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315)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315화(315/325)
315. 진짜 마지막입니다.
그 후로 며칠.
한길은 오전에는 3호점, 오후에는 2호점으로 출근하는 일정을 반복했다.
아직 유셰프의 미각이 정상화되지 않은 관계로, 맛 평가가 필요한 부분은 한길이 직접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이 토마토, 중탕기에서 몇 시간 돌렸지?”
“(17시간입니다.)”
“그 이상으로 돌린 것도 있어?”
“(12시간, 17시간, 24시간, 40시간. 이렇게 4개 시도해봤는데요.)”
“다 가지고 와. 비교해보고 결정하게.”
“(예스, 셰프!)”
요리사 한 명의 메뉴를 확인하던 한길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시선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고개를 휙 돌리는 유셰프가 시야에 들어왔다.
‘또···인가?’
그날 이후, 유셰프는 두 번 다시 마오타이 사건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상한 시선이 느껴지면, 그 끝에는 어김없이 유셰프가 있었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마치 한길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셰프, 여기 있습니다!)”
그 사이 요리사가 중탕된 토마토를 들고 왔고, 한길은 그것을 일일이 시식하며 맛을 비교해보았다.
“오래 중탕한 게 좋은데 조직감이 아쉽네.”
“(넵! 저도 그래서 식감을 우선시한 거였거든요.)”
“맛이랑 식감을 둘 다 살릴 방법도 있을 것 같은데? 한천을 추가해서 한번 시도해봐.”
“(예스, 셰프!)”
“내일까지 완성해서···”
이번에는 일부러 대화 도중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갑작스러운 타이밍에, 이쪽을 쳐다보던 유셰프가 미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눈이 마주쳤다.
‘역시.’
그녀는 한길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셰프?)”
“내일까지 완성해서 보여줘. 가서 일 봐.”
“(예스, 셰프!)”
한길은 요리사를 보낸 후, 유셰프에게로 다가갔다.
“왜 저를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궁금해서요. 보는 것도 안 되나요?)”
“눈빛이 이상해서 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상한데요?)”
설명하고 싶어도 너무 미묘한 차이라 설명이 안 된다. 그렇다고 아예 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원래 하던 방식대로 하세요.”
“(네.)”
한길은 멀어지는 유셰프의 뒷모습을 보며 얼굴을 와락 구겼다.
‘한번 따로 얘기해야 하나?’
역시···
그날 이후로 유셰프의 행동이 이상하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한번 ‘없었던 일로 하자’의 의미를 못 박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입으로 그날을 언급해야 한다.
그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냥 조금 더 거리를 두는 게 좋을 터.
최대한 유셰프와 멀리 떨어진 구역에서 다음 작업을 이어가던 한길은, 갑자기 코앞에 스치는 하얀 손에 화들짝 놀라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의 주인은 유셰프였다.
“(죄송해요, 저도 식초 써야 해서. 왜 그리 놀라세요?)”
역시 불편했다.
유셰프가 다가올 때면, 같은 극의 자석을 억지로 붙이려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밀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유셰프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한길이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본심을 들은 사람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약점을 잡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셰프. 버터, 타는데요?)”
지척에서 들려오는 유셰프의 목소리에 놀라 팬을 확인해 보니, 금색으로 빛나야 하는 버터가 옅은 갈색이 되어 있었다.
“··· 브라운 버터를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면 저으셨어야죠.)”
“···.”
“(셰프, 요즘 실수가 좀 많지 않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자신이 보기에도 잔 실수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한길은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즘 피로가 쌓여서 그렇습니다. 오늘은 이만 마무리하고 가보겠습니다.”
한길은 서둘러 뒷정리를 하고 3호점을 나섰다.
하지만 주차장으로 향하는 유일한 입구에서, 반갑지 않은 존재와 다시금 마주쳤다.
유셰프였다.
“(셰프, 오늘 일 끝나고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으세요?)”
“무슨 일입니까?”
“(여기서 말하기는 조금 그래서··· 퇴근하고 셰프 집으로 갈게요. 그때 말해요.)”
#
그날 저녁,
집에 도착하니 거실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거실 한가운데에 기다란 삼각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니까.
“이건 뭡니까?”
한길의 질문에 삼각대를 조절하던 유셰프가 태연하게 답했다.
“(내일, 인터뷰라면서요?)”
내일은 한길의 개인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다.
너튜브 영상에 찔러넣을 인터뷰로, 한길의 개인사를 공유해야 하는 인터뷰다.
“그게, 무슨 문제 있습니까?”
“(원래 노선배님과 예행 연습하기로 했는데 바빠서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요?”
“(한 번이라도 카메라 리허설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유셰프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왔지만. 한길은 의식적으로 얼굴 근육을 움직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지만, 리허설은 괜찮습니다. 준비는 알아서 잘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유셰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시선이다.
지난 며칠간 한길을 괴롭히던 시선.
정말로 노셰프와 예행연습을 못 할 정도로 바빴냐고, 일은 핑계가 아니냐고 추궁하는 듯했다.
이래서 싫었던 거다.
약점이 잡히는 건.
“(준비됐다면 다행이네요. 한 번만 보여주세요.)”
“유셰프가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들어가시죠.”
“(셰프, 요즘 상태 이상한 거 알아요?)”
“···.”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죠? 얼굴, 완전 칙칙해요.)”
그녀의 말대로, 한길의 불면증은 극에 달해 있었다. 지난 며칠간의 수면 시간을 합하면 총 4시간도 채 되지 않을 거다.
아무래도 얼굴이 눈에 띄게 나빠진 모양이다.
어차피 숨길 수 없다면···
인정하는 편이 낫다.
“요즘 긴장이 되어서 그런지,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습니다. 모두가 걱정하지 않게, 앞으로는 컨디션 조절도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새벽 1시였다.
“차가 끊겼겠네요.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가시죠.”
한길은 서둘러 차키를 챙기고 나섰지만, 유셰프는 따라오지 않았다.
“안 가십니까?”
“(카메라 리허설, 딱 한 번만 해봐요. 그 후로는 제가 알아서 택시 타고 갈게요.)”
“저도 빨리 쉬고 싶습니다. 유셰프도 빨리 들어가시죠.”
“(딱 한 번만요.)”
하여간 보통 고집이 아니다.
인터뷰가 잘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지랖을 부리는 건 알지만,
‘적당히 하지?’
솔직히 고마움보다는 짜증이 일었다.
한길은 수면 부족으로 체력이 한계에 달한 상태다. 유셰프의 고집에 맞춰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쉽사리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니 조금 강하게 말하는 게 좋을 터.
“예행연습은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내일 할 수 있으면, 오늘도 할 수 있잖아요? 시간도 오래 안 걸리는데···.)”
“유셰프. 제가 상사라는 걸 기억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필요 없다고 하면 필요 없는 겁니다. 선을 지키세요.”
가볍게 경고하고 현관문을 열었지만, 유셰프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이 불청객을 처리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무서운 거죠?)”
갑자기 들려온 말에, 손발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숨기려 하지 마세요. 인터뷰하기 두려워서 요즘 상태가 이상한 거잖아요?)”
한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손발에서 시작된 냉기가 얼굴까지 점령한 것이다.
“선, 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
마지막 경고였다.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든 눈앞의 여자를 치우고 싶었다. 강제로 그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고 집 밖으로 끌어내서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누구는 힘에 의존하고 싶은 간신히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데···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요, 저 같아도 싫을 테니까. 정 힘들면 무리할 필요 없다고도 생각하고요. 상태가 안 좋으면 차라리 인터뷰를 취소하는 게 어때요?)”
누구는 아무렇지 않게 입을 나불거리고 있다.
“유셰프, 봐주는 것도 한두 번입니다.”
“(네?)”
“술에 취해 몇 마디 나눈 거로 쓸데없이 아는 척하고 나대지 않는 게 현명할 거라는 얘깁니다.”
“(저는 그냥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해보자고···.)”
“그런 걸 두고 주제넘게 나댄다고 하죠.”
유셰프는 겁먹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런 표정은 처음 본다.
한길의 입매가 뒤틀렸다.
그러게 얌전히 닥치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재능 하나 믿고 언제까지 나댈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재능을 가진 이가 어디 유셰프 하나뿐이겠습니까?”
“(···.)”
“여기를 나가면, 당신을 받아주는 곳이 있기는 합니까? 남아있으려면, 쓸데없는 참견 말고 얌전히 본인의 업무에만 집중하세요.”
“(딱 봐도 이상한 게 보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유셰프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입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는 법이죠.”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라는 게 있다.
유셰프는 아무렇지 않게 그 선을 넘고 있었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 헤드 셰프 따위, 필요 없습니다. 결정은 유셰프가 내리시죠. 제 방식에 따를 겁니까, 아니면 나갈 겁니까?”
예외는 없다.
여기 남아있으려면, 그녀도 룰을 따라야 했다.
“(···.)”
유셰프는 아무 말 없이, 억울한 눈빛을 하며 한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너무 가소로워서 헛웃음을 치자, 유셰프의 동공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가방을 챙겨 들고 걸음을 옮겼다.
콰아앙!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녀의 결정을 알려주었다.
#
‘이제야 나갔네.’
후련했다.
유셰프는 배려심도 없고, 성격도 나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인재다.
한길이 아는 모든 인맥을 통틀어 가장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으며, 레스토랑을 심사하는 사람의 등에 대고 가운뎃손가락을 날릴 정도로 충동이 제어가 안 되는 인물이었다.
솔직히, 재능만 아니었다면 기용하지도 않았을 거다. 어디에 가도 혼자 툭 튀어나오는 이물질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차라리 잘 된 거야.’
한길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계획을 세웠다.
유셰프가 한길의 왼팔 역할을 해온 건 사실이지만. 왼팔이 없다고 사람이 죽는 건 아니다.
한동안은 한길이 시간을 쪼개서 2호점과 3호점을 동시에 관리하면 된다. 그러면서 2호점을 이끌 새로운 헤드 셰프를 찾으면 되고.
‘쉽지는 않겠지.’
어리고 경력도 다소 부족한 유셰프를 헤드 셰프로 고용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호점은 오스피탈리타 이탈리아나 인증을 받아야 했으니까.
상세한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기준에 맞는 셰프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 사람을 구하기 힘들면, 이탈리아 현지 셰프를 데려와서 통역을 붙이면 그만이다.
돈은 많이 들겠지만, 못할 일은 아니다.
‘이번에는 인성도 봐야겠네.’
이왕이면 침착하고 겸손한 인재가 좋다.
욕설을 입에 달고,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은 처음부터 제외해야겠다. 지켜야 할 선을 꼭 지키는 사람을 고르는 게 좋을 테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한길은,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최대한 맑은 정신으로 임하는 게 좋을 터.
그렇게 생각하며 잠을 청하려는데,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귓가에 요리사들의 아우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우리 여왕님이··· 가셨다고요? 저희를 버리고?’
‘우리, 버림받은 건가요?’
‘셰프, 데리고 와주세요!’
녀석들을 진정시키는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거다. 안 그래도 바쁜 시기에, 정말 마지막까지 민폐다.
그래도···
녀석들은 단순하다.
새로운 헤드 셰프가 오면 적응도 빨리할···
생각을 이어가던 도중, 갑자기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둔 게 맞겠지?’
유셰프의 퇴장 방식을 생각하면, 제 발로 나갔다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사표는커녕, 본인 입으로 그만두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으니 법적으로 따지면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모처럼 새로운 셰프를 구했는데, 뒤늦게 유셰프가 나타나서 자신은 퇴사한 적이 없다고 우긴다면 여러모로 일이 꼬인다.
ㄴ 확인차 메시지 보냅니다. 퇴사 의사가 있으면 서면으로 통지하세요.
한길은 폰을 지켜보면서 유셰프가 톡을 읽었는지 확인해보았지만. 열람했다는 표시는 뜨지 않았다.
ㄴ 확인하는 대로 시간 관계없이 즉시 연락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도 한참을 기다렸지만, 유셰프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벌써 자는 건가?’
아니, 아직 잠들 시간은 아니다.
유셰프의 집은 인천이다. 이곳을 나선 후 바로 택시를 탔다면, 지금쯤 집에 도착해서 씻고 있을 시간이다.
‘설마, 집에 아직 안 간 건가?’
한길의 집에서 몇 골목만 가면, 술집들이 즐비해 있다. 그래서 이 인근은 밤늦은 시간이 되면 취객들이 많았고.
유셰프는 누구나 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볼 정도의 외모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얼굴은 예쁘장한 주제에, 입은 걸다.
거리를 걷다가, 취객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벌어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겠지.’
어린 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인데, 혼자 귀가도 못 할까. 괜한 걱정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눈을 감는데,
후두둑—
창밖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빗방울은 머지않아 본격적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역시··· 찝찝하다.
한길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전화를 집어 들었다.
뚜우우우—
뚜우우우—
신호음이 몇 번이나 울려도, 유셰프는 받지 않았다. 기다렸다가 다시, 또다시 걸어도 마찬가지.
‘무시하는 거겠지?’
방금 퇴사한 인간이, 상사의 전화를 받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다.
— 나, 진짜 죽일 년이라니까?
마오타이 사건이 있던 날,
비밀을 털어놓은 건 한길만이 아니었다.
유셰프 역시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했더랬다.
어머니에게 했던 못난 행동들, 속죄를 위해 요리를 택한 얘기, 그리고 속죄를 마치기 전에 어머니를 떠나보내면서 느낀 죄책감까지···
— 근데 막 핑~ 하고 온 거야! 엄마 때문이 아니야!! 난 요리가 조아! 그냥 요리가 조은것도 아뉘고, 여기서 요리하는 게 조타고! 그 바보들 아니었으면 나, 지금도 방문 걸어 잠그고 마아악 울고 이쓸껄?
갑자기 이상한 가려움증이 올라왔다.
피부밑에서 무언가가 사정없이 몸을 갉아 먹는 듯한 묘한 감각. 온몸을 갈고리로 긁어대는 듯한 꺼림칙한 감각이었다.
결국, 한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깐 갔다 오자.’
유셰프의 주소는 직원 연락망에 있다.
집에 도착했는지 확인만 하고 오는 게 좋을 거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을 테니까.
왜 온 거냐고 묻는다면··· 사직서가 필요하다고 말하자. 그렇다. 이건 법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으니 명확히 해야 하는 일이다.
서둘러 차키를 챙기고 나선 한길은, 현관문을 열다가 도중에 멈칫했다.
‘···?’
문이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문밖에 무언가가 있었다.
반밖에 안 열리는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밖으로 나가보니,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언제부터 있었던 겁니까?”
유셰프였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는 유셰프는, 쫄딱 젖은 상태였다.
“(카메라 리허설, 하실 거예요?)”
여전히 저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저런 몰골로.
현관 앞에는 차양이 있지만, 그렇게 넓지 않아 비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셰프의 얼굴과 목덜미에는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미역처럼 감겨있었고, 날카로운 턱밑으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셔츠는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올랐다.
“집에 안 갈 거면 안에서 죽치고 있지, 여기서 뭐 하는 짓입니까?”
“(리허설, 하실 거예요?)”
“할 말 있으면 들어와서 하세요.”
“(리허설 해주시면 들어갈게요.)”
“적당히 하라고 했습니다.”
“(아침까지 기다려드릴게요. 그때까지도 안 해주시면 저, 진짜로 그만둘 거예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짜증 나는 여자다.
“기다릴 거면 들어와서 하든가.”
“(어차피 리허설 안 하실 거면, 앞으로 두번 다시 얼굴 볼 일도 없잖아요? 감기에 걸리든 말든 신경 쓰실 것 없어요.)”
뭐 이런 민폐녀가 다 있나?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이런 생떼가 통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차피 한길은 그녀의 요구에 응해줄 생각이 없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볼 일 없으니, 그녀가 비를 맞든 말든 알 바 아니다.
본인이 좋아서 한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비 좀 맞는다고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그걸 아는데도···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돌아서려고 시도해 봐도···
저런 유치한 땡깡을 받아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문 하나 닫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몸 안의 모든 세포가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돌한 말과 달리, 유셰프는 버려진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아···.”
한길은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어렵게 말을 꺼냈다.
“들어오세요.”
“(리허설, 해주시는 거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다.
한길이 유셰프의 부모는 아니지만, 뭔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대가 페르난도나 스카피였다면,
절대 져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하지만, 유셰프에게는···
아니, 아마 유셰프뿐 아니라 최셰프나 슬아나 자신의 요리사들에게는···
“진짜 마지막입니다.”
이상하게 져 줄 수밖에 없는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