”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고, 일적으로는 괜찮아. 인간적으로 어설퍼서 그러지. 왜, 그, 큭! 크큭!”
큰 소리로 떠들던 노셰프가, 돌연 고개를 푹 숙이며 키득거렸다.
“가끔 너를 보다 보면, 유치원생 같은 구석이 있거든.”
“유치원생?”
“유치원에 가면, 노는데 끼지 못하고 쳐다만 보는 애들이 있잖아? 같이 놀고는 싶은데, ‘같이 놀자’는 그 말 한 마디를 못하는 애들. 그러면서 괜히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그건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냐! 니네 요리사들 노는 거 볼 때, 니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고는 있냐?”
“···.”
조금 뜨끔했다.
같이 놀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없지만, 주방 녀석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흐뭇했으니까.
“그냥 솔직하게 놀아달라고 해.”
“그런 거 아니라니까.”
“걔들은 눈물 흘리며 좋아할걸?”
“형, 이쪽은 진지하니까 장난치지 말고. 진짜 내 캐릭터성이 그 정도로···”
“봐봐, 또 일로 숨어버리지.”
노셰프는 두 번째 병을 따고 술잔을 가득 채웠다.
“제작진이 모범생이라고 말한 건 조금 이해가 가. 넌 뭔가 애쓰는 느낌이 있는데 그게 어딘가 교과서적이거든. 뭔가 숨기는 것 같기도 하고.”
“딱히 숨기는 건 없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그리 보인다는 거지. 분명 궁금해하는 녀석들도 있을 테고.”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숨기려 한 적은 없다.
개인적인 얘기가 나오면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일하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 때문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레스토랑의 홍보를 위해 필요하다 했으니까.
‘별 상관없지 않나?’
감성팔이든 사연팔이든, 필요하다면 뭐든 할 수 있다.
숨길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엄청난 일을 겪었던 것도 아닌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쫄지 마, 새꺄. 안 물어볼 거니까.”
“어? 안 쫄았는데?”
“너 지금 완전 사자 앞에 토끼 같은 거 아냐?”
듣고 보니 온몸에 긴장감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다.
살면서 약간의 불행을 겪긴 했지만, 그걸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왜지?’
불편했다.
상당히 불편했다.
아마···
익숙지 않아서 그런 걸 거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사적인 얘기를 털어놓은 지도 오래되었다.
최근에 알레한드로와 비슷한 대화를 나눈 걸 제외하면, 마지막으로 그런 얘기를 한 건··· 학창 시절일 거다.
이런저런 일을 겪기 전에는 나름 친구들도 꽤 있었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난 직후에는 친구들에게 사정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그들이 난감해하는 걸 보고서는 조금 조절해야 했다.
수능 걱정을 해야 하는 판에. 집 안에 딱지가 붙어있고, 갈 곳이 없어서 고시원을 전전한다는 말은 그리 즐거운 주제가 아니었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친구들과 더욱 소원해졌다.
그들은 평범하게 대학 생활을 즐기는 반면, 한길은 생계를 위해 일하기 바빴으니까.
만날 시간도 없거니와, 괜히 무거운 얘기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친구들의 소개팅이나 과제, 축제 얘기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고. 더 솔직히 말하면, 술값을 낼 여력도 안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옛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겼고.
그 후로 딱히 친하게 지낸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외로운 것도 한가할 때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니까.
악덕 사장이 월급을 주지 않아 몇 달째 임금이 밀려도 월세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저금을 해야 했고, 그 후로는 가게를 차리기 위해 돈을 모아야 했다.
가게를 운영한 후에는 더 많은 고민에 빠져 지냈던 것 같다.
요리를 하고 싶지만, 이대로 요리로 평생 먹고살 수 있을까 걱정하기 바빴고.
만에 하나, 사고라도 당해서 요리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각종 불행에 대비하기 바빴다.
불안은 느낀 적 있어도, 딱히 사람이 아쉬웠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기간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주변에 사람도 많고.
그런데도 입은 선뜻 열리지 않는다.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어서 말을 안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러면 꼭···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 같잖아?’
그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조금···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
확인이 필요하다면, 노셰프가 적임자였다.
고마운 선배이기도 했고. 만에 하나··· 사이가 어색해진다고 해도, 외부인이니 일적으로 피해가 갈 일도 없다.
“형도 궁금해?”
“뭐가?”
“그냥, 나에 대한 것.”
노셰프는 한길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며 버섯을 입안에 넣는 데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뭐, 조금 궁금할 때도 있고?”
“그런데··· 왜 안 물어봐?”
“그걸 꼭 지금 물어봐야 해?”
“···.”
“준비되면 니가 니 입으로 말하겠지. 나랑 평생 안 볼 거냐? 니가 아무리 굼떠도 죽기 전에는 말하겠지, 뭐.”
“··· 조금 의외네.”
“뭐가?”
“조금 어른스러운 것 같아서.”
“마, 내가 너보다 10년을 더 살았다!”
노셰프는 아무렇지 않게 세 번째 병을 따고 있었다.
한길은 속으로 결의를 다진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 예습 좀 부탁해도 될까?”
“무슨 예습?”
“개인 인터뷰 하기로 했잖아. 형은 방송 경험도 많으니까 제작진이 할 질문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병뚜껑을 돌리던 손이 멈췄다.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노셰프를 보니 괜히 무안해졌지만, 노셰프는 이내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하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너, 이 새끼. 진짜지?”
“어.”
“잠깐 기다려 봐.”
노셰프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지이이익—
순식간에 짐가방이 열렸고, 가방 속에서 미니어처 와인잔이 무려 10개나 더 나왔다.
단둘이 온 출장인데 웬 잔을 이리 많이 챙겨온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셰프는 10개의 잔을 일렬로 나열한 후, 그 안에 백주를 가득 채워 넣고 있었다.
“형, 뭐 하는 거야?”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벌칙이 있어야지! 질문에 제대로 답 못하면 이걸 다 원샷해. 동기부여라고 생각하고.”
마오타이는 독하다.
이걸 연달아 10잔이나 마시는 건 말이 안 된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 위험할 수도 있다.
“시작해볼까?”
하지만 노셰프는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어딘가 섬뜩한 눈빛에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지금 와서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쪽에서 허락해줄 것 같지도 않았고.
뭔가 적당한 변명을 찾기 위해 머릿속을 헤집던 그때,
띠리리—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은 언제나 한길을 위기에서 구원해주는 존재였다.
“쳇, 최셰프냐?”
노셰프가 화면에 뜬 이름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런데 여기, 신호가 터졌냐?”
“왔다 갔다 하더라고. 중요한 전화 같으니까 받고 해도 될까?”
“하긴, 이 시간이면 급한일이겠네.”
노셰프의 말을 듣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덧 새벽 3시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간에 전화를 건다면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한길이 전화를 받자, 건너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셰프! 이제야 연락이 되네요. 깨톡은 보셨습니까?
— 아뇨. 여기 신호가 잘 안 잡혀서 아직 확인을 못 했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 그게··· 일이라면 일이지만, 레스토랑 일은 아닙니다. 아니, 레스토랑 일이기도 하죠.
최셰프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게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윽고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유셰프가··· 한동안 못 나올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