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35)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35화(35/325)
< 35. 판만 깔아주면…… >
“돌아왔네?”
눈을 떠 보니, 익숙한 장소.
집이었다.
오랜만에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체류 기간이 길어서인지, 아니면 새로운 경험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몰라도.
‘경험이라…..’
루시아의 식당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우선, 생각지도 못한 진귀한 재료들을 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구하기 어려운 올리브유, 신선도가 남다른 채소, 흔치 않은 곡물빵 등을 접했었다.
현대에서도 익숙한 재료이지만, 그보다 품질이나 맛이 몇 단계 업그레이드된 재료.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향을 경험했다.
난생처음 맛보는 허브……
그것만으로도 날아오를 것 같았지만, 한길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진짜 주방에 섰어….’
영화에서만 보던 전쟁터 같은 주방.
결의에 찬 스무 명의 요리사.
그 손발이 되어주는 수십 명의 노예.
외국에서는 주방을 ‘kitchen brigade’라고 부른다. 여기서 ‘brigade’는 군대의 여단을 뜻한다.
수십 명이 정확하게 합을 맞춰서 요리하는 환경.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최고의 한 끼를 선사하는 것.
그게 셰프가 서는 주방이었다.
그리고…..
한길은 들어갈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는 요리사 군단이 서는 주방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몇 없는 호텔과 레스토랑은 한길을 받아주지 않았다.
자격이 없었으니까.
호텔 조리학과를 졸업한 학생들도 호텔 주방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고 있고, 해외 유학파 셰프들도 갈 곳이 없어 레스토랑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동네 식당만 전전하며 독학으로 요리를 배운 한길의 경력은,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식당에는 취업할 수 있어도, 레스토랑은 문턱도 넘지 못했다.
현실에서는 꿈속에서만, 영화 속에서만 보던 셰프의 주방을 경험하다니……
새삼, 한길은 히든 스테이지가 처음 개방되었을 때 봤던 내용을 떠올렸다.
– ‘이한길’은 기본기가 탄탄하지만, 경험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이대로라면 제법 괜찮은 동네 식당 주인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부족한 경험만 채워주면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맞춤형 히든 스테이지’를 설계해 준다고 했었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갈망했지만.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포기했던 그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퀘스트 속에서라면.
지금은 아피키우스의 주방에 있는 일개 요리사뿐이지만……
그 안에서 총괄 요리사가 된다면?
더 나아가 다른 귀족의 주방, 왕족의 주방까지 경험하게 된다면?
상상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아니, 헛된 꿈만 꾸지 말고……’
한길은 세차게 자신의 뺨을 몇 대 때렸다.
희망을 품는 건 좋지만, 망상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한길은 눈을 감으며 다시 한번 로마의 주방을 회상했다. 특히, 총괄 요리사였던 타이투스의 움직임을.
음료 조에 붙어있던 한길은, 다른 요리사들에 비교하면 한가한 편이었다. 와인이 너무 타지만 않게 살살 저어주면서 졸이는 걸 기다리면 되니까.
그래서 진두지휘하던 타이투스의 모습을 상세히 지켜볼 수 있었다.
타이투스 역시 하나의 요리를 맡고 있었지만, 자신의 요리를 하면서도 신출귀몰하게 주방을 돌아다니며 모든 요리사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 비결은 효율과 타이밍.
모든 요리사의 옆에 매 순간 붙어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확인이 필요한 중요한 타이밍에만 불쑥불쑥 나타나서 확인했었다.
‘나도 할 수 있을까?’
아마 당장은 능숙하게 못 하겠지만……
시도해볼 기회가 있었다.
방송.
한길이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방송 출연을 결심한 이유. 이 방송이 가상 창업 체험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즉, 연예인 몇 명을 데리고 주방을 운영하는 간접체험을 할 수 있었다. 한스키친보다 규모가 큰 주방을.
현실에서는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커다란 식당을 운영하다 실패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금전적으로도 큰 손해를 볼 테고.
하지만 이건 방송이다.
리스크가 없다.
딱 5일간.
자신이 과연 주방을 지휘를 할 수 있을지 스스로의 능력을 확인할 기회였다.
#
“왔네?”
새벽부터 한스키친을 찾아간 한길은, 재료 상자가 도착하자마자 급한 손길로 상자를 뜯었다.
열리자마자 풍기는 향긋한 허브향.
한길은 행복한 미소를 머금으며, 소중한 허브를 하나하나 살폈다.
어젯밤에 열심히, 각 허브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었다.
대부분의 허브는, 현대에도 존재하는 허브였다. 영국이나 이탈리아 등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해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잘만 찾아보면, 한국에서도 모종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이중 단 하나.
이제는 지구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재료가 있었다.
상자 바닥에 있는 작은 단지를 보며 한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단지 안에 담긴 노란 알갱이.
레저(laser) 잣.
로마에서 레저라고 불리는 재료는, 실피움(silphium)이라고 불리는 허브에서 추출한 수액이었다. 이 잣은 그 수액 안에 장시간 담가놔서 향을 입힌 잣이고.
실피움은 어느 날 갑자기 역사 속에 등장한 전설의 허브였다.
그리스인들은 실피움을 “아폴로의 선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기원전 7세기 경에, 신이 내려준 것처럼 갑자기 등장한 허브니까.
일설에 따르면, 현 리비아에 거대한 홍수가 일어나고 키레네 (Cyrene) 왕국이 세워질 무렵에 갑자기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맛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전해진다.
줄기부터 뿌리까지 어느 하나 버릴 곳이 없었고, 실피움을 뜯어먹은 양의 양고기는 진미로 알려져 있었다.
현대의 와규 소고기처럼, 고대에는 실피움 양고기가 고급 육류로 애용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대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기적의 허브는, 과도한 수확으로 멸종되었다.
실피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54AD 경.
아직도 몇 가닥이 발견된다면서 네로 황제에게 흥밋거리로 바쳐졌다는 내용뿐.
“해볼 게 너무 많은데?”
이 시대 그 어떤 요리사도 다루지 못할 재료를 얻다니.
지나친 기쁨에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 후로 반나절은 정신이 없었다.
세이버리와 레저 잣을 섞어 만든 함박 스테이크는, 그야말로 이 세상맛이 아니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이 세상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는 맛이니까.
루타의 쓴맛은, 양파를 글레이징 할 때 깊이를 더해주었다. 씁쓸한 맛이 대조되어 양파의 단 향을 끌어내 주고 있었으니까.
다음은 소스를…..
띠리리!
실험실처럼 여기저기 재료를 펼쳐두고 조리 삼매경에 빠져들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사장님, pbs 방송국의 권지현 작가입니다. 촬영장에서 뵈었는데 기억하시죠? 저희 내일 촬영인데….”
“네,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장님도 재료 가져오신다고 했잖아요. 혹시 어떤 재료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이건 조금 난감했다.
전설의 허브가 있어도, 전설의 허브라고 말할 수도 없고.
출처가 불분명한 재료를 잔뜩 들고 가면 모두가 의아해할 거다.
“꼭 재료를 다 공개해야 하나요? 제가 개발한 레시피라 재료가 다 알려지면 곤란한데요.”
“흠…..”
가끔 방송에서 보면 맛집 사장들이 절대 공개 불가능하다는 비밀 재료를 보여주긴 했다.
가령, 밀가루 반죽 하나만 보여주고 ‘이 안에 들어간 게 뭔지는 죽어도 말 못한다‘라든지.
그 정도만 가능하다면……
“방송에는 안 나가도 저희한텐 알려주셔야 하는데. 비율 같은 건 숨기셔도 돼요.”
“예를 들면, 제가 특제 소스에 재워둔 잣이 있는데 그 특제 재료를 공개하는 건 조금 꺼려지거든요.”
“잣은 보여줄 수 있죠?”
“네.”
“그 정도면 잣만 보여주시면 괜찮을 것 같아요. 나머지는 설명으로 하시고요.”
다행히 레저 잣은 사용 가능해 보였다.
이런 원리라면 다른 재료들도 가져갈 수 있을 테고.
이쪽 문제가 풀렸다면,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었다.
“메뉴는 하나만 가능한가요?”
“네?”
“식당 메뉴요.”
“함박 스테이크만 하시는 것 아니었어요?”
상대가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노 셰프님도 요리를 하나만 하나요?”
“아뇨, 코스 요리를 하시기는 하는데…… 사장님, 주방에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 다 요리를 한 번도 안 해본 초보라는 건 알고 계시죠?”
“네.”
“흠, 일단 한번 확인하고 다시 연락 드릴게요.”
#
“에휴, 이 사장님도 힘들게 하네.”
전화를 끊은 이는 서브 작가로 일하는 권지현 작가였다.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팀장이 다가왔다.
“왜, 또 무슨 일인데?”
“한스키친 사장님도 메뉴를 추가하신대요. 그리고 비밀 재료를 들고 오신다는데요?”
“무슨 재료?”
“그건 못 물어봤어요. 캐내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회의 끝나고 한번 물어보죠. 아, 채은 언니는 지방에서 올라오는데 차가 막혀서 한 시간 정도 늦어진대요.”
“그러면 우리끼리 먼저 얘기할까?”
오늘은 pbs 방송국 제작진의 구성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앞서,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짜는 작업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관계로 따로 대본이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준비 없이 촬영에 임할 수는 없다.
각 인물이 어떻게 움직일지, 어떤 캐릭터를 가져갈지. 어떤 케미가 좋을지. 미리 파악해야 카메라에 제대로 담을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제작진은 고민이 많았다.
“생각보다 한스키친 사장님이랑 카키랑 말도 거의 안하고, 케미가 없다시피 해요. 카키 쪽에서도 다가가지 않고. 이러면 의미가 없는데……”
“그 사장님 자체가 너무 밋밋해요. 조용하기도 하고. 예능이랑은 완전 안 어울려….”
존재감이 너무 없는 출연자.
어차피 연예인들이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아쉬운 부분이었다.
“거기에 이번에 요리 대결에서 그 사장이 이긴 것도 참 애매하단 말이지. 스토리가 이상하잖아?”
팀장은 한 마디를 꺼낸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한스키친 사장은 섭외할 때부터 어느 정도 역할이 정해 있었다.
의욕만 앞서서 창업을 하고 뒤늦게 성공을 한 영세업자.
그런 사장이 운영하는 식당과 노련한 셰프가 운영하는 식당. 그 두 식당을 비교하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줄 수 있을 터.
물론, 이건 팀장 혼자 계획한 스토리였다.
작가들에게는 비밀로.
섭외를 맡은 작가들은 간혹 출연진과 너무 친밀해져서 이런 악역을 잘 못 맡으니까.
특히 함께 일하는 메인 작가인 채은은, 교양 작가 출신이라 그런지 예능을 너무 몰랐다.
“지현 작가, 그 한스키친 사장 인터뷰, 요약본 나왔어?”
“네.”
“경력이 어떻게 되었지?”
“경력은 9년인데 작은 동네 식당에서만 일해왔대요. 주방에 두 명 넘게 들어가 본 적이 없다네요? 그런데 초보들을 데리고 메뉴를 여러 개 한다고 하니….. 에휴.”
그에 반해, 수십 명에 달하는 요리사를 관리해온 노 셰프.
이 대비를 잘 살리려면……
“그, 여자애 이름이 뭐였지? 덜렁이.”
“아, 하은미요?”
출연진 중 한 명인 하은미는, 비운의 걸그룹 출신 연예인이었다.
오목조목하게 예쁜 얼굴. 애교가 넘치는 귀여운 성격. 하지만 가창력도, 댄스 실력도 고만고만해서 수많은 걸그룹 중에 묻혀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다.
뒤늦게 연기와 예능으로 눈을 돌리고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는데, 모든 일에 열심이지만 어딘가 백치미 끼가 있는 캐릭터였다.
뭐, 예능이니 그런 캐릭터가 잘 먹히지만.
신인이니 말도 잘 들을 테고……
무엇보다, 절박했다.
한 프레임이라도 더, 카메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신인.
“걔 번호 좀 줘봐.”
“윽, 팀장님이 직접 통화하시게요? 웬일로?”
“웬일이긴. 누가 들으면 팀장은 일 안 하는 줄 알겠다?”
“잘 안 하시잖아요.”
“팀장의 일은 다르거든. 내가 이 연차에 돌아다니면서 잡일까지 하겠냐? 그냥 중요한 판만 깔아주는 거지.”
#
“사장님, 오셨어요?”
다음날.
한길이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달려온 이가 있었다. 긴 생머리에 산뜻한 미소를 짓는 여자. 우윳빛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투명한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저번 촬영 때 봤던 연예인 중 하나다.
한길의 팀에 배정받은 인물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한길이 머뭇머뭇하자, 그녀는 생긋 웃었다.
“저번 촬영 때 뵀었는데 기억 못 하시나 보다. 원래 첫 촬영은 하도 정신없어서 누가 누군지 기억하기 힘들거든요. 하은미에요.”
“이한길입니다.”
은미는 작은 토끼처럼 깡충거리면서 한길의 주위를 맴돌았다.
“저번에도 말을 걸고 싶었는데 너무 바빠서 못했거든요. 저, 식당은 처음이라 너무 긴장되어서! 요리도 잘 못 해요.”
“그러시구나.”
주방으로 걸어가는 내내 은미는 한길의 곁에서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한길이 들고 있는 가방으로 향했다.
“와, 사장님 정말 준비 많이 하셨나 보네요? 이게 사장님이 가져오신 재료에요?”
한길은 꽤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지퍼로 잠겨진 캔버스 백은 내부를 전혀 훔쳐볼 수 없는 재질이었다.
은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가방을 보더니, 반달 모양으로 눈을 휘며 눈웃음을 쳤다.
“비밀 병기 같은 건가요?”
“네, 맞습니다. 비밀병기.”
“뭔지 한번 봐도 돼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하는 은미에게 한길이 미소를 지었다. 상냥하지만 어딘가 단호한 미소였다.
“은미 씨라고 했죠?”
“네.”
“비밀 병기는 함부로 공개하는 게 아닙니다. 비밀이니까요.”
< 35. 판만 깔아주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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