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47)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47화(47/325)
< 47. 타고났네 >
“부주방장이요?”
“타이투스가 총지휘를 맡고, 자네가 오른팔 역할을 했으면 하는데. 왜, 싫은가?”
“그럴 리가요.”
스무 명이나 되는 요리사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주방에 있는 요리사들은 모두 눈가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사람들.
나이는 어림잡아 30대 후반에서 중년까지.
잘은 모르지만, 아마 경력도 한길보다 많을 거다.
이들을 제치고 이곳의 2인자로 서라니.
하지만…… 두려움이나 긴장감보다는 기대감이 앞섰다.
“일단 한번 먹어보고 떠올리는 요리가 있는지 말을 해주게.”
물론, 아피키우스도 한길이 마냥 예뻐서 이런 지위를 주는 건 아니었다.
쓸모가 있으니까 기회를 주는 거겠지.
지금 눈앞에 있는 요리를 맛보고 조금씩 개선해야 한다.
한길은 일단 오징어순대부터 집어서 맛을 보았다. 로마식 순대는 어떨지 궁금했으니까.
통통하게 물이 오른 오징어는 생각보다 연했다. 어렴풋이 셀러리 향과 달착지근한 와인향이 느껴지는 게 독특하기도 했고.
‘이건 뭐지?’
동그란 오징어 안에 가둬진 소는, 처음 먹어보는 식감이었다.
생김새로만 보면 약간 노르스름하면서도 연한 베이지색을 띠고 있었는데, 디저트 무스같이 입자가 고왔다.
맛은 있지만……
‘해물 맛은 안 나네?‘
오징어 특유의 바다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도 나름의 매력은 있었지만, 아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이렇게 신선하고 좋은 오징어가 있는데, 그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어떤가?”
“맛있습니다.”
“그렇지? 이 안에 들어가는 재료만 수십번 시도했거든. 그런데 아무리 해봐도 뇌가 가장 부드럽고 맛있더군.”
“뭐가 들어갔다고요?”
“뇌 말일세. 소고기는 다른 곳은 맛이 없지만, 뇌는 정말 섬세해서 마음에 들거든.”
생각지도 못한 재료를 맛보는 바람에 한길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현대에서는 쉽게 맛볼 수 있는 재료는 아니니까.
‘이런 맛이었나?’
자주 먹는 재료는 아니어서 한길 역시 맛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언젠가 조선 시대에는 뇌를 전으로 부쳐 수라상에 올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먹어보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소고기 향은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지만, 폭신하면서 고급스러운 식감이었다. 곱게 갈아서 사용해서 그런지, 어떻게 보면 생선알을 쪄서 갈아낸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이 요리에 손을 댈 생각은 없나?”
“오징어 본연의 향을 살리고 싶습니다.”
“본연의 맛이라….. 아까 랍스타를 만들 때 보여준 조리법을 사용하려나 보군. 다음은?”
아피키우스는 그 맛이 머릿속에 그려지는지,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그리고 한길을 재촉했다.
다음은 가오리 요리.
부채 모양으로 펼쳐진 가오리는 붉은 소스에 파묻혀 있었다.
처음 먹어보는 소스.
붉은 액체는 농익은 와인을 사용해서 달짝지근하면서도 깊이가 있었다. 향긋한 허브 향이 은은하게 풍겨오는 데다가, 적당한 산미도 더해져서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아쉬운 점은…..’
이런 좋은 소스가 생선과 따로 놀고 있다는 것. 가오리에 소스를 잔뜩 묻히고 먹어도, 소스는 입천장에 달라붙고 생선의 속살은 어딘가 심심하고 싱거웠다.
해물 스튜는 아피키우스의 말대로 쿠민 향이 조금 도드라졌지만, 그 외에는 견과 향과 와인의 풍미가 더해져서 맛있었다.
토마토만 들어가면 완벽하겠지만, 이 시대에는 아직 토마토가 없다. 토마토를 대체할 만한 재료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고.
성게는 화이트와인에 익혀서 연하게 단맛이 났지만, 크리미한 홍합 같았다. 신선하게 회로 먹어도 맛있을 것 같지만, 로마인들이 날것을 좋아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현대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요리니까.
“그래서, 다섯 개 다 새로 만들어볼 수 있겠나?”
아피키우스가 장난감을 새로 얻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묻자,
“오늘 당장은 무리입니다.”
말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예상외로, 타이투스였다.
아피키우스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할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점심식사까지는 두 시간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처음 만들어보는 요리를 다섯 개나 시도할 수는 없습니다.”
“아, 그것도 그렇군. 손님까지 있으니….. ”
아피키우스는 턱을 괴며 잠시 생각에 잠긴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러면 오늘은 조금 다르게 가보지. 타이투스는 전채와 디저트, 메인 요리 하나를 맡아주도록. 마르쿠스는 메인요리 세 개를 맡고.”
메인을 세 개나 맡으라는 말에 한길이 놀란 표정을 짓자, 아피키우스가 덧붙였다.
“타이투스, 먹어보고 이상하다 싶으면 그냥 빼버려. 어차피 점심은 메인 요리가 하나만 나와도 되니까.”
#
“아우렐리우스, 로무스, 클리오, 셉터스. 자네들은 마르쿠스 쪽에 붙도록.”
아피키우스가 나가자마자, 타이투스는 네 명의 요리사를 호명했다.
“그나마 해산물 조리에 능숙한 놈들이니 크게 손은 안 갈 거야. 그래도 중간중간 확인은 필요하니 잘해보라고.”
타이투스는 한길에게 마지막 조언을 건네준 후, 다른 요리사들을 끌고 갔고,
“그래서….. 뭘 만들죠?”
네 명의 요리사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한길을 바라보았다.
“오징어순대와 가오리, 랍스타 요리를 만들 겁니다. 랍스타는 제가 만들 테니, 각자 맡은 재료 손질하고 손질이 완료되면 저를 불러주세요.”
한길은 한 요리에 두 명씩 배정한 후, 랍스타 조리를 시작했다. 아까 만든 크로켓에 조금 더 손을 대고 싶었으니까.
“오징어 손질이 완료되었습니다.”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다가가니, 내장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손질된 오징어와 그 안에 들어갈 내용물까지 다 만들어져 있었다.
“다리는 따로 잘라서 이 정도 크기로 썰어주고 소랑 같이 섞어서 안에 채워주세요.”
“삶지도 않고요?”
“네, 삶아서 사용하면 오징어 향이 달아납니다.”
당연한 말을 하는데, 요리사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생선을 삶지 않고 쓴다고요? 이물질 제거도 해야 하고. 30분 이상 삶아내지 않고 먹으면 위험한데……”
한길은 그제야 왜 해산물에서 바다향이 안 나는지 알 것 같았다. 살짝 데치는 것도 아니고 푹 삶은 후에 사용하니 그 맛이 남아있겠나.
찜기를 이용해서 수증기의 열기로 익히는 원리를 여러 번 설명해도 의심의 눈초리만 이어졌다.
찜기 도구만 보고도 스스로 이해한 아피키우스와는 달랐다. 이들은 새로운 방식에 거부감부터 나타내고 있었다.
“아피키우스가 인정한 방법입니다.”
“정말로요?”
“네, 랍스타도 그렇게 만들고 있잖아요?”
아피키우스의 이름을 들은 후에야 그들은 머뭇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삶지 말고 그대로 쓰라고요?”
가오리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이래서 싱거웠구나….‘
다시 한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가오리는 펄펄 끓는 물에 오랜 시간 삶으면 살결이 풀어져 버린다. 흐물흐물한 생선을 소스와 함께 졸여내면 생선이 아니라 수프가 되어 버린다.
소스가 담긴 프라이팬에 가오리를 바로 올리라는 지시를 내리자, 담당 요리사는 더욱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가오리는 가장자리는 얇고 속은 두꺼워서 그러면 고루 안 익을 텐데……”
“계속 소스를 위에 끼얹어주면 됩니다.”
“아니, 그래도……”
결국 한길이 직접 시범을 보여줘야 했다.
프리아팬의 바닥에 고인 소스를 숟가락으로 떠서 생선의 통통한 부위에 수시로 끼얹어주는 모습을 보여주자, 담당 요리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얼굴이었다.
“향이 깊군. 넵튠의 축복을 받은 요리구먼.”
타이투스가 완성된 요리를 맛보고 극찬을 하자, 그제야 요리사들은 조심스레 시식을 했다.
“해산물에서 이런 맛이 날 수 있나?”
“이거 입에 착 감기네.”
한길의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소곤거리는 소리는 뚜렷하게 들려왔다.
#
“점심은 대충 먹어도 되는데……”
“귀한 손님인데 그럴 순 없죠.”
“진짜 빵 한 조각이면 된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필록제노스는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었다.
‘저 양반도 점심은 차려 먹나 보군.’
대부분의 귀족은 점심을 간단하게 먹었다.
제대로 한 끼를 차려 먹는 건 저녁 식사뿐.
아피키우스야 미식이 업이다 보니 점심을 화려하게 먹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필록제노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절대 빵 하나만 먹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운치 있군. 이런 호숫가 앞에서 먹는 밥은 또 그것대로 별미지.”
오늘 점심은 실내 연회장이 아닌, 야외 정원에서 먹기로 했는데. 신화 속 영웅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된 인공 연못이 눈 앞에 펼쳐지니, 보기에 제법 나쁘지 않았다.
이런 장소에서 해산물 요리만 가득 나오면, 일부러 ‘바다의 신 넵튠의 요리’를 준비했다는 핑계가 설득력을 얻는다.
오늘은 육류 재료가 상태가 좋지 않아 해산물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설명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다. 괜히 없어 보이니까.
‘별문제는 없겠지?’
몸은 손님들과 함께 정원에 있었지만, 아피키우스의 마음은 주방에 가 있었다.
타이투스가 있으니 큰 실수는 나오지 않겠지만…… 너무 급하게,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즉흥적인 결정을 연달아 내리니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전채 나왔습니다.”
집사가 식사의 시작을 알린 후, 하나둘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잣을 넣고 살짝 튀겨낸 계란.
꿀에 절인 대추.
작은 항아리 안에 익힌 성게.
화려하진 않지만, 하나하나 완성도는 높았다.
“역시 아피키우스는 점심도 남다르구먼. 이거, 시작부터 너무 즐거운데.”
호시탐탐 트집을 잡을 기회를 노리던 어제와 달리, 필록제노스는 시작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허겁지겁 요리를 입에 담으며 온전히 맛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칭찬도 아끼지 않았고.
마음은 조금 놓였지만, 변덕스러운 노인네인 만큼,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오징어순대입니다.”
메인 요리가 나왔다.
요리를 들고 나온 이는 마르쿠스.
그런데……
포동포동한 오징어는, 겉보기에는 자신이 만들어온 오징어요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조금 더 놀라움을 줄 음식을 기대했건만.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바뀌었다.
‘이 향은 뭐지?’
연하면서도 적당한 탄력이 느껴지는 오징어는, 씹을 때마다 은은한 바다의 맛을 자아내고 있었다.
짠맛은 아니었다.
그윽하면서도 깊은 맛.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처럼, 한없이 풍부하고 윤택한 맛이었다.
자신이 만든 오징어순대는, 오징어는 식감만을 담당했었다. 부족한 맛은 향신료로 채우고.
같은 모습이지만, 오징어의 풍미가 채워지니 전혀 다른 요리가 되어버렸다.
“가오리입니다.”
다음에 나온 가오리도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숟가락을 대자마자 차이점이 도드라졌다.
부챗살처럼 줄이 길게 새겨진 가오리는, 숟가락이 닿자마자 깔끔하게 갈라졌다.
탄력이 달랐다.
흐물흐물한 살점이 아니라, 탱탱하게 생동감이 느껴지는 살점. 이빨에 닿고 나서야 무너지는 생선살은, 씹는 순간 풍미를 터트렸다. 조개관자와도 같은, 깊은 감칠맛이 폭발했다.
가오리의 주름마다 고여 있는 와인 소스가 찰박하게 입안을 적시며 달콤함과 새콤함까지 더해주니. 그야말로 맛의 보고였다.
그리고 마지막 메인.
“랍스타입니다.”
탱글탱글한 랍스타의 속살 역시 지금껏 먹어온 랍스타와는 달랐다. 씹는 순간 알 수 있었으니까. 방금 전까지 살아있었다는 것을.
활력이 넘치는 맛이었다.
입안에서 살점이 갈라질 때마다 은은한 바다향을 머금은 즙이 스며 나왔다. 그 바다향을 올리브유가 부드럽게 감쌌고, 코리안더의 산미가 느끼함을 없앴다.
크로켓 역시 아까 먹었을 때보다 맛이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노릇노릇한 튀김옷 사이에 숨겨진 선물이 있었으니까. 놀라울 정도로 고소하고 반가운 선물이.
랍스타의 살결에 진득하게 엉겨 붙어있는 노란 소스의 정체는…… 치즈였다. 바삭한 반죽 아래에서 치즈와 랍스타의 속살이 일심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치즈의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풍미가 더해지니, 그야말로 홀릴 수밖에 없는, 입안이 황홀해지는 경험이었다.
“과일입니다.”
디저트가 나오는 게 아쉬울 정도로.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점심을 맛보는 날이 올 줄이야. 아피키우스의 점심은 로마의 모든 귀족 연회를 합친 것보다도 호화롭군. 역시 최고의 미식가다운 밥상이네!”
필록제노스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아피키우스의 손을 부여잡았다.
이쯤 되면 이 노인이 로마에서 어떤 소문을 퍼트릴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직 저녁이 남아있으니까요.”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이는, 사위였다.
아무리 아피키우스라고 해도 연달아 세끼나 화려한 연회를 열 수는 없다.
저녁까지 남은 시간은 세 시간.
그 안에 최소 열다섯 개의 요리를 더 만들고, 컨셉을 잡고, 재료를 준비하고, 조리까지 하는 건 무리다.
미리 준비해두었다면 모를까,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인데 가능할 리가 없다. 세야누스의 표정을 보니 그걸 충분히 알고 있는 표정이고.
“그럴 수가 있나, 나도 해가 떨어지기 전에 갈 길을 가야지.”
그런데 의외로 필록제노스가 거절을 했다.
“나 같은 늙은이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움직이는 게 건강에 좋거든.”
“하지만 모처럼 아피키우스의 연회인데요.”
“뭐, 오늘 못 먹는다고 평생 못 먹을 것도 아닌데. 안 그러나?”
아피키우스를 바라보는 필록제노스의 눈빛은 한없이 자상했다. 눈치 없는 괴짜 노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언제든 오시죠.”
“다음에는 꼭 미리 기별하고 오지.”
아피키우스와 악수를 나눈 필록제노스는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서 채비를 하고 떠났다.
홀로 남으면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서인가. 세야누스도 노인과 함께 로마로 돌아갔다.
그제야 아피키우스도 조금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겼다.
‘하나쯤은 실수를 할 줄 알았건만.’
그래서 세 개나 메뉴를 맡겼었다.
하지만 마르쿠스가 만들어낸 세 개의 요리는 하나같이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처음으로 주방을 이끌어가면 조금은 실수가 나올법한데. 다른 사람과는 처음으로 손발을 맞춰보는 것일 텐데도 완벽 그 자체였다.
‘이건, 타고났네.’
흥분으로 손끝이 떨려왔다.
이 정도 인재라면……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려놓기만 한 맛을 그대로 펼쳐볼 수 있을 테니까.
< 47. 타고났네 > 끝
ⓒ 글망쟁이