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316)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316화(316/325)
316. 화해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전 잠시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비도 오는데 굳이 나가실 것까지는···.)”
“차에 두고 온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한길은 유셰프에게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건네준 후, 밖에 주차된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유셰프를 배려한다는 명분을 댔지만. 사실은 방해받지 않게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후우···.”
차 문을 걸어 잠근 한길은 크게 숨을 내쉰 후, 시선을 조수석으로 옮겼다.
조수석에는 파일 바인더가 하나 있었다.
바인더를 열자, 지난 며칠간 한길을 괴롭힌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터뷰 예상 질문지였다.
며칠 전 전달받은 것으로, 각 질문 아래에는 한길이 손글씨로 적어둔 예상 답변이 있었다.
종이는 한눈에 봐도 난잡했다.
문장을 적었다가 그 위로 선을 그어 지우고, 또다시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지우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단어들이 한길의 현 상태를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었다.
사실···
한길은 인터뷰에 어떻게 답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인터뷰의 목적은 명확했다.
자신을 매력 있는 사람, 응원하고 싶은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 사람인 이상, 살다 보면 사연이 한둘쯤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걸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인간미를 부각할 수 있어요.
— 결점을 장점으로 만들면 됩니다.
제작진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참으로 어려운 과제였다.
지금까지 수행해 온 그 어떤 퀘스트보다 더.
‘이걸 보면 응원하고 싶어진다고?’
한길의 눈이 재빠르게 종이를 훑어내렸다.
자신의 결점을 폭로하는 단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혼]. [대물림.]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후,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어머니는 이혼에 반대하셨더랬다. 어떤 어려움이든, 가족이 함께 극복하는 게 좋다고.
하지만 결국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셨다.
— 당신 마음은 알지만, 한길이한테까지 이런 삶을 물려줄 수는 없잖아?
그런 말에 설득당한 것이다.
한길은, 가정을 파탄 낸 원인 제공자였다.
이게··· 응원하고 싶어지는 사연인가?
[과로사]어머니의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어머니가 평소에 심장 질환을 앓으신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홀로 자식을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영향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역시 한길의 탓이었다.
이게··· 응원하고 싶어진다고?
[밑바닥부터 시작]어머니가 돌아가실 당시, 한길은 아직 군인 신분이었다.
직계 가족이 사망한다 해도, 주어지는 휴가 기간은 5일뿐이다. 급한 대로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의 물품을 서둘러 처분하고, 가게도 집도 정리하고. 바로 복귀해야 했다.
막상 군 복무를 할 때는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제대하고 밖에 나왔을 때···
갈 곳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던 그때···
한길은 한동안 방황했더랬다.
그게··· 응원하고 싶어 하는 과거인가?
이게 사람의 매력이 된다고?
이런 결점을 장점으로 만들면 된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한길은 헛웃음을 쳤다.
한길은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불행을 털어놓아봤자, 찾아오는 건 불편함 뿐이라는 사실을.
공감하고 위로해 주는 것도 그 순간뿐이다.
얘기를 들은 날은 함께 눈물 흘려주고 괴로워해 주겠지.
하지만 그다음 날부터는 거리감이 생긴다.
절대 이전과 같은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
“진짜 갑자기 왜 이러냐···.”
이미 10년, 15년도 더 된 일이다.
그때 당시에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급한 대로 반창고를 붙이고 열심히 달려왔더랬다.
하지만.
최근에서야 다시 반창고를 뜯어보니, 상처는 그대로였다. 새살조차 돋아나지 않은 상처는, 미풍에도 아려왔다.
‘한심하게.’
한길은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은 오랜 과거나 추억을 곱씹을 때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미래를 위해서, 이딴 과거 한두 개 파는 것쯤이야.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아직도 안 보이네.”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한길은 지금껏 예상치 못한 상황을 수없이 맞닥뜨려왔다.
그때마다 침착하게 상황을 관찰하고, 나아가야 할 길을 그린 후, 착실히 두 발로 걸어왔었고.
어떤 상황이든 길은 항상 있었다.
심지어 지금 가야 할 길은, 이미 약도까지 그려둔 상태였다.
목표지점까지 어떻게 갈지, 언제 갈지, 준비물은 무엇이 필요한지. 모든 계획을 이미 세워두었는데···
갑자기 자욱한 안개가 나타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이런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레스토랑 식구들에게는 더더욱.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면, 믿고 따라오고 싶어질 리 없으니까.
그런데···
— 숨기려 하지 마세요. 인터뷰하기 두려워서 요즘 상태가 이상한 거잖아요?
— 상태가 안 좋으면 차라리 인터뷰를 취소하는 게 어때요?
들켜버렸다.
심지어 유셰프는 이 한심한 모습을 보고 눈을 돌려주는 대신,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만 도려내고 싶기도 했다. 그녀만 사라지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하아···.”
다시 한숨을 내쉬는데, 전화가 진동했다.
ㄴ 셰프 왜 안 오세요?
아직 늦은 건 아니다.
지금이라도 유셰프를 자르고, 인터뷰를 취소하고. 그냥 부족한 대로 너튜브 영상을 알아서 올리라고 할
수 있으니까.
분명 그쪽이 편할 거다.
그러면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갈 수 있다.
그러는 편이 쉽다.
하지만···
그조차 할 수 없었다.
‘그건 도망치는 거니까.’
아직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만큼은 명확하게 보였다.
한길은 바인더를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
#
“(그거, 뭐예요?)”
유셰프는 한길이 들고 온 바인더에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예상 답변을 정리해 둔 겁니다.”
“(아, 그런 게 있으면 좋긴 하죠.)”
“보시죠.”
“(제가요?)”
한길은 바인더를 유셰프에게 내밀었다.
온몸의 세포가 건네주기 싫다고 비명을 지르는 듯했지만, 한길은 그 본능을 억눌렀다.
지금의 한길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앞이 보이는 사람에게 잠시 운전을 맡겨야 한다.
이왕이면 최셰프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못 하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최셰프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이제는 그만 인정해야 할 때였다.
할 수 있다고 채찍질만 하는 게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 앞으로는 전략을 세울 때, 자신의 나약함이나 한심함도 포함해야 했다.
좋든 싫든, 유셰프는 이미 한길의 과거를 알고 있었으니 그녀에게 맡기는 게 맞다.
“(흐음···.)”
유셰프의 눈이 종이를 훑어내리고 있었다.
불편했다.
마치 알몸이 된 기분이었으니까.
그래도··· 견딜 수는 있었다.
억겁과 같은 시간이 흐른 후, 유셰프가 입을 열었다.
“(셰프, 빨간펜 있어요?)”
한길은 고갯짓으로 소파 옆 탁자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블록 메모지와 함께 3색의 펜이 꽂혀 있었다.
유셰프는 그중에서 빨간펜을 들더니, 예상 답안지에 커다란 ‘X’를 그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 또박또박한 손글씨로 단 두 문장만을 적었다.
“(셰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유셰프가 적어준 문장은 간결하고 건조했다.
“이것만··· 말하라고요?”
“(적어도 제 경우에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어요. 저도 예전에 비슷한 인터뷰를 한 적이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유셰프를 처음 고용할 때, 읽었던 기사가 생각났다.
“(시민 기자가 인터뷰한 거였는데, 귀국한 이유를 묻더라고요. 엄마가 편찮으시다는 것까지만 공개했었어요. 그 정도가 적당하지 않나요? 너무 과하면 오히려 불편했을 테니까.)”
경험자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게다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유셰프의 기사를 곱씹어보니 모든 게 선명하게 보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 폭언을 퍼붓고, 요리하면서 겨우 철이 들고. 앞으로 요리로 어머니께 효도한다는 생각으로 유학하던 중 병환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는 정보가 유셰프의 기사에 실렸다면, 오히려 역효과였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길도···
건조한 팩트 일부만 공개하는 게 좋을 터.
“만약 저쪽에서 더 물어보면···.”
“(제가 막아드릴게요. 휴먼 다큐 찍는 것도 아니고, 그게 왜 필요한 건데?)”
“···.”
“(어때요? 카메라 리허설,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네, 부탁합니다.”
안에 가둬둘 때는 그렇게 크던 고민이, 막상 꺼내 보니 너무 하찮아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앞이 안 보였으면···
“(셰프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이런 걸 다 혼자 담아두고 있으니, 인간이 멀쩡할 리가 있나.)”
유셰프는 바인더를 한길에게 돌려준 후, 카메라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정을 다 마친 후, 갑자기 한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맞다! 시작하기에 앞서서··· 셰프, 미안해요.)”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화해하자고요. 아까 저도, 셰프도. 말을 예쁘게 한 건 아니니까.)”
“···.”
“(솔직히 셰프가 훨씬 심한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저도 그렇게 나올 걸 알면서 찔렀으니까 원인 제공을 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그래서 미안하다고요.)”
유셰프는 언제나처럼 당돌했다.
그 당돌한 눈빛이, 한길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저도··· 안 좋은 소리 해서 미안합니다.”
“(굿! 우리 그럼, 화해한 거 맞죠?)”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참 잘도 한다 싶었지만··· 한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괜히 불편하다고 피하지 마세요. 불편한 건 셰프만이 아니거든요? 나도 엄마 얘긴 아무한테도 말 안 했으니까.)”
“···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불편하다고 자르지도 마세요. 그건 권력 남용이에요.)”
#
인터뷰 촬영장에는 유셰프가 동행했다.
한길의 청각이 아직 온전하지 않은 관계로, 누군가가 동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최셰프에게 부탁할 예정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유셰프가 적임자였다.
촬영장에 도착한 유셰프는 바로 담당 피디에게 다가가 통보했다.
“(질문은 제가 할게요. 우리 셰프, 낯가림이 심해서 남이 질문하면 얼어버리거든요.)”
“(□□□□□···)”
“(빨리 시작해요. 저희 셰프, 다음 일정이 있어서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거든요. 질문할 게 있으면 저한테 전달해주시고요.)”
최셰프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었지만, 유셰프는 그러지 못했다.
설득의 여지가 전혀 없는 태도에, 담당 피디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셰프는 필요 없는 질문에 가차 없이 퇴짜를 놓았다.
“(이 질문은 의도가 뭐죠? 시간이 없으니 넘어가죠.)”
“(이건 너무 억지스러운데요? 넘어가죠.)”
한길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지만, 너무 단호한 태도에 제작진에게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예상 질문지에 적힌 것 외에도 추가 질문이 있었지만,
“(카키 사장님과의 인연에 대해 더 얘기해 주세요. 두 사람, 업무 외적으로도 친해요?)”
“(레스토랑 식구들이 셰프를 기계라고 부르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셰프의 활약 덕분에 난이도는 상당히 낮았다.
덕분에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인터뷰는 별 탈 없이 수월하게 흘러갔다.
“(□! □□□□□니다! □□ □□□□ □□ 후에 □□□□···.)”
“(이틀이면 수정 영상이 나온다고요? 좋아요.)”
유셰프는 통역사라도 되는 양, 제작진의 말을 요약해서 다시 알려주기도 했다.
한길의 청각 이상 상태를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배려였다. 덕분에 말이 전혀 안 들리는 제작진과도 직접 소통할 수 있었다.
“일전에 했던 대로 3호점에서 시사회를 다시 하죠. 자세한 일정은 차후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꺼리던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이틀 후, 수정된 영상의 시사회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